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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 고난의 진짜 의미 (시118:5-9)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역사 속에서 전쟁을 겪지 않고 지나온 나라는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지난 5천 년 동안 거의 1,000여 번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는 단 한 번도 전쟁이 없던 날이 없을 정도로 전쟁은 늘 현재 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이미 보도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봐도 그렇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당연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도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좀 특이한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전쟁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은 그들의 전력이 아닌, 그들의 믿음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려 왔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전쟁은 어떨까요? 그 역시도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시다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믿는 것이 현재의 이스라엘입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기들이 벌이는 전쟁에 대해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틀렸습니다. ‘그렇지 않다!’가 정답입니다.
사무엘상 17:47절 후반부의 말씀을 보면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서는 다윗이 이런 선포를 합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이 말씀에서 보면 구약의 하나님이 전쟁에 개입하신 것은 맞지만, 그 전쟁은 오늘날 세상 나라들이 벌이는 전쟁과는 성격이 달랐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전쟁이 우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면, 오늘날의 전쟁은 인간들의 욕심의 산물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 오늘날에도 우상을 섬기는 나라나 하나님을 부정하는 나라들과의 전쟁이라면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개입하시느냐라는 문제가 발생합니다만, 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시대엔 전쟁에 개입하신 하나님이 오늘날엔 왜 개입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답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구약 시대엔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을 구원받은 자의 쌤플로 정하시고 그들이 불신자들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켜나가도록 믿음 아닌 것들과 우상의 것들을 직접 제거하고 통제하시는 과정에서 필요한 경우에는 전쟁에도 개입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더는 그러실 필요가 없게 됐습니다.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전후하여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바뀌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그렇다면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은 어떻게 다를까요?
공의의 하나님이 ‘믿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사랑의 하나님은 ‘믿음대로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누군가에게 뭔가를 반드시 ‘하게 하려’면 ‘당근과 채찍’이라는 양날의 검을 사용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랬기에 구약의 하나님은 사람들로 믿게 하시기 위해 즉각적인 복과 승리를 주셨지만, 또한 믿게 하시려니 즉각적인 책망과 전쟁도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는 공의보다 사랑을 앞세우십니다. 그래서 믿음대로 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가 믿기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또한 믿음대로 되게 해주시기 위해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현재 전쟁 중인 이스라엘이나 중동 지역의 나라들은 모두가 신이 내 편이라는 믿음으로 전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중동 국가는 알라를.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결국 그들의 전쟁은 자기들끼리의 전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저들에게는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유대교의 전통에만 매달려서 예수님을 부인했고 오히려 죽이기까지 한 민족이고, 이슬람은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닌 선지자 인간 마호메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실이 왜 중요한가 하면, 누가 됐든 나에게 예수님이 없다면 예수님의 구원이나 은혜는 물론이고 주시는 응답 역시 나에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나에게 구원과 응답과 은혜가 있으려면 나에겐 예수님이 계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경에서 말씀한 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며 무엇이든 주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살다 보면 누구나 어려운 시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부정적인 마음 자세를 가진다면 결국 그런 것들이 나도 모르게 내 믿음이 되어 내 인생이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믿음대로 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비록 어려운 시기를 만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가진다면 결국 어려움은 극복되고 이전보다 더 나은 형편으로 나가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대개 자살하는 사람을 보면 어려움이 닥쳤다거나 가진 것이 없다고 자살하지는 않는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유는 미래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내일은 없다.’는 이런 믿음으로 살다 보면 정말 내일이 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믿음 대로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꼭 믿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닙니다. 불신자들의 안 믿는다는 생각 역시도 나름의 확고한 믿음이기에 그런 믿음대로도 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믿음대로 된다 해서 스스로가 된다고 아무리 믿어봐야 소용없습니다.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저절로 될 리가 없고, 없는 것이 갑자기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믿음대로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어야 하는 이유이며 또한 믿음대로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개입하실 것을 믿고 기도하는 시편 기자의 절절한 심경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선 5절 말씀의 앞부분을 보면 시편 기자는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이때 고통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메차르’인데, 통상 ‘곤경, 고난’ 등의 의미를 가지지만, 실제로 이 말을 듣거나 쓰는 유대인들은 고난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이해했을까요?
저들이 ‘메차르’라는 단어를 쓸 때면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이란 의미로 사용했음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랬기에 저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을 만났을 때면 응당 저들이 한 일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라는 말씀을 유대적인 개념으로 의역해서 다시 써 보면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 중에 하나님께 기도했더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저들에게서 이런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나에게 있는 고난이나 고통, 문제나 어려움 등을 이젠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이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믿게 되면 그다음엔 누가 하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엔 당연히 믿음대로 되게 하시는 하나님, 또한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이 있게 될 것입니다.
순서가 그렇다는 것을 잘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응답을 받으려면 이 순서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1번. 내게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쳐왔음을 아는 게 믿음이고, 2번. 그랬기에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게 기도고. 3번. 그랬더니 하나님이 내가 요청한 대로 도움으로 응답하심이 감사요 간증인 것입니다.
이어서 5절 후반부를 보시면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라고 하는 부분을 해석을 잘해야 하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 ‘메르하브’를 직역한 것으로 본래의 의미는 ‘속박이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제까지 세상에서 여러분을 속박하여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여러분을 얽매는 굴레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고통이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이라고 한다면 그 반대 상황도 아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의 고통에 대해 하나님 편에서는 어떻게 보실까요?
하나님 역시 우리에게 있는 고통을 ‘하나님이 도움을 주셔야만 하는 위기 상황’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고통 중에 할 일이 부르짖는 거라면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 중에 하시는 일이 응답하시는 것이라는 것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시편 기자에겐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6절을 보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오늘은 우리가 새롭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간 우린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고 배웠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실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입니다. ‘그렇다.’와 ‘아니다.’입니다.
이리 말씀드리면 누구라도 질문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편이시란 거야? 아니란 거야?’라고.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언제나 내 편이신 게 맞습니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언제나 내 편이 아니신 것도 맞습니다. 그래서 6절 말씀을 다시 쓰면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믿는 사람의 편이시다.’라고 해야 맞습니다.
사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화 리‘는 의미상 ’여호와는 나와 함께 계시니‘라는 뜻입니다.
어째서 이런 논리가 가능한가 하면 아무리 하나님이 내 편이시면 뭐합니까?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즉 내가 하나님 편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믿음대로 되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말로는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내가 하나님 편이 되지 못하면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내 편이 아니신 것과 같은 결과가 되고 말 뿐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믿어야만 그 믿음이 내가 하나님 편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그런 내 편이 되셔서 나의 믿음대로 되게 하시고 기도한 대로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는 게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편인가?’가 중요하단 사실을 꼭 기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인생도 7절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의 삶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시편 기자는 8절과 9절을 통해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다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복 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먼저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믿음은 ‘세상 것이냐?’와 ‘하나님 편이냐?’의 사이에서 항상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대답이 여러분의 믿음을 대변하지 못합니다. 오직 여러분의 행동이 여러분의 믿음을 드러낼 뿐입니다.
이 말은 닥치기 전엔 무슨 말인들 못 하겠느냐만 불행이든 행복이든 일단 당해 봐야 내가 누구 편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은 받은 복을 죽는 길로 연결시킵니다.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요즘 왜 교회를 안 나오십니까?’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하나님의 어찌나 축복하는지 바빠서 못 나가겠어요.’라고 하더랍니다.
지금 내가 받은 복으로 인해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면 그게 과연 하나님이 주신 복일까요?
반대로 지금 내가 받는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결국엔 그런 사람에게 복을 주시지 않겠는지요?
비슷한 예화겠지만, 평소 열심히 기도 생활하던 분이 언제부턴가 세상일이 너무 바빠져서 기도를 빼 먹고 넘어가는 날들이 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잠깐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사다리가 보이더니 그 사다리가 하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얼른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도중에 사다리의 단이 하나 빠져 있습니다. 그러자 속으로 ‘하나님은 어쩌자고 단 하나를 빼놔서 이렇게 힘들게 하실까?’라고 생각하며 더 힘을 내서 올라가는데 어느 부분에서는 3단, 4단씩 빠져 있기도 한 걸 보고는 드디어 불평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
”하나님. 사다리로 하늘나라까지 올라가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3단, 4단이나 빠진 사다리를 주시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그때 천사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그 단은 하나님이 뺀 것이 아니라, 당신이 기도를 빼 먹을 때마다 하나씩 빠져나간 자리라오.’
여러분! 사실 하늘나라에서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게 기도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이미 다 있기에 부족하거나 필요한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며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만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서 기도가 없다면 세상을 사는 동안 힘든 건 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결국 나를 위해 내가 해야 하는 것이기에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를 방치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면 절대 기도가 빠진 인생을 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것만이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를 축복하고 사랑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8절과 9절에서 언급된 ‘피하다’라는 말은 ‘피신처를 찾다’라는 뜻인데 실생활 중에서 사용된 용례를 보면 ‘소망을 둔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며 또 앞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여러분에겐 어떤 부족함이 있으셨습니까? 또한 절실히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피하세요. 즉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 편이 되는 믿음을 가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에게 있는 고난이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이라고 한다면 고난은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게 하는 축복을 위한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도우셔야 할 상황이 되면 우리를 위해 역사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으셔서 고난 덕에 오히려 하나님만을 소망하며 결국엔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