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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혁거세왕(거서간)
- 박씨, B.C.69년~A.D.4년
- 재위기간: B.C.57년 모월~A.D.4년 4월, 약 60년
- 부인: 1명
- 자녀: 4남
왕후 알영 - 장남, 제2대 남해왕, 일지 갈문왕, 허루왕
혁거세거서간은 진한 6부의 하나인 양산촌 출신이며, 서기전 69년에 태어났다. 열세살이 되던 서기전 57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서기전 53년에 알영을 비로 맞아들였다. 알의 크기가 박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이라 하였고, 그 광채로 인하여 이름을 혁거세 혹은 불구내라고 하였다. 이때 왕의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슬한이라 하였고, 나라이름을 서나벌, 서라벌, 서벌 혹은 사라, 사로라 하였다. 29세가 되던 재위 17년에 알영과 함께 국내 6부를 순회하며 위무하였는데,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였으며, 진한 전역으로 영토를 넓혀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진한 6부의 촌장의 뜻을 모아 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 진한 6부를 복속한 때는 이 무렵인 것으로 보인다. 재위 19년, 변한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 오면서 신라국의 영역은 더욱 확대된다.
33세가 되던 재위 27년(서기전 37년)에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이라 하였고 서기전 32년에 궁실을 짓게 되는데, 아마도 이때가 실질적인 개국 시점일 것이다. 그러나 개국연대가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라는 설은 문제가 있다. 첫째,『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의 관점에서 신라의 건국을 고구려나 백제보다 먼저 잡은 것으로 보여진다. 둘째, 갑자년이라는 간지가 참위설의 갑자혁명설에 입각한 듯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혁거세왕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는 것은 39세가 되던 서기전 31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진한 6부와 변한 일부 국가를 합쳐 한반도 동남쪽을 장악한 신라국은 이때부터 마한의 그늘을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간 마한에 바치던 조공도 중단하여 마한 왕실과 등을 지고, 북방으로도 세력을 확대하여 낙랑(동예)과 국경을 맞대게 됨으로써 국경 분쟁도 잦게 된다. 서기전 28년 낙랑이 침범해 왔으나 국경에 있는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으며 곡식더미가 들에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의 나라'라 하고 스스로 물러갔다. 이렇듯 신라의 위세는 급속히 성장했고, 급기야 마한과 힘을 견 줄 정도의 상황이 되었다. 자신감을 가진 혁거세왕은 재위 38년(서기전 20년)에 신하 호공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을 탓하는 마한 왕에게 호공이 그럴 필요가 없다하여 마한 왕이 분노해 죽이려 했으나 신라들이 만류하여 놓아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마한 왕이 죽어 신하들이 마한을 정벌할 것을 권했으나, 혁거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하여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이는 그 무렵, 신라의 정치체제가 바로잡혀 마한에 매여 있지 않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마한은 지방자치제 형태인 분국 국가 체제였는데, 신라국은 그와 달리 분국 10여 개를 하나로 묶은 새로운 개념의 중앙집권적 연합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따라서 삼한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통일국가의 탄생은 주변 분국들에게 영향을 미쳐 여기저기서 국가 연합을 모색하는 상황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서기전 18년에 마한 땅에서는 고구려에서 망명한 온조의 세력이 마한의 북방 변경 지역에 백제를 세웠는데, 백제의 건국은 세력을 팽창시켜 마한 땅 전체를 장악하려던 신라에는 대단히 위협적인 복병이 아닐 수 없었다. 마한 왕실의 위상은 떨어지고 마한 분국들의 결속력 또한 급격히 약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혁거세왕은 후반기 20년 동안 주로 평화 정착과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서기전 4년에는 동옥저에서 보낸 사신이 와서 말 20필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당시 신라의 세력에 비추어 맞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혁거세는 재위 62년 만에 하늘로 승천했다가 7일 만에 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흩어져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백성들이 그 나뉘어진 혁거세의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를 지내고자 했으나,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을 쫓아내며 훼방을 놓았다. 하는 수 없이 양 다리, 양 팔, 그리고 몸통과 얼굴을 각각 따로 묻었는데, 이렇게 혁거세의 무덤은 다섯 개가 되었고, 그 무덤들을 오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이는 혁거세왕의 시신이 동강이 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인데, 그의 재위 말년에 반란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죽은 뒤 사릉에 장사지냈는데, 능은 담암사 북쪽에 있다.
제2대 남해왕(차차웅)
제1대 혁거세왕 - 알영
- 박씨, 생년 미상~서기 24년
- 재위기간: 4년 3월~24년 9월, 총 20년 6개월
- 부인: 1명
- 자녀: 3남 1녀
운제부인 - 장남, 제3대 유리왕, 아효부인 박씨(제4대 탈해왕의 왕비), 나로
남해차차웅은 혁거세왕과 알영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박유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성품이 깊고 두터웠으며 지략이 많았다고 전한다. 차차웅이라는 칭호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차차웅 혹은 자충은 무를 의미하는 신라 방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남해왕 대에는 정치 수장적 성격보다는 제사장적 기능이 강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남해차차웅의 치세에는 외침이 잦았는데, 즉위년 7월에 낙랑(동예)의 군대가 쳐들어와 금성이 포위되는데, 이에 왕권은 계속 불안한 상태를 지속하게 된다. 이 시기에(서기 8년) 석탈해라는 인물이 어질고 용맹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맏딸 아효로 하여금 아내로 삼게 하여, 대보의 벼슬을 주고 군사와 정치에 관한 일을 전담시켰다. 석탈해가 대보의 직위에 오르자, 국정을 조금씩 안정되었고, 덕분에 혼란스런 상황에서도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남해왕대의 혼란은 천재지변으로 계속 이어지는데, 서기 11년에는 봄과 여름에 걸쳐 가뭄이 지속되어 극심한 흉년이 들었으며, 재위 11년(서기 14년)에는 왜인이 쳐들어와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여 6부의 정병을 보내 격퇴한다. 낙랑은 그 혼란을 틈타 또 쳐들어왔다. 낙랑군은 금성까지 밀고 들어와 알천가에 주둔하였는데, 낙랑 진영에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겁을 먹은 낙랑군은 퇴각하였다.
재위 15년에는 가뭄이 심하게 든 데다, 설상가상으로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또 재위 19년에는 전염병이 크게 돌아 숱한 사람이 죽었으며, 음력 11월에도 물이 얼지 않는 기상이변까지 겹쳤다.
재위 21년 9월에 메뚜기 떼가 극성을 부려 농사를 망쳐 놓았다. 남해왕은 재위 내내 정치적 혼란과 재난, 그리고 전쟁에 시달려야만 했으며, 재위 21년에 생을 마감했다. 혁거세왕이 묻힌 사릉원에 장사를 지냈다.
제3대 유리왕(이사금)
제2대 남해왕 - 운제부인
- 박씨, 생년 미상~57년
- 재위기간: 24년 9월~57년 10월, 총 33년 1개월
- 부인: 3명
- 자녀: 2남
왕비 박씨(일지갈문왕의 딸)
후비 - 제7대 일성왕
후비 - 제5대 파사왕
유리이사금은 남해왕의 태자이며 운제부인 소생이다. 서기 24년 9월에 남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으며, 『삼국유사』는 그를 노례왕 또는 유례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비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일지갈문왕의 딸 박씨, 허루갈문왕의 딸 또는 사용왕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으나, 일지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유리왕 때부터 쓰인 이사금이라는 왕호는 이질금, 치질금이라고도 쓰는데, '잇금'을 의미하는 신라 방언이라는 전통적 해석이 있으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다. 사회적으로 이사금시대 왕의 성격은 부족연맹장이라는 설이 있으나, 어떻든 종래의 거서간시대보다는 문물 제도면에서 향상된 시대였음은 인정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왕호에 대해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기를 "남해가 바야흐로 죽으려 할 즈음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 너희 박 석 두 성씨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을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 탈해는 38세였고, 유리의 나이는 기록되어 않아 알 수 없다. 지혜가 많은 자는 잇금이 많다고 하니, 그것으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자는 탈해의 제안으로 떡을 깨물어 보니, 유리의 이자국이 더 많아 유리가 왕이 되었다.
즉위 이듬해인 25년 친히 시조 묘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를 사면했다. 재위 9년에는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이, 최, 손, 정, 배, 설)를 하사하였으며, 관직도 17등급으로 나눠 정부 조직을 정비하였는데, 관등제는 신분에 따라 오를 수 있는 등급의 상한선이 결정된 것인데, 이것이 법흥왕 대에 이르면 골품제도로 정착되어 신라말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6부를 정한 뒤에는 이를 두 편으로 나눠서, 두 왕녀로 하여금 각각 부 내의 여자를 거느리게 하였다. 이들 두 편으로 하여금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길쌈 시합을 하도록 하여 그 많고 적음을 보아 승부를 결정짓는 놀이를 하였는데, 이 행사를 가배라고 하였다. 이는 한가위, 즉 추석의 기원이 되었다.
재위 무렵, 보습같은 농기구나 수레 등이 대대적으로 보급되었고,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도 만들어졌다. 유리왕 재위 10년 동안은 비교적 안정과 평화가 지속되어 여러 문화적인 발전이 이뤄졌지만, 재위 11년(서기 34년)부터 전쟁과 재해에 시달리게 된다. 재위 13년 8월에는 낙랑(동예)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타산성을 점령함으로써 전쟁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듬해인 37년에는 고구려가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낙랑민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고, 이에 유리왕은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재위 17년 9월에는 낙랑의 화려현과 불내현 사람들이 공모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이에 맥국(동옥저) 우두머리가 곡하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이들을 물리쳤다. 유리왕은 맥국에 감사의 뜻으로 그들과 친교를 맺었고, 재위 19년 8월에는 맥국의 왕이 사냥을 하여 새와 짐승을 바쳤다.
재위 34년 되던 해에 병환이 들어 자리에 몸져눕게 되자, 신료들을 모아놓고 "탈해는 그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고 지위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 번 공명을 드러내었다. 짐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하라."고 유훈을 남기고 죽었으며, 사릉에 장사지냈다.
제4대 탈해왕(이사금)
용성국 왕비
- 석씨, B.C.19년~80년
- 재위기간: 43년 모월~80년 8월, 약 37년
- 부인: 2명
- 자녀: 1남
아효부인(남해왕의 장녀)
후비 - 구추(제9대 벌휴왕의 아버지)
탈해이사금은 용성국의 함달파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국왕의 딸 또는 적녀국왕의 딸이라고 한다. 성은 석씨이며, 토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는 탈해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는데, 이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천 리 밖에 있다. 처음 그 나라 왕이 여국 왕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않다.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하였다. 그 여인이 차마 알을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 가지고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것이 처음에는 금관국 해변에 닿았으나 금관 사람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상자는 다시 진한 아진포 어구에 닿았는데, 이때가 시조 혁거세 39년(서기전 19년)이었다. 그때 해변에 사는 할머니가 상자를 줄로 끌러 올려 해안에 매어 놓고 열어 보니,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때 해파가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양모였던 노파는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공부를 시켜,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의 집터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자, 자신이 본래 대장장이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하여 그 집을 차지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첫째 탈해 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으로 봉사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둘째는 석씨부족이 어로를 주요생활수단으로 하였지만, 이미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이 하나였다고 보고 있다. 탈해는 서기 8년에 왕의 사위가 되고, 서기 10년에는 대보의 자리에 올랐으며, 유리이사금의 즉위 시에 왕위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으며, 유리이사금이 탈해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차차웅의 사위이니 결국 박씨 집단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 철을 이용한 군사력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하였으며, 이것은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 서기 8년에는 남해차차웅의 사위가 되어 왕실의 일원이 되었으며, 2년 뒤인 10년에는 재상격인 대보에 임명되어 정사를 맡았다. 24년에 남해왕이 죽자, 유리왕이 탈해의 덕망이 높다는 이유로 그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는데, 유리왕이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43년에 왕위에 올랐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환갑을 넘긴 62세였다.
즉위 이듬해인, 서기 58년 2월 몸소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으며, 즉위 초부터 외교에 힘을 기울여 59년 왜와 수교하였다. 서기 65년(삼국유사에는 60년)에는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인시켜보니, 금궤가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있어, 궤를 열어보자 용모가 단정한 아이를 얻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 아이가 김알지이다. 왕은 시림을 계림이라 고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탈해이사금 대에 신라와 백제는 계속해서 전쟁이 이어지는 상황 속에 있었는데, 백제의 세력이 점점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탈해왕은 호공을 대보로 삼아 장사를 맡겼다. 61년에 마한 부흥군의 우두머리인 맹소와 복암성을 바치며 항복해 오자 그를 받아들였는데, 이 일로 백제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백제의 다루왕은 63년에 낭자곡성을 장악한 뒤, 사신을 보내 만날 것을 제안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이때부터 백제는 줄기차게 신라를 공격해 왔다. 서기 64년에 백제군이 와산, 구양의 두 성을 비롯하여 이후 4, 5회 공격해왔다. 이에 탈해왕은 직접 기병 2천명을 동원하여 물리쳤다. 66년에 백제가 다시 와산성을 급습하여 함락시키고 병력 2백 병을 주둔시켰는데, 신라군의 반격을 받고 곧 퇴각했다. 그러자 백제는 가야를 압박하여 신라를 협공하기 시작했다. 70년에 백제가 또 한 차례 공격을 감행해 오더니, 73년에는 왜군이 목출도를 침범해 각간 우오를 보내 막았으니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한다. 74년에 백제가 변방에 다시 침입해 와 방어했는데, 10월에 다시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탈해왕은 76년 9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와산성을 회복하고, 그곳을 수비하던 백제 병력 2백 명을 모두 죽였다. 77년 8월에는 가야가 신라를 공격해 왔는데, 탈해왕은 아찬 길문에게 군사 수천을 주어 가야군을 대적하게 했고, 양쪽 군대는 황산진(경남 양산 근처)에서 맞붙었다. 길문은 가야 병력 1천여 명을 물리치고 가야의 기세를 위축시켰다. 이상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탈해왕 대의 전쟁은 대부분 백제의 침입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백제는 마한의 영토를 장악하고, 과거 마한의 속국이던 신라와 가야에 조공 요구했는데, 가야는 이를 응했지만, 신라는 수용하지 않았다. 백제의 지속적인 침략은 그 같은 신라의 태도에 대한 응징의 성격이 짙었다고 볼 수 있다. 탈해왕의 재위 기간 내내 백재, 왜, 가야, 삼국의 침입을 막아 내야 했다. 하지만 잦은 외침에도 탈해왕은 오히려 국가 기강의 확립을 위해 중앙집권화를 강력하게 추진해냈다. 서기 67년에는 전국의 영토를 주와 군으로 구분하고, 각 주와 군에 왕족인 박씨들을 주주와 군주로 삼아 파견하였다. 같은 해 2월에는 '순정을 이벌찬으로 임명해 정사를 맡겼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유리왕 때 마련된 관등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탈해왕은 서기 80년 8월에 99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금성의 북쪽 양정 언덕에 묻혔다. 『삼국유사』에는 탈해왕이 건초 4년(서기 79년)에 죽어서 소천 언덕에 장사됐다고 적혀 있다. 또 뒤에 탈해의 유골에 대해 해골 둘레가 3자 2치, 몸뚱이 뼈 길이가 9자 7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제5대 파사왕(이사금)
제3대 유리왕 - 후비
- 박씨, 생년 미상~112년
- 재위기간: 80년 8월~112년 10월, 총 32년 2개월
- 부인: 1명
- 자녀: 1명 이상
사성부인 김씨(김알지의 손녀) - 제6대 지마왕
파사이사금은 유리왕의 차남이며, 후비 소생인 서자이다. 태자 일성보다 인물이 뛰어나 즉위하였다고도 한다. 유리이사금의 아우인 내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서기 80년 8월에 탈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는 그의 생활 태도에 대해 "절도 있고 검소하며 물자를 아꼈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였다."고 적고 있다.
즉위 이듬해 2월에는 몸소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3월에는 몸소 주와 군을 순행하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옥에 갇힌 죄수들을 대대적으로 사면함으로써 민심 얻기에 힘썼다. 이를 기반으로 재위 3년 3월에는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고 군사를 훈련시켜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재위 5년(서기 84년)에는 파사왕의 농업장려책의 핵심이었던 보리농사에 성공을 거두게 되어 신라 사회는 주식인 보리 생산을 크게 증대시키게 되었다. 재위 11년 7월에 전국 각 주와 군에 열 명의 감사를 파견하여 주주와 군주들을 조사하고, 공무에 성실하지 않거나 농토를 황폐하게 한 자가 있으며 직급을 내리거나 사직하도록 조치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농업장려책으로 비치지만, 파사왕의 궁극적인 목표는 보리 개량과 농업 진흥을 수단으로 삼아 중앙집권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치적 성과는 국방 분야에서도 드러났다.
재위 6년에 백제가 변경을 침입하자, 파사왕은 재위 8년(87년) 7월에 하여 백제와 가야의 침략에 대비하고 그들 두 나라를 침입할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가소성(경남 거창지역)과 마두성(경북 청도지역)을 신축하였다. 이것은 경주를 벗어난 맨 처음의 축성 기록이다. 마두성 신축에 위기를 느낀 가야는 마침내 재위 15년(94년) 2월에 마두성을 공격해 온다. 파사왕은 아찬 길원에게 1,000여명의 기병을 주어 가야군을 패퇴시켰는데, 이때 이미 기마전투의 양상을 볼 수 있다.
가야의 김수로왕은 2년 뒤인 96년 9월에 신라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자 자신이 직접 병력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가야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듬해 정월 가야를 공격하려 했으나 수로왕이 사신을 보내 회친을 제의하자 사죄하여 용서하였다. 그 후, 신라와 가야는 몇 년 동안 서로를 침입하지 않았다. 백제와 가야의 공격을 방어하는 동안, 신라는 자연재해로 몇 차례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01년 2월에는 월성을 쌓아 7월에 금성을 버리고 월성으로 궁실을 옮겼다.
102년에는 음집벌국과 실직곡국의 경계 다툼이 있었는데, 그들은 파사왕을 찾아와 영토분쟁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파사왕도 쉽사리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자 연륜이 있던 금관가야의 수로왕에게 부탁했다. 수로왕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집벌국에 귀속되게 하였고, 덕분에 그 지역의 경계 분쟁은 잘 해겨로디었다. 그 뒤 다시 음집벌국을 쳐서 병합하였고, 실직국(강원도 삼척)과 압독국(경북 경산)도 항복해 신라로 복속되어 파사국의 위상이 크게 격상되었다.
108년에는 비지국과 다벌국, 초팔국을 합병하였다. 국가 기강의 확립과 영토 확장에 힘쓰던 파사왕은 재위 33년(서기 112년) 10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사릉원 안에 마련되었다.
제6대 지마왕(이사금)
제5대 파사왕 - 사성부인 김씨
- 박씨, 생년 미상~134년
- 재위기간: 112년 10월~134년 8월, 총 21년 10개월
- 부인: 1명
- 자녀: 1녀
애례부인 김씨(마제갈문왕의 딸) - 내례부인(제8대 아달라왕의 왕비)
지마(혹은 지미)이사금은 파사왕의 적자로 사성부인 김씨 소생이다. 일찍이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112년 10월에 부왕 파사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지마왕은 즉위 이듬해인 113년 2월에 대대적으로 조정을 개편했다. 창영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기고, 옥권을 파진찬으로, 신권은 일길찬으로, 순선을 급찬으로 삼았다.
즉위 4년인 115년 3월에 쏟아진 우박과 4월의 홍수로 신라사회가 혼란을 겪자, 115년 2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 남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지마왕은 그해 7월에 자신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황산하(낙동강 하류)를 건너 가야를 공격했는데, 가야의 복병에 걸려 패하고 간신히 퇴각했다. 이에 이듬해인 116년 8월에 다시 정예병력 1만을 직접 이끌고 정벌에 나서 공성전을 벌였지만, 결국 다시 물러났다. 이후 지마왕은 가야정벌을 포기했고, 가야 역시 신라의 대군을 의식하여 함부로 신라 땅을 넘보지 않았다. 재위 9년(120년) 3월에 서라벌에 전염병이 돌고, 민심이 흔들리자, 지마왕은 121년 정월에 익종을 이찬으로 삼고 혼련을 파진찬, 임권을 아찬으로 삼아 조정을 개편하는 한편, 2월에는 대증산성을 쌓아 왜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재위 12년(123년) 3월 지마왕은 왜와 강화를 맺었다. 고구려의 번성으로 흑룡강, 송화강 유역의 말갈은 모두 고구려에 예속되고 남쪽으로 밀려오면서 재위 14년(125년) 말갈군이 대령책(대관령)으로 쳐들어 왔다. 그해, 7월에 대령책을 습격하고 니하를 건너 또 침략해 왔다. 이에 지마이사금이 백제의 기루왕에게 원군을 청해 백제가 다섯 장수를 보내 격퇴하였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파사왕 26년(105년) 화친한 이후 지마, 일성 이사금 2대 동안 평화적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음질국(안강)과 압독국(지금의 경산)을 멸망시켰다고 하나 『삼국사기』에는 파사이사금 때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 지마왕의 말기에는 천재지변이나 화재가 계속 이어졌고 봄과 여름에 걸쳐 심한 가뭄이 지속되었다. 지마왕은 재위 23년(134년) 8월, 생을 마감했다.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제7대 일성왕(이사금)
제3대 유리왕 - 후비
- 박씨, 천일창. 생년 미상~154년
- 재위기간: 134년 8월~154년 2월. 총 19년 6개월
- 부인: 2명 이상
- 자녀: 2남 이상
왕비 박씨(지소례왕의 딸) - 제8대 아달라왕
마다오(왜의 단마국 출도 출신 태이의 딸) - 제조
일성이사금은 유리왕이 죽은 후 77년이나 지난 뒤에 왕위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그는 유리왕이 아들이 아니라 손자이거나 그 후대의 자손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일성왕이 유리왕이 만년에 낳은 장자가 확실하다면 그는 여든이 다 된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40여년의 긴 망명생활 끝에 조카 지마왕이 후계자도 하나 얻지 못한 채 죽음을 앞두자, 서기 134년 8월 신라로 돌아와 제7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왕위에 오른 일성은 즉위하자 죄인들을 사면하고, 시조묘에 제사를 올려 스스로의 위상을 세상에 알렸다. 조정을 새롭게 개편하기위해 웅선을 이찬에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근종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재위 4년(서기 137년)에 말갈이 국경을 침입하여 장령 지방의 방책 다섯 곳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이에 일성왕은 이듬해 7월에 알천 서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고 말갈의 재침에 대비하였다. 140년에는 장령에 목책을 세워 방비를 세우기도 했다. 일성왕은 138년 금성에 국가중대사를 회의하는 장소인 정사당을 설치하였으며, 144년에는 모든 주군이 제방을 수축하고 전야를 넓게 개간하도록 명하고 민간에서는 금은주옥의 사용을 금하였다. 146년 압독(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이 모반하자 군사를 보내어 평정하였다. 148년에는 박아도를 봉하여 갈문왕을 삼았다. 하지만, 149년 11월에 금성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이듬해엔 가뭄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151년 2월에는 이찬 웅선이 죽었고, 3월에는 우박이 내려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 153년 10월에는 궁궐에 불이 나 대문이 불탔고, 혜성이 연이어 나타나 민심이 흉흉해졌다. 일성완은 154년 2월에 백 살에 가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제8대 아달라왕(이사금)
제7대 일성왕 - 왕비 박씨
- 박씨, 생년 미상~184년
- 재위기간: 154년 2월~184년 3월. 총 30년 1개월
- 부인: 1명
- 자녀: 없음
내례부인(제6대 지마왕의 딸)
아달라이사금은 일성왕의 적자이며, 지소례왕의 딸 박씨 소생이다. 그는 키가 7척이었으며, 풍채가 뛰어나고 얼굴이 기이하게 생겼다고 전한다. 즉위 초기엔 비교적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어 재위 3년(156년) 4월에는 계립령(지금의 문경새재 동쪽고개)에 길을 뚫고, 재위 5년(158년) 3월에는 죽령(풍기 북쪽고개)을 개통하였다. 재위 4년(157년) 2월에는 감물(충북 괴산 감물면)과 마산(충남 보령의 남포면)에 처음으로 현을 두었고, 그해 3월에는 장령진을 순행했다.
재위 7년(160년) 4월에 폭우, 이듬해 7월 흉년으로 민심은 흉흉해지게 된다. 결국, 165년 10월에 아찬 길선이 모반했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달아나는데, 아달라왕은 길선을 넘겨 달라고 요구했으나 백제 개루왕은 이를 거절한다. 분노한 아달라왕은 군대를 보내 백제의 성을 공격했으나 공성전을 벌이던 중 식량이 떨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오게 된다. 166년 백제 개루왕이 죽고 초고왕이 즉위하는데, 그는 167년 7월 신라 서쪽 변경의 두 성을 역습해 격파하고, 주민 천여 명을 잡아갔다. 갑작스런 백제의 급습으로 두 성을 격파 당하자, 아달라왕은 군사 2만 명과 8,000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의 초고왕은 잡아갔던 주민을 돌려주며 강화를 청했다. 이때, 서북쪽으로의 영토개척을 이루는데, 이를 석씨세력의 남하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는 미추이사금의 아버지인 구도가 파진찬이 된 사실을 친석씨계의 부상으로 보는 견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후, 재위 21년부터 31년 사망할 때까지 기록의 공백이 있어 왕실세력의 교체와 관련하여 주목을 요한다. 이 10여 동안 신라 사회엔 엄청난 동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염병이 돌고 가뭄이 시작되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굶주린 백성들은 유랑민으로 전락하게 된다. 왕족들 간에도 치열한 정권 다툼이 진행되어 아달라왕의 살해가능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이 해로부터 10년간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다가 184년 3월에 아달라왕이 죽었다는 기록만 남기고 있다. 결국 아달라이사금은 아들이 없이 죽고, 석씨왕계가 즉위하게 되었다.
제9대 벌휴왕(이사금)
각간 구추(제4대 탈해왕의 아들) - 지진내례부인 김씨
- 석씨, 생년 미상~196년
- 재위기간: 184년 3월~196년 4월. 총 12년 1개월
- 부인: 1명
- 자녀: 2남
왕비(제6대 지마왕의 딸) - 골정(제12대 침해왕의 아버지), 이매(제10대 내해왕의 아버지)
벌휴(또는 발휘)이사금은 탈해왕이 만년에 낳은 아들인 각간 구추의 아들이며, 지마왕의 딸 내례부인 김씨 소생이다. 구추의 아들로 되어있으나, 연대상으로 탈해가 죽은 지 104년 만에 즉위한 것이므로 세대 간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 따라서 이것은 탈해 이후 석씨세력이 쇠퇴하여 그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때문이거나, 벌휴계가 탈해의 후손이라고 억지로 끌어다 붙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벌휴가 홍수-가뭄 및 그해의 풍흉을 미리 알았고 사람의 사정을 알아맞혀 성인이라 불린 데에서 시조적 성격이 농후하며, 『삼국사기』벌휴이사금 즉위 초 이외에 구추에 관한 기록이 없음에서도 짐작이 간다.
벌휴가 즉위한 것은 아달라이사금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웠다고 한다. 이는 전투능력을 비롯한 문화수준에 있어서 우위를 가진 새로운 세력집단이 경주로 진출하여 종래의 지배층을 압도한 것으로 보아진다. 따라서 석씨왕계의 성립 이후 신라는 보다 급격한 영역확대를 실현시켰다.
185년 정월에 시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사면함으로써 왕으로서 위엄을 갖추었다. 2월에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가 좌우 군주가 되어 소문국(경북 의성)을 정벌하였는데, 군주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처음이다. 188년 백제가 모산성(전북 남원의 운봉)을 공격해 오자, 이에 벌휴왕은 파진찬 구도에게 군대를 안겨 방어하게 하였다. 구도에게 밀린 백제군은 189년 구양성(충북 옥천)을 공격해 와서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구도에게 병력 5백을 잃고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190년 다시 원산향(지금의 예천군 용궁)을 함락하고 진격하여, 부곡성(경북 군위군 부계)을 포위하였다. 구도는 자신이 직접 기병 5백을 이끌고 나가 백제군을 급습하여 패퇴시켰으나, 백제군을 와산(충북 보은)까지 추격하던 중, 백제군의 계략에 말려들게 되어 패배하게 된다.
벌휴왕은 구도의 죄를 물어 부곡 성주로 강등시키고, 설지를 좌군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192년엔 3월에 석 자가 넘게 폭설이 내려 쌓였고, 5월에는 홍수가 나서 10여 군데의 산이 무너지는 천재가 있었다. 196년 3월에는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을 괴롭혔고, 4월에는 대궐 남쪽의 거목이 벼락을 맞아 탔고, 금성 동문도 벼락을 맞는 등 불길한 자연재해들이 일어나게 된다.
196년, 벌휴왕은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왕비가 누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머니가 김씨인 점으로 보아, 이제 박씨계는 고립되고 석씨와 김씨와의 제휴시대를 맞게 된 것으로 보인다. 벌휴의 재위는 신라 왕조사이에 석씨 왕조 시대를 연 계기였다.
벌휴는 내례부인이 이끌고 있던 박씨 종실과 부인 김씨 집안의 후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지만, 결과적으로 석씨 집안의 이름을 걸고 왕위에 올라, 자신의 후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기반을 만들어 주게 되었다.
벌휴 이후에 내해(제10대), 조분(제11대), 첨해(제12대), 유례(제14대), 기림(제15대), 흘해(제16대)등이 모두 그의 후손이라는 점이 그를 증명해 준다. 석씨 왕실의 집권은 184년부터 356년까지 172년간 지속된다.
제10대 내해왕(이사금)
제9대 벌휴왕 - 왕비 - 차남 이매 - 내례부인(제8대 아달라왕의 왕비)
- 석씨, 생년 미상~230년
- 재위기간: 196년 4월~230년 3월. 총 33년 11개월
- 부인: 1명
- 자녀: 2남 1녀
왕비 석씨(제6대 지마왕의 딸) - 우로, 이음, 아이혜부인(제11대 조분왕의 왕비)
내해이사금은 벌휴왕의 차남 석이매의 아들이고 아달라왕의 왕비 내례부인 소생이다. 벌휴이사금의 태자인 골정과 둘째아들 이매가 일찍 죽고 골정의 아들 조분도 아직 어리므로, 이매의 아들인 내해가 왕이 되었다. 비는 조분왕의 누이 석씨로서, 사촌 간에 근친결혼을 하였다.
내해왕은 뛰어난 정치 감각으로 박씨 왕실을 다독이는 한편, 석씨 왕실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 신라 사회의 안정에도 크게 기여하게 된다. 비록 출발은 평탄하였으나, 내해왕의 치세는 난관이 지속되었다. 즉위 초부터 천재와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재위 3년(198년) 5월에 서라벌 서쪽 지방에 큰 홍수가 나자 내해왕은 그들 백성들에게 1년 치의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201년에는 봄, 가을 일어난 가뭄을 시작으로 이른 서리와 우박, 심한 가뭄, 홍수, 지진, 폭설까지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천재지변이 거의 3년에 한 번씩 닥쳤는데, 설상가상으로 전쟁마저 이어졌다. 내해왕 대에는 백제, 말갈, 왜의 침입이 이어졌는데, 재위 4년인 199년 7월에 백제가 국경을 침입한 이래, 203년 10월에는 말갈의 침입이 있었다.
208년 4월에는 왜인들이 침입해 왔다. 내해왕은 차남 이음을 이벌찬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한 뒤 왜군을 대적하도록 했다. 이음의 활약으로 왜군은 물러갔다. 199년에 본가야(금관가야)가 무너지고 난 뒤, 본가야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나머지 다섯 가야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본가야의 수도인 김해를 공격하게 되자 이 내란을 진압하기 위해 신라가 개입하게 된다. 이 전쟁으로 가야는 신라에 의존하게 되었고, 212년에는 신라에 왕자를 볼모로 보내야 했다.
214년 7월에 기습을 감행해 서쪽 전략기지인 요거성(충북 보은)을 함락하고 성주 설부를 죽였다. 그러자 내해왕은 이음에게 병력 6천을 안겨 백제의 사현성을 격파하였다.
222년 10월에 백제군이 우두주(경북 예천)을 공격해 왔다. 병마사 충훤이 대적했지만, 크게 패해 군대를 모두 잃고 단신으로 쫓겨왔다. 분노한 내해왕은 충훤을 우두진 진주로 강등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연진은 224년 7월에 대군을 이끌고 백제군을 급습하여 봉산(구례)에서 1천여 명의 백제군을 대파함으로써 병마사로써의 위상을 높였다. 또한 8월에 봉산성을 쌓아 전초기지를 형성함으로써 백제가 함부로 신라 땅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내해왕 치세동안 재해와 전쟁이 계속 되었지만, 조정은 안정된 편이었다. 특히 가야내란에 개입하여 국제적 위상을 한껏 높임으로써 내해왕의 입지는 더욱 굳어졌다. 덕분에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내해왕은 재위 35년 3월에 죽었으며, 그의 왕위를 태자 우로에게 물려주지 않고 자신의 사위이자 조카이고 벌휴왕의 장손이었던 조분에게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제11대 조분왕(이사금)
제9대 벌휴왕 - 부인 - 장남 골정 - 옥모부인 김씨
- 석씨, 생년 미상~247년
- 재위기간: 230년 3월~247년 5월. 총 17년 2개월
- 부인: 3명
- 자녀: 2남 2녀
아이혜부인 석씨 - 명원부인, 광명부인(제13대 미추왕의 왕비)
후비 박씨 - 제14대 유례왕
후비 - 걸숙(제15대 기림왕의 아버지)
조분(혹은 제분)이사금은 벌휴왕의 태자였던 골정의 장남이며, 옥모부인 김씨 소생이다. 내해이사금이 죽을 때 사위인 조분에게 왕위를 잇도록 유언하였다고 하지만, 조분은 이미 벌휴의 대손이었고 개인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도 왕위계승의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며, 왕비계 김씨세력의 영향력도 있었을 것이다.
230년 즉위함과 함께 연충을 이찬에 임명하고, 영토 확장에 주력하여 내해왕의 태자였던 우로를 이찬에 임명하고 대장군으로 삼아 231년 7월에 감문국(경상북도 김천시 개령) 토벌을 명령한다. 감문국은 원래 가야에 속해 있다가 거등왕 때에 6가야 연맹 체제가 무너지면서 신라가 지배권을 획득한 땅으로 판단된다. 감문국은 신라의 국상을 틈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듯하다.
하지만 감문국은 우로가 이끄는 신라군에 의해 무너졌고, 이어 조분왕은 이 땅을 속군으로 만들어 신라 땅으로 확정했다. 231년 4월에 왜군 수천이 금성으로 쳐들어왔다.
금성을 급습한 왜군은 오히려 신라군의 반격에 밀려 병력 1천여 명을 잃고 퇴각하게 된다. 패퇴한 왜군은 232년 5월에 신라의 동해안 마을들을 약탈하였다. 조분왕은 우로를 앞세워 왜군을 대적하게 하였고 우로는 바람과 화공을 이용하여 왜인들의 배를 불태우고 적병을 수장시켰다. 이 싸움 이후 왜왕은 함부로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몇 년에 걸친 왜군의 약탈로 해안의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조분왕은 그런 민심을 달래기 위해 234년 정월부터 동쪽 순행길에 올라 난민들을 위로하고, 피해 상황을 조사하여 복구하도록 하였다.
236년 2월에는 골벌국(경상북도 영천)의 왕 아음부가 스스로 백성들을 이끌고 와서 신라에 항복하자, 병합하여 각각 군으로 삼았다. 북진정책에 따라 신라군은 남한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245년에는 다시 북한강을 건너 칠중하(임진강) 근처까지 다다랐는데, 이와 같은 행동은 고구려를 크게 자극하여, 그해 10월 고구려의 동천왕은 북변을 쳐들어왔다. 우로가 군대를 지휘하며 고구려 군에 대항했지만, 고구려군에 패하고 마두책을 지켰다.
고구려 수도 평앙에 위나라가 관구검을 앞세워 평양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양국의 전쟁 양상은 자연스럽게 교착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는 신라본기에 기록된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첫 번째 침공이다. 이 같은 대외전쟁을 주도하였던 내해이사금의 태자인 우로는 244년에 이찬에서 서불한(이벌찬의 별칭)이 되었고 병마사도 맡아보았다.
조분왕은 그런 와중인 245년 5월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치세 중엔 두 번의 재해 외에는 별다른 재해가 없었고 주변국과의 전쟁에서도 거의 승리로 이끌었다. 따라서 조분왕 치세는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덕분에 석씨 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가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제12대 첨해왕(이사금)
제9대 벌휴왕 - 왕비 - 장남 골정 - 옥모부인 김씨
- 석씨, 생년 미상~261년
- 재위기간: 247년 5월~261년 12월. 총 14년 7개월
- 부인: 기록 없음
- 자녀: 기록 없음
첨해이사금은 석골정의 차남이며, 옥모부인 김씨 소생이다. 즉위년(247년)에 아버지 골정을 세신갈문왕에 봉함으로써, 자기가 벌휴왕의 적손임을 과시했던 것이다. 따라서 첨해이사금의 즉위를 형제상속으로 보기도 하고, 골정계의 독립이라는 점에서 가계내의 계승으로 보기도 한다.
248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고, 왜와도 역시 화친 관계를 맺었다. 이런 일들은 그의 즉위와 동시에 추진되었고, 바로 이듬해에 매듭지어졌다. 주변국인 고구려와 왜에 대해 저자세의 외교로 대응하는 첨해왕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재상 석우로는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조만간에 너희 국왕(왜왕)을 염전의 노비로 만들고, 왕비는 찬부(식모)로 만들 것이다."라는 왜왕을 모독하는 욕설을 퍼부었다. 이 말이 왜국 사신을 통해 왜로 들어가게 되면서, 왜와 신라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고, 왜왕이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첨해는 이 사태의 원인 제공자인 우로를 몰아세웠고, 결국 우로는 스스로 왜군 장수 우도주군을 찾아가 사과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왜장 우도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우로를 화형 시킨 뒤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삼국사기』는 우로가 왜의 사신 앞에서 왜왕을 모독하는 발언을 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그간 우로의 행적을 볼 때, 이는 첨해의 친왜정책을 비판하던 우로를 제거하기 위한 첨해왕의 은밀한 책략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비록 큰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는 한 나라의 왕족이요 재상이었던 사람이 왜장의 손에 화형 당했는데도 첨해왕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첨해왕은 왕실과 백성들에게 큰 원망을 듣게 된다. 첨해왕 대에는 정치의 불안정과 기근, 그리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255년 백제가 봉산성(지금의 영주)을 공격해왔고, 봉산성은 지켰지만 신라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259년에는 또 한 차례 가뭄이 닥쳐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큰 흉년이 들었고, 260년에는 큰비가 내려 40여 군데의 산이 무너졌고, 그 해 7월에는 혜성이 나타나 첨해왕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그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또다시 백제가 침입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첨해왕은 어떻게든 전쟁을 막기 위해 백제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했으나, 백제의 고이왕은 이를 거절했다. 첨해왕이 죽은 것은 그 해(261년) 12월이었다. 죽음의 원인은 기록되지 않았고, '갑자기 병이 들어 죽었다.'고만 쓰여 있다.
치세 중 영토의 확장에 노력하여, 달벌성(지금의 대구)을 쌓았으며 사벌국(지금의 상주)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이때에는 사로국이 진한의 전 지역을 통일하였다. 재위 3년(249년) 7월에 대궐 남쪽에 남당을 지었는데, 이는 왕이 대신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곳이었다. 도당으로 불린 남당은 왕과 신하들이 토론을 벌였던 일종의 정치토론장으로, 이때 시작된 남당의 전통은 신라 말기까지 이어졌다.
제13대 미추왕(이사금)
김구도(김알지의 5대손) - 박씨(갈문왕 이칠의 딸)
- 김씨, 생년 미상~284년
- 재위기간: 261년 12월~284년 10월. 총 22년 10개월
- 부인: 1명
- 자녀: 없음
광명부인 석씨(제11대 조분왕의 차녀)
미추이사금은 미조 또는 미고, 미소라고도 불렸으며, 김알지의 5대손 김구도의 아들이고, 갈문왕 이칠의 딸 박씨 소생이다. 미추의 계보는 알지에서부터 비롯하여,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미추로 이어진다. 그러나 문무왕릉비문을 비롯한 금석문 자료에는 김씨 왕실의 시조를 성한이라 하여, 이를 세한으로 보는 설과 반대의 설이 있어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미추의 조상으로 역사에 나타나는 인물은 아버지인 구도로서 그는 8대 아달라이사금에서부터 9대 벌휴이사금 때까지 활약한 인물이며, 263년에 갈문왕으로 추봉되었다. 구도는 이칠 갈문왕의 딸인 술례부인 박씨와 혼인하였고, 그의 딸인 옥모부인은 골정 갈문왕과 혼인하였다. 따라서 미추왕은 신라 왕실을 이끌고 있던 박씨나 석씨가 아닌 김씨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삼국사기』는 미추의 왕
위 계승에 대해 '첨해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고 쓰고 있다.
첨해왕은 조분왕의 큰사위인 석우로에게 돌아갈 왕위를 탈취하여 왕자에 오른 인물이었다. 재상 석우로가 왜왕에게 화형을 당한 뒤, 첨해왕은 석씨와 박씨 왕실로부터 심한 반발을 사게 된다. 첨해왕과 그 정적들의 다툼은 그 후로 8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가 죽은 뒤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 미추왕이다. 미추이사금의 비는 조분이사금의 딸인 광명부인으로, 결국 그는 조분이사금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첨해왕을 제거하긴 했으나, 미추왕의 왕위 계승은 그리 쉽지 않았다. 첨해왕의 추종세력들은 미추의 즉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미추왕이 즉위하자, 곳곳에서 난을 일으켰다. 미추왕 재위 2년(263년) 정월에 이찬 양부를 서불한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했는데, 미추왕파가 반대파를 제거하고 조정의 안정을 되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63년 2월에 시조묘에 제사를 올리고 정식으로 왕위를 승계했음을 천명했다. 264년 2월엔 직접 동쪽 지방을 순행하며 백성들과 함께 바다에 제사를 지냈으며, 3월에는 황산에 행차하여 험악해진 민심을 달래기도 했다. 미추왕이 이렇듯 내정의 안정에 전념을 쏟고 있던 266년 8월에 백제가 봉산성(경북 영주 근방)을 근습해 왔다. 하지만, 그곳 성주 직선이 장사 2백 명을 거느리고 맞서 싸워 백제군을 패퇴시켰다. 미추왕은 국정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하였는데, 신하들과 정책을 토론하고, 그 토론장에서 도출된 결정을 직접 정책에 적용하는 형태를 띠었다.
268년에 신하들을 남당에 모아 놓고 자신이 직접 정사와 형벌의 잘잘못을 물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경연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또한 각 지방에 사신들을 파견하여 전국을 순회토록 하고 백성들의 고통과 근심을 조사해 오도록 함으로써 민심과 민생의 안정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272년에는 농사에 방해가 되는 일은 모두 금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276년, 신하들이 궁궐을 다시 짓기를 청하였으나 미추왕은 백성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은 중대사라 하여 거부하였다. 이렇게 철저히 백성의 입장에 서서 국가안정책을 수립해 나가자,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이 강해져 민심은 물론이고, 정치, 경제, 군사 전반에 걸쳐 매우 안정되었다.
274년에 백제가 신라 변경을 침입해 왔으나, 신라군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278년에는 신라의 전초 기지인 괴곡성(충북 괴성)을 포위하였으나 정복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게 된다. 백제의 침입이 계속되자, 미추왕은 281년 9월에 양산에서 대대적인 군대사열을 실시하여 신라 군대의 위용을 과시했다. 백제의 고이왕은 283년 9월에 다시 변경을 침입하여 노략질하고, 10월에는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미추왕은 일길찬 양질을 보내 백제군을 패퇴시켰다. 백제의 계속되는 침입으로 변경의 군대와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자, 미추왕은 284년 2월 변경 지방 순행길에 오른다. 이때 미추왕은 이미 늙은 몸이었지만, 노구를 이끌고 험한 변경을 둘러보며 그곳을 지키는 군졸과 백성들을 위로했다. 그는 그해 10월, 재위 23년에 죽으니 대릉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14대 유례이사금 14년 이서고국이 금성을 쳐들어 왔을 때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죽엽군이 갑자기 신라군을 도와 이들을 물리친 일이 있는데, 이들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찾아보니 죽장릉 위에 대나무 잎이 쌓여 있어 선왕의 음덕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설화가 있다. 능은 흥륜사 동쪽에 마련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14대 유례왕(이사금)
제11대 조분왕 - 후비 박씨(갈문왕 나음의 딸)
- 석씨, 생년 미상~298년
- 재위기간: 284년 10월~298년 12월. 총 14년 2개월
- 부인: 기록 없음
- 자녀: 기록 없음
유례(또는 유리)이사금은 제11대 조분왕의 장남이며, 갈문왕 나음의 딸 박씨 소생이다. 『삼국사기』의 주에는 『고기』를 인용하여 3대와 14대의 두 임금의 이름이 유리 혹은 유례로 똑같다고 하였다. 이른바 신라 상고왕위계승의 허구론에 의하면, 눌지와 위의 두 왕이 같은 왕명으로서 '늙'의 의미를 가진 역사시대의 눌지가 상대로 투사되어 만들어졌다고도 하고, 이들 셋은 '누리'의 뜻을 지녔고 박, 석, 김의 3성에 각각 이러한 이름을 가진 왕이 병립하여 있던 것을 하나의 계보로 만들어 버린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신라 상고의 기사를 그대로 믿는 경향으로 기울어져서, 유례이사금은 제11대 조분이사금의 맏아들이고, 어머니 박씨의 입 속으로 별빛이 들어와 잉태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조분이사금은 유례이사금의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다. 선왕 미추가 네 명의 석씨 왕에 이어 조분이사금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왕위는 다시 석씨인 유례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유례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국제 관계는 여전히 복잡했다. 최대의 경쟁자인 백제와는 첨예한 대립을 지속하고 있었고, 왜와도 갈등을 겪고 있었다. 왜와의 갈등은 곧 왜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가야와의 관계 악화를 의미했다. 이 시기 신라는 백제, 왜, 가야 삼국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왜의 관계가 악화된 것은 미추왕 말기에 일어난 석우로의 부인 명원부인 사건 때문이다.
우로는 첨해왕 3년(249년)에는 첨해왕의 계략으로 왜장 우도주군에 의해 화형 되었는데, 명원부인은 이 일로 왜국에 원한을 품고 있다가 왜에서 사신을 보내오자 왜국 사신을 개인적으로 대접하던 왜국 사신에게 술을 취하게 한 다음, 휘하의 장사들을 시켜 남편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를 태워 죽였다. 이 사건으로 신라와 왜국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왜국 왕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대병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할 움직임을 보였는데, 그 와중에 미추왕이 죽고 유례왕이 즉위했던 것이다. 왜의 침입이 예상되는 가운데, 유례왕은 즉위와 동시에 전쟁을 대비해야 했다.
우선, 백제와 화해를 추진했다. 때마침 내정이 불안정했던 백제는 유례왕 재위 3년(286년)에 금성에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제의하고 화친이 성립된다. 이 화친으로 백제와는 당분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287년 4월, 왜병이 일례군을 공격해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 1천여 명을 사로잡아갔다. 하지만 왜군의 공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292년 왜군이 다시 쳐들어왔다. 그해 6월에 왜군이 사도성(경북 영일만 일대)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유례왕은 일길찬 대곡에게 군사를 안겨 사도성을 탈환했다. 왜군은 물러가면서 성을 불태우고 많은 주민을 잡아갔다. 그 무렵 가야는 왜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유례왕은 그런 가야에 대해 몹시 분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왜가 물러가자, 군대를 동원하여 가야를 공격하였다. 신라의 느닷없는 침략으로 가야는 졸지에 전쟁에 휘말렸다. 그러자 왜는 가야를 구원하기 위해 다시 군대를 동원해 294년에 사도성 근처에 있는 장봉성을 공격해 왔다.
293년 사도성을 개축하고 사벌주(지금의 상주)의 호민 80여가를 옮겨 살도록 조치함으로써 사도성 일대를 안정시켰던 덕분에 사도성의 민심이 안정되어 왜군의 장봉성 공략을 가까스로 막아 낼 수 있었다. 왕은 백제군과 연합하여 왜에 원정할 것을 꾀하였으나, 서불한 홍권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유례왕은 계속 왜와 가야에 강경한 태도를 취했는데, 297년 정월, 가야는 신라와의 경계인 이서고국(지금의 청도)에 병력을 집결하고 금성을 공략해 왔다. 거센 가야 병력의 공격으로 수세를 면치 못한 채 당황하고 있던 신라군은 뜻밖의 원군을 만났다. 어디서 온 병력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귀에 댓잎을 꽂은 병사들이 나타나 가야군을 패퇴시켰다.
가야군이 물러간 뒤, 수만 개의 댓잎이 죽장릉에서 발견되어, 백성들은 미추왕이 하늘의 군대를 보내 전쟁을 도왔다고 믿었다(그러나 아마도 댓잎군사는 백제의 책계왕이 보낸 군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가야와 왜 등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드러내어 도와주지 못하고 변장하여 나타나 도와준 것으로 추측된다).
재위 15년째인 298년 2월에는 경도 서라벌에 닷새 동안이나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었다는 기사가 보이고, 그해 12월에 유례왕의 사망기사가 보인다. 능과 가족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제15대 기림왕(이사금)
제11대 조분왕 - 후비 - 차남 걸숙 - 부인
- 석씨, 생년 미상~310년
- 재위기간: 298년 12월~310년 6월. 총 11년 6개월
- 부인: 기록 없음
- 자녀: 기록 없음
기림이사금은 기립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조분이사금의 아들, 손자, 증손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으나, 나이 차이로 보아서 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기림이사금이 조분이사금의 손자나 증손일 경우, 아버지는 걸숙이고, 어머니는 아이혜부인다. 그러면 기림은 유례왕의 동생인 걸숙의 아들인데, 유례왕을 이어 조카인 기림이 왕위를 이은 것이다. 여기에는 기림이 유례의 사위의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을 것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재위 3년(300년) 정월에 왜국과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이는 왜와의 전쟁 때문에 불안한 전쟁에 휘말려야 헸던 신라인들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또, 비열홀(지금의 함경도 안변)을 사찰하였다는 기사와 3월에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왔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당시 비열홀은 고구려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지만, 고구려는 내정의 불안과 중원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느라 한반도 쪽을 돌아볼 이유가 없었다. 이때, 동예(한반도 낙랑) 왕실의 후예들을 끌어오는데, 기림왕이 직접 동예의 도성인 안변으로 찾아가 설득하여 신라로 데려오게 된다.
기림왕 재위 3년에 낙랑이 항복해 왔다는 이 기사는 동예의 왕실 후예들이 대거 망명해 온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써 소백산맥 이북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대방(지금의 중국 산동 지역)은 247년에 그 곳의 태수 궁준이 백제의 고이왕과 싸우다 패배하여 전사하자 백제와 결혼 동맹을 맺어야했고, 책계왕 대에 이르러 백제는 완전히 대방을 병합하여 대륙백제 건설했는데, 이에 백제의 행정은 대륙과 한반도로 분리되어 대륙은 왕이 직접 다스렸고 한반도는 외척이 다스리는 형태를 유지하게 된다.
한성을 다스리던 외척 진씨 세력의 학정이 반발하여 비류가 구수왕의 아들임을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한성을 장악했다. 이때, 대방의 왕족들이 신라 땅으로 달아났는데, 기림왕 3년에 대방이 항복해 왔다는 기사는 한성에 머물고 있던 대방의 볼모가 신라로 달아나 망명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재위 10년(307년)에는 '덕업일신 망라사방'라는 내용이 기사에 나오는데, 이는 탈해왕 이후 계림국으로 쓰던 것을 신라로 복구했다는 뚯이다. 원래 신라는 서라, 사로, 신라, 계림 등으로 불렀는데, 탈해왕 대에 계림으로 부르다가 기림왕 대에 다시 계림을 폐하고 종전의 명칭으로 되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증왕 대에 가서 '신라'를 국호로 확정하게 된다. 이외에 몇 가지 재해에 관한 기사도 보인다. 재위 5년에 봄과 여름에 걸쳐 심한 가뭄이 들었고, 7년에는 8월과 9월에는 지진이 발생하여 금성의 민가가 무너지고 사망자가 발생했다.
재위 13년에 생을 마감했으며, 능과 가족에 관한 기사는 알려지지 않는다.
제16대 흘해왕(이사금)
제10대 내해왕 - 왕비 무씨 - 장남 우로 - 명원부인 석씨(조분왕의 장녀) - 후손
- 석씨, 생년 미상~356년
- 재위기간: 310년 6월~356년 4월. 총 45년 10개월
- 부인: 1명
- 자녀: 1명
왕비 - 공주
흘해이사금은 내해이사금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각간 수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내해-우로-흘해로 계보가 이어지는데, 생존연대 상으로 미루어 보아 우로와 흘해 사이에 2,3세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기림이사금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으로 추대되었다.
왕위에 오른 흘해는 311변 급리를 아찬으로 삼아 정사를 맡기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했다. 재위 3년(312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들의 혼인을 청하자, 아찬 급리의 딸을 시집보내어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재위 35년(344년) 2월에 왜는 다시 한 번 흘해왕의 딸과의 결혼동맹을 요구했다. 하지만 흘해왕의 딸이 이미 출가했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자, 이로써 신라와 왜의 화친은 끝이 나게 된다. 절교를 선언한 왜왕은 이듬해에 대군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해 풍도(포항 앞바다의 목출도)와 변방 민가를 약탈하고, 금성까지 포위하였으나 성문을 닫고 수성전을 펼쳐 격퇴시켰다. 이렇게 왜와는 화친과 전쟁을 반복하는 관계였지만, 백제와는 여전히 화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흘해왕은 337년에 백제의 비류왕에게 사신을 보내 양국의 화친 관계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46년간의 흘해왕 치세는 이러한 외교 관계에 관한 기록 외에는 천재지변에 관한 것들이 많다. 재위 4년 7월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나자, 흘해왕은 지방에 특사를 내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고, 5년 2월에는 궁궐을 중수하다가 비가 오지 않으므로 이를 중단했다. 8년 봄과 여름에는 가뭄이 들었는데, 왕이 직접 죄수를 재심사하여 많은 사람을 석방하여 민심을 달랬다. 『삼국사기』에는 재위 21년(330년)에 벽골제(전라북도 김제)를 개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백제의 기록이 잘못 들어 왔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는 김제의 벽골제와 견줄 만한 크기의 제천의 의림지, 상주의 공검지, 밀양의 수산제, 세 저수지가 그것이다. 흘해왕 당시의 벽골제 길이가 1천 8백 보나 된다는 기록을 존중한다면, 남한에서 가장 큰 저수지로 알려진 공검지를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상주사록에 따르면 공검지는 제방 길이가 860보였고, 너비가 800보였으며, 둘레는 22리(약 9킬로미터)였다고 한다.
재위 47년 (256년)에 아들 없이 죽었다. 능과 가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제17대 내물왕(이사금 또는 마립간)
김구도(김알지의 5대손) - 박씨(갈문왕 이칠의 딸) - 김말구(제13대 미추왕의 아우) - 휴례부인 김씨
- 김씨, 생년 미상~402년
- 재위기간: 356년 4월~402년 2월. 총 45년 10개월
- 부인: 1명
- 자녀: 3남
보반부인 김씨 - 제19대 눌지왕, 복호, 미사흔
내물(또는 나밀)마립간은 구도 갈문왕의 아들 말구(또는 미구)와 휴례부인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추왕의 아우였던 말구는, 유례왕 8년(291년)에 이벌찬에 임명되어 정사를 도왔던 인물이다. 흘해왕이 죽고 후계자가 없자, 신라 왕실에서 왕위 다툼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내물과 그 지지 세력이 무력을 동원하여 왕위를 차지했다(내물왕 이후로 석씨 왕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으로 봐서, 내물왕에 의해 김씨 중심의 왕실이 세워지면서 석씨가 왕족에서 완전히 밀려난 것으로 보아진다). 내물왕 대의 왕호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는 눌지왕부터 마립간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에는 내물왕부터 '마립간'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마도 마립간이라는 용어는 내물왕 대부터 사용되긴 했으나, 정식 칭호로 채택된 것은 눌지왕 대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삼국유사』의 설을 따라 내물왕 때에 '마립간'의 왕호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마립간은 수석장 또는 후세의 군장에 대한 존칭어인 상감에 해당하는 와호로 짐작되고 있다. 왕호가 마립간이었다는 사실은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왕권이 보다 강회되어 더욱 존엄성이 있는 왕호가 필요해진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로써 내물왕은 신라의 귀족들인 대등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가 중앙정청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남당'에서 주재하는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또한 이런 강력한 중앙집권을 바탕으로, 내물 마립간 이후부터는 박, 석, 김의 삼성이 왕위를 교대로 계승하는 현상이 없어지고 김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이 가능해졌다. 내물왕 대에 와서 신라가 대내적으로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게 된 것은 백제 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복하고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자 이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내물 마립간의 이러한 체제내적인 정비는 중국과의 국제관계에도 관심을 가지게 하여, 377년과 382년의 두 차례에 걸쳐서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아 부견의 전진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382년에 전진에 사신으로 파견된 위두와 전진의 왕 부견 사이의 대화에서는 당시 신라의 사정이 잘 드러나는데, 『태평어람』에 인용되어 있는 『진서』의 기사에 의하면 "그대가 말하는 해동의 일이 예와 같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라는 부견의 질문에 대하여 위두는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명호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사회에 변화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사회의 변화도 당연하다는 것으로서 신라가 고대국가체제의 정비를 구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이와 같은 신라와 전진과의 외교관계는 곧바로 중국문물 수입의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물왕은 재위 2년(357년)에 각 지역에 특사를 내보내 백성들을 위로하고, 효성이 깊고 유애가 돈독한 관리들을 천거토록 하여 그들의 직급을 올려 주었다. 재위 3년에는 시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내 왕위계승을 정식적으로 공포하였다. 재위 9년(364년) 4월에 왜는 군사를 이끌고 신라 땅에 상륙하여 금성을 공략하였으나, 신라의 복병에 걸려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 내물왕 초기에 백제와 화친으로 평화를 유지하던 중, 373년에 백제의 독산 성주가 백성 3백 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자 이를 받아주어 백제와의 외교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당시 중국 북방에서는 모용 선비가 쇠락하고 있었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영토 확장을 꾀하여 서로 세력을 다투는 양상을 띄게 된다. 371년에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3만의 군대를 이끌고 평양성을 습격했는데 이때, 고국원왕이 전사하게 되고 이로써 고구려와 백제는 더 악화되게 된다. 백제는 가야를 통해 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도 신라와 관계를 강화하면서 이에 따라 백제, 가야, 왜 삼국 연합군과 고구려가 대결하게 되는 국제 관계를 이루게 된다. 391년에는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즉위했고, 과감한 팽창정책을 추진하였다. 말갈군을 동원하여 내정이 불안하던 백제의 적현성을 급습하여 무너뜨렸다. 그 무렵, 백제는 왜병을 끌어들여 여려 차례에 걸쳐 침범하였고, 신라는 우호적 관계에 있던 고구려의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은 392년 7월에 병력 4만을 이끌고 백제의 대륙기지를 공격하였고, 순식간에 열 개 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북방 요새인 관미성을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켜 버렸다. 그동안의 불안했던 내정이 정리되자, 백제는 또 왜병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395년 8월 말갈군까지 북쪽 변경을 노략질하자, 계속되는 전쟁과 천재지변으로 고통 받던 신라는 399년에 고구려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그 이듬해 5만 명의 보병, 기병 군사를 신라의 국경지대로 파견하여 백제군과 연합한 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군사적 지원은 결과적으로 신라의 자주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는데, 신라는 고구려와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392년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기도 하였다.
401년 7월에 고구려에 인질로 갔던 실성이 돌아왔는데, 이는 내물왕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내물왕의 장남 눌지가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에 실성이 왕위를 이을 적임자로 지목되고 있었다. 내물왕은 실성이 돌아온 지 7개월 만인 402년 5월에 생을 마감했다. 능은 첨성대 서남쪽에 마련되었다.
제18대 실성왕(이사금 또는 마립간)
김대서지(미추왕의 아우) - 이리부인 석씨
- 김씨, 생년 미상~417년
- 재위기간: 402년 2월~417년 5월. 총 15년 3개월
- 부인: 1명
- 자녀: 기록 없음
아류부인 김씨
실성왕은 김대서지의 아들이며, 아간 석등보의 딸인 이리부인 소생이다. 대서지는 미추왕의 아우이므로 내물왕의 숙부가 되며, 실성왕은 내물왕의 사촌 아우이다. 실성은 392년에 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는데, 9년 뒤인 401년 신라로 돌아오고, 402년 2월 내물왕이 죽자, 태자 눌지가 너무 어려 그가 왕위를 이었다. 그는 키가 7척 5촌의 거구이고, 미래를 예견하는 식견이 있었다고 전한다.
403년에 미사품을 서불한(이벌손)으로 삼고 군국의 일들을 위임하여 통치하였다. 외교적인 측면에서는 왜와의 화호를 위해서 402년에는 내물왕의 왕자이자 복호의 형인 미사흔을 볼모로 보내고, 412년에는 유일하게 원군을 청할 수 있는 고구려와의 우호적 관계 유지를 위해서 내물왕의 왕자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기도 하였다. 왜와는 관계개선을 위한 외교적 노력 이외에 405년에는 왜가 침입해 명활성을 공격하자, 왕이 친히 기병을 이끌고 300여명을 참획하기도 했다. 408년 2월 왜가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선공할 계획을 세웠으나,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기를 "'무기란 흉하며, 싸움이란 위험하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 타국을 치다가 실패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보다 험한 곳에 의지해 관문을 설치해 그들이 오면 막아 우리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고, 유리할 때 나가 사로잡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곧 남을 이용하여 이용당하지 않는 계략으로, 대책 가운데 으뜸일 것입니다."라 하여 실성왕이 그 의견에 따랐다. 이가 곧 신라의 대왜 방위전력이 되었다. 413년에는 평양주(지금의 양주)에 큰 다리를 준공했으며, 415년 여름에 실성왕은 왜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올 것이라는 첩보를 접하고 그해 7월에 혈성벌에서 대대적인 군대사열을 실시하고 전쟁에 대비하였다. 얼마 뒤인 8월, 왜군은 포항 앞바다의 풍도로 쳐들어오자 왜군과 한바탕 격전을 벌여 격퇴시켰다. 왜군의 잦은 침입으로 신라사회는 흔들리고 있었던 실성왕 말년, 내물왕의 태자인 눌지가 덕망이 있어서 자기의 왕권을 위협하자, 실성완은 눌지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어 고구려의 힘을 이용해 그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오히려 고구려는 눌지를 지원하여 금성으로 잠입해 정변을 일으켜서 실성왕을 살해했다(417년). 이 정변으로 실성왕의 모계인 석씨세력은 김씨계에 의하여 소멸하게 되었다.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제19대 눌지왕(마립간)
재17대 내물왕 - 보반부인 김씨
- 김씨, 생년 미상~458년
- 재위기간: 417년 5월~458년 8월. 총 41년 3개월
- 부인: 1명
- 자녀: 1남 1녀
아로부인 김씨(실성왕의 딸) - 제20대 자비왕, 조생부인(지증왕의 어머니)
눌지마립간은 내물왕의 장남이며, 보반(또는 내례회)부인 김씨 소생이다. 내물왕이 죽을 당시 그는 너무 어렸으므로 실성이 왕위를 이었다. 실성이사금은 즉위 후에 자신이 외국에 볼모로 갔던 것을 원망하여 고구려를 이용, 내물마립간의 아들 눌지를 해침으로써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정변을 일으킨 눌지에 의하여 살해되고, 눌지는 실성이사금에 이어서 즉위하게 되었다. 그 때가 417년 5월이었다. 이처럼 그의 왕위계승에 고구려의 힘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위에 오른 눌지는 삽라군 태수 박제상으로 하여금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가 있는 복호와 미사흔을 데려오도록 했다. 박제상은 뛰어난 화술로 고구려의 장수왕을 설득하여 418년 정월에 고구려에 있던 복호를 귀환시켰고, 그해 가을에는 왜에 붙잡혀 있던 미사흔을 탈출시켰다. 하지만 제상은 미사흔의 안전을 위해 함께 도주하지 않아 왜인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눌지왕은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남으로써 양국 간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424년에 사신을 보내어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하지만, 당시 장수왕이 지배하던 고구려와의 관계는 예전 같지 않았다. 왜군의 노략질은 여전히 계속되었는데, 413년에 대군을 동원하여 서라벌로 진주해 왔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갔다. 그해 7월에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기근이 발생하고 눌지왕은 정치, 외교, 경제, 군사,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악재가 계속 나타나 어려운 상황에서 백제 비유왕이 화친을 청했다. 이에 눌지는 433년 고구려의 평양천도 이후의 남진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종래 적대적 관계에 있던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신라에 대한 왜의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440년에 두 차례에 걸쳐 남쪽과 동쪽 변경을 침입, 백성들을 납치했다.
444년 4월, 왜는 또 한 번 대군을 동원하여 금성으로 밀려들었고, 신라는 수성전을 펼쳐 왜병을 퇴각시켰다. 450년 7월에는 신라의 하슬라 성주 삼직이 고구려의 변장을 살해한 일로 고구려가 공격해 왔고, 454년 7월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입한다. 별과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난 장수왕은 이듬해 10월 다시 군대를 동원해서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동맹에 입각하여 군사를 파견, 백제를 지원한다. 이로써 신라와 백제의 동맹관계는 굳어지고, 고구려는 적대 관계로 굳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불안한 대외적인 위기상황 속에서 왕실 내부의 분쟁을 미리 막기 위하여 왕위계승의 부자상속제를 확립시켜 직계인 자비마립간과 소지마립간은 혼란 없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중앙정청인 남당에서 왕이 친히 노인뜰을 봉양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였고, 저수지인 시제(위치 미상)를 축조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도모하였으며, 또한 백성들에게는 우차의 사용법을 가르쳐서 화물유통을 쉽게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눌지왕 때, 최초로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보이는 마립간이 실제로는 내물왕 때 이미 사용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때에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 것은 종래의 왕호인 이사금이 마립간과 더불어 내물과 실성의 양 대에 걸쳐 혼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눌지왕은 각종 천재지변으로 신라가 혼란하던 458년 8월에 생을 마감했다.
제20대 자비왕(마립간)
제19대 눌지왕 - 아로부인 김씨
- 김씨, 생년 미상~479년
- 재위기간: 458년 8월~479년 2월. 총 20년 6개월
- 부인: 3년
- 자녀: 3남
제1왕비 김씨(파호갈문왕의 딸) - 왕자
제2왕비 김씨(미즐희 각간의 딸) - 왕자
제3왕비 김씨(미사흔의 딸) - 제21대 소지왕
자비마립간은 눌지마립간의 장남으로 실성왕의 딸 아로부인 김씨 소생이며, 458년 8월에 부왕 눌지왕이 죽자, 신라 제20대 왕에 올랐다. 눌지마립간 대에 마련된 왕위의 부자상속제에 따라 즉위함으로써 보다 강화된 왕권을 보여주었다. 당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종래의 족제적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는 6부를 개편하는 일이 시급했는데, 469년에는 왕경인 경주를 지역적으로 구분하여 방리명을 확정함으로써 왕경의 족제적 성격에서 벗어나 행정적 성격을 강하게 하였다.
국내의 지배체제를 강황하는 한편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비하여 눌지마립간 때에 체결되었던 백제와의 공수동맹을 보다 강화하였다. 이 공수도맹에 입각하여 474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백제의 개로왕이 아들 문주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이에 군사를 파견하여 백제를 구원하였으나, 신라의 구원병이 이르기도 전에 백제의 한산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전사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이 증대되고 있던 상황에서, 468년 2월 고구려와 말갈이 군사를 몰고 내려와 실직성(삼척)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자비마립간은 백성을 징발하여 니하(강릉)백성을 대거 동원하여 니하에 성을 쌓고 고구려 군을 공격하였다.
469년 4월 수해복구를 위해 7월에 신라 전역을 순행하였으며,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비하기 위해 470년 삼년산성(지금의 보은), 471년 2월에는 모로성, 473년에는 명활산성을 보수했다. 475년에는 일모성, 사시성, 광석성, 답달성, 구례성, 좌라성 등 일선지대의 요새지에 새로이 산성을 축조하여 이미 확보한 점령지의 효과적인 통치도 꾀하였다.
459년 4월 왜인들이 병선 백여 척으로 습격하고 월성을 에워싸자, 자비마립간의 지휘 하에 성에서 지키다가 적이 퇴각하는 것을 기다려 추격하여 몰아냈다. 462년 5월에 다시 왜가 쳐들어와 활개성을 점령하고 백성들을 생포해 갔다. 463년에는 삽랑성(경남 양산)을 침범하고 물러가는 왜병을 급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연해지방의 두 곳에 성을 쌓아 왜인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또 7월에는 군대를 사열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었다. 467년에는 전함을 수리하여 왜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477년 6월에 함대를 끌고 와 동쪽 해안 지역으로 상륙하였는데, 이에 자비왕은 장군 덕지를 시켜 왜군에 맞서 싸우게 했는데, 덕지의 공략에 말린 왜군은 병력 2백을 잃고 도주했다. 이렇듯 자비왕 시대는 왜의 계속된 침략으로 신라의 국방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이 시기 신라는 개국 이래 최대의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자비왕은 479년 2월 3일에 생을 마감했다. 능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제21대 소지왕(마립간)
제20대 자비왕 - 제3왕비 김씨
- 김씨, 생년 미상~500년
- 재위기간: 479년 2월~500년 11월. 총 21년 9개월
- 부인: 2명
- 자녀: 1남 1녀
선혜부인 - 보도부인(제23대 법흥왕의 왕비)
벽화부인 김씨 - 왕자
소지마립간은 비처왕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자비왕의 셋째 아들로 미사흔의 딸 김씨 소생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효행이 지극하고 겸손하여 타인을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여 성인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479년 2월 부왕 자비가 죽고 왕위에 오르자 우선 사면령을 내려 죄수를 방면시키고, 관리들의 벼슬을 한 급씩 올려 주었다. 그의 치세기간에는 잦은 천재지변과 고구려와 왜, 말갈 등의 외침으로 혼란스러웠다.
즉위 이듬해인 480년 5월 가뭄을 시작으로, 동년 10월의 기아, 482년 2월의 폭풍 및 금성의 화재, 4월의 폭우, 483년 4월과 7월에 홍수, 11월에 우레와 전염병 등이 계속되었다. 자연재해가 계속된 직후 오함이라는 자를 새로 이벌찬으로 삼는 등 인사개편에 나섰다. 480년 11월에 말갈이 변경을 공격하게 되자, 481년 2월에 자신이 직접 비열성(함경남도 안변)까지 행차하여 군복을 하사함으로써 변방의 군사를 위로하였다. 신라군은 패전을 거듭했고, 신라의 북방 변경을 휘젓고 다니던 고구려군과 말갈군은 순식간에 호명성(강원도 철원) 등 일곱 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다시 동쪽 해안선을 따라 남진하여 미질부(경북 영일만 일대)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에 소지왕은 백제의 동성왕과 가야에 구원을 요청했고, 백제와 가야의 군대의 도움으로 고구려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각종 재해와 주변국의 침입으로 마립간에게 그 화살이 돌아오자, 소지왕은 자비왕 대에 강화된 왕권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고육지책으로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다.
484년 7월 고구려에 공격당한 백제를 위해 연합으로 모산성 아래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실추되었던 국가 위상을 되찾고, 군대의 사기도 크게 높였다. 이에 힘입어 소지왕은 여러 성을 쌓아 국방을 강화했다.
485년 2월에는 구벌성을 쌓고, 486년 정월에는 일선 지방의 장정 3천 명을 동원하여 삼년성과 굴산성을 개축하였다. 488년 7월에는 도나성을 쌓았고, 490년 2월에는 비라성을 중수했다. 493년 7월에는 임해와 장령 두 곳에 진을 설치하여 왜적의 침입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계속된 외침과 자연재해의 수습을 끝낸 소지마립간은 시조 박혁거세가 처음 태어났다고 알려지는 나을에 신궁의 건설을 시작하여 497년 2월에 끝냈다.
487년 7월에는 월성을 수리하여 그곳에 대궁을 설치하고 이듬해인 재위 10년 정월에 월성으로 옳겨갔다. 이때부터 월성엔 주로 왕과 왕비 등이 기거하고, 금성에 왕실의 혈족들이 기거하게 되어, 왕의 위상을 높였다. 그해,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국내의 기간 도로인 관도를 수리하였으며, 490년에는 수도인 경주에 처음으로 시사를 열어 사방의 물화를 유통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자비왕대의 경주의 방리명확정과 아울러 족제적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는 육부체제를 개편하여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수립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또한, 소지왕은 비열성(지금의 안변), 일선군(지금의 선산), 날이군(지금은 영주)등지를 순행하여 병사를 위문하고 재해지나 전쟁지역의 주민들을 위로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유식하는 백성들을 귀농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왕의 치적은 신라의 대내적 결속력의 강화와 농업생산력 증대에 기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재위 14년 492년 백제의 동성왕의 결혼요청을 받아들여 잉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냄으로서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 뒤,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동맹관계는 더욱 공고해져 494년의 고구려의 신라침입 때에는 백제가, 495년 고구려의 백제공격 때에는 신라가 각각 구원병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강력하게 저지하였다. 496년 7월 고구려군이 다시 신라의 우산성을 쳤는데, 장군실죽이 나가 싸웠다. 497년 4월 왜, 8월에 고구려가 다시 잇따라 침공, 고구려군이 결국 우산성을 점령했다. 고구려와의 전쟁과정에서 변경지방의 요충지에는 삼년산성 등을 개축, 증축하여 침입에 대비하였다. 재위 21년(500년) 생을 마감했으며,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제22대 지증왕(마립간)
갈문왕 습보(내물왕의 손자) - 조생부인 김씨(제19대 눌지왕의 딸)
- 김씨, 437~514년
- 재위기간: 500년 11월~514년 7월. 총 13년 8개월
- 부인: 1명
- 자녀: 2남
연제부인 박씨 - 제23대 법흥왕, 입종(제24대 진흥왕의 아버지)
지증왕은 내물왕의 증손이며, 습보갈문왕의 아들로서 조생부인 김씨 소생이다. 성은 김씨이고, 지대로 혹은 지도로 또는 지철로 라고 하였다. 갈문왕 습보는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의 아들이다. 또한 조생부인이 눌지왕의 딸이므로 지증왕은 소지왕의 6촌 아우가 되는 셈이다. 왕은 몸이 건장하였으며 담력이 있었다고 한다. 재종형인 소지마립간이 후계자가 없이 죽자 64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재위 3년(502년)에 순장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렸다. 신분의 위상을 드러내는 중요한 전통적 장례 절차였던 순장을 자신들의 신분을 구분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왕실과 귀족사회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금지시킨다. 이는 불교적인 의미도 없지 않겠으나 농업노동력의 확보라는 측면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주목된다. 또, 주군에 명하여 농업을 권장하도록 하였으며, 비로소 우경을 시행하도록 하는 개혁조처를 단행함으로써 농업생산력증대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는 벼농사가 확대, 보급되면서 수리사업도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사회적 생산력의 발달에 기반을 두고 정치적 개혁들을 실행해 나갔다.
우선 재위 4년(503년)에는 이제까지 사라, 사로, 신라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던 국명을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왕호를 방언인 마립간에서 중국식인 왕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지증왕은 비로소 고대국가로 정비된 신라국의 왕이 되었다.
이때에 제정된 국명인 신라의 의미는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국명 및 왕호의 한화정책은 단순한 명칭상의 변경만이 아니라 신라가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과 지배조직을 강화함에 따라 이루어진 결과였으며, 중국의 고도한 정치조직과 문물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또한, 재위 6년(505년)에는 친히 국내의 주, 군, 현을 정하였는데, 지방제도로서의 주군제도의 실시는 고구려, 백제, 가야 등의 삼국과의 전쟁에서 얻어진 점령지의 통치와 영토 확장의 수단이었다. 즉,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의 수립을 위하여 새로이 신라의 영역내로 편입된 점령지를 행정적 차원에서 일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해에 실직주(지금의 강원도 삼척)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신라 최초의 군주를 삼은 것도 이러 정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군주제는 군사적 필요에 따라 수시로 이동할 수 있는 군정적 성격을 띠었으며,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실질적인 중간기구로서 기능하는 외직이었다. 그해 11월에는 석빙고를 관리하는 소관부서를 설치하고 얼음을 저장하게 하였다.
한편, 군사적으로는 504년 동북 방면에 파리성, 미실성, 진덕성, 골화성 등 12개성을 축조하였고, 512년에는 하슬라(강릉)주 군주인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복속시키게 하였다. 남쪽 방면으로는 아시촌(지금의 함안)에 소경을 설치하여 그곳 주민을 행정적으로 회유함으로써 신라의 직할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한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504년 상복법의 제정, 서울에 동시의 설치, 선박 이익의 권장 들 일련의 의례와 민생에 관한 시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지증왕의 정책은 구체적이고 섬세했다. 그는 제반 문제를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여 제도화함으로써 국가 기강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이런 여러 업적을 남긴 그는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인 514년 78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는데, 신라에서 시법을 사용하기로는 지증왕이 처음이었다. 지증왕 대에는 칭호를 왕으로 사용하기로 확정하긴 했으나, 여전히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널리 사용되었다.
제23대 법흥왕
제22대 지증왕 - 연제부인 박씨
- 김씨, 원종, 생년 미상~540년
- 재위기간: 514년 7월~540년 7월. 총 26년
- 부인: 4명
- 자녀: 2남 3녀
보도부인 김씨(소지왕의 딸) - 지소태후(제24대 진흥왕의 어머니)
옥진궁주 김씨 - 비대
벽화부인 김씨 - 삼엽
보과부인 김씨(백제 동성왕의 딸) - 모량, 남모
법흥왕은 지증왕의 장남이며, 연제부인 박씨 소생으로 이름은 원종이다. 그는 키가 7척이고 도량이 넓으며 사람을 좋아했다고 한다. 소지왕이 죽고 부군이었던 지증이 왕위를 잇자, 원종은 곧바로 태자에 책봉 되었다.
514년 7월에 왕위에 오른 법흥왕은 지증왕 때 일련의 개혁정치를 계승하여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완비하였다. 재위 4년(517년)에 신라에서 중앙관부로서는 병부가 제일 먼저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권을 왕이 직접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병부는 눌지왕 이후에 등장하여 왕의 직속으로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군과 같은 직책을 중앙관부로 흡수하여 재편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재위 7년(520년)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공복을 제정하였는데, 이때에 반포된 율령에는 17관등제와 골품제도 등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율령에 의하여 신라내로 통합된 이질적 요소들을 법 아래에서 강제적으로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왕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권력의 강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관복은 붉은빛과 자줏빛 두 가지색으로 구분하여 등급을 표시하도록 했다.
이러한 국가권력, 즉 왕권의 강화를 단적으로 나타낸 제도가 바로 법흥왕 대에 설치된 상대등이다. 상대등은 수상과 같은 존재로서 531년에 이찬 철부가 최초로 상대등에 임명하여 국사를 총괄하게 하였다. 상대등은 신라의 최고관직으로서 대등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의 주재자였다.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 왕이 귀족회의 주재자로서의 성격을 탈피하게 되자 왕 밑에서 귀족들을 장악할 새로운 관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상대등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법흥왕은 이와 같이 대내적으로 체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영역확장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522년에 백제의 적극적인 진출에 반발한 대가야가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결혼을 요청하다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을 보내어 동맹을 맺었다. 그 뒤, 법흥와은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하여 524년에는 남쪽의 국경지방을 순수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532년에 본가야의 금관국주 김구해가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옴으로써 정식으로 합병되었다. 법흥왕은 구형의 귀순을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금관국을 그의 식읍으로 내줬으며, 셋째 아들 무력을 대신으로 등용하였다. 이로써 약 500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가야 왕조를 폐하고 신라에 병합하였다. 본가야의 투항은 신라로 하여금 낙동강과 남해안의 교통상의 요지인 김해를 발판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서북방면의 점령지는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군주로 임명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왕권강화와 영역확장 등에 힘입어서 국력이 신장된 신라는 재위 23년(536년)에 비로소 독자적 연호인 건원을 사용하였다. 이로써 법흥왕 이래 신라 중고왕실의 거의 모든 왕들은 자기의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전통사회에서 중국의 주변국가가 중국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일단 중국과 대등한 입장에서의 자주적 국가임을 표현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또한 521년에는 기존의 외교노선에서 벗어나 위진남북조시대의 북조 대신에 남조인 양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때 신라에 사신으로 온 양나라의 승려 원표가 불교를 신라왕실에 전해준 것이 불교수용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불교가 신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5세기 초 아마도 눌지왕 때이거나 혹은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고구려를 통해 들어왔다. 신라불교 개척자는 아도였다. 전설적 인물인 묵호자와 동인 인물로 추정하고 있는데, 신라의 민가에 들어와 불교를 전차했다 전해진다. 신라와 중국과의 외교적 교섭이 열림에 따라 신라왕실에 법흥왕은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를 받아 고민하던 중 527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의 국가적 공인이 이루어졌다.
법흥왕에 의하여 국가종교로 수용된 불교는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형성에 있어서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여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법흥왕이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공이라 한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재위 27년 만에 죽자 시호를 법흥이라 하고 능은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마련되었다.
제24대 진흥왕
갈문왕 김입종(제23대 법흥왕의 아우) - 지소태후 김씨(법흥왕의 딸)
- 김씨, 삼맥종, 534~576년
- 재위기간: 540년 7월~576년 8월. 총 36년 1개월
- 부인: 4명
- 자녀: 4남 1녀
사도부인 박씨 - 동륜, 구륜
숙명궁주 박씨 - 제25대 진지왕
소비 부여씨
월화궁주 김씨 - 천주
금진 - 난성공주
진흥왕은 법흥왕의 아우 김입종의 아들이며,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삼맥종, 혹은 삼맥부이다. 534년에 태어났으며, 일곱 살이 되던 540년 7월에 법흥왕이 죽자 왕태후 지소의 섭정을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신라의 대외적 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킨 왕이다.
551년에 개국이라고 연호를 바꾸고 친정을 시작하면서부터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지금의 천안 혹은 증평)과 금현성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듬해 병부령 이사부를 임명하고,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한강하류유역을 차지했다. 그 기반으로 그 해에 백제의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백제가 고구려부터 한강지역을 탈환하자, 진흥왕은 거칠부를 비롯하여 구진, 비태, 탐지, 비서, 노부, 서력부, 비차부, 미진부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 이북 고현(지금의 철령) 이남의 10개군을 고구려부터 빼앗게 하였다. 그리고 553년에는 백제가 고구려부터 탈환한 한강하류유역의 전략적인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를 기습 공격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유역의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신주를 설치하여 아찬 김무력을 초대 군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다.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하류유역을 탈취한 사건은 백제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결혼동맹을 파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백제 성왕은 554년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지금의 옥천) 전투에서 신주군주 김무력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하였으며, 백제군은 거의 전멸되었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 ․ 물적 자원의 획득 이외에도 황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였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에 신라는 564년 이래 거의 매년 중국 남조의 진과 북조의 북제에 사신을 파견하고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법흥와의 가야에 대한 정복사업을 계승하여 낙동강유역에까지 정복의 손을 뻗쳤다. 555년에는 비사벌(지금의 창녕)에 완산주가 설치하고, 557년에는 국원(충북 청주)을 소경으로 만들었으며, 사벌주를 없애고 감문주를 설치하고 사찬 기종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562년 백제는 신라의 변경을 침략하였고, 그 틈을 이용하여 가야왕 도설지가 군대를 일으켰다. 신라 변경을 노략질하던 백제군은 신라군에게 역공을 당해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으며, 가야의 반란 세력은 신라 장군 이사부와 사다함이 군사 5천을 이끌고 가서 패퇴시켰다. 이리하여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낙동강유역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565년에 원래 대야주(지금의 합천)를 설치하여 가야지역 통치의 본거지로 삼는 동시에 백제에 대한 방어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 밖에도 동북방면으로 북상하여 556년 비열홀주(지금의 안변)를 설차하고 사찬 성종을 군주로 임명하였으며, 신주로 삼았던 한강 이북에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고구려, 백제, 가야에 대한 활발한 정복사업의 결과로 신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은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네 개의 순수관경비와 최근 발견된 단양의 적성비를 통해 볼 수 있는데, 네 개의 순수비 중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는 창녕비는 561년에, 함경남도 함흥군에 있는 황초령비와 이원군에 있는 마운령비는 568년에 각기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진흥왕의 순수관경비는 새로이 신라 영역내로 편입된 지역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확장된 영역을 확인하기 위하여 세워진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진흥왕은 이 같은 정복활동뿐만 아니라 대내적인 정치에 있어서도 많은 치적을 남겼다. 중대왕실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유교적인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그 위엄을 드러내고자, 545년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였다.
또한 법흥왕 대에 공인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는데, 544년 흥륜사의 완성을 시작으로 경주에 많은 사찰을 지었으며, 사람들이 출가하여 봉불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었다. 또한 중국 남조에 부처님의 사리를 요청하였는데, 549년에는 양나라에 유학하였던 승려 각덕이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자,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에서 영접하게 하였다. 그리고 553년에는 월성 동쪽에 왕궁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왕궁을 고쳐서 불사로 삼고 황룡사라 이름 하였는데, 이는 566년에 완공되었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로서 이곳에는 574년에 신라 최대의 불상인 장륙상을 주조하여 모셨다. 이 장륙상에 소요된 구리의 중량이 무려 3만 5천근이고, 도금한 중량이 1만 1백 98푼이나 되었다. 황룡사가 완공되던 해에는 지원사와 실제사도 준공되었다. 이렇게, 신라왕실의 보호를 받는 불교는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함으로써 도성불교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외형적인 사찰건축 외에도 565년에는 승려 명관이 불경 1,700여권을 진나라에서, 576년에는 안홍법사가 「능가승만경」및 불사리를 수나라에서 각각 가져옴으로써 교리적인 발전의 기틀도 마련하였다. 또한 572년에는 7일 동안 팔관연회를 외사에서 열어 정복전쟁기간에 전사한 장병의 영혼을 위로하였는데, 이것은 신라 불교가 국가의 현실적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호국불교임을 나타낸 의식이었다. 이와 같이 진흥왕은 불교의 현실적 필요성을 절감하고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한편, 그 자신도 불교에 매료되어 만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의를 입고 법운이라 하여 여생을 마쳤으며, 왕비도 이를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거처하다가 614년에 죽었다.
또, 진흥왕은 576년에 종래부터 있어오던 여성 중심의 원화를 폐지하고 남성 중심의 화랑도를 창설하였다. 무리들은 '풍월도'라 불리었고, 그 우두머리를 일러 풍월주라고 하였는데, 초대 풍월주는 위화랑이었다. 『화랑세기』는 그는 얼굴이 백옥과 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가졌다고 했다. 또 그는 성격이 곧고 대의를 알며 공평무사했다. 진흥왕이 그를 총애하여 위화랑 이후 풍월주를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하여 화랑이란 명칭을 탄생시킨다. 화랑도의 전승기는 위화랑이 제1세 풍월주가 된 540년부터 681년에 김흠돌의 난에 대한 여파로 풍월주가 폐지될 때까지의 241년 동안이다. 그 이후로 화랑도는 조직이 약화되고 사병화되어, 신라 말에 이르러서는 일개 수련 단쳬로 전락하게 된다.
이렇게 많은 업적을 남긴 진흥왕은 대내적으로는 국가의식과 대외적으로 자주의식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독자적 연호를 세 개나 사용할 수 있었다. 551년의 개국, 568년의 대창, 그리고 572년의 홍제가 그것이다. 재위 37년 만인 576년, 43세로 죽었다.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
제25대 진지왕
제24대 진흥왕 - 숙명궁주 박씨
- 김씨, 금륜, 생년 미상~579년
- 재위기간: 576년 8월~579년 7월. 총 2년 11개월
- 부인: 1명
- 자녀: 3남
지도부인 박씨 - 용수, 용춘
도화랑 - 비형
진지왕은 진흥왕의 차남이며, 이름은 사륜 혹은 금륜이고 지소태후의 사녀 숙명궁주 소생이다. 진흥왕의 태자 동륜이 572년에 죽었기 때문에 진흥왕에 이어서 즉위하여 무열왕계의 시조가 되었다. 당시의 왕위계승에 있어서는 이미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진흥왕의 둘째 아들인 진지왕은 진흥왕의 적손,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뒤의 진평왕)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없었다. 진지왕이 즉위하던 해(576년)에 거칠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여 국정을 맡긴 사실과, 재위 4년 만에 정란황음을 이유로 화백회의의 결정에 따라 폐위되었다는 점, 또한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진흥왕대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거칠부의 지원을 받아 백정의 왕위를 찬탈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577년에 이찬 세종이 서쪽 변경의 주군으로 침입하여온 백제군을 일선군(지금의 선산) 북쪽에서 격파하여 3,700여명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또 이듬해 7월에는 백제의 알야산성을 점령했다. 내리서성을 축조하여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기도 하였으나, 2년 뒤에 백제가 웅현성(지금의 보은근처)과 송술성을 쌓음으로써 막히고 말았다. 578년에는 중국 남조의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 진흥왕 이래의 외교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재위 4년 만에 폐위되었다. 진지왕이 왕위에 오르던 때부터 실질적 왕권은 사도태후와 진흥왕의 애첩 미실이 장악하고 있었고, 왕권을 상실한 진지왕은 정사는 안중에도 없고 매일 잉첩들과 어울려 색사를 즐겼다. 이렇듯 진지왕이 황음을 일삼으면서 사도태후와 미실의 말을 듣지 않자, 그들은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동륜의 아들 백정(진평왕)을 왕으로 세웠다. 그 후 진지왕은 별궁에 유폐된 채 지내다가 579년 7월 17일 생을 마감했다. 시호를 진지라 하고 능은 경주 영경사 북쪽에 있다.
제26대 진평왕
제24대 진흥왕 - 사도부인 박씨 - 동륜태자 - 만호부인 김씨
- 김씨, 백정, 567~632년
- 재위기간: 579년 7월~632년 정월. 총 52년 6개월
- 부인: 4명
- 자녀: 1남 2녀 이상
마야왕후 김씨 - 천명공주, 덕만공주(제27대 선덕왕)
승만왕후 - 왕자
화명부인
옥명부인
진평왕은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동륜태자의 아들이며, 입종의 딸 만호부인 소생으로 이름은 백정이다. 572년에 아버지 동륜태자가 죽자 할머니 사도태후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고, 579년 7월에 사도태후가 진지왕을 폐하자 열세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하였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하였다고 한다.
진평은 진흥왕대를 이어서 왕권을 지속적으로 성장시켰다. 즉위하던 해(579년) 8월에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여 일체의 국정을 맡기고, 진평왕 2년(580년)에는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후직을 병부령에 임명하여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진평왕은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관제의 정비와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독자적인 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581년에 관리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를 설치하였으며, 583년에는 국가의 공부를 관장하는 조부를 설치하고 조부령 1인을 두었으며, 같은 해에 또 거승을 관장하는 승부를 설치하고 승부령 1인을 두었다. 그리고 586년에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를 설치하고 예부령 2인을 두었으며, 591년에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 2인을 두었다. 이로써 신라 조정은 병부를 시작으로 위화부, 선부서, 조부, 승부, 예부 등을 설치함으로써 조정 6부조직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580년대에는 위화부-조부, 그리고 예부와 같이 중앙관부 중에서도 핵심적인 구실을 담당하는 관부가 설치되어 각 관청간의 분업체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소속 관원수를 규정하여 조직화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진흥왕대의 정복국가체제에서 관부정치체제로의 질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진평왕 대 말기인 622년 2월 궁정관부를 총괄하는 내성사신을 설치하였고,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을 초대로 임명하였다. 이밖에도 623년 정월 병부에 대감 2인을 두었으며, 624년 정월 시위부에 대감 6인, 상사서와 대도서에 대정 1인을 각각 설치하였다. 다음으로 584년에 건복이라고 개원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천명하였다.
581년에 건국하여 위진 남북조의 분열기를 극복하고 589년에 통일왕조로 등장한 중국 수나라가 등장하자, 이에 진평왕은 594년에 수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고,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 596년에는 승려 담육을 수나라에 보내 불교를 연구토록 하였으며,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신라가 수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한 것은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 양국과 관계가 크게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양견은 수륙군 30만을 양성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는데, 이에 고구려는 말갈병 1만을 앞세워 598년에 요서 지역을 선제공격하였다. 급습을 당한 양견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그해 6월에 병력 30만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장마 중에 고구려 맹장 강이식의 전술에 말려 대패하고 말았다. 일단 고구려의 영양왕과 양견은 화친을 맺었으나, 양견은 고구려 정벌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았고, 백제까지 수나라의 고구려 공격을 돕겠다는 의지를 표하자, 영양왕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백제를 공격하게 되고, 이로써 한동안 전쟁을 자제하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사이에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백제의 무왕은 602년에 아막성(아모산성, 충북 음성 일대) 공략해 왔는데, 진평왕은 기병 수천을 내세워 대응했다. 또한 소타, 외석, 천산, 옹잠 등에 각각 성을 쌓고 백제 땅을 역습했고, 병력 4만으로 신라가 새롭게 쌓은 네 개의 성을 공격했다. 603년에는 고구려의 영양왕은 장군 고승을 선두로 내세워 북한산성을 공격해왔다. 진평왕은 직접 군대 1만을 이끌고 출전하여 고구려 군을 물리쳤다. 이때, 수나라에서는 양견(문제)이 아들 양광(양제)에게 살해되고 양광이 왕위를 찬탈했는데, 그는 낙양에서 북경에 이르는 대운하 공사를 하는 등 일단 내치에 힘을 쏟으며 외교적으로 고구려를 압박하는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진평왕은 608년에 수나라의 군사와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여 원광에게 「걸사표」를 짓게 하고, 611년에 이를 수나라에 보냈고, 다음해에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 정벌이 있게 되었다. 612년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얼마 뒤 많은 피해를 입은 채 퇴각해야 했다.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이 전개되면서 고구려가 한반도 쪽을 돌아볼 여력을 잃게 되자, 즉시 신라를 공격해 왔다. 백제는 611년에 신라의 가잠성(충북 괴산)을 함락시키고, 616년에는 모산성(전북 남원)을 공격하였다.
그 무렵, 중국에서는 618년에 양광이 농민군에게 살해되고, 태원의 귀족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했다. 당의 건국으로 중국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고, 그것은 곧 신라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진평왕은 당 고조 이연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고 국교를 맺었다. 당의 등장으로 국제정세가 급격하게 변하고 백제와 고구려는 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신라를 공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623년 백제가 신라의 늑노현을 침입함으로써 5년간의 침묵이 깨졌고, 624년 백제의 속함성(지금의 함양)을 비롯한 5성 공격에 대한 신라의 방어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신라는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18년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당나라와 621년부터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거의 매년 당나라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였다. 신라가 당나라와 수립한 외교관계는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외교적 견제에 이용될 수 있었다. 즉,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으로 곤경에 처한 신라는 625년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빈번한 침입으로 말미암아 당나라에 대한 조공로가 막히게 됨을 호소하니, 이에 당나라 고조는 우선 626년에 사신 주자사를 신라와 고구려에 보내 양국이 화합하라는 외교적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 결과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기도 하였다. 진평왕은 당나라에 의한 고구려 견제라는 외교적 노력을 진행시키는 한편, 628년에 가잠성을 포위한 백제군을 격파하기도 하였으며, 629년에는 대장군 김용춘과 김서현-김유신 부자로 하여금 고구려의 낭비성(지금의 청주)을 공격하여 항복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신라 사회는 크게 피폐해져 있었고, 자연히 정치적 불안도 조성되었다. 급기야 조정은 반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631년 5월에 이찬 칠숙와 아찬 석품이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계획이 누설되어 진압할 수 있었다.
진평왕 대에는 중국에서 발달한 고도의 불교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고승들의 구법행과 귀국행이 빈번하게 있었는데, 고승들의 귀국은 대체로 외교사절의 귀국행차와 같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불교수용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지원을 짐작하게 한다. 진평왕 7년(585)에 남조의 진으로 구법을 위하여 떠났던 고승 지명은 602년에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상군과 함께 귀국하여 왕의 존경을 받아 대덕이 되었으며, 589년에 진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원광은 600년에 조빙사인 나마 제문과 대사 횡천과 함께 귀국하였다. 또한, 596년에 수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고승 담육은 605년 수나라에 파견되었던 입조사 혜문과 함께 귀국하였다. 국가의 지원을 받았던 고승들은 세속적인 국가사에도 참여하고 있어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한 신라불교의 모습을 잘 드러내준다.
진평왕은 재위 54년 만에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재위기간은 초대 박혁거세 거서간 다음으로 길다. 한지에 장사지냈으며, 당나라 태종은 조서를 보내어 진평왕에게 좌광록대부를 추증하였다.
를 추증하였다.
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재위기간은 초대 박혁거세 거서간 다음으로 길다. 한지에 장사지냈으며, 당나라 태종은 조서를 보내어 진평왕에게 좌광록대부를 추증하였다.
를 추증하였다.
제27대 선덕여왕
제26대 진평왕 - 마야부인 김씨
- 김씨, 덕만, 생년 미상~647년
- 재위기간: 632년 정월~647년 정월. 총 15년
- 남편: 3명
- 자녀: 없음
김용춘
흠반
을제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둘째 딸이고 이름은 덕만이며, 마야부인 김씨 소생이다. 진평왕의 장녀로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즉, 선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고 하는 특수한 왕족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하였으며, 633년에는 주군의 조세를 일 년 동안 면제해주어 민심을 수습하였다. 여왕은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백성들을 얼마나 인자하게 아끼고 사랑했는지는 지귀의 설화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지귀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행차할 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선덕여왕이 이를 보고 그의 가슴 위에 자신의 팔찌를 놓고 떠났다. 지귀가 잠이 깨어 이를 알고는 마음에서 불이나 영묘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635년). 634년에는 분황사를 창건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634년에 인평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고왕실의 자주성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즉위 이래 거의 매년 당나라에 대해 조공사신을 파견했는데, 이는 고구려, 백제의 공격이 빈번해짐에 따라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국가를 보존하려는 자구책으로 볼 수 있다. 선덕여왕은 즉위하던 해부터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봉작을 요구했지만,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이세민은 선덕여왕의 즉위 이후에도 3년 동안이나 봉작을 내리지 않았다. 봉작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선덕여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 때문에 신라에선 줄기차게 사신을 보내 신임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고, 결국 당나라는 이세민의 신임표를 보내 선덕여왕을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백제는 선덕여왕 재위 2년(633년) 8월에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입했고, 636년 5월 독산성을 습격, 638년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 11월에는 칠중성(임진강변)을 공격했는데 모두 알천에게 피해 물러갔다. 이렇듯 고구려의 침입이 잦아지자, 선덕왕은 하슬라(강릉)을 북소경으로 삼아 사찬 진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즈음 백제에는 의자왕이 왕위를 이었는데, 그는 고구려와 여제동맹을 맺고, 642년 7월에 신라에 총공세를 퍼부어 신라 서쪽의 40여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8월에는 고구려가 당항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버렸다. 또 백제 장군 윤충이 같은 달에 대야성(경남 합천)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그곳 도독 이찬 품석(김춘추와 사위)와 사지 죽죽, 용석 등을 죽였다.
대야성 함락 소식에 놀란 선덕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신라가 죽령 이북의 땅을 내주면 군대를 파견하겠다는 말로 김춘추를 농락했다. 이에 김춘추가 화를 내며 거절하자, 연개소문은 그를 옥에 가둬 버렸다. 난감해진 김춘추는 일단 땅을 내주겠다고 약속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신라로 돌아왔다. 이렇게 되자,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지금의 경산) 군주에 임명하여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의 구원요청을 접한 당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양국의 침범을 받게 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644년 신라의 김유신은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회복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645년 3월에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김유신은 다시 출전하여 2천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다. 그해 5월 이세민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선덕여왕은 군대 3만을 동원하여 협공을 하였다. 그 틈을 노려 백제가 신라 변경을 급습해 와 일곱 성을 점령했다. 이렇게 전쟁은 계속 이어져 백성은 불안에 떨었고, 이 무렵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승려 자장의 건의에 따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황룡사 9층탑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황룡사 9층 석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뜻은 이웃의 9층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이라 전해진다. 그러나 이 대탑 건설에 엄청난 인력과 자원이 투입되자 이전에 당태종에 의해서 지적되었던 여왕통치를 문제로 삼아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 진골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는 김춘추와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었다.
여왕은 내란중인 1월 8일에 생을 마감했다. 재위 16년 만에 죽으니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사지냈다(선덕여왕은 생전에 자신이 죽을 시기를 예언하고 무덤의 위치를 정해뒀다고 하는데, 현재 선덕왕릉이 있는 경주시 보문동이 바로 그곳이다).
제28대 진덕여왕
갈문왕 김국반
(제26대 진평왕의 동복 아우)
|―――――――― ▷ 제28대 진덕여왕
월명부인 ․ 김씨, 승만, 생년미상 ~ 654년
․ 재위기간 : 647년 정월 ~ 654년 3월. 총 7년 2개월
․ 남편 : 기록 없음
․ 자녀 : 없음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동복아우인 갈문왕 국반의 딸이고, 월명부인 박씨 소생으로 이름은 승만이다. 그녀는 자태가 곱고 키가 7척이었으며, 팔을 뻗으며 무릎까지 닿았다고 전해진다. 즉위하던 해(674년)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에 힘입어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의 영주로 임명하는 등 왕권강화를 통한 정치적 개혁을 실시함과 동시에 국내 안정을 꾀하여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서 정무를 집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신의 파견을 통하여 자신의 즉위 사실을 알리고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지속시켰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당 태종은 지절사를 보내 선덕여왕을 광록대부에 추증하고, 진덕여왕을 주국으로 삼아 낙랑군 왕에 책봉하였다. 이로써 진덕은 즉위 한 달 만에 내정을 안정시키고, 국제적으로 공인도 받았다. 그러나 백제가 신라가 내분으로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그해 10월 백제가 쳐들어왔다. 이에 진덕여왕은 김유신을 출천시켜 백제군을 막아내도록 했는데, 이후 백제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백제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신라는 설상가상으로 고구려까지 공격해오게 된다. 곤란한 상황에 빠진 신라는 648년 고구려와 백제의 견제를 위해 필요한 군사를 지원받기 위해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그 사신은 바로 김춘추였다.
진덕여왕과 당 태종은 서로 간에 친교를 돈독히 한 다음, 나당 연합을 체결하게 된다. 이러한 당나라와의 친교는 결과적으로 신라 내정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649년 신라의 백관이 모두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는 중조의관제를 , 650년에는 즉위 직후부터 사용하던 독자적 연호인 태화를 버리고 당나라 고종의 연호였던 영휘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의 관제와 연호의 사용 등은 김춘추의 건의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서 당나라의 선진문물의 수용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정치적 예속도가 강화되었다는 부정적인 면도 무시할 수는 없다. 또한 651년에 백관의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의 실시와 품주를 개편한 집사부의 설치는 왕권강화의 의미를 가지는 정치적 개혁으로 김춘추 ․ 김유신 세력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또, 진덕여왕은 김유신으로 하여금 국방력을 증강시켜서 훗날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재위한 지 8년만인 654년에 죽었고, 사량부에 능이 마련되었다. 진덕여왕의 남편과 자식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제29대 태종무열왕
제25대 진지왕
|―――――――― 김용수 (장남)
지도부인 박씨 |―――――――― ▷ 제29대 태종무열왕
천명공주 ․ 김씨. 춘추, 603~661년
(제26대 진평왕의 장녀) ․ 재위기간 : 654년 3월 ~ 661년 6월. 총 7년 3개월
․ 부인 : 3명
․ 자녀 : 9남 4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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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량궁주 - 고타소 (1녀)
문명부인 - 법민(제30대 문무왕), 인문, 문왕, 노차,
지경, 개원, 지소 (6남 1녀)
보희부인 김씨 - 개지문, 차득령, 마득,
공주, 공주 (3남 2녀)
태종무열왕의 이름은 춘추이고, 진지왕의 장남 김용수의 아들이며, 진평왕의 장녀 천명공주 소생이다. 603년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제세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전해진다. 24세 되던 626년에 화랑도의 풍월주에 올랐으며, 이후 이찬의 벼슬에 올라 진평, 선덕, 진덕여왕 대의 정치 및 외교 문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왕위계승자로서 상대등 알천을 천거하였으나,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하고 그 대신 제세의 영걸로서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왕위에 올랐는데, 당시 나이가 52세였다. 그의 즉위에는 오래전부터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하여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의 정치적 ․ 군사적 결합을 이루게 된다.
즉 진지왕계인 김용춘 ․ 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으며, 금관 군주 김구해계인 김서현 ․ 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호이익에 입각한 두 세력의 정치적 결탁으로 이어지게 된다.
김춘추가 활동하던 당시는 삼국 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던 때였다. 신라는 642년 백제의 장군 윤총이 이끄는 백제군에게 대야성(경상남도 합천)을 빼앗겼고, 이때, 김춘추의 사위 품석과 딸을 잃었다. 이에 김춘추는 고구려와 함께 힘을 합쳐 백제를 공격하고자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을 만났다. 그러나 오히려 국경 문제로 붙잡혀 갇혀 있다가 고구려의 대신 선도혜의 도움을 받아 겨우 탈출하였다. 647년에 귀족회의와 최고의장인 비담이 여왕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김유신과 함께 이를 진입하여 큰 공을 세웠다. 비담의 난을 진압하던 중 선덕여왕이 승하하자 진덕여왕을 추천하여 여왕으로 내세웠다. 김춘추는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는데, 649년 당나라에 건너가 백제 정벌을 위한 군대를 요청하여 당태종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약속받았다. 또 당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신라에 도입하게 하여 발전시켰다. 친당외교와 내정개혁을 통하여 신장된 김춘추 ․ 김유신으로 구성된 신귀족 세력의 힘을 기반으로 하여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화백회의에서 섭정으로 추대되었다.
무열왕은 즉위하던 해에 우선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로 추증하여 왕권의 전통성을 확립하고, 이방부격 60여조를 개정하는 등의 율령정치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655년에 원자인 법민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아들 문왕을 이찬으로, 노차를 해찬으로, 인태를 각찬으로, 그리고 지경과 개원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656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김인문을 군주에, 658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문왕을 집사부 중시에 새로이 임명하여 직계친족에 의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의 즉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던 김유신에 대해서는 660년에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왕권을 보다 전제화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태종무열왕이 즉위하기 이전인 중고시대의 상대등은 귀족회의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이거나 왕위계승 경쟁자로서의 자격이 있었던 것에 대하여,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이후에 왕의 측근세력인 김유신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상대등이 귀족세력의 대표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전제왕권과 밀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대등 중심의 귀족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으며 신라 중대 사회에서는 전제왕권의 방파제 구실을 하는 행정책임자인 집사부 중시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친당외교를 통하여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고 내정에서는 측근세력의 정치적 포석을 통하여 왕권을 안정시킨 다음 고구려 ․ 백제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였다. 655년에 고구려가 백제 ․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 북경지방의 33성을 공취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고, 이에 당나라의 정명진과 소정방의 군사가 고구려를 공격하자, 고구려와 백제는 물러났다. 당은 658년에 설인귀와 정명진을 보내 고구려를 재차 공격했으며, 659년에도 다시 공격에 나섰다. 659년에는 백제가 자주 신라의 변경지방을 침범하므로 당나라의 군사를 청하여 당 고종의 본격적인 백제정벌을 추진에 합류하였다. 3월에 소정방을 비롯한 수륙 13만명이 백제를 공격하여 5월에 왕은 태자 범민과 유신, 진주, 천촌 등과 더불어 친히 정병 5만명을 이끌고 당 군의 백제공격을 지원하였다. 7월에는 김유신의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군이 크게 패하고 계백도 전사했다. 계백이 무너지자, 백제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7월 12일에 당 군과 연합하여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켰고, 이어서 웅진성으로 피난하였던 의자왕과 왕자 부여융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는 신라의 숙원이던 백제를 병합함으로써 반도통일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사비성 함락 이후 9월에 당나라는 유인원의 1만명과 김인태의 7,000명의 군대로 하여금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0월에 태종무열왕은 친히 백제지역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례성(지금의 논산) 등 20여성의 항복을 받고 11월에는 백제로부터 귀환하여 백제정벌에서 전사한 자들과 전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그리고 항복해 온 백제의 관료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신라의 관등을 주어 관직에 보임하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는 동안 고구려는 660년에 신라의 칠중성(지금의 적성)을 공격해왔고, 661년에는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군과 연합하여 술천성(지금의 여주)을 공격하고 다시 북한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성주인 대사 동타천이 효과적으로 방어하였으므로 대나마로 관등을 높여 주었다. 이 해에 압독주를 대야(지금의 합천)로 다시 옮기고 아찬종정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정복된 백제지역의 관리에 적극성을 보였다.
태종무열왕은 재위기간 동안 신라의 왕권을 강화했다. 또 당나라의 율령제도를 본떠 신라의 법제를 바로잡고, 군대를 정비하는 등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무열왕의 닦아 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문무왕 때 신라는 결국 삼국을 통일하고, 이후 120년 동안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무열왕은 백제 병합에 성공했으나, 백제의 잔병을 완전히 궤멸시키지 못한 때인 661년, 재위한지 8년 만에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시호는 무열이며, 묘호는 태종이다. 영경사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제30대 문무왕
|―――――――― ▷ 제30대 문무왕
문명왕후 김씨 ․ 김씨, 법민, 생년미상 ~ 681년
․ 재위기간 : 661년 6월 ~ 681년 7월. 총 20년 1개월
․ 부인 : 3명
․ 자녀 : 3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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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왕후 - 소명태자, 정명(31대 신문왕), (2남)
신광부인
야명부인 - 인명 (1남)
문무왕은 무열왕의 장남이며,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부인 소생으로 이름은 법민이다. 태종무열왕 원년인 654년에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에 임명되었다가 곧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는 태자 시절에 통일 전쟁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650년 진덕여왕 때 왕명으로 아버지 김춘추와 함께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외교 활동을 벌여 당 고종에게 대부경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특히 660년의 백제 정벌 전쟁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태종무열와과 당나라의 소정방이 연합하여 백제를 정벌할 때 법민도 이 전쟁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661년에 태종무열왕이 미처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법민이 왕위를 계승하여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즉위하던 해, 옹산성(지금의 대덕군 회덕면)과 우술성에 응거하던 백제잔적을 공파하여 항복을 받고 그곳에 웅현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663년에 백제의 거열성(지금의 거창), 거물성, 사평성, 덕안성의 백제잔적을 정벌하였다.
이 때 각지에서 일어난 백제부흥군은 백제의 옛 장군의 복신과 승려인 도침이 이끌었는데, 이들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지금의 한산, 또는 부안)에 근거를 두고 웅진성을 공격하여 신라와 당나라의 주둔군을 괴롭혔다. 이에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과 함께 당나라에서 파견되어 온 손인사의 증원병과 연합하여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함락하였다. 이어서 지수신이 끝까지 항거하던 임존성(지금의 대흥)을 정복하여 백제부흥운동을 종식시켰다. 664년에는 백제 왕자였으며 당나라의 지원을 받던 웅진도독 부여융과 화맹을 맺었다.
문무왕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계속 고구려 정벌에 나섰는데 즉위하던 해 당의 소정방과 김유신을 비롯한 김인문, 진주 등의 장군을 이끌고 고구려 공격에 임했다. 대동강을 통하여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던 소정방이 이끌던 당군이 연개소문의 굳센 항전으로 고전하자 결국 당군은 본국으로 물러가고 말았다. 문무왕은 666년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여 한림과 삼광을 당나라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고 667년 이세적이 이끈 당군과 연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668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군이 신성(지금의 봉천), 부여성 등 만주의 여러 성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자 문무왕도 6월 김유신, 김인문, 김흠순 등이 이끄는 신라군을 당영에 파견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여 9월 보장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문무왕은 고구려 멸망에 공을 세운 여러 장사에게 논공행상을 하고 11월 백제와 고구려의 평정을 선조묘에 고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점령지의 지배를 위하여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중심으로 9도독부, 42주, 100현을 두고 통치하였다. 이에 대형인 검모잠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는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을 왕으로 맞이하여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으나, 70년 안승이 검모잠을 죽인 다음 4천호를 이끌고 신라로 망명하였다. 문무왕은 그를 금마저(지금의 익산)에 머무르게 하고 고구려왕(뒤의 보덕왕)에 봉하였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삼국 전체를 자기의 영토로 삼으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에 신라는 강력하게 반발하였으며,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로써 나 ․ 당전쟁이 시작된다. 옛 백제 땅은 당의 웅진도독부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곳을 지배하던 웅진 도독 부여융에게 화친을 청했으며, 문무왕은 670년 품일, 문충 등이 이끄는 신라군으로 하여금 63성을 공취하여 그곳의 인민을 신라의 내지로 옮기고, 천존 등은 7성을, 군관 등은 12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671년 죽지 등이 가림성(지금의 임천)을 거쳐 석성(지금의 임천 동쪽)전투에서 당군 3천 5백 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당나라의 행군총관 설인귀가 신라를 나무라는 글을 보내오자 문무왕은 이에 대하여 신라의 행동이 정당함을 주장하는 글을 보냈다. 그리고 사비성(지금의 부여)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아찬 진왕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백제 고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 해 바다에서는 당나라의 운송선 70여척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에서도 신라와 당나라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특히, 신라가 백제의 고지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 침략해온 당군과 전투가 가장 치열하였다. 문무왕 672년 당이 대군을 이끌고 오자, 한강으로부터 대동강에 이르는 각지에서 당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신라의 당나라에 대한 항쟁은 675년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 해에 설인귀는 당나라에 숙위하고 있던 풍훈을 안내자로 삼아 쳐들어왔으나 신라장군 문훈은 이를 격파하여 1천 4백명을 죽이고 병선 40척, 전마 1천 필을 얻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이근행이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오므로 신라군은 매초성(지금의 양주)에서 크게 격파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이 매초성의 승리는 북쪽 육로를 통한 당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 676년 해로로 계속 남하하던 설인귀의 군대를 사찬 시득이 지벌포에서 격파함으로써 신라는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나라는 결국 676년 안동도호부를 평양으로부터 요동성(지금의 요양)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의 영토를 지배권만을 장악하면서 한반도를 통일하게 되는데, 과거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까지 통일시키지 못하고 이 북방 경계선에 머물게 되면서, 영토상의 한계점을 드러내게 된다.
문무왕은 이와 같이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도 국가체제의 정비를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증가한 중안관부의 업무와 확장된 영역의 통치를 위한 노력의 일부였는데 우선,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 잡찬 문왕을 비롯한 문훈, 진복, 지경, 예원, 천광, 춘장, 천존 등 8명의 인물이 행정책임자로서 집사부 중시를 역임하였다. 문무왕은 이 중에서 특히 문왕, 지경, 예원과 같은 자신의 형제들을 중시에 임명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통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무왕은 671년과 672년에 걸쳐 병부, 창부, 예부, 사정부와 같은 중앙관부의 말단행정 담당자인 사의 인원수를 증가시켜 업무처리를 원활하게 하였다.
지방통치를 위해서 673년 진흥왕대에 이미 소경을 설치한 중원에 성을 축조하였으며, 통일한 후인 678년 북원소경을, 680년 금관소경을 두어 왕경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고 신문왕대에 완성되는 5소경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삼국통일 후의 신라 군사조직인 신라민과 피정복민으로 구성된 중앙의 9서당과 지방의 9주에 설치된 10정이었다. 여기에서 9서당은 대체로 신문왕대에 완성되는 것이지만 9서당 중에서 백금서당은 문무왕이 백제지역을 온전히 점령한 다음해인 672년에 백제민을 중심으로 조직한 것이다.
또, 같은 해 장창당을 두었는데, 이것이 693년에 비금서당이 되는 것으로 보아, 신문왕대에 이뤄지는 9서당 편제의 전초작업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 문무왕 672년 기병을 위주로 하는 지방군제의 하나인 5주서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문무왕의 체제정비작업은 675년 백사와 주군의 동인을 제작, 반포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시호는 문무이며, 장지는 경상북도 경주군 감포 앞바다에 있는 해중왕릉인 대왕암(문무대왕릉)이다. 그의 능이 바다에 조성된 것은 그의 뜻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스스로 용이 되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제31대 신문왕
|―――――――― ▷ 제31대 신문왕
자의왕후 ․ 김씨, 정명, 생년미상 ~ 692년
․ 재위기간 : 681년 7월 ~ 692년 7월. 총 11년
․ 부인 : 2명
․ 자녀 : 4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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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김씨
신목왕후 김씨 - 이흥(32대 효소왕)
흥광(33대 성덕왕)
근질, 사종 (4남)
신문왕은 문무와의 둘째 아들이며, 자의부인 소생이다. 이름은 정명이며 문무왕 5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681년 7월에 문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김씨인데 소판 흠돌의 딸이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 비로 맞아들였으나 오래되어도 아들이 없었으며, 나중에 그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왕궁에서 쫓겨났다. 683녀에 다시 일길찬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신문왕대는 태종무열왕 대부터 시작된 신라의 중대왕실의 전제왕권이 확고하게 자리 잡힌 시기이다. 왕이 즉위하던 해에 왕의 장인인 김흠돌을 비롯한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하였다. 김흠돌의 반란은 왕권전제화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이 사건에는 많은 귀족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신문왕은 주동자뿐만 아니라 말단 가담자까지도 철저한 숙청을 가하였다(이때 화랑도의 낭도들이 대거 가담한 죄를 물어 화랑도를 폐지하고, 그 낭도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모두 병부에 예속시켰다. 당시 화랑도의 풍월주 자리를 흠돌의 조카 신공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흠돌의 반란에 화랑도의 남동들이 대거 가담했던 것이다). 신문왕은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려는 의도에서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전제왕권의 확립을 꾀하였다.
같은 해에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인재의 교육과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국학을 설립하고 여기에 경 1인을 두었다. 이것은 진덕여왕 대에 이미 국학에 소속된 대사라는 관직을 설치했던 것을 신문왕대에 와서 완성한 것이다. 한편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685년에는 봉성사와 망덕사를 준공하기도 하였다.
신문왕대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증대한 중앙관서의 업무와 확대된 영역의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정비도 이루어졌다. 우선 중앙관부에서는 682년에 위화부령 2인을 두어 인재등용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공장부감과 채전감 각각 1인을 두었으며 686년에는 예작부경 2인을 두었다. 그리고 687년에는 음성서장을 경으로 올리고 688년에는 선부경 1인을 더 두어 늘어난 중앙관부의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특히 685년에는 각 관부에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사지가 설치됨으로써 문무왕대에 설치된 말단행정 담당자인 사와 아울러 영, 경, 대사, 사지 사의 5단계 관직제도가 완성되었다.
지방의 통치제도에 있어서는 689년에 왕경의 지리적 한계를 문제 삼아 지금의 대구인 달구벌로 옮기려 하였으나 서라벌에 터전을 둔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왕경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미 685년에 서원소경(지금의 청주)과 남원소경(지금의 남원)을 설치하고 진흥왕대에 설치된 국원소경을 중원소경(지금의 충주)으로 고침으로써 5소경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설치하여온 군정적 성격이 강한 주도 685년에 완산주(지금의 전주)와 청주(지금의 진주)를 설치함으로써 삼국통일 후의 확대된 영역의 효과적 지배를 위한 9주제를 비로소 완성하였는데(9주 5소경제 완성). 686년과 687년에는 여기에 따른 주 ․ 군 ․ 현의 정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중앙의 군사조직에 있어서는 신라인을 중심으로 고구려 ․ 백제 ․ 보덕국 및 말갈인을 편입시켜 9서당을 완성하였다. 내외의 관제정비와 짝하여 689년에는 관리의 늑봉으로 지급하던 녹읍을 폐지하고 해마다 세조를 차등 있게 지급하여 관리의 기존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전제왕권의 강화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와 같은 중앙과 지방에 걸친 제도의 체계적 정비를 통하여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통치 질서를 완비한 신문왕은 중국제후의 5묘제를 본 떠, 687년에 중대왕실의 정통성을 수립하는 5묘제를 확립하였다. 이 밖에도 일본과 당나라에 사신이 빈번하게 내왕하였고 문화가 발전되고, 설총과 강수와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는 등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능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낭산의 동남에 있다.
제32대 효소왕
|―――――――― ▷ 제32대 효소왕
신목왕후 김씨 ․ 김씨, 이홍 또는 이공, 생년미상 702년
․ 재위기간 : 692년 7월 ~ 702년 7월. 총 10년
․ 부인 : 기록 없음
․ 자녀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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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기록 없음)
효소왕은 신문왕의 장남이며, 신목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이홍 또는 이공이다. 신문왕11년(691년)에 태자에 책봉되어, 이듬해인 692년 7월 신문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의 태자 책봉 시기가 691년인 것을 고려할 때, 효소왕은 10대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판단된다. 신문왕 대에 잡아놓은 기반으로 효소왕 시대의 정치와 사회는 안정된 편이었다. 하지만 왕이 어린 탓에 정사는 신문왕 대의 공신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692년에 즉위하여서는 좌우이방부의 ‘이(理)’자가 왕의 이름과 같으므로 피휘하여 좌우의방부로 관부의 명칭을 고치기도 하였다. 즉위하던 해 8월에 대아찬 원선을 집사부 중시에 임명하여 국정을 위임하였다(중시는 진덕여왕 대인 651년에 처음 실시되어 무열왕과 문무왕을 거치면서 입지가 강화되었고, 신문왕 대엔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대두되었다. 따라서 효소왕 대에 이르면 상대등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로 전략하고, 중시가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행정부를 대표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는 이후로 경덕왕 대에 시중으로 호칭이 바뀌는데, 신라 후반기에 이르면 왕권을 제약하거나 때론 능가하는 존재로 변신하게 된다).
같은 해에는 고승 도중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천문도를 왕에게 바쳤다. 천문도는 고구려에 전래된 진탁의 성도와 같은 것으로서 왕실권위의 상징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을 설립하여 의학박사를 두고 『본초경』『침경』『맥경』등의 중국 의학서를 교수하게 되었다.
재위 4년(695년)에 서시전과 남시전을 두었는데 이것은 지증왕 대에 설치된 동시전과 더불어 왕경의 3대 시전으로서, 서라벌 도성 안의 내시까지 합쳐 큰 시장이 넷이나 형성되어 물화의 유통을 쉽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해에 자월(음력 11월)을 정월로 정하였다가 700여년에 다시 인월(음력 1월)을 정월로 바꾸었다. 698년 3월 기사에는 “일본국 사신이 왓으므로 왕이 숭례전에서 그를 만났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써 이즈음에는 신라에서도 왜의 공식 국호를 ‘일본’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왜는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자국의 공식 명칭을 ‘일본’으로 개칭했다고 통보해왔는데, 신라에서도 그 점을 인정하여 그들을 왜라고 부르지 않고 일본으로 부르게 된다. 69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함으로써 양국과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유지하였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잇던 신문왕 대의 공신들의 힘이 왕권을 능가하는 지경에 이르자, 효소왕은 왕권을 되찾기 위해 공신들과 대결을 벌인다. 700년에 이찬 경영의 반란이 있었으며 이 사건에 연좌되어 698년에 중시로 임명되었던 순원이 파면되었다. 이듬해엔 영암군 태수로 있던 일길찬 제일을 사익을 탐한 죄를 물어 장형에 처하고 귀양 보내 버렸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공신 세력을 단결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것은 효소왕의 몰락으로 귀결되었다. 효소왕은 경영의 모반 사건이 발생한지 2년 만인 702년 7월에 죽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20대 초반이었다. 그가 젊은 나이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죽었다는 것은 권신들에 의해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
702년 7월에 죽어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 자식은 한 명도 두지 못한 것으로 전한다. 또한 부인에 대한 언급도 없다. 이는 그가 권신들에 의해 제거될 때, 부인과 자식 또한 함께 살해되었기 때문에 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능은 경주 낭산 동남쪽에 있다.
제33대 성덕왕
|―――――――― ▷ 제33대 성덕왕
신목왕후 김씨 ․ 김씨, 초명은 융기, 개명은 흥광, 생년미상 ~ 737년
․ 재위기간 : 702년 7월 ~ 737년 2월. 총 34년 7개월
․ 부인 : 2명
․ 자녀 : 4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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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왕후 김씨 - 중경, 수충 (2남)
소덕왕후 김씨 - 승경 (제34대 효성왕)
헌영 (제35대 경덕왕), 사소부인 (2남 1녀)
성덕왕은 신문왕의 차남이며, 신목왕후 소생으로 효소왕의 동복아우이다. 본명은 융기였으나, 당나라 현종의 이름과 같았던 탓에 재위 11년 3월에 당의 칙명에 의해 흥광으로 고쳤다. 효소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702년 7월에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의 정치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사회전반에 걸쳐서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다. 우선 정치적으로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는 집사부의 중시가 일체의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됨에 따라 전제왕권은 보다 강화될 수 있었다.
이찬 원훈이 성덕왕이 즉위하던 702년에 중시에 임명된 이래로 원문, 신정, 김문량, 김위문, 효정, 김사공, 문림, 선종, 윤충 등 10명의 인물이 성덕왕대에 중시로서 활동하였다. 재위 3년인 704년에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여 왕실의 기강을 다잡았고, 711년에는 왕이 백관잠을 지어 군신에게 제시하였다. 백관잠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전제왕권 하에서 신하가 지켜야 할 계명을 적은 것으로서 유교적인 충군사상이 주요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덕왕대에는 이찬 개원을 비롯하여 인품, 배부, 사공 등 4명이 상대등으로 재직하였으나 정치적으로 힘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귀족회의의 대표자였던 상대등의 활동이 위축된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국방시책으로는 721년에 하슬라도(지금의 강릉)의 정부 2,000명을 징발하여 북경지방에 장성을 축조하는가 하면, 재위 21년(722년)에는 모벌군성(지금의 경주시 외동면)을 축조하여 일본의 침입로를 차단하기도 하였다. 731년에 일본의 병선 300척이 동해변을 습격하자 이를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733년에 발해가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당 현종은 신라에서 발해의 남부 지역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고, 성덕왕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도중에 폭설을 만나 길이 막히고, 많은 동사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 덕분에 당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고, 그 결과 734년에는 당나라와의 외교적 현안이었던 국경문제를 패강(지금의 대동강)으로 확정지었다. 이로써, 신라의 영토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지역으로 결정되었다. 성덕왕은 이 지역의 민심수습과 북방경영을 위하여 이찬 윤충, 사인, 영술 등을 파견하여 평양주와 우두주(지금의 춘천)의 지세를 조사하게 되었다.
성덕왕은 국내의 정치안정을 기반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추진하였다. 703년에 일본국의 사신을 접견하는 둥 일본과의 관계를 계속적으로 유지해 나갔으며, 당과의 관계도 더욱 밀착되어 갔다. 하지만, 새로 일어난 발해와는 당과의 관계 때문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703년에 아찬 감사양이 당나라에 조공한 이래 36년 동안 당에 파견된 신라의 사절횟수는 43회로서 신라 중대왕실의 다른 어느 왕 때보다도 많았으며 사절의 내용은 주로 조공과 숙위, 그리고 하정이었다. 이러한 당과의 빈번한 외교적 교섭은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확고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물의 수입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704년에 입당사 김사양이 귀국하여 최승왕경을 바쳤고, 717년에는 숙위 김수충이 귀국하여 문선왕과 10철 및 72제자의 화상을 바치므로 국학에 봉안하였다. 이는 전제왕권 안정에 필요한 정치이념으로서의 유교의 적극적 수용의지를 반영한 것이며, 728년 에는 왕제인 김사종을 당나라에 파견하면서 신라 귀족자제들의 당나라 국학의 입학을 요청하였다. 717년에 의학박사와 산박사를 각각 1인씩 두었고, 718년에는 누각을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기술관계의 관직설치와 시설은 모두 유교적 이상정치인 위민 및 농본정책의 시행을 위한 바탕이 되었다. 705년과 706년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 받자, 관리를 파견하고, 창고의 곡식을 나눠주어 구제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오곡의 종자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722년에는 모든 백성들에게 비로소 정전을 지급하였는데, 정전은 정을 기준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지급한 토지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실제적으로 백성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자영농민이 본래 소유하고 있던 토지에 대한 국가적 인정을 뜻하는 것으로서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 국가는 농민으로부터 많은 세를 거두어들일 수 있었고 재정적 기반을 견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성덕왕은 재위 36년째인 737년에 죽었다. 시호는 성덕이며, 이거사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왕릉은 현재 경주시 조양동에 있다.
제34대 효성왕
|―――――――― ▷ 제 34대 효성왕
소덕왕후 김씨 ․ 김씨, 승경, 생년미상 ~ 742년
․ 재위기간 : 737년 2월 ~ 742년 5월. 총 5년 3개월
․ 부인 : 3명
․ 자녀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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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박씨
혜명왕후 김씨
후비(영종의 딸)
효성왕은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고, 소덕왕후 소생이며 이름은 승경이다. 성덕왕 23년 724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737년 2월에 성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효성왕은 즉위하면서 사정부의 승과 좌우의방부의 승을 모두 좌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승’자가 왕의 이름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즉위하던 해(737년) 3월에 아찬 정종을 상대등에 임명하여 귀족회의를 관장하게 하고 아찬 의충을 집사부의 중시에 임명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739년 의충이 죽자 이찬 신충을 중시에 임명하고, 왕제인 헌영(뒤의 경덕왕)의 관등을 파진찬으로 하여 태자로 삼았다. 또, 전 왕인 성덕왕 때에 정상화된 당나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외교적 통로를 이용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특히 738년에 당나라 사신 형숙이 신라에 올 때 당나라 현종이 그에게 ‘신라는 군자의 나라’라고 일러준 것을 보아도 당시 신라의 문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때 형숙은 노자의 『도덕경』을 비롯한 서책을 왕에게 바쳤는데, 여기서 신라의 선진문물에 대한 수용 자세를 엿볼 수 있다.
740년에는 파진찬 영종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되었다. 반란의 원인은 영종의 딸이 효성왕의 후궁이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왕비가 이를 시기하여 그의 족당과 더불어 후궁을 모살하였다. 이에 영종이 왕비의 족당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보면 단순한 여인들의 투기가 정치적 반란을 유발한 것 같으나 실제는 성덕왕대에 전성을 구가하던 중대 왕실의 전제왕권이 점차 약화되면서부터 그간에 축적되었던 정치적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귀족세력이 왕권의 약화를 틈타 다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741년에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정종과 경덕왕 대에 상대등으로 활동하는 사인이 왕을 대신하여 열병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재위 6년째 되던 742년 5월에 죽으매 시호를 효성이라 하였는데, 유명에 따라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뿌려진 까닭에 능은 조성되지 않았다.
제35대 경덕왕
|―――――――― ▷ 제35대 경덕왕
소덕왕후 김씨 ․ 김씨, 헌영, 생년미상 ~ 765년
․ 재위기간 : 742년 5월 ~ 765년 6월. 총 23년 1개월
․ 부인 : 3명
․ 자녀 : 1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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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모부인
경수왕후 - 건운(제36대 혜공왕)
제3비(이찬 순정의 딸)
경덕왕은 성덕왕의 넷째 아들이며, 소덕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헌영이다. 효성왕의 동복아우인 그는 파진찬 벼슬에 있다가 효성왕 재위 3년인 739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742년 5월에 효성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경덕왕 때에 이르러 새로운 귀족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경덕왕과 행정 책임자였던 중시는 왕권강화를 위해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를 실시했다.
744년에 이찬 유정이 중시에 임명된 이후, 대정, 조량, 김기, 염상, 김옹, 김양상 등 7인이 경덕왕 때에 중시를 지냈다. 경덕왕은 즉위 초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관제를 정비하고, 과감한 제도 개혁을 실시했다. 747년에 중시의 명칭을 시중으로 바꾸었으며, 748년에는 정찰 한 명을 임명하고 백관을 규찰하도록 했다. 이는 성덕왕 대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던 전제왕권 체제를 가속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747년에 국학에 제업박사와 조교들을 두었고, 749년에는 천문박사 한 명과 누각박사 여섯 명을 두었다. 이런 전문 식견을 갖춘 학자 관료들을 육성하여 성덕왕 이래 추진되던 유교정치 구현의 토대를 형성한 것이다. 경덕왕은 근본적으로 유학 사상에 입각한 전제왕권 정치를 꿈꾸고 있었고, 중국의 한, 당의 정치를 그 모델로 삼고 있었다(중국의 것을 모방하는 정책).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제도적 장치는 당나라 태종이 그랬듯이 왕권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에 한화정책은 귀족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는 756년 상대등 김사인은 상소에서, 최근의 빈번한 천재지변을 들어 현실정치의 모순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시중에 대해서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 이때의 비판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경덕왕이 추진한 한화적 개혁정치가 비판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비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757년부터 김기가 적극적으로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전국 주의 이름을 대대적으로 바꾸고, 그 휘하의 현과 군을 대폭 정비하였다.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1주 10군 10현을 예속시켰고, 상량주를 양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2군 34현을 예속시켰으며, 청주를 강주로 고치고 1주 11군 27현을 예속시켰다. 또 한산주를 한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27군 46현을, 수약주를 삭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1군 27현을,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3현 29현을 예속시켰다. 하서주는 명주로 고치고 1주 9군 26현을 예속시켰으며, 완산주를 전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0군 31현을, 무진주를 무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4군 44현을 예속시켰다. 전국 9주의 이름을 모두 바꾸거나 간소화하고, 소속된 소경과 군현을 명시했다. 이로써 통일 이래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행정 구역을 확실하게 규정하였다.
758년 2월에는 내외의 관원을 막론하고 만 60일 이상 휴가를 얻은 자는 해직으로 간주하라는 교시를 내려 관료들의 기강을 다잡았다. 4월에는 의술을 깊이 연구한 사람들을 관료로 등용해 내공봉에 근무하게 하는 조치를 내렸다. 또 율령박사 두 명을 임명했는데, 이는 유학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법치주의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 759년에는 지방 행정 조직 정비에 이어 중앙 관명을 중국식으로 개정함으로써 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병부와 창부의 경과 감을 시랑으로, 대사를 낭중으로, 집사부의 사지를 집사원외랑으로, 집사사를 집사랑으로 개칭하였다. 각 부서의 대사는 모두 주부나 주서로 개칭하고, 예부의 사지를 사례로, 조부의 사지를 사고로, 영객부의 사지를 개칭하고, 승부의 사지를 사목으로, 선부의 사지를 사주로, 예작부의 사지를 사례로, 병부의 노사지를 사병으로, 창부의 조사지를 사창으로 개칭했다. 이러한 경덕왕과 집사부가 추진한 한화적 개혁정치는 혜공왕 대에 가서 귀족세력이 다시 왕권을 압박해 오면서 모두 옛 명칭으로 환원되고 만다.
경덕왕은 당나라왕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전통적 방법인 조공과 하정의 사신을 11회나 당나라에 파견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하여 일본과는 거의 국교 단절 상태가 되고 말았다.
757년에 내외관리의 월봉을 혁파하고 다시 녹읍을 부활시켰다. 이것은 새로이 성장하는 귀족세력의 경제적인 욕구가 지금까지 세조만 받던 월봉을 혁파하게 하고, 녹읍의 부활을 제도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그해 8월에 조부에 사를 두 명 더 두어서 세수 업무를 한층 강화시켰다. 경덕왕 말기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귀족세력은 763년에 경덕왕의 측근세력이었던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을 면직시켰다. 왕당파인 이들의 면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상에 나타나지 않으나, 왕권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의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은 김옹이 물러난 뒤 약 4개월의 공백기를 거쳐, 764년 만종과 양상이 각각 상대등과 시중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양상은 나중에 상대등으로서 혜공왕을 사해하고 신라 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인물로서, 경덕왕 때에 이미 귀족세력을 대표하고 전제왕권에 도전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경덕왕 말년의 정치는 왕권과 귀족세력의 정치적 타협 위에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덕왕은 재위 24년 만인 765 6월에 생을 마감했다. 능은 처음에 경지사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으나, 후에 성덕왕의 능이 있는 양장곡으로 옮겨졌다.
제36대 혜공왕
|―――――――― ▷ 제36대 혜공왕
경순왕후 ․ 김씨, 건운, 758~780년
․ 재위기간 : 765년 6월 ~ 780년 4월. 총 14년 10개월
․ 부인 : 2명
․ 자녀 : 기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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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왕후
창장부인
혜공왕은 경덕왕의 장남이며, 경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건운이다. 758년에 태어났으며, 세 살 때인 760년에 태자 책봉되었고, 765년 경덕왕이 죽자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혜공왕은 태종무열왕의 직계손으로 계승된 신라 중대왕실의 마지막 왕이다. 즉위 했던 때의 나이가 8세였으므로 무후 경수태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혜공왕 대에는 집사부 중시를 중심으로 강력한 전제왕권 체제를 구축했던 신라 중대 사회의 모순이 본격적으로 노정되었다. 즉 전제왕권의 견제 하에 있던 귀족세력들이 정치일선에 등장하여 정권쟁탈전을 전개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였다. 따라서, 혜공왕의 재위 16년 동안에는 많은 정치적 반란사건이 있었다. 먼저 일길찬 대공과 그의 동생 아찬 대렴이 768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의 측근인물인 이찬 김은거를 비롯한 왕군에 의해서 토멸되었다. 이 반란은 경덕왕에 이어서 중대의 전제왕권 체제를 유지하려는 혜공왕 초년의 정치적 성격을 부인하려는 최초의 정치적 움직임이었다. 김은거는 이 반란의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해에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이찬 신유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769년에 왕은 임해전에서 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인재를 천건하게 하여 새로운 인재들을 모아 전제왕권 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770년에는 대아찬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도 대공의 반란과 마찬가지로 반 혜공왕적 성격의 것이었다. 김융의 난으로 김은거가 시중에서 물러나고 이찬 정문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혜공왕대의 정치적 사건 중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774년 감양상이 상대등에 임명된 사실이다. 즉, 김양상은 경덕왕 대에 시중을 역임하였으나 778년에 있었던 대공의 난에 연루되어 시중직에서 물러나고 왕의 측근인 김은거에게 시중직을 물려주었다. 이로써 보면 김양상은 적어도 친 혜공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김양상이 다시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반 혜공왕적인 귀족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전제왕권 중심의 중대 사회에서 귀족중심의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775년에는 김은거 및 이찬 염상과 정문의 모반이 두 차례에 걸쳐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전제왕권 유지를 지지하는 세력으로서 귀족세력인 김양상의 대두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됨으로써 김양상 중심의 정치세력은 더욱 공고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혜공왕일파는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상실하고 명목상의 왕위만을 보전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어지러운 내정을 타개해보고자, 혜공왕은 재위 16년 동안 11회의 조공, 하정 그리고 사은의 사절을 중국 당나라에 파견하여 외교정책을 펼쳤으나 혜공왕일파의 외교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777년 상대등 감양상의 상소에 의하여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상소를 통한 김양상의 혜공왕일파에 대한 정치적 경고는 친 혜공왕파를 자극하게 되어 780년에 김양상일파를 제거하려는 이찬 김지정의 반란이 있었으나 오히려 김양상과 이찬 경신에 의하여 진압되고 말았다. 이 반란의 와중에서 혜공왕과 왕비는 살해되었다. 그리고 경신의 추대에 의하여 김양상 자신이 제37대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혜공왕의 나이는 스물셋이었다.
제37대 선덕왕
개성대왕 김효방(내물왕의 9대손)
|―――――――― ▷ 제37대 선덕왕
사소부인 김씨 ․ 김씨, 양상, 생년미상 ~ 785년
(성덕왕의 딸) .․ 재위기간 : 780년 4월 ~ 785년 정월. 총 4년 9개월
․ 부인 : 1명
․ 자녀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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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족왕후
선덕왕은 내물왕의 10대손으로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양상이다. 아버지는 개성대왕 효방이고,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 사소부인 정의태후이다. 선덕왕은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왕위를 승계할 신분은 아니었다. 764년 정월에 이찬인 만종이 상대등에, 아찬인 양상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의 시중 임명은 전제왕권을 재강화하려던 경덕왕의 한화정책이 귀족의 반발로 실패하고 왕당파인 상대등 신충이 물러난 4개월 뒤에 이루어진 점으로 보아, 그의 정치적 성격은 경덕왕의 왕권전제화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양상의 활동은 혜공왕 대에 접어들어 두드러졌다. 771년에 완성된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에 의하면 그는 대각간 김옹과 함께 검교사숙정대령겸 수성부령검교 감은사사각간으로서 종 제작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감찰기관인 숙정대의 장관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위치를 엿볼 수 있다. 그는 혜공왕 10년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혜공왕 재위 12년에는 한화된 관제의 복고작업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동왕 13년에는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전제주의적인 왕권의 복구를 꾀하는 일련의 움직임을 견제하였다.
혜공왕 16년 2월에 왕당파이었던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자, 상대등이었던 양상은 4월에 김경신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지정을 죽이고 혜공왕과 왕비를 죽인 뒤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즉위는 무열왕계인 김주원을 경계하고 그들의 반발을 억제하려던 김경신의 강력한 뒷받침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784년에 왕위를 물려주려는 결심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병석에서 내린 조서에서도 항상 선양하기를 바랐다고 한 것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즉위년(780년)에는 750년에 어룡성에 둔 봉어를 경으로 고치고 다시 감으로 바꾸어 어룡성을 개편했으며, 781년에는 패강의 남쪽 주현을 안무하였고, 782년 한주(지금의 서울지역)에 순행하여 민호를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이듬해 1월에는 김체신을 대곡진 군주, 즉 패강진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개척 사업을 일단 완료하였다. 이러한 패강진의 개척은 왕실에 반발하는 귀족세력의 배제와 왕권을 옹호해 줄 배후세력의 양성하려는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재위 6년만에 죽으니,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하고 그 뼈를 동해에 뿌렸다.
제38대 원성왕
김효양(내물왕 11대손)
|―――――――― ▷ 제38대 원성왕
계오부인 박씨 ․ 김씨, 경신, 생년미상 ~ 798년
․ 재위기간 : 785년 정월 ~ 798년 12월. 총 12년 11개월
․ 부인 : 1명
․ 자녀 : 3남 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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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왕후 김씨 - 인겸(혜충 태자), 헌평태자, 예영, 대룡, 소룡
원성왕은 내물왕의 12대손으로 김효양과 계오부인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경신이다. 혜공왕 말기에 이찬 지정이 친위혁명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이 반혁명을 일으켜 지정과 싸웠다. 경신은 이때 양상을 도와 지정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덕분에 그는 김양상(선덕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 혜공왕 말기의 혼란을 평정한 공으로 상대등에 임명되고, 선덕왕이 죽자 태종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는 김주원과의 왕위계승다툼에 대한 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았던 김주원이 왕위에 추대되었는데, 김경신이 복두를 벗고 소립을 쓰고 12현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자, 여삼의 해몽을 듣고 비밀히 북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비가 와서 알천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였으므로 신하들이 경신을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훗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아, 단순한 설화가 아님을 짐작케 한다.
원성왕대는 하대권력구조의 특징을 이루는 왕실친족집단원에 의한 권력 장악의 전형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즉, 원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자신의 적자를 태자로 책봉하고 다른 왕자들, 준옹(뒤의 소성왕)뿐 아니라 그의 동생인 언승(뒤의 헌덕왕)도 정치의 중심부에서 활약하였는데, 이처럼 왕과 태자를 중심으로 근친왕족들이 상대등, 병부령, 재상 등의 요직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근친왕족들로 이루어진 왕위계승은 왕족들이 신라하대 왕들의 주류를 이루는 특징을 보여준다. 또, 786년에는 대사 무오가 병법 15권과 화령도 2권을 바쳤는가 하면, 왕 자신도 「신공사뇌가」를 지었는데, 그것은 인생 궁원의 변화에 대한 이치를 담은 것이라 한다. 이 책들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791년에 제공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하였다. 제공은 785년에 시중이 된 인물로 그가 일으킨 반란의 성격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같은 해에 인겸 태자가 죽으니 시호를 혜충이라 하였다. 그리고 제공의 반란이 진압되자 다시 혜충 태자의 아들 준옹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785년에 원성왕은 총관을 도독으로 바꾸었으며, 재위 4년(788년)에는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였다. 이 정책이 실시되기 전에는 궁술과 인물만 가지고 관리를 뽑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독서삼품과에서 관리를 뽑은 것은 과거제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개혁은 국학을 설치한 지 이미 1세기가 지난 당시 신라사회에 있어서 무예를 중심으로 한 종래의 관리등용법의 개혁이 요청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원성왕은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785년에 승관을 두어 정법전이라 하고, 795년에는 봉은사(혹은 보은사)를 창건하였으며 망덕루를 세웠다.
왕의 치적으로 790년 벽골제의 증축과 발해와의 통교를 들 수 있다. 이와 더불어 795년에 당나라의 사신이 하서국 사람 둘을 데리고 와 신라의 호국룡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잡아가려는 것을 막았다는 설화는 그가 상당한 독자외교를 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재위 14년인 798년 12월 29일에 죽으니, 유명으로 봉덕사 남쪽 토함악 서쪽동굴에 화장하였고, 능을 추복하기 위한 승복사가 세워졌다.
제39대 소성왕
제38대 원성왕
|―――――――― 혜충태자
숙정왕후 김씨 |――――――― ▷ 제39대 소성왕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준옹, 생년미상 ~ 800년
․ 재위기간 : 799년 정월 ~ 800년 6월. 총 1년 5개월
․ 부인 : 1명
․ 자녀 : 2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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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화왕후 김씨 - 청명(제40대 애장왕)
체명, 장화(제42대 흥덕왕의 왕비)
소성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준옹이다. 원성왕이 아들 인겸을 태자에 책봉했으나 791년에 사망하였고, 다시 아들 헌평을 태자에 책봉했으나 그 역시 794년에 사망했다. 두 아들이 죽고 셋째와 넷째 아들이 남아 있었으나, 원성왕은 장손인 준옹을 태자로 책봉했다. 준옹은 원래 태자의 아들로서 궁중에서 자랐고, 78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대아찬 직위를 받았으며, 790년에는 파진찬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791년에 전 시중 이찬 제공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제압하여 공을 세우고 시중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병으로 1년 6개월 만에 시중에서 물러났다가 792년에 병부령이 되고, 79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798년 12월 말에 원성왕이 죽자, 이듬해인 799년 정월에 왕위에 올랐다.
소성왕의 치적으로 즉위년 3월에 청주(지금의 진주)의 노거현을 국학생의 녹읍으로 설정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당시 국학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장학금 형태로 녹읍을 지급했다는 뜻이다. 799년(소성왕 1) 7월에는 “길이가 9척이나 되는 인삼을 발견하여 하도 신기하여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진상을 하였더니 덕종이 보고 인삼이 아니라며 받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왕위에 오르던 당시, 이미 지병을 앓고 있던 소성왕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재위 2년 만인 800년 6월에 생을 마감했다.
제40대 애장왕
제39대 소성왕
|――――――― ▷ 제40대 애장왕
계화왕후 김씨 ․ 김씨, 초명은 청명, 개명은 중희. 788년 ~ 809년
․ 재위기간 : 800년 6월 ~ 809년 7월. 총 9년 1개월
․ 부인 : 2명
․ 자녀 : 기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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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박씨
후궁김씨
애장왕은 소성왕의 장남이며, 계화부인 김씨 소생으로 초명은 청명이고, 왕위에 오른 뒤에 중희로 고쳤다. 788년에 태어났으며, 800년 6월에 소성왕이 죽음을 앞두고 태자로 책봉했다. 소성왕이 죽자,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즉위 초부터 작은아버지인 병부령 김언승(뒤의 헌덕왕)의 섭정을 받았다. 애장왕이 친정을 요구한 때는 재위 6년인 805년인데, 이때 애장왕의 나이는 18세였다. 친정을 시작한 애장왕은 우선 자신의 모후 김씨를 태왕후로, 부인 박씨를 왕후로 봉하여 자신의 위엄을 세웠다.
애장왕은 중앙과 지방제도에 대한 개혁조치의 일환으로 805년 공식 20여조를 반포하였으며, 808년 12도에 사신을 파견하여 모든 군, 읍의 경계를 정하였다. 공식 20여조를 반포하기 1년 전 동궁의 만수방을 새로 만들었으니, 이는 곧 태자의 위치를 굳건히 하여 왕권을 신속하게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와 같은 정책의 일환으로 805년 위화부의 금하신을 고쳐 영이라 하고, 예작부에 성 두 사람을 두는 등의 관제개혁 조치를 취한다. 애장왕은 다른 역대왕들과는 달리 불교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불교의 사치스런 행사를 막기 위해 교지를 내려 불교사원의 새로운 창건을 금하고, 금수로써 불사하는 것과 금은으로 기물 만드는 것을 금하였는데, 이는 귀족들은 막대한 토지와 재력을 지니고 지방의 연고지를 가지면서 원당과 같은 절을 세워 자신들의 막대한 토지와 재력을 유지하는 것을 막고, 왕권에 그들을 복속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중대에 세워졌던 전제왕권주의가 무너지고 귀족세력이 난립하는 신라하대의 상황 때문에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성공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왕위에서 쫓겨났다.
애장왕은 국내정치의 개혁과 병행하여 대당외교 외에 일본과의 국교를 트고 있다. 802년 12월 균정에게 대아찬을 제수하고 가 왕자로 삼아 왜국에 사신으로 보내고자 하였으며, 애장왕 4년(803년)에는 일본국과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성덕왕 30년(731년)에 일본의 침입 사건으로 단절되었던 두 나라의 외교 관계는 72년 만에 회복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802년 순웅, 이정에 의하여 가야산에 해인사가 세워졌는데, 해인사는 당시 왕실에서 경영하는 절이었다. 이렇듯 애장왕이 내외의 정사를 직접 챙기기 시작하자 왕권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상대적으로 언승 일파의 힘은 약화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껴, 809년 7월 언승이 조카 제륭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와 왕을 죽였다. 이때가 애장왕 10년인 809년 7월이었다.
제41대 헌덕왕
혜충태자(제38대 원성왕의 장남)
|――――――― ▷ 제41대 헌덕왕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언승, 생년미상 ~ 826년
․ 재위기간 : 809년 7월 ~ 826년 10월. 총 17년 3개월
․ 부인 : 1명
․ 자녀 : 2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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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아왕후 - 헌상, 장렴
헌덕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소성왕의 동복아우이다. 이름은 언승이며, 소성왕이 죽은 뒤에 어린 애장왕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이 되었다가, 애장왕 10년(809년)에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790년에 대아찬으로 임명되어 중국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다음해에는 제공의 난을 진압하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잡찬이 되었다. 원성왕 10년(794년)에 시중에 임명되고, 그 다음해에 이찬으로서 재상이 되었으며, 796년에는 병부령의 자리를 맡게 되어 원성왕 말년부터 정치적인 기반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세력기반을 바탕으로 애장왕의 즉위와 함께 각간에 올라 섭정도 맡게 된다. 801년에 어룡성의 장관인 사신이 되었고 이어 상대등에 올랐다. 아우 수종이 시중의 위치에 있었던 809년에는 제옹과 더불어 난을 일으켰으며, 난중에 애장왕이 살해되고 언승이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다.
헌덕왕대의 정치는 함께 반정에 가담한 그의 아우 수종(흥덕왕)을 비롯하여 조카 제륭, 양종, 균정, 영공, 헌정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헌덕왕은 그들을 차례로 시중에 기용하며 조정을 장악하였다. 그 덕분에 헌덕왕 재위 10년까지는 조정이 비교적 안정된 편이었으나, 인사의 편중이 심한 탓에 불만 세력이 늘어났다. 특히 지방으로 방출당한 관리들의 불만이 팽배해져 지방 행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 때문에 재위 11년부터 지방 곳곳에 초적들이 일어났다. 헌덕왕은 모든 주와 군의 도독 및 태수에게 명하여 초적들과 전면전을 벌여 그들을 토벌하도록 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마침 당나라에서는 절도사이사도의 반란을 당하여 신라에 출병을 요청하였다. 헌덕왕은 816년에 김웅원으로 갑병 3만을 이끌고 반란의 진압을 돕도록 하였다.
국내외적 혼란이 계속되던 822년에는 집사시랑인 녹진이 충공을 찾아가 인재의 쓰임을 목재의 쓰임에 비유하여 인사 처리에 적절한 대책을 제언하였는데, 이때 녹진이 제시한 인사원칙은 왕당파에게 유리한 것으로 왕권에 반대하는 귀족에게는 불리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헌덕왕이 주도한 개혁정치에 반대하여 오던 귀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822년 3월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난다. 선덕왕을 이어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올랐다면 헌창은 아마 왕좌에 앉아 있거나 왕위 계승자가 되어 있어야 했으나, 수년 동안 외직을 전전하게 되었고 그는 그런 현실을 비통해하며 일으켰다. 그동안 외직에서의 기반을 바탕으로 반군의 깃발을 들자 순식간에 무진, 완산, 청주, 사벌 등 네 주가 그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는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여 스스로 왕을 청하며 반군을 이끌었다. 정부군의 진압 작전이 조직적으로 이뤄지면서 헌창의 부대는 곳곳에서 무너졌으며 헌창은 패배를 만회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였다. 헌창이 죽자, 그의 부하가 그의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따로 묻어 두었다.
한편, 웅진성을 무너뜨린 정부군은 헌창의 무덤을 찾아내 그의 시신을 다시 칼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죽였다. 하지만 헌창의 아들 범문이 겨우 목숨을 건져 825년 정월에 다시 부하들을 이끌고 북한산주를 공격했다. 그는 그곳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개국할 생각이었지만, 패배하여 처형되고 말았다. 헌덕왕도 그 이듬해 10월에 생을 마감했는데, 장지는 천림사 북쪽이다.
제42대 흥덕왕
혜충태자(제38대 원성왕의 장남)
|――――――― ▷ 제42대 흥덕왕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초명은 수종, 개명은 경휘, 생년미상 ~ 836년
․ 재위기간 : 826년 10월 ~ 836년 12월. 총 10년 2개월
․ 부인 : 2명
․ 자녀 : 1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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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왕후 김씨 - 능유
후비박씨
흥덕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셋째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소성왕과 헌덕왕의 동복아우이다. 초명은 수종이었다가 왕위에 오른 뒤에 경휘로 고쳤다. 그는 형 헌덕왕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는 데 가담하여 이찬이 되었고, 헌덕왕 11년(819년)에 상대등이 되었다. 그리고 822년에는 부군에 책봉되어 왕위 계승권을 확보한 뒤, 826년 10월에 헌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헌덕왕은 왕자가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동생인 그를 부군으로 책봉하여 왕위를 계승토록 했다. 즉위하면서 흥덕왕은 정치개혁을 시도했는데, 827년에 명활전을 설치하였다(914년에 설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829년에는 원곡양전을 설치하였으며,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고쳤다. 이때의 개혁은 김헌창의 난으로 어지러워진 왕실을 정리하고, 신라 왕실의 귀족세력을 억제시켜 왕권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834년에 모든 관등에 따른 복색, 거기, 기용, 옥사 등의 규정을 반포하였다. 이 규정은 왕이 당시 사치풍조를 금지시키기 위하여 발표한 것이라 하지만, 그 내면에는 골품간의 계층구별을 더 엄격히 하고자 하는 귀족들의 요구가 바탕이 된 것이었다. 이 규정에서는 진골과 육두품을 비롯한 여하의 귀족이나 평민과의 차별을 더 뚜렷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골세력에 대한 배려를 깊이 깔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밖의 치적으로 변방에 진을 설치한 것과 불교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다. 우선 828년에 궁복(장보고)이 중국 당나라의 서주에서 소장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였으므로 1만 명의 병졸로써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다음해에는 당은군에 당성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827년에는 중 구덕이 당나라로부터 경전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830년에는 도승 150명을 허가해주었다. 한편, 828년에는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돌아온 김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여 성하게 되었다. 재위기간 중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잃고 병마에 시달리던 흥덕왕은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재위 11년(836년) 12월에 죽었다.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마련되었으니, 그의 유언에 따라 정목왕후의 능에 합장된 것이다.
제43대 희강왕
김헌정(제38대 원성왕의 손자)
|――――――― ▷ 제43대 희강왕
포도부인 박씨 ․ 김씨, 제륭 또는 제옹, 생년미상 ~ 838년
․ 재위기간 : 836년 12월 ~ 838년 정월. 총 1년 1개월
․ 부인 : 1명
․ 자녀 : 2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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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목왕후 김씨 - 의종, 계명(제48대 경문왕의 아버지)
희강왕은 원성왕의 손자인 이찬 김헌정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포도부인 박씨이다. 이름은 제륭또는 제옹이라고 하며, 헌덕왕과 함께 애장을 제거하는 데 가담하여 권좌에 올랐다.
836년 12월에 흥덕왕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자, 신라 조정은 왕위 계승권 다툼에 휘말렸다. 흥덕왕의 종제 균정과 조카 제륭이 서로 파벌을 형성하여 왕위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시중인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김우징과 조카인 예징 및 김양은 균정을 받들었다. 그들은 흥덕왕의 죽음이 임박하자, 각기 군대를 이끌고 대궐로 들어가 전쟁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 김양이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 바람에 제륭파가 승세를 굳혔고, 균정은 살해되었으며 김양과 우징은 달아났다.
제륭은 왕위에 올라 우선 사형수 이외의 죄수를 모두 사면하여 자기의 왕위 계승을 전국에 알렸다. 또 아버지 김헌정을 익성대왕에, 어머니 박씨를 순성태후에 추봉했다. 또 자기가 즉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김명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아찬 이홍을 시주에 임명하여 조정을 장악했다. 그와 싸우다 패배하여 달아나 장보고에게 의탁하고 있던 우징이 아버지 균정이 살해된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련 반역을 선동하고 있어, 왕정은 쉽게 안정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김명과 이홍은 서로 짜고 군대를 일으켜 희강왕의 측근들을 대거 죽여 버렸다. 이에 겁을 먹은 희강왕은 자기도 살해당할 것을 염려하여 궁중에서 목매어 자살하니, 이때가 재위 3년째인 838년 정월이었다. 능은 소산에 마련되었다.
제44대 민애왕
김충공(제38대 원성왕의 손자)
|――――――― ▷ 제44대 민애왕
귀보부인 박씨 ․ 김씨, 명, 생년미상 ~ 839년
․ 재위기간 : 838년 정월 ~ 839년 윤 정월. 총 1년 1개월
․ 부인 : 1명
․ 자녀 : 기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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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왕후
민애왕은 원성왕의 손자 대아찬 충공의 아들이며, 귀보부인 박씨 소생이다. 이름은 명이며 헌덕왕 대로부터 여러 벼슬을 거쳐 희강왕을 보좌한 덕으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가, 838년 정월에 시중 이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아버지 충공을 선강대왕, 어머니 귀보부인을 선의태후로 추존하고 김귀를 상대등, 헌중을 시중으로 삼았다.
흥덕왕이 죽고 그 사촌동생인 균정과 5촌 조카인 제륭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을 때, 시중인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우징과 조카 예징 및 김양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이 화살을 맞아 우징 등과 더불어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도망하여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였으나, 불만을 가진 김명이 이홍과 같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자진하고 김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김명(민애왕)은 다시 균정계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 청해진에 의탁하고 있던 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000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하여 진격해왔다. 김양, 염장, 장변, 정년, 낙금, 장건영, 이순행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이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 등을 파견하여 무주 철야현(지금의 나주 부근)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그 다음해 정월 달구벌(지금의 대구)에서의 싸움에서도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청해진 군대가 밀려오자, 궁궐 서쪽 교외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때가 839년 정월 22일이니,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3개월 만이었다. 장지는 알 수 없다.
제45대 신무왕
김균정(제38대 원성왕의 손자)
|――――――― ▷ 제45대 신무왕
진교부인 박씨 ․ 김씨, 우징, 생년미상 ~ 839년
․ 재위기간 : 839년 윤 정월 ~7월. 총 6개월
․ 부인 : 1명
․ 자녀 : 1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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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왕후 - 경웅(제46대 문성왕)
신무왕은 원성왕의 손자 균정의 아들이며 진교부인 박씨 소생으로 이름은 우징이다. 헌덕왕 14년인 822년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자 대아찬의 벼슬을 받고 아버지 균정과 함께 토벌대를 이끌었으며, 흥덕왕 3년인 828년에 시중에 올랐다. 그리고 831년에 시중에서 물러났다가 3년 뒤인 834년에 다시 시중에 기용되었다. 835년에 아버지 균정이 상대등에 오르자, 부자가 함께 재상과 시중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물러났다. 836년에 헌덕왕이 죽자, 아버지 균정을 왕위에 앉히려 했으나, 재종 제륭(희강왕)에게 패배하여 청해진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 838년에 희강왕의 김명(민애왕)에게 살해되고, 김명이 왕위에 오르자, 장보고 군대의 도움을 받아 김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때가 839년 윤 정월이었다.
신무왕의 즉위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인겸계와 균정계 세력의 대립에서 균정계가 승리하였음을 의미한다. 균정계가 승리한 데에는 청해진 세력과 이미 거세된 김주원계의 후손인 김양의 도움이 컸다. 즉위와 동시에 할아버지 예영을 혜강대왕, 아버지 김균정을 성덕대왕, 어머니 진교부인 박씨를 헌목태후에 추존하고, 아들 경웅을 태자로 삼았다.
신무왕은 즉위한 지 반년도 못 되어 죽었기 때문에 별다른 경륜을 펴지 못하였으나, 다만 그는 장보고나 김양에 대하여 배려하고 있었던 듯하다. 839년에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삼아 식읍 2,000호에 봉하였다. 반면, 장보고도 이에 그치지 않고 딸을 왕비로 세우려 하였는데 이것은 청해진 세력이 강대해졌음을 알려준다. 신무왕은 장보고 등 왕권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을 제압하여야 하는 과업을 앞두고 죽었다. 이때 죽위년 7월이었다. 능은 제형산 서북에 있다.
제46대 문성왕
제45대 신무왕
|――――――― ▷ 제46대 문성왕
정종왕후 ․ 김씨, 경응, 생년미상 ~ 857년
․ 재위기간 : 839년 7월 ~ 857년 9월. 총 18년 2개월
․ 부인 : 2명
․ 자녀 : 1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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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왕비 박씨
제2왕비 김씨 - 태자
문성왕은 신무왕의 장남이며, 정종왕후소생으로 이름은 경응이다. 839년 윤 정월에 신무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7월에 신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신무왕은 흥덕왕이 죽은 뒤 계속되어온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지만 6개월도 못 되어 죽어, 왕위쟁탈과정에서 쌓여온 많은 모순을 해경하지 못하였고, 아들 문성왕대로 고스란히 넘어오게 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왕위를 둘러싼 균정계와 원성왕의 장자 인겸의 아들인 충공계와의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이 싸움에서 일단 패한 균정계의 우징은 청해진대사 장보고와 김주원의 후손 김양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그 결과 장보고와 김양 등 신무왕을 도운 귀족세력은 그에 상응한 정치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문성왕이 즉위하자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봉하고, 예징을 상대등에 임명하였고 김양에게 소판의 관등을 주면서 병부령으로 임명하였다. 반면, 이와 같은 귀족세력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모순의 양상은 841년 홍필의 모반과 846년에는 장보고의 반란으로 드러난다. 장보고는 딸을 왕의 차비로 세우려 하였는데, 조신들이 해도사람의 딸을 왕비로 맞을 수 없다고 반대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았다. 사실,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려 한 것은 신무왕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였다. 신무왕은 장보고의 군대를 빌리면서 자신이 왕이 되면, 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겠다고 약속했는데, 신무왕이 재위 7개월 만에 죽는 바람에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장보고는 문성왕에게 약속 이행을 요구하였고, 문성왕 또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는 것이 국정 안정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신라는 전통적으로 왕비를 왕족 내부에서 간택해 왔고, 서라벌 귀족출신으로 구성된 조정 대신들을 그런 전통을 앞세워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문성왕 재위 8년(846년)에 염장에 의하여 장보고가 살해당하면서 진압되었다. 일설에는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한 인물이 김양이라고 하는데, 842년 김양이 그의 딸을 왕비로 세우는 기사가 이러한 추측을 낳게 한다. 장보고의 난이 진압되자 851년 청해진을 혁파하였으며, 그곳 민호를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 이는 곧 해상무역의 혼란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신라, 일본, 당을 오가는 해상 무역상들은 청해진이라는 귀중한 안전판을 상실했던 것이다. 이는 세 나라의 경제에 엄청난 피해를 초래했다. 또한 장보고의 힘으로 등장한 문성왕의 지지기반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장보고의 난 이후에도 정치적인 불안은 계속되었다.
847년, 장보고의 인맥인 이찬 양순과 파진찬 흥종의 반란이 있었다. 문성왕은 그런 와중인 재위 9년(847년)에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여 왕실의 위엄을 다졌다. 그러나 849년 역시 청해진의 후광을 입어 등용된 인물이었던 이찬 김식, 대흔의 반란이 또 한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양순이나 대흔은 모두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웟던 인물이다.
전래로부터 계속된 왕위 다툼은 그대로 계속되다가, 857년 문성왕은 숙부 의정에게 왕위를 계승 시킨다는 유조를 내리고 죽었다. 이때가 857년 9월이다. 능은 공작지에 마련되었다. 이것은 그 한 달 전에 문성왕을 도와오던 김양이 죽자, 상대등인 의정과 시중인 계명이 결합하고 왕을 핍박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는 추측이기도 하다.
제47대 헌안왕
김균정(제38대 원성왕의 손자)
|――――――― ▷ 제47대 헌안왕
조명부인 김씨 ․ 김씨, 의정, 생년미상 ~861년
․ 재위기간 : 857년 9월 ~ 861년 정월. 총 3년 4개월
․ 부인 : 2명
․ 자녀 : 1남 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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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 영화(경문왕의 왕비), 공주(경문왕의 후비)
후비 - 궁예(태봉의 건국자)
헌안왕은 신무왕의 아버지 균정의 아들이며, 조명부인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의정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행적은 잘 알 수 없으나, 아마 아버지인 상대등 균정과 처남인 시중 김명 사이에 왕위계승문제로 암투가 격심하던 흥덕왕 말년(836년)에 중국 당나라에 사행하였고 문성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시중을, 그 뒤에는 병부령을 거쳤다가 다시 문성왕 11년(849년)에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헌안왕의 어머니 조명부인은 왕위계승다툼에서 남매지간인 민애왕이 시아버지인 신무왕을 죽였고, 남편인 신무왕은 민애왕을 죽여 친정과 시가가 모두 원수였던 애매한 관계에 놓여있는 인물이었다. 이런 복잡한 관계속에서 태어난 헌안왕은 조카인 문성왕이 857년 죽자, 연로한 나이에 왕위를 계승받게 된다. 여기에는 당시 실세를 잡고 있던 경응파가 정파싸움에서 이뤄낸 결과로 보고 있다.
즉위 초에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아지자, 제방을 수리하게 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재위 2년(858년)에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비로자나불상을 만들게 하고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재위 3년(859년)에는 도선국사에 의해 수도암을 지었다. 이듬해(860년)에는 체징이 터를 잡아 보림사를 창건하였다.
재위 5년째인 861년 1월,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오래되었으므로 왕위를 사위인 응렴(경문왕)에게 선위하고 그달 29일에 죽었다. 공작지에 장사하였다.
제48대 경문왕
김계명(제43대 희강왕의 아들)
|――――――― ▷ 제48대 경문왕
광화부인 ․ 김씨, 응렴, 846 ~ 875년
․ 재위기간 : 861년 정월 ~ 875년 7월. 총 14년 6개월
․ 부인 : 2명
․ 자녀 : 3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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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왕후 김씨 - 정(제49대 헌강왕), 황(제50대 정강왕),
윤, 만(제51대 진성여왕)
후비 김씨
경문왕은 희강왕의 아들인 이찬 계명의 아들이며, 광화부인 소생으로 이름은 응렴이다. 846년에 태어났으며, 헌안왕 4년인 860년에 15세의 나이로 헌안왕의 큰딸 영화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그리고 861년 정월에 헌안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이 국선이 되었는데, 헌안왕이 불러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본 일을 묻자 선행을 행한 세 사람을 말하였는데, 첫째는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하나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부호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은 사람이요, 셋째는 고귀한 세력가이면서 그 위엄을 보이지 아니한 사람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헌안왕이 어짐을 알고 사위로 삼고자 하여 왕의 두 딸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게 하였다. 이에 낭도인 범교사(삼국사기에는 흥륜사의 승려라고 함)의 조언을 받아들여 왕의 큰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경문왕은 불교에 비교적 관심이 많아 낭도 중에도 승려가 많았으며 864년에 감은사에 행차하였고, 866년에는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871년에는 황룡사구층탑을 개조하였다. 이는 그 규모가 엄청나서 이 공사를 명령하던 시점에 지진과 홍수로 시달리던 백성들의 삶을 더 어렵게 하여 민심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황룡사 대탑 공사는 3년간 지속되어 873년 9월에 오나성해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경문왕은 불교 뿐 아니라 국학에도 관심이 있어 864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였다. 즉위한 직후 나라를 잘 다스려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때 왕의 정치를 도운 사람들 중에는 국선출신이 많았는데, 곧 요원랑, 예흔랑 등이다. 이들은 국토를 유람하면서 왕을 위하여 치국의 뜻을 노래로 짓고, 이를 다시 사지인 심필을 시켜 대구화상에게 보내어 「현금포곡」, 「대도곡」, 「문상곡」등 3수의 노래를 짓게 하였는데, 경문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칭찬하였다고 하는데 가사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즉위 초 861년에 대대적으로 죄수들을 사면하고, 862년 이찬 김정을 상대등으로, 아찬 위진을 시중에 임명하였으며 866년에는 아버지 계명을 의공대왕, 어머니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 왕비를 문의왕비로 봉하고 왕자 정을 태자로 삼는 등, 열의를 가지고 정치를 했지만, 진골귀족간의 오랜 분쟁은 일시에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중기 이후에는 반란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866년 이찬 윤흥과 그 동생 숙흥, 계흥의 모역과, 868년 이찬 김예, 김현 등의 모반, 874년 근종 등의 모역이 있었다. 근종의 난으로 민심을 크게 악화되고, 정치 불안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경문왕은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875년 7월 8일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한편, 경문왕은 산 뱀을 가슴에 덮고 자는 나쁜 습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당나귀 귀와 같은 큰 귀를 가졌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역시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제49대 헌강왕
제48대 경문왕
|――――――― ▷ 제49대 헌강왕
문의왕후 김씨 ․ 김씨, 정, 생년미상 ~ 886년
․ 재위기간 : 875년 9월 ~ 886년 7월. 총 10년 10개월
․ 부인 : 2명
․ 자녀 : 1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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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명왕후 - 의성(선덕왕의 왕비)
후비 김씨 - 요(제52대 효공왕)
헌강왕은 경문왕의 맏아들이며, 문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정이다. 경문왕 재위 6년인 866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875년 9월에 경문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명민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 번 보면 입으로 모두 외웠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헌강왕은 이찬 위흥을 상대등으로, 대아찬 예겸을 시중으로 임명하여 조정의 기반을 잡았다. 헌강왕은 불교와 국학에 대한 관심을 아울러 가졌는데, 876년과 886년에 황룡사에서 백고좌강경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들었다. 이러한 왕의 사찰행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위한 출행이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망해사가 세워진 것도 헌강왕 대이다.
879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였으며, 883년에는 삼랑사에 행차하여 문신들로 하여금 시 1수씩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879년에 신홍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하였다. 그 뒤 헌강왕대에는 신라가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880년에 왕이 좌우를 거느리고 월상루에 올라 서울의 사방을 바라보면서, 백성들의 집이 볏짚이 아닌 기와로써 이어졌고 밥할 때 장작이 아니라 숯을 땐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유함은 신라 전체가 아닌 이른바 금입택과 같은 진골귀족의 부강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오히려 신홍 등의 반란은 하대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헌강왕대에 신라 하대사회의 위기의식을 나타낸 기록이 보이고 있다.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을 순행하였을 때 어디서 온지를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서 춤을 추니,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이라 한다.
또 헌강왕이 동해안의 개운포에 놀러갔다가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처용을 만나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처용가>가 만들어졌는데, 처용을 지방 세력가의 자제로 보아 헌강왕대에 기인제도가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한 886년 봄에는 적국인 보로국(지금의 안변군 서곡면)과 흑수국(여진족의 하나) 사람들이 신라와 통교를 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헌강왕은 중국 당나라와 일본과의 교섭을 꾀하기도 하였다.
886년 6월에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끝내 그해 7월 5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대 중반으로 추정되며, 능은 보리사 동남쪽에 마련되었다.
제50대 정강왕
제48대 경문왕
|――――――― ▷ 제50대 정강왕
문의왕후 김씨 ․ 김씨, 황, 생년미상 ~ 887년
․ 재위기간 : 886년 7월 ~ 887년 7월. 총 1년
․ 부인 : 기록 없음
․ 자녀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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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 기록 없음
정강왕은 경문왕의 차남이며, 문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황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으로 추봉된 계명이고, 할머니는 광의왕태후로 추봉된 광화부인이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맏딸로 문의왕후에 봉하여진 영화부인이다. 정(헌강왕), 만(진성여왕), 윤과 형제간이다. 그는 886년 7월에 형 헌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최치원의 글 <사추증표>에는 헌강왕의 죽음과 정강왕의 즉위가 887년으로 되어 있어 1년의 차이가 있다. 정강왕은 이찬 준흥을 시중으로 임명하고 조정을 꾸렸지만, 그의 치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즉위년에 서쪽 지방에 심한 가뭄이 들어 흉년이 닥쳤고, 이듬해 정월에 한찬 김요가 한산주에서 병력을 일으켜 모반을 도모했다. 다행히 반란은 진압되었고, 김요는 붙잡혀 처형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강왕이 병상에 눕고 말았다.
5월에 병상에 누운 정강왕은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시중 준흥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나의 병이 위급하니,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뒤를 이을 자식은 없으나, 누이동생 만은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남자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왕과 진덕왕의 옛 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언을 남긴 정강왕은 그해 7월 5일에 죽었다.
재위기간 동안에 887년에 정월 황룡사에 백좌강경을 설치하였으며, 같은 해 고승 진감선사 혜소의 높은 도덕과 법력을 양모하여 대사가 도를 닦은 옥천사를 쌍계사로 개칭하고, 고운 최치원으로 하여금 진감선사 대공탑비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승, 빈영이 이를 새겼다. 보라사 동남쪽에 묻혔다
제51대 진성여왕
제48대 경문왕
|――――――― ▷ 제51대 진성여왕
문의왕후 김씨 ․ 김씨, 만, 생년미상 ~ 897년
․ 재위기간 : 887년 7월 ~ 897년 6월. 총 9년 11개월
․ 남편 : 1명 이상
․ 자녀 : 1명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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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대왕 김위홍 - 막내아들 양패
진성여왕은 경문왕의 딸이며, 문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만이다. 헌강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정강왕이 왕위를 이었으나, 그 또한 재위 1년 만에 죽었다.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887년 7월에 그녀가 왕위에 올랐으니, 선덕과 진덕에 이어 세 번째 여왕이다.
진성여왕이 즉위할 무렵, 신라 사회는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체제가 와해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미 지방 호족 세력이 너무 성장하여 조정의 힘은 미약해지고,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822년 김헌창의 난 이후, 신라 왕실은 계속해서 왕위 다툼이 일어나 왕실의 권위가 무너졌다. 조정의 통제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었으며, 헌강왕이 후계자를 제대로 정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죽고, 이어 즉위한 정강왕마저 병상에 누워 정사를 챙기지 못하는 바람에 지방에 대한 신라 조정의 통제력은 점차 마비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진성여왕이 등극하였다. 여왕의 즉위는 백성들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지방 세력의 힘을 강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주 ․ 군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하였으나 재위 2년인(887년) 2월 숙부이자 남편이었던 상대등 위홍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대야주에 은거하던 왕거인의 국왕 비판 등이 있었으며, 888년부터는 주 ․ 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국고가 비게 되었다. 이에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를 계기로 민심이 흉흉해져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게 되었다.
급기야 889년에 사벌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사벌주(지금의 상주)의 농민 봉기를 주도한 인물은 원종과 애노, 아자개 등이었다. 그들은 사벌의 군주 우연을 죽이고, 사벌성을 장악하였다. 진성여왕은 나마 영기에게 군대를 안겨 농민군을 진압하게 했으나, 영기는 농민군의 기세에 눌려 진군하지 못했다. 그 소식을 접한 진성여왕은 영기를 참수하고, 사벌 군주의 아들을 군주로 삼아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했으나 농민군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신라 조정이 사벌의 반란군 진압에 실패하자,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 각처에서 크고 작은 반란 사건이 잇따랐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 호족들이 힘을 형성하여 연이어 군대를 일으켰다.
사벌의 아자개, 죽주(안성)의 기훤, 청주의 청길, 북원(원주)의 양길, 중원(충주)의 원회 등이 그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이들은 대개 지방의 호족들로 농민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키고, 그 지역의 관아를 장악하는 과정을 통해 군벌로 성장했다.
지방 군벌들은 한층 세력을 확충하며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는데, 자기들끼리의 힘 싸움 끝에 가장 큰 세력으로 남은 것은 죽주의 기훤과 북원의 양길, 사벌의 아자개 등이었다. 청길, 원회, 신훤 같은 중부 세력은 거의 기훤에게 흡수되었고, 서라벌 주변 세력은 아자개에게 흡수되었다. 또 양길은 서라벌 북동부(지금의 강원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들 중 서라벌의 토벌군과 군사적 요충지였던 사벌의 아자개 군대가 가장 많은 전쟁을 치렀다.
아자개의 장남 견훤은 서라벌 서쪽과 남쪽을 휩쓸고 다니며 몇 달 만에 5천 군대를 형성하였고, 백성들에게도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이에 힘입어 견훤은 아버지 아자개를 떠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견훤은 마침내 혁명 의지를 굳히고 군대를 남쪽으로 몰아 무진주(광주)를 장악한 뒤, 스스로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900년 견훤은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후백제)라고 칭함으로써 후삼국 시대의 서막을 올렸다.
한편, 기훤의 휘하 장수 궁예가 청길, 원회, 신훤과 결탁하여 양길에게 투항함으로써 기훤은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략했다. 반면에 양길은 궁예를 앞세워 경북 북부 일대와 충청도, 강원도 동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견훤 못지않은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성장했다. 견훤의 창업에 자극받은 궁예는 894년에 명주(강릉)를 장악, 병력 3천 5백을 형성하고 양길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궁예는 강원도 북부 일대를 장악하고 서쪽으로 진출하여 경기도 및 황해도 지역을 손안에 넣었다. 896년에는 송악의 호족 왕융을 받아들여 철원의 태수로 봉하고, 주면 세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신라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한 그 주변지역에 그치고, 전 국토는 대부분 적당이나 지방호족세력의 휘하에 들어갔다. 또,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까지 진출하여 민가를 약탈하는 등 수도의 안위조차 불안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은 894년에 사무 10조를 제시하였다.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귀족의 이익과는 배치될 수 있었다. 이 개혁은 결국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는 못하였다. 897년 6월 조카 헌강왕의 아들 요(뒤의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 12월에 죽었다. 능은 황산에 마련되었다.
제52대 효공왕
제49대 헌강왕
|――――――― ▷ 제52대 효공왕
후비 김씨 ․ 김씨, 요, 886 ~ 912년
․ 재위기간 : 897년 6월 ~ 912년 4월. 총 14년 10개월
․ 부인 : 2명 이상
․ 자녀 : 기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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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박씨
후첩
효공왕은 헌강왕의 서자이며, 후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요이다. 헌강왕이 죽을 당시 그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보에 싸인 상태였다. 그의 나이 열 살 되던 해인 895년에 진성여왕이 그를 궁중으로 데려와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897년 6월에 진성여왕이 중병에 걸려 왕위를 넘기자,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효공왕은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자색이 뛰어난 한 여자를 만났는데, 뒤에 헌강왕이 궁궐을 빠져나가 그 여자와 야합하여 태어난 아들이다. 뒤에 이 사실을 안 진성여왕에 의하여 헌강왕의 혈육이라 하여 895년에 태자로 봉하여지고, 뒤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왕위에 오른 효공왕은 헌강왕의 왕후이자 자기 양어머니인 김씨를 의명왕태후로 추존하고, 서불한 중흥을 상대등, 아찬 계강을 시중으로 삼아 조정을 개편했다. 그리고 재위 2년인 899년 3월에 이찬 예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효공왕 재위 시 신라는 왕실의 권위가 떨어져서 지방에서 일어난 궁예와 견훤이 신라영토의 패권을 놓고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지금의 청주나 충주 이북지역은 완전히 궁예의 세력권에 속하게 되었다. 898년에 북쪽 지역에서 패권을 형성하고 있던 궁예는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의 30여 성을 빼앗고, 마침내 송악에 도읍함으로써 후고구려의 기치를 내걸었고, 899년 7월에는 북원의 양길을 무너뜨리고 패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900년에 충주, 청주, 괴산의 세력가인 원회, 청길, 신훤 등이 궁예에게 성을 바치고 항복함으로써 궁예의 세력은 충청도와 경상 북부 일원까지 확대되었고, 마침내 901년에 궁예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후고구려가 건국되었다.
북쪽에서 궁예가 패권을 형성하고 있는 사이 남쪽의 견훤도 세력을 팽창해오고 있었다. 견훤은 901년 8월에 낙동강 서쪽 지대 장악을 위해 대야성(합천)을 공격해 왔는데, 다행히 신라 장수들의 활약으로 대야성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견훤은 이내 병력을 금성(나주)로 옮겨 그곳을 공격하였다. 나주는 독특한 지형 덕택에 견훤의 다각적인 공격을 막아 내며 어렵게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견훤은 나주를 손안에 넣기 위해 여러 차례 군대를 동원했지만, 쉽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궁예는 해군대장군 왕건에게 나주를 장악할 것을 명하여 왕건은 그곳 호족들을 포섭, 나주로 군대를 잠입시켰고, 마침내 나주를 손안에 넣었다.
그리고 궁예는 904년에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 하고, 백관의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러자 신라 왕실을 섬기며 버티고 있던 패서도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투항해 버렸다. 궁예는 905년에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죽령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빠르게 신라 땅을 잠식하였다.
907년에는 견훤이 일선(경북 선산)까지 진출하여 주변의 10여성을 장악하였고, 궁예는 남진을 계속하여 상주와 안동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렇게 되자, 신라 도성이 있는 서라벌 주변이 온통 견훤군과 궁예군의 전장이 되고 말았다.
나주 점령에 실패한 뒤, 계속해서 나주를 공격해오던 견훤은 909년에 해군장수 왕건과의 해전에서 크게 패해 진도와 고이도를 뺏기는 바람에 해상권을 잃고 나주에서 후퇴해야만 했다. 910년에 견훤은 다시 총력전을 펼쳐 나주를 공격하였고, 열흘 동안 포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왕건이 이끄는 수군의 습격을 받아 퇴각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의 효공왕이 이미 쇠할 대로 쇠한 국력을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절망감에 사로잡힌 그는 정사는 제쳐 두고 총애하는 첩과 음사를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대신 은영이 그런 모습을 보다 못해 효공왕에게 정사를 돌볼 것을 충언으로 간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효공왕의 첩을 죽여 왕정을 경계하게 한다.
이 사건 이후 효공왕은 왕권을 빼앗기고 허수아비 왕으로 전략하였고, 급기야 912년 4월에 죽음을 맞이했다. 효공은 왕비를 비롯한 박씨 일파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박경휘(신덕왕)가 왕비 박씨의 오빠이고, 은영의 백부라는 사실이 그런 추축을 가능케 한다. 그의 죽음으로 내물왕 이후 지속되던 김씨 왕실은 몰락하게 된다. 죽은 뒤 사자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도 하고, 혹은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여 뼈는 구지제 동산 기슭에 묻었다고도 한다.
제53대 신덕왕
박예겸(제8대 아달라왕의 후손)
|――――――― ▷ 제53대 신덕왕
정화부인 ․ 박씨, 경휘, 생년미상 ~ 917년
․ 재위기간 : 912년 4월 ~ 917년 7월. 총 5년 3개월
․ 부인 : 1명
․ 자녀 : 2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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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왕후 김씨 - 승영(재54대 경명왕), 위응(제55대 경애왕
신덕왕은 제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고, 박예겸의 아들이며 정화부인 소생이다. 이름은 경휘이며, 일찍이 헌강왕의 사위가 되었다. 타락한 효공왕이 박씨 세력에 의해 제거되자, 912년 4월에 왕위에 올랐다. 신덕왕의 아버지 예겸은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시중에 임명된 사람으로 신라 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덕왕의 즉위는 제8대 아달라왕을 끝으로 제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던 박씨 왕조의 부활을 의미한다.
왕위에 오른 신덕왕은 즉위년 5월에 선친 예겸을 신성대왕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를 정화태후로, 왕비를 의성왕후로 하고, 아들 승영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이찬 계강을 상대등으로 삼아 조정을 수습하였다.
신덕왕대의 신라는 국토의 대부분을 궁예와 견훤의 세력권에 빼앗겨 실제로 경주지역을 다스리는 데 그쳤다. 궁예의 부하인 왕건이 나주를 정벌한 이후 그들의 패권다툼이 더욱 치열해가는 동안 신라의 명맥은 겨우 유지되는 형편이었다. 이때의 신라 왕실은 스스로 후백제나 태봉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힘이 없었다.
그의 치세 중에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914년에 궁예가 연호를 ‘수덕만세’에서 ‘정개’로 고친 것과 916년 8월에 견훤이 또다시 대야성을 공격해 온 일이었다. 916년에 이르러서는 견훤이 대야성(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여 비록 이를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나, 그것은 곧 신라의 심장부에 비수를 겨누는 격이 되었다. 신덕왕은 917년 7월에 죽었으며, 육신은 화장되었고, 능은 죽성에 마련되었다. 혹은, 화장하여 잠현에 묻었다고 한다
제54대 경명왕
제53대 신덕왕
|――――――― ▷ 제54대 경명왕
의성왕후 김씨 ․ 박씨, 승영, 생년미상 ~ 924년
․ 재위기간 : 917년 7월 ~ 924년 8월. 총 7년 1개월
․ 부인 : 1명
․ 자녀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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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왕후
경명왕은 신덕왕의 장남이며, 의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승영이다. 912년 아버지 신덕왕이 즉위하자, 그해 5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917년 7월에 신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경명왕은 아우인 이찬 위응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대아찬 유렴을 시중으로 삼아 정사를 꾸렸다. 하지만, 경명왕 때에는 이미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 왕실은 왕경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지역을 다스리는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궁예와 견훤 등 지방 세력들에게 빼앗겼다. 특히, 918년(경명왕 2)에 일어난 현승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또, 경명왕 때에는 여러 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하는데, 919년 사천왕사 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에 황룡사탑의 그림자가 사지 금모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 나왔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불안한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사들이다.
928년 6월에 궁예가 911년 세웠던 태봉 왕조는 민심이 불안해지면서 왕건을 추대하는 신하들로 인해 무너지고 만다. 왕건은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 하였다. 얼마 뒤, 후백제가 아자개가 지배하던 상주 일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그의 심사를 불편하게 하자 아자개가 아들인 견훤을 버리고 왕건에게 투항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견훤의 명예는 크게 훼손되었다.
고려 개국 이후 신라의 지방 세력들은 왕건에게 호의를 가지기 시작했고, 경명왕도 고려와 타협하여 후백제를 함께 견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왕건이 919년에 도읍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겨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자, 920년 정월 상대등 김성과 시중 언옹 등은 왕건과 사신을 교환하고 고려와 수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자 견훤에게 위협을 받고 있던 지방 세력들이 전략적 제휴의 형태로 대거 고려에 귀순했다.
920년 2월에 강주(진주) 장군 융웅이 견훤의 대야성을 공격해 위협을 느끼고 고려에 귀순했는데, 예상대로 견훤은 그해 10월에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해 왔고, 결국 대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다급해진 경명왕은 급히 아찬 김율을 왕건에게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견훤의 군대는 다시 진례로 진군했고, 이를 왕건의 도움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912년 2월에는 말갈의 일족인 달고 무리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고려 장수 견권에게 대파되어 전멸하였다. 경명왕은 왕건에게 사신을 파견하고, 감사하는 편지를 함께 보냈다.
이렇게 고려의 도움으로 계속되는 수난들을 극복하게 되자, 경명왕의 외교정책도 친고려의 성향으로 바뀌고 만다. 이렇게 상황이 돌아가, 922년 정월에 하지성 장군 원봉이, 923년 7월에는 지성장군 성단, 경산부 장군 양문 등이 왕건에게 귀순하게 된다.
왕건에게 등을 돌렸던 태봉의 신하들도 고려에 투항하기 시작했다. 922년 정월에 명주의 호족 김순식이 항복하여 왕씨 성을 하사받고 충성을 맹세하였고, 또 진보성 장군 홍술도 같은 달에 항복하였다. 명주의 호족으로 지금의 강운도 동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순식과 경북 의성 일대의 호족인 홍술의 귀순으로 왕건의 세력은 더 확고해지게 된다.
고려에 의존하던 덕분에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경명왕은 923년에 창부시랑 김낙과 녹사 참군 김유경과 924년 조산대부 창부시랑 김악을 후당에 입조시키고 토산물을 바치는 조공 외교도 펼치게 된다. 후당의 장종은 그에게 의대부시위위경의 관직을 내렸다. 경명왕은 고려와 후당에 생존을 위한 외교전을 펼치며 신라의 명맥을 겨우 유지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924년 8월에 지병으로 생을 마감하니, 황복사 북쪽에서 화장되어 뼈는 성등 잉산 서쪽에 뿌렸다. 고려 태조 왕건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토록 하여 양국의 화친 관계를 확인하는 조치를 내렸다.
제55대 경애왕
제53대 신덕왕
|――――――― ▷ 제55대 경애왕
의성왕후 김씨 ․ 박씨, 위응, 생년미상 ~ 927년
․ 재위기간 : 924년 8월 ~ 927년 11월. 총 3년 3개월
․ 부인 : 1명
․ 자녀 : 여러 명(자세한 기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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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경애왕은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동복아우이고 의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위응이다. 경명왕 원년인 917년에 상대등에 임명되어 조정을 이끌다가 919년에 물러났다. 924년 8월에 경명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경애왕 때 후삼국의 패권다툼은 이미 왕건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925년 고울부장군 능문이 항복하였고, 927년 강주(지금의 진주)의 왕봉규가 관할하는 돌산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렇듯 신라 장수들이 계속 고려 조정에 투항하고 있을 무렵, 고려 도성으로 발해의 귀족과 백성들도 대거 귀순하고 있었다. 당시 발해는 거란의 거센 공격에 밀려 도성이 함락될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 여파로 925년 9월엔 장군 신덕 등 5백 명이 귀순했고, 또 같은 달에 발해의 예부경 대화균을 비롯해 대씨 왕족들이 대거 귀순해 왔다. 고려는 신라 호족들과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웠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건과 견훤은 잠시 싸움을 그치고 강화하였는데, 견훤이 보낸 질자인 진호가 고려에서 죽자 견훤은 926년 다시 출병하여 고려를 공격하였다.
신라는 경명왕 4년에 고려와 수교하여 친 고려정책을 펼쳤다. 이 시기에 견훤은 1만 명이라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그의 오랜 숙원인 대야성을 함락시켰으며, 다음 진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게 되는데, 이때 고려군의 파병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후 후백제와 고려의 관계는 4,5년간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나 경애왕이 등장하면서 대규모의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려는 용주성을 공격한 것을 계기로 후백제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으며, 드디어 왕건이 친히 강주를 순행하며 민심을 돌보자, 불안을 느낀 견훤은 지금의 상주를 공격하고, 이어 경주 근처의 고울부를 습격한다. 견훤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한 경애왕은 다급한 심정으로 왕비와 궁녀, 종실들과 함께 포석사에 나가 제를 올리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왕건이 곧 군사 1만 명을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였으나 고려군이 도착했을 때, 이미 서라벌은 백제군에게 유린당한 뒤였다. 이 사건을 『고려사』,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이 포석정에 나가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었다고 하나, 이는 고려의 역사가들이 신라 멸망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고려건국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기록한 것이라 보아진다.
경애왕은 견훤이 포석정까지 들이닥치자, 당황하여 왕비와 함께 달아나 도성 남쪽 별궁에 몸을 숨겼으나 백제군의 수색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이때가 927년 11월이었다. 견훤은 경애왕의 외종제 김부(경순왕)를 왕으로 세우고, 왕족 효렴을 비롯해 재상 영경과 그 외에 종실의 자녀들과 각종 기술자들, 병기, 보배 등을 빼앗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신라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급히 군사를 일으켰고 바로 이것이 공산성전투가 된다.
한편, 경애왕 때 황룡사에 백좌경설을 설치하고 선승 300여명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것을 백좌통설선교라 부르며, 대규모 선승 모임의 시초가 되었다. 세 왕 김부는 경애왕의 시체를 수습하여 서쪽 대청에 안치하고, 장례를 치른 뒤, 남산 해목령에 능을 마련했다.
제56대 경순왕
김효종
|――――――― ▷ 제56대 경순왕
계아태후 ․ 김씨, 부, 생년미상 ~ 978년
․ 재위기간 : 927년 11월 ~ 935년 11월. 총 7년
․ 부인 : 3명
․ 자녀 : 1남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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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방부인 - 마의태자
낙랑공주 왕씨
후실왕씨
경순왕은 제46대 문성왕의 후예로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부이며, 경애왕의 외종제이다. 아버지는 이찬 효종이며, 어머니는 계아태후이다. 경순왕의 아버지 효종은 효공왕 6년(902년)에 대아찬으로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 이후 이찬으로 품계가 올랐고, 오랫동안 신라 조정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효종의 아들 부가 왕위에 오른 것은 견훤의 천거에 의해서였다. 927년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된 후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경명왕 즉위 이후 신라가 노골적으로 고려와 화친하며 백제를 적대시하던 박씨 왕조를 폐하고 김씨 왕조의 후예인 부를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견훤은 김부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가면서 신라의 도성을 지키던 병사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가, 경순왕은 군사권도 행사할 수 없는 이름뿐인 왕이었다.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우선 경애왕의 시체를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와 함께 장례를 준비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사신을 보내 조문한 뒤, 이내 자신이 직접 병력 5천을 이끌고 견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달려왔다.
왕건은 공산(팔공산)에서 견훤을 급습하려했으나, 오히려 백제군이 숨겨놓은 복병에 당하고 만다. 백제군에 둘러쌓여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이자 신숭겸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탈출할 수 있었다. 공산의 패전 이후, 왕건은 백제와의 계속되는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928년 고려와 신라의 교통로였던 죽령과 강주를 백제군이 장악했으며, 11월에는 경상 북부 지역의 요충지인 부곡성이 함락당해 장군 양지와 명식이 백제에 항복하였다. 929년 7월에는 고려의 주요 거점인 의성부를 공격하여, 의성 성주 홍술이 전서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해 10월에 견훤은 자신의 고향인 사벌의 가은현을 차지하려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경상도 지역에 주둔한 고려군의 마지막 보루인 고창(경북 안동)을 공격했다. 그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내려온 왕건은 고전 끝에 유금필을 앞세우고 죽령을 뚫는다. 이때, 재암성을 지키고 있던 신라 장수 선필 군대를 이끌고 귀순해 오게 되고, 유금필을 선봉에 두고 백제군을 잇따라 궤멸시켰다. 이에 고려군은 고창에, 견훤의 군대는 불고 5백 보 남짓 떨어진 석산에 주둔하며 대치했다. 이때, 김선평, 권행, 장길 등이 이끌던 주변의 신라 민병대가 고려군에 가세하게 되고 힘을 얻은 왕건은 신라 민병대와 함께 협공을 감행하여, 견훤의 군대를 낙동강 넘어 남쪽까지 퇴각시키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신라 신하로 남아있던 동해 주변의 주와 군의 110여 성이 고려에 귀순했다.
931년에는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하여 수십 일을 머물렀는데, 왕건은 부하들에게 질서와 규율을 지키도록 하니, 수도 아녀자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고 한다.
왕건이 기세를 세우며 백제 성곽에 대한 공격을 가속화하고 있던 시기에 견훤은 수군을 움직여 그해 9월 백제의 해군장수 상귀로 하여금 고려의 예성강을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염주, 백주, 정주 세 개의 포구를 장악하고, 전함 1백 척을 불살랐다. 도성주변을 공격당한 왕건은, 934년 9월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운주 정벌을 감행했다. 유금필을 필두로 선제공격에 나선 고려군은 백제군 3천 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게 되고, 이에 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스스로 항복해 왔으며, 929년부터 백제의 지배 아래 들어간 나주까지 탈환하게 된다. 운주에서 대패하고, 다시 나주까지 뺏긴 백제 조정은 935년부터 심한 내분을 겪게 된다. 견훤은 여러 명의 아내에게 십여 명의 아들을 뒀는데, 그들 중에 넷째 아들 금강을 가장 총애했다. 운주 전투에서 물러난 후, 금강에게 왕위를 양위하자 이에 당시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던 신검과 반대파 세력은 935년 3월에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켜 버렸다.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유폐된 지 3개월 만인 그해 6월에 나주로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했다.
935년 그는 고려에 신라를 넘겨 줄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고 김봉휴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선을 전하게 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경순왕이 끝내 투항을 천명하자, 부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속세를 등졌다.
그해 11월 고려 태조가 신라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이로써 신라 천년사직은 무너졌다. 경순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거와 보마가 30여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정승공으로 봉하고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다. 또, 왕건은 그에게 녹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을 모두 등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그의 식읍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이자, 신검의 매형인 박영규가 고려에 귀순했다. 이렇게 한반도의 패권과 민심은 왕건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왕건은 그해 9월에 8만 7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견훤과 함께 신검을 응징하기 위해 나섰고, 일선(선산), 완산주 등지에서 전쟁을 벌여, 완산주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아냈다. 후백제가 멸망하게 되면서, 이로써 약50년에 걸친 후삼국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경순왕의 삶은 이어졌다. 그는 녹읍으로 받은 경주 지역을 다스리며 살다가 978년(고려 경종 3년)에 생을 마감했다. 무덤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량포리에 있다. 그의 능이 어떤 이유로 이곳에 조성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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