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세속도시의 즐거움』은 최승호 시인의 네 번째 시집으로 1990년 제2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한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시인이 고구하고 있는 주제를 두 가지로 집약해 보면 ‘문명도시’와 ‘죽음’이 될 것이다. 『세속도시의 즐거움』에서 죽음에 대한 탐구는 ‘지하철’, ‘자동판매기’, ‘자동차’, ‘변기’, ‘기계’, ‘공해’ 등과 같은 도시적 물상에 대한 경험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시인은 그의 첫 시집 『대설주의보』에서부터 이러한 다양한 도시적 물상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 왔다. 『세속도시의 즐거움』은 그 연장선상에 자리하고 있는 작품들이자, 세속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순된 삶을 모순어법으로 형상화하여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집이다.
‘세속도시’라는 의미망 안에는 생태환경, 문명, 종교, 자본주의 등속의 다각도적인 문제가 포회되어 있다. 『세속도시의 즐거움』에서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들의 상호작용으로, 삶과 생명의 체계가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린 세계를 ‘세속도시’로 표상하고 있다.
『세속도시의 즐거움』에서 ‘세속도시’는 매우 그로테스크하면서 비극적으로 그려지는데 「공장지대」는 이러한 시적 경향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이다. 「공장지대」가 ‘무뇌아를 낳은 산모’나 ‘폐수를 뿜어내는 젖’과 같은 그로테스크한 소재로, 생태환경의 위기를 그리고 있다면 「복면의 서울」은 ‘전화’라는 문명의 이기를 소재로, 도시적 삶의 양식이 안고 있는 익명성, 고립성, 그로인한 강박 관념적 불안 등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시인이 인식한 도시적 삶의 양식 이면에 감추어진 극한의 불모성과 파멸의 징후를 『세속도시의 즐거움』이라는 반어와 역설의 세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 『세속도시의 즐거움』(최승호, 세계사, 1990)
공장지대 / 최승호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자궁 속에 고무인형 키워온 듯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 털들을 하루 종일 뽑아댄다.
복면의 서울 / 최승호
하루에도 너댓번씩 전화가 온다 그는 늘 말이 없다 나의 목소리를 듣기만 한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같은데 나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
자신을 숨은 신이라 생각하는 정신병자? 밤중에도 새벽에도 전화가 온다 그녀인지도 모르겠다 내 애를 낳았다고 주장하던 결혼 전 그 거머리여자는 아닌지 집으로도 사무실로도 전화가 온다 저쪽은 늘 말이 없다 내가 있는지 없는지 듣기만 한다
혹시 나를 뒷조사해 컴퓨터로 읽고 있는 전지전능한 형사는 아닌지 나는 불안에 끄달리기 시작한다 저쪽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모든 전화기들이 복면을 쓰고 일어나 나를 둘러싸고 킬킬대는 밤
전화선을 뽑아버린다 불통의 밤 벽이 나를 막아주는 밤 雜鬼들은 無心으로 물리쳐야 한다고 나를 달래며 사악해지는 밤 속에서 한결같은 달빛을 쳐다본다
자동판매기 / 최승호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 버렸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 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 다닌다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 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매춘부賣春婦라 불러도 되겠다 황금黃金 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권능權能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매음賣淫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십자가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신神의 오렌지 주스를 줄 것인가
출처 ; 최승호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 1985년. 문학과 지성사.
자동차에 치인 눈사람 / 최승호
자동차는 말썽이다. 왜 하필 눈사람을 치고 달아나는가. 아이는 운다. 눈사람은 죽은 게 아니고 몸이 쪼개졌을 뿐인데, 교통사고를 낸 뺑소니 차를 원망하는 것이리라. "눈사람은 죽지 않는단다. 꼬마야, 눈사람은 절대 죽지 않아." 아이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저씨, 눈사람은 죽었어요. 죽지 않는다고 말하니까 이렇게 죽었잖아요."
『얼음의 자서전』, 세계사, 2005.
변기 / 최승호
1. 늦은 밤 불을 켜니 둥근 벽 변기에 빠져 있는 귀뚜라미, 몸뚱이보다 촉수가 긴 게 별깨나 헛더듬은 시인 같다. 거품의 밤을 울던 창녀 같다.
2. 변기의 물 전체가 떨고 떨림의 진원점에 그가 있다. 파도에 까만 눈이 어리둥절 흔들린다. 내가 일으킨 파도에 내가 휩쓸려 익사하는 수도 있겠구나
3, 둥근 벽 안에서 귀뚜라미가 헤엄친다 저쪽이 피안이겠지 출렁이며 헤엄쳐 가 닿는 순간 둥근 벽이 그를 밀어낸다
어쩔 것인가 가는 곳마다 둥근 벽이요 가지 않으면 천천히 몸이 가라앉을 때
4. 굴원이여 아무리 욕돼도 죽지 못하는 자들을 왜 괴롭히는가 강물 속에서 거울을 들고 일어서는 큰 물귀신
살아서는 세상에 거슬리고 죽어서는 물살에 거슬렸던 기개 있는 굴원이여
나는 멋있는 놈이 아니다 세상이 본래 청탁한데 나만 탁하다고 생각하니까
5. 둥근 벽 밑바닥의 구멍은 언제라도 삼킬 준비를 끝내고 때를 기다린다
누구든 죽음의 반대편으로 노 젓는 일이란 없는 것이다
구멍으로 들어가긴 들어가는데 왜 이리 오랜 날들을 겁먹은 채 맴돌다가 들어가야 하는지
6. 변기의 뚜껑을 덮으면 귀뚜라미의 절망은 완성된다. 둥근 벽을 덮치는 둥근 뚜껑, 나는 귀뚜라미를 건지지 않았다. ‘
움푹한 자궁과 움푹한 무덤이 아가리를 꽉 맞추고 한 덩어리 동글네모난 감옥을 이룬 뭐랄까, 임신에서 매장까지의 길들이 둥근 벽 안에서 미끄러지고 뒤집히는 거대한 변기의 감옥 속에서 죽어가는 나를 건져줄 그 어떤 손도 나는 거부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