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아닌 시 (머리말)
나는 시인이 아니다. 세상에 나와 마흔 다섯이 되도록 시라곤 써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내 천분도 그렇겠고, 나 자신 삶에 참지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우리 역사가 그런 역사다. 한 사람의 다윗도 예레미야도 난 일이 없고, 단테도 밀턴도 난 일이 없다. 그 좋은 자연에 워즈워드가 못 났고, 그 도발적인 역사에 타고르가 못 났다. 이 사람들은 오직 눈 뽑히고, 머리 깎이고, 사슬 지고, 맷돌을 가는 삼손이었다.
거기 나서, 가뜩이나 무딘 맘에다 줄을 골라주는 사람하나 없이 젊은 날을 다 지냈으니 시가 나올 리가 없었다. 나도 영원을 지향하는 충동을 품고 고난의 역사의 짐을 지는 한개 심정인 이상 시가 왜 없으리오만, 그것은 품어주는 날개 없는 알같이 다 곯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참혹한 일이다.
그 내가 감히 시를 쓰다니, 몰려서 된 일이지 자신 있어 한 것이 아니다. 고난의 역사를 조금 내다보는 눈에, 해방이 하늘에서 떨어져 왔다기로, 일이 그저 되지 않는 줄을 아니, 덮어놓고 날뛰는 감격은 아니 왔다 하더라도, 그래도 기뻤고 기대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생각 우리 맘 같지 않아, 밝던 날 도로 점점 어두워가니 맘이 아니 상할 수 없었다.
게다가 소위 신의주학생사건이 일어나, 정권에 미친놈들 단순한 젊은 가슴의 의분에 총칼로써 대답하고, 그 원통한 피 모두 내 머리에 돌려, 나를 잡아 옥 속에 던지니, 해방의 소식을 밭고랑에서 거름통 멘 채 들으며 “오, 그날이 오기는 왔나부다”하고 들을 뿐이리만큼 둔감한 내 가슴에서도 울음밖에 나올 것이 없었다.
그래 눈물 사이사이에 나오는 생각을 간수병의 눈을 피해가며 부자유한 지필(紙筆)로 적자니 부득이 시가의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이것이 난 후 처음 시란 것을 쓴 것이다. 50일 갇혀 있는 동안, 나오려니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짬짬이 면회 온 친구에게 주어 보낸 것이 모이니 삼백여 수여서, 나온 후 그것을 한데 엮어 ‘쉰날’이라 이름했었는데 그것은 1947년 봄 삼팔선을 넘을 때 거의 다 잃어버렸다.
삼팔선을 넘을 때 내 맘도 분명 한 선을 넘었고, 와서는 한편 스승님을 모시고 저으기 생각을 파가는 동안에 어둔 맘에도 얼마쯤 뚫린 것이 있었다. 세상은 저 갈 대로 가는 동안 나는 역사를 고쳐 바라고, 인생을 고쳐 씹고, 성경을 고쳐 읽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날껏 천지 사이에 부앙(俯仰)하면서, 풍파 사이에 부침(浮沈)하면서, 너 나 사이에 주고받으면서, 맘은 끝없는 것을 그리고, 몸은 구차한 생의 보따리를 지고, 산에, 물에, 하수도에, 전전하는 동안 세상 형편, 교회 모양, 또 내 꼬락서니를 들여다보며 때로 느껴진 것을 적은 것이 지금 내 놓는 이 글이다.
본래 나 홀로나 하는 소리요, 소수의 흠 없는 벗에나 알려주잔 것이지, 공개하잔 생각이 아니었다. 그 일부분 부분이 연전 개성에서 ‘영원의 젊은이’라 하여, 공주에서 ‘장작불’이라 하여, 대전에서 ‘기러기’라 하여 프린트로 나왔던 일이 있고, 또 고영춘 형이 제주에 피난해 있는 동안에 이것을 친고간에 나눠 주겠다 하여 간행을 시작하다 만 일이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내 병신자식이다. 이제 이것을 세상에 내보내게 되니 부끄럽고 슬픈 맘이 많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이렇게나 울잔 것은 아니었는데, 이 갈대가 시원히 뚫리지 못하고 이 실이 곧게 켕기지 못한 것이 한이다.
독자여,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 아닌 시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 노릇을 못하고, 나가선 국민 노릇을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이것은 시 아닌 시다.
시라 할 테면 하고 말 테면 말고, 그것은 내게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다 바칠 뿐이다.
독자여, 여기 껍질이 있거든 스스로 아낌없이 벗겨버리라. 찌기 있거든 스스로 어려워함 없이 짜내버리라. 만일 진주라고 믿어지는 것이 있거든 나와 같이 울자. 그것을 눈물로 다시 씻어 우리 님께 바치자. 네 맘 따로 내 맘 따로가 아니니라.
마지막으로 이것이 세상에 나오는 데는 여러 친구들의 가슴과 눈과 손의 얼크러진 교향악이 있어서 된 것임을 말하여둔다.
1953년 3월 4일 함석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