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자아화’라는 말속에는 자아의 이기적 욕망이 담겨 있다. 이는 물질적 욕망과는 다른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의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철학적으로도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에서 결국은 자아에 대한 존재론으로 의문부호가 옮겨간 것처럼 시인의 욕심만큼 세계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계의 문 앞에서 시인은 자신의 언어가 손상되고 있음을 안다. 아니 기존의 구조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문을 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존의 기의와 기표로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의 한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인은 굴욕보다도 더 큰 좌절을 마주하게 된다. 자아와 세계를 대등하게 놓고 문학을 얘기하는 통념에서 벗어나 세계와 세계가 충돌하는 사이 어디쯤 자아가 외롭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실존적으로 이 영역에 도달한 시인은 분명 마조히즘 또는 자폐적 언어로 자신을 방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자아의 존재 영역과 세계의 다층적 범주를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는 수용을 거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독자가 수용을 잘하거나 못하고의 문제를 떠나 시인의 세계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멈추지 않고 확장해나가야 한다. 해묵은 난해시 논쟁을 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존의 시학으로 세계를 껴안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미시세계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 속에서 발견한 작품이 바로 변선우의 「비세계」이다.
비세계 / 변선우
들판에서 닭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그것은 눈동자가 되고 있으므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자꾸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비세계에 있으므로, 우리 사이에 커튼이 있다.
닭 한 마리는 돌다가 탈주하고 있다. 숲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있으므로, 닭 한 마리가 덩달아 좇아가고 있다.
숲속이 조금 더 뻑뻑해지고 있다. 커튼은 세차게 펄럭거리고 있으므로, 나는 들통 나고 있다.
닭들의 눈은 모두 마흔세 개. 아니, 팔십하고 여덟 개…….
숲속에서 전쟁은 개시되고, 세상은 평면이 된다. 도무지 정지하지 않는 평면. 평평해지지 않는 평면……
-변선우, 『웹진 문장』 (2023, 5월호)
2. 비세계에서 세계로
화자는 평면에서 원을 그리는 닭들을 바라보고 있다. 발견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닭들의 운동성이 눈이 되어 화자를 응시하고 있다. 우리는 대상을 인식하고 표현할 때 고유명사라는 형식에 얽매어있다. 우리의 사유는 명사보다는 동사 또는 형용사, 아니면 그들의 명사형으로 인식하게 된다. 억지로 고유명사에 집어넣다 보니 감정들의 잉여에 기대고 만다. 그래서 슬픔에 천착해도 독자를 데리고 갈 수 없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제에서 보듯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 속의 닭의 개념으로 읽게 된다면 이 시를 읽는 행위를 그만둬야 할 것이다. 다시 작품을 보자. 운동에너지에서 시작된 존재자가 화자를 관찰하고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화자는 비세계에 있다. 커튼이라는 보잘 것 없는 벽에 안심하고 있다. 너무나 쉽게 무너질 것 같은 커튼, 하지만 화자의 용기가 작동한다면 화자는 비세계에서 세계와 대등하게 마주할 수 있는 대자적 자아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이 보인다. 이 용기가 통한 것일까? 아니면 이 또한 운동에너지의 변이일까? 닭들의 탈출을 목격하게 된다. 한 세계가 무너지고 또 다른 세계가 생성되고 있다. 구성원은 같으나 우리는 ‘숲’이라는 기표로 표기하는 세계이다. 연쇄적인 변이가 ‘쫓다’가 아니라 ‘좇다’ 인 것은 화자가 거시세계의 표면적 인식에 머물지 않고 논리적 사유를 하고 있다는 증명이 될 것이다. 커튼이 세차게 흔들리며 내가 ‘숲’이라는 세계에 들통나게 된다. 화자의 능동적 행위가 아닌 거대한 세계들의 충돌 속에 피동적으로 화자는 세계의 편입에 강요당한다. 어쩌면 인식과 이해라는 작용은 인간의 한계 의식을 증명하는 화석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수많은 기표를 생산해 내어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상태, 무명(無名)은 세계가 아니라 차라리 자아에 어울리는 단어일 것이다. 닭들의 눈에 대한 표현이 흥미로웠다. 닭은 인간과 눈의 위치가 다르고 시야도 다르다. 세상의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안면에 위치란 두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인간과는 다른 차원의 인식이라는 것이다. 처음에 ‘마흔 세 개’라는 인식은 인간 중심의 사고로 보인다. 그런데 팔십 세 개가 아니고 왜 ‘팔십하고 여덟 개’인가? 이 두 눈의 주체는 누구인가? 만약 화자의 두 눈이라면 비세계에 숨어 있던 개아가 흔들리던 커튼의 상실을 의미하고 ‘숲’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에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니면 운동에너지의 변이 속에서 새로운 논리적 사유를 창조한 화학작용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 이 세계 역시 ‘숲’이라는 명사로 묶을 수 없다.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 끊임없는 운동인 것이다. ‘도무지 정지하지 않는 평면’은 인간이 원하는 평평한 평면일 수 없는 것이다.
3. 시작(詩作)이라는 시작(始作)
위 시는 구체적 현실이나 현상에 기초하지 않는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핍진성을 제거한 채, 새로운 사유의 층위를 건너 뛰고 있다. 세계를 탐험하는 시인의 숙명이고 천형이다. 이 시는 기승전결을 좋아하는 수용자를 위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독자에게 위 시는 수수께끼나 암호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시에 대한 취향은 개인적인 것이고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인에게 독자의 입맛에 맞는 시를 써라고 강요하는 것 역시 폭력이다. 시인은 인간의 언어라는 수단으로 자신이 발견하고 찾아낸 세계를 설명해야 하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시인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지 못해도 지켜봐주고 기다려줘야하는 의무가 있다. 그것이 진정으로 세계에 천착하는 시인에 대한 마지막 예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위 시인의 동명의 작품을 보자.
분수에 빠진 생쥐와 분수에 빠진 또 다른 생쥐는 껴안는다. 분수는 정말 크고 생쥐들은 정말 작아서 방법이 이것뿐이라는 듯 껴안지만 냄새를 맡지 않는다. 후회와 모의가 없다. 믿음만 깊어진다 시인은 시작한다.
-변선우, 『웹진 문장』 「비세계」 중에서 (2023, 5월호)
「비세계」 라는 동명의 작품이다. ‘분수’라는 우주 속에 생쥐 두 마리가 껴안고 있다. 필사적이다. ‘정말 작아서’ 방법이 이것뿐이라는 말에 연민이 느껴진다. ‘냄새’를 맡지 않는 것은 식별을 포기하는 것이다. 후각을 통한 인식은 동종에 대한 안심과 또는 적개심을 가지고 저항하기 위한 본능적 행위이다. 하지만 더 이상 비세계에 있을 수는 없다. ‘후회’도 ‘모의’도 없다. 시인이라는 명사를 해체하고 시작이라는 동사로 귀결된다. 우리 모두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고유명사가 아니라 아름답고 서글픈 동사의 시작 앞에서 시인의 힘든 여정을 바라본다. 그의 시가 이 시점 이 시기에 조명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가 시작하였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하다. 다음 발표 시에서 만날 자아가 몹시 궁금해진다.
송용탁 편집위원
1977년 부산에서 출생. 국립창원대학교 국어교육전공 석사 졸업. 2021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