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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5일(금) 성탄절 예배
누가복음 2:1~14
하나님께 영광, 사람들 중에 평화
하늘사랑교회 성탄절예배 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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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천년 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입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쁘고 즐거운 성탄절을 맞았지만, 지금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 2.5 단계로 인해 비대면 영상예배를 드려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과거 우리들이 성탄전야에 교회당에 모여 선물을 교환하고, 각 가정을 돌며 새벽 송을 돌며 성탄을 축하했던 일은 이제 우리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저물어 가는 한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한해를 계획해야 할 시점에, 우리들은 예배당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찬양할 수 없는 어려운 현실적인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전염병의 위험을 감안할 때, 우리의 이러한 노력이 전염병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고, 우리의 이웃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임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가 더욱 주님을 바라보고,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여기서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실질적인 초대황제였습니다. 그의 이름에 붙여진 ‘아구스도’라는 명칭은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이 사람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였는데, BC 27년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후,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구스도라는 칭호를 수여받게 되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원로원을 장악하고,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불리는 “로마의 평화시대”를 열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연 로마의 평화 시기는 200년간이나 지속되어, 국내외적으로 평화롭고 발전된 로마국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고 명령을 내린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로마의 식민지에서 막대한 통치자금을 걷어 들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필요할 때 언제든지 군사를 모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의 정치적 지배를 받고 있던 유다 백성들도 호적을 하기 위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이 귀향 행렬 속에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을 하기 위해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을 때에, 이미 마리아는 만삭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 부부가 살던 나사렛에서 고향 베들레헴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무려 144Km나 됩니다. 만삭의 임산부가 무려 144Km의 먼 거리를 여행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것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천하를 다스리던 로마 황제의 권력유지를 위해서 이처럼 무리한 여행을 강행한다는 게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입니까?
더군다나 베들레헴에 도착했던 이 부부는 아기를 낳을 변변한 방 한 칸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아기를 낳자,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그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봅시다. 혹시 여러분이 그 모습을 목가적이거나 낭만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기를 낳아 가축의 여물통 위에 올려놓아야만 하는 부부에게 이 광경은 비참한 현실일 수 밖에 없습니다.
과연 이런 비인간적이고, 비참한 삶의 방식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까?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를 부르짖던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와 그 주변에 있던 권력자들의 지나친 권력욕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힘이 있고, 권력 있는 자들에게는 평화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평화를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비참함을 겪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평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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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이 사회를 안타깝게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정규직을 꿈꾸던 24살의 비정규직 청년이 태안화력발전소의 컨베이어 벨트에 몸이 끼어 사망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2016년에는 서울 구의역에서 한 비정규직 젊은이가 안전 문에 몸이 끼어 사망한 사고도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산업재해 사망률은 OECD국가 중에서 1위라고 합니다. 보건사회연구원이 1999년부터 2003년까지 통계청 사망 자료를 분석해 본 결과, 임시직과 일용직이 정규직에 비해 사망률이 3배나 높다고 합니다. 특히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최근 5년간, 발전소 안전사고로 인해 사망한 노동자 40명 중에 37명이 비정규직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의 목숨에 정규직, 비정규직 구분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규직의 경우는 신분이 보장되다보니 일이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그 일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우는 신분이 보장되지 못해 위험한 작업환경임에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출처: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371681&memberNo=15305315&vType=VERTICAL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꿈꾼다고 할 때, 과연 그 평화는 누구를 위한 평화여야 할까요? 우리가 성결을 이야기할 때, 성결은 개인적 성결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웨슬리가 주장한 성결은 사회적 성결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사회 곳곳에 하나님의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고,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머니의 따스한 숨결처럼 느껴지는 사회입니다.
독일 베를린에 가면 독일 히틀러의 치하 아래 순교한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교회의 예배 실에는 창문이 없다고 합니다. 아마도 히틀러가 지배하고 있던 당시 독일교회의 암울함이나 ‘출구 없음’을 건축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배당 안을 비추는 빛이라고는 고작 천장에 있는 십자가 형태의 석고를 통해 스며드는 희미한 빛이 전부입니다. 희미하지만 그 빛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습니다.
천천히 예배당을 둘러보는 이들은 창문이 있어야 할 자리마다 걸려 있는 여섯 장의 흑백 그림들에 주목합니다. 각각의 그림은 마태복음 25장을 형상화한 것인데,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들의 암담한 상황이 가슴 아프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그림들은 하나의 물음표로 사람들 앞에 서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려는가?” …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만삭의 여인은 몸 풀 곳을 찾지 못합니다.
-출처: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48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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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만삭의 여인은 몸 풀 곳을 찾지 못합니다.”
이처럼 비인간화된 사회에서 우리들은 낙심만 하고 있어야 합니까? 과연 우리들은 어디에서 삶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마치 카메라 앵글이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옮겨 가듯이, 이제 성경의 앵글은 로마의 황실에서 마구간으로, 마구간에서 또 다시 들판으로 옮겨갑니다. 거기에는 한 밤 중에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목자들은 한 밤중에도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 떼들을 지킬 만큼 삶의 현실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이 목자들은 어린 다윗을 연상하게 합니다. 어린 다윗은 아버지 이새의 양들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삼상 16:11).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홀연히 주의 사자가 그들 앞에 나타났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비추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로 무서워 떨고 있던 목자들에게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이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곧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겁니다. 이어서 천사는 목자들에게 그 표적을 보여줍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표적이 될 것입니다(10-12절).
천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어디선가 수많은 천군이 나타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절).”
과연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마련된 곳은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성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지나치게 율법화 되어 있었고, 세속화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예수님의 육신이 성전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그를 믿는 주의 자녀들을 성전삼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실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로마 황제가 하늘의 영광을 얻은 것처럼 자신을 신격화할지라도, 그 영광은 이 땅에서 그칠 것이고, 하늘의 영광에는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비천해 보여도,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자입니까? 로마의 왕좌에 앉아 있는 자입니까, 천한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입니까?
또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들에게 평화를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 황제는 ‘로마의 평화’를 주장하며 정치, 경제, 군사적 평화를 일구었지만, 힘없는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임산부와 갓 태어난 아기마저 기본적인 사회보장을 받을 수 없을 정도의 비인간화된 사회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과연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의 악순환을 겪어야만 하는 사람들도 경험할 수 있는 평화는 누가 가져다줍니까? 아기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이 로마의 권력자에게 먼저 알려진 것이 아니라, 당시의 빈곤 계층이었던 목자들에게 전해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비록 사회적 불평등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 예수 탄생의 소식은 평화의 소식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선물로 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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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여러분은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이일선 목사님을 아십니까? 이일선 목사님은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약수 동에 신일교회를 설립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한센 병 환자 치료를 위해 서울대 의대에 진학해 피부과 전문의가 된 목사이자, 의사요, 의료선교사입니다.
사람들이 이일선 목사님을 한국의 슈바이처로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분은 17살의 청소년 시절에 슈바이처 박사의 신앙과 인류애에 감동을 받고, 슈바이처에 대한 책을 네 권이나 집필하였습니다. 또 이일선 목사님은 1958년, 59년에 실제로 슈바이처 박사가 일하던 아프리카 가봉공화국 랑바레네 병원에서 슈바이처의 지도를 받은 한국의 유일한 의사이기도 했습니다.
이일선 목사님이 서울 신일교회에서 사역할 때의 일입니다. 목사님이 매번 교인들이 사준 새 양복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자, 어느 날인가는 교인들이 작정하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교회가 이만치 성장했으면 목사님 양복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새 양복을 그렇게 번번하게 남을 주시면, 총회와 노회에서 저희 체면이 안 섭니다. 우리는 교회를 떠나겠습니다.”
그러자 이일선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야 주일 빼고 늘 나병환자와 지내고, 주일은 흰 목사가운 입으니, 새 양복을 입어 무엇 합니까? 총회야 일 년에 한 번 가고요. 장로, 권사, 집사님들 사정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병 환자들이 진 물투성이 옷을 입고 사는데, 내가 새 양복 입고 가면 그들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정이 그러시다면, 새 양복은 아껴서 꼭 입고 가야 할 자리에만 입고 가겠습니다. 그러니 나간다는 말은 거두어 주십시오.”
당시 이일선 목사님이 목회했던 신일교회는 성도수가 1,000여 명이나 되는 대단한 교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일선 목사님은 청렴한 삶을 사셔서 교인들에게 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이일선 목사님이 의료선교를 위해 울릉도를 향하던 중에, 큰 풍랑을 만나 목선이 삼일 동안 바다를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이리저리 표류하던 목선은 급기야 북한의 원산 앞바다까지 밀려갔습니다. 멀리 보이는 뭍에 이른다 해도 월북이었습니다. 이일선 목사님은 배 안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죄인 혹여 살려주시면 울릉도 환자와 구령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주님 뜻대로 하소서.”
가까스로 역풍이 불어, 목선은 울릉도 해변에 다다랐습니다. 이 때 이일선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내 생명은 당신의 것입니다. 이곳에 의사가 없습니다. 내가 여기서 일하겠나이다(1975년 9월 2일자 ‘크리스챤신문’ 인터뷰 기사 중).”
그 기도대로, 1961년 3월, 이일선 목사님은 서울 신일교회 당회장직을 사임하고, 울릉도에 의료선교사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울릉도 인구는 27,000명이었고, 교회는 30~40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이들조차 고기잡이를 나갈 때면 성황당에게 제사를 지낼 정도로 믿음이 약했고, 이단의 세력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일선 목사님이 사역을 시작한 후, 울릉도에 있던 800여 명의 결핵환자는 300여명으로 줄어들었고, 68명이던 한센 병 환자는 4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1976년 기준). 과부나 고아, 독거노인 등 환자의 3분의 2는 무료 진료 환자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일선 목사님과 사모님은 1973년 이후로는 척추디스크와 골반골절로 인해 고통스런 나날들을 보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지에서 한센 병 환자들을 사랑으로 치료하다가, 끝내 미국으로 건너가 1995년에 LA에서 별세하셨습니다. 죽기 직전에 이일선 목사님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등에는 십자가가 있다. 그러나 입에는 노래가 있다.”
-출처: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1741704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이셨습니다. 환경적으로 보면, 아기 예수님의 삶은 그 출발부터가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던 불행한 출발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곧바로 이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없던 그 지역의 목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가 온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될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고통 중에 있는 분들이 이 사회에 많습니다. 곳곳마다 탄식의 소리가 들려오고, 선교지에서는 안타까운 순교의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밤하늘에 별 빛이 더 영롱하게 빛나듯이,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구원과 평화의 소식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아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작은 예수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