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8:1-11절)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다 옛날 저희들이 어렸을 때<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에서 한 악당(惡黨)이 주인공의 집에 쳐들어와서 식구들을 다 죽이는데, 그 집에서 혼자 살아남은 소년은 나중에 이 용서할 수 없는 악당(惡黨)을 찾아서 복수(復讐)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되는 악인(惡人)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여성이 어렸을 때, 선생이나 어른으로부터 성추행(醜行)을 당하고, 한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다면, 그 여성은 그들이 용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덩치 큰 사람에게 몽둥이로 맞아서 평생 장애(障礙)를 입게 되었다면, 그는 자기에게 장애(障礙)를 입게 한 사람이 용서가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인생의 마지막을 너무나 비참하게 끝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罪)나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는 것을 견디다 못해서 자살(自殺)로 인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전에는 별 세 개를 달았던 장군(將軍)이 무슨 조사를 받고 난 후에 투신자살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뇌물(賂物)혐의로 조사를 받던 어떤 정치인이,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을 성추행(醜行)한 혐의를 받던 한 연극영화과 교수(敎授)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유치원 교사와 원장이 자살했다는 기사가 있었고, 한 중학생은 친구 들에게 매를 맞다가 견디지 못해 건물에서 뛰어내려서 자살(自殺)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수많은 자살(自殺)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과연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고 과연 이런 식으로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정신적으로 정상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본문은 원문(原文)에서 논쟁(論爭)이 많은 사건입니다. 그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현장에서 간음(奸淫)하던 여자를 붙잡아 와서 예수님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 고 시험(試驗)하는 내용인데, 예수님은 이 간음(奸淫)한 여자를 용서해 주시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마 오래된 사본(寫本)들 중에서는 간음(奸淫)한 여자를 이렇게 쉽게 용서하면, 기독교가 오해 받는다고 생각했는지, 이 내용이 빠져 있는 사본(寫本)들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죄(罪)중에서는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되는 죄(罪)들이 있습니다.
어떤 질(質)이 나쁜 사람의 죄(罪)를 너무 쉽게 용서하면, 그 사람은 더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罪人)인 여자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다시는 죄(罪)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간음죄(姦淫罪)를 지은 여인을 예수님이 쉽게 용서하셔도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Ⅰ.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자 예수님께서는 초막절(草幕節)이라는 절기 때,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사람들에게 요7:37-38절)...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채워도, 채워도, 도무지 만족이 안 되는 갈급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세상의 지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이 원하는 것이 강같이 흐르기 때문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돈이 배에서 강같이 쏟아져 나오고, 원하는 명예나 지위를 얼마든지 실컷 얻게 된다면, 우리는 만족할 수 있을까?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聖靈)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 돈에 갈증을 느끼고, 명예에 목을 매다는 인간의 속을 다 시원하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성령(聖靈)을 받아보든지 아니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을 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성공(成功)이나, 사람들의 인정(認定)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8:2-6절)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님은 이른 아침에 성전(聖殿)에 나가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성전(聖殿)에 모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유대인의 지도자에 해당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奸淫)하던 중에 붙들린 한 여인을 끌고, 예수님에게로 왔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예수님에게 말하기를“예수님, 이 여자는 간음하던 중에 현장에서 붙들렸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뭐라고 판결을 내리시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이 여자를 끌고 와서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정말 몰라서 예수님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핑겟거리를 잡으려고 이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律法)에는 간음하다가 붙들린 남녀는 모두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율법(律法)이 엄격하게 지켜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거기에 비해 로마는 유대인들이 직접 사람들을 처형(處刑)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자체적으로 벌금(罰金)을 내리거나, 채찍질하는 것은 용납했지만, 돌로 쳐 죽이는 것은 금지(禁止)했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그것은 로마법에 걸리게 되고, 또 그냥 넘어가자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은 간음(奸淫)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려온 여자가 과연 어떤 여자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사람은 직업적(職業的)인 윤락(淪落)여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어디로 가면, 이런 여성들이 있는지, 잘 알았고, 그곳을 급습(急襲)해서 이 여자를 잡아 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에 이 여자를 상대하던 남자(男子)는 잽싸게 창문을 넘어서 도망을 쳤든지, 사람들에게 사정사정을 해서 그 자리를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21:31절)...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보면 유대 사회에 직업적인 창녀(倡女)가 많이 있었던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음란(淫亂)한 것을 원해서 창녀(倡女)가 되었다기보다는 빚을 갚지 못해서 창녀(倡女)가 되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음란(淫亂)한 짓을 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고, 죄인(罪人)임에도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 여자는 몸을 팔아서 빚도 갚고, 먹고 살던 여자였는데, 그날 재수 없게 단속에 걸려서 끌려 나가는 바람에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보통 때는 단속(團束)도 하지 않았고, 또 단속을 한다고 해도 걸리면, 돈을 주고, 빠져나왔는데, 이번에는 붙들려서 성전(聖殿)까지 끌려가게 되었고, 잘못하면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음란(淫亂)한 여성을 예수님에게 끌고 와서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시라고 재촉을 했습니다.
8:6-8절)...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때 예수님은 그 유대인들이나, 여자를 보지 아니하시고, 몸을 굽히셔서 땅에 자꾸 무슨 글씨를 쓰시기만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맨 땅에다 무슨 글을 쓰고 계셨을까?
“너희들은 죄가 없는 줄 아느냐? 이 꼴 보기 싫은 놈들!”이라고 쓰셨을까? 아니면“이 여자를 살려야 하나, 죽게 해야 하나?”라고 쓰셨을까? 아니면“햄릿(Hamlet)같이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고 쓰셨을까?
예수님이 무슨 글을 쓰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때, 글을 쓰는 것이 마음에 여유를 찾게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화를 하는 중에 엎드려서 글을 쓰시는 것은 예수님이 보통 배짱을 가지신 분이 아니신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엇인가 따지고 물으면, 당황해서라도 무슨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완전히 딴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요즘 정치(政治)하는 분들이 기자(記者)로부터 골치 아픈 예민(銳敏)한 질문을 받으면, 기자(記者)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유체이탈”이라고 하는데, 자기는 없어져버리고, 다른 사람의 일인 것처럼 대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의기양양(意氣揚揚)하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을 몰아붙일 때, 몸을 굽혀 글을 쓰심으로 모두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바로 성령(聖靈)이 역사하실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마다 자기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다 이기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의지했고, 성령님이 역사 하실 시간을 가지시려고 하셨습니다.
Ⅱ.예수님의 애매한 답변(마샬Marshall)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아니하시고, 땅을 보시면서 글을 쓰시니까 유대 지도자들은 계속 예수님에게 이 여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옳은지, 대답을 재촉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아주 알쏭달쏭한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그것은“이 여자를 돌로 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냥 아무나 돌로 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서“죄 없는 자가 가장 먼저 돌로 이 여자를 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고개를 숙이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슨 글을 쓰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번에는 무엇이라고 땅에 글을 쓰셨을까? 그것은“나는 너희 죄를 다 알고 있다”고 쓰셨던지,“너희 중에 죄 없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쓰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엎드려서 글을 쓰시는 동안에 거기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전부 양심(良心)에 찔려서 어른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전부 들고 있던 돌을 땅에 내려놓고, 성전(聖殿)에서 모두 다 나가고, 여자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령(聖靈)이 역사하시는 시간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良心)을 공격하셔서 그들이 지금까지 지었던 음란(淫亂)했던 일들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여자와 예수님을 심판(審判)하기 위하여 성전(聖殿)에 몰려들었던 사람들 중에서 예전에 음란(淫亂)한 짓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모두 이중적(二重的)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아주 율법(律法)을 잘 지키는 것 같고, 도덕적(道德的)인 생활을 하는 것 같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포르노(porno)를 즐기고, 매춘(賣春)하는 곳에 들락거리는 위선적(僞善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양심(良心)에 찔렸던 사람 중에서 왜 예수님 앞에서“예수님 저도 사실은 죄인입니다. 이 돌에 맞아 죽을 사람은 저 여자가 아니고, 바로 저입니다”라고 말하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을까?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명성(名聲)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상한 관심을 가졌지만, 예수님이 능히 죄(罪)를 사(赦)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여자를 끌고 온 사람 중에 양심(良心)이 찔렸을 때,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도 죄인(罪人)이라고 고백(告白)한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었더라도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작은 자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면서“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모두 양심(良心)에 찔림까지는 받았지만,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내놓을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의 눈을 하나님의 눈보다 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罪)가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자신의 죄(罪)가 드러난 사람과 아직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병(病)으로 치면, 병원(病院)에 가서 의사(醫師)로부터 진단결과를 통보받은 사람과 병(病)은 있지만, 아직 병원(病院)에 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사람의 차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罪)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찬송가 536장 *죄 짐에 눌린 사람은*
그런데 사람들은 죄(罪)문제보다는 자기 체면(體面)이나, 사회적인 비난, 먹고 사는 문제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 무릎을 꿇지 못하고, 고백(告白)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도“미투(me-too)”문제로 온 세상이 들끓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미국 체조 국가대표팀 닥터가 많은 어린 여자 선수들을 성추행(醜行)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선수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른이 되고 난 후에 자기 말고도 그런 일을 당한 선수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는 용기를 내어서 이 닥터를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법정(法庭)에서 증언(證言)한 후에 서로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이 닥터는 고발당하고, 처벌당하는 것이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에 우리나라에서도“미투(me-too)”가 막 일어났는데,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많은 사람이 그 대상으로 언론(言論)에 올랐고, 어떤 사람은 법정(法庭)에 서고, 어떤 사람은 자살(自殺)까지 했습니다.
아마 그때 남자들이 전부 벌벌 떨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비슷한 죄(罪)가 없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똑똑하고, 잘난 사람 중에서 이런 죄(罪)를 짓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온 사람 중에서 자기도 죄인(罪人)이라고 무릎 꿇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유대 사회가 썩을 대로 썩은 사회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Ⅲ.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아마 예수님께서 몸을 굽혀서 글을 쓰셨기에 망정이지, 예수님이 그 불꽃같은 눈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쳐다보셨다면, 그들은 고개를 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자신의 양심(良心)을 감추고, 돌을 내려놓고, 하나씩 둘씩 성전(聖殿)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여자와 예수님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고개를 들고, 일어나셔서 여자만 남은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8:10절)...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니라.”여자는 벌벌 떨면서“주여 없나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제 이 여자의 운명(運命)은 예수님 한 분의 손에 달렸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돌을 들어서 던지시면, 여자는 죽거나, 다치는 것이고, 돌을 던지지 않으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분명히“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을 들어 이 여자를 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11절)...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의 죄(罪)를 용서해주셨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음란(淫亂)한 짓을 행한 여자를 이렇게 쉽게 용서해주면, 세상은 어떻게 되느냐? 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罪)짓는 것을 우습게 생각해서 또다시 너나 할 것 없이 쉽게 죄(罪)를 짓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 여자에게 가서 다시는 죄(罪)를 범하지 말라 고 하셨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될까?
이 여자는 이미 사람들로부터 음란(淫亂)한 여자라는 낙인(烙印)이 찍힌 여자입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이미 음란(淫亂)한 생각과 습관(習慣)이 인(印)이 박여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예수님이 죄(罪)를 범하지 말라 고 하신다 해서 죄(罪)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 붙잡혀 온 이 여성은 예수님 앞에 끌려와서 고발당하면서 이미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바로 그 능력(能力)이 있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 앞에 강제로 끌려왔지만, 그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다른 사람의 유혹(誘惑)을 받고, 옛 생활로 돌아가려고 해도 예수님의 말씀만 기억한다면,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이 여인에게 새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즉 “그래 예수님은 나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어.”
“예수님은 나에게 새 사람이 되어서 살라고 말씀하셨어.”여인이 이것을 묵상하면, 이상하게 죄(罪)가 달아나게 되고, 얼마든지 죄(罪)짓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기 때문입니다.(히4:12)
우리나라에 자살(自殺)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패역(悖逆)하고, 음란(淫亂)한 사회인 증거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하나님의 선물(膳物)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죽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끝까지 살아야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 힘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죄(罪)를 다 고백(告白)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즉 내 마음의 미움과 음란(淫亂)한 행동이나, 생각들이나, 죄(罪) 지었던 모든 과거를 다 고백(告白)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고백(告白)만 하면, 다 용서해주시고, 죄(罪)를 이길 수 있는 새 마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罪)를 싫어하게 되고, 또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든지 죄(罪)짓지 않고, 아름답게 살 수 있게 해주십니다.
이런 새 마음으로 시작하는 사람들이 미래(未來)를 하나님은 지켜주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의인(義人)이면, 얼마나 의인(義人)이고, 니느웨와 같은 세상에서 정의(正意)로우면, 얼마나 정의(正意)로 울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자신의 허물과 죄(罪)를 인정하는 자만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핑계를 대고, 변명만 늘어놓고, 계속 그렇게 위선적(僞善的)으로 살고자 하는 자는 희망(希望)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11:28절)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한 죄인(罪人)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자신의 부족한 것과 허물을 자백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뿐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주십니다.
요일1:8-10절)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살 길이 생기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어린 아이로 다시 태어나면 됩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나의 모든 과거의 죄 짐을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두 어린아이가 되어 깨끗한 새 마음으로 새 인생을 시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찬송가 436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축복의 통로 다음카페 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카톡선교회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