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풍자우화: 쥐박산성 사람들 이야기2
지은이: 참서옹
2. 쥐통장관의 일기
내가 어릴 적 우리 집에 묵다 간 큰 나라, 미국의 평화봉사단원이 예쁜 동화책을 생일선물로 보내주었다. 꼬부랑글씨로 써있어 뜻은 잘 몰랐지만 그 천연색 그림을 넘기며 맞던 흥분과 황홀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동화책을 읽으며, 디즈니 만화를 보며 생각했다. 미국 여자들은 모두 백설 공주와 같이 아름답고 유럽의 거리는 신데렐라에 나오는 뾰족 성처럼 예쁘리라고. 그리곤 백마를 탄 왕자가 되어 잠자는 숲 속의 미녀와 같은 공주를 만나 뾰족 성에서 사는 꿈을 꾸었다. 좀 커서 중학생이 되었을 땐, 서부 드라마와 영화의 주인공이 인디언을 박살낼 때마다 박수를 쳐대며 헐리웃 키드로 살았다. 고등학교 땐 쥐박공화국 여자와 달리 가슴이 축구공 크기는 됨직한 쭉쭉빵빵한 미인들이 나오는 영화를 몰래 보며 그런 여자와 해변에서 뒹구는 상상을 하였다.
참 큰 나라, 모든 물질이 넘치게 생산되고 소비되는 나라,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과 군대와 정보력을 가진 나라, 아름다운 여자가 넘쳐나고 그들과 마음껏 놀아날 수 있는 나라 미국! 난 정의의 보안관이 되어 백마를 타고 마릴린 몬로처럼 생긴 여자를 뒤에 태우고는 초원을 신나게 달리는 장면을 몇 번이고 상상했다. 마늘 냄새나는 김치는 거의 먹지 않았고 될 수 있는 한 특별한 맛이 감도는 미제 음식을 먹으려고 미군 부대의 군무원으로 있는 아버지를 졸랐다.
아버지를 따라 친구 몇을 데리고 시청 앞에 있는 미국 공보원에서 영화 《그린베레》를 본 이후, 난 학교가 파하는 대로 뒷산에 올라 그린베레가 되어 소련 놈과 공산괴뢰 도당을 박살내는 놀이를 땅거미가 지는 줄도 모른 채 반복했다. 조금 더 커서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팝송에 열광하였고, 밤새도록 애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그 짓거리도 흉내냈다. 그러다 가끔은 프로스트의 시를 읊조리고 포스터의 가곡을 들으며 프론티어정신과 프라그마티즘이 마디마디 밴 대평원과 싱그러운 청춘남녀를 떠올렸다.
난 마침내, 미군부대에서 물자를 빼돌려 한 몫을 잡아 그를 밑천으로 사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꿈에 그리던 미국유학 길에 올랐다. 햐! 얘들 결혼 후엔 철저한데 그 전엔 프리섹스를 주장하는 계집애들이 부지기수라. 어찌 안 될까 작업을 걸어보았지만, 그 계집애들 꼴에 대국의 백인 미녀라고 약소국에서 온 노란 얼굴의 나를 매번 무시했다. 하는 수 없이 그 생각이 나면 사창가를 찾아갔다. 거기엔 인종차별이 없었다. 달러지폐만 가득 쥐어주면 날 뿅 가게 하였다. 일기를 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괴성을 지르며 출렁이던 그 탱탱한 가슴, 그 젖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고 흔들던 때가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가장 소망하던 나라에서 평생 그리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내 지도교수와 심사위원들은 내 논문이 형편없다며 계속 통과시켜주지 않았다. 몇 년을 더 퇴짜를 맞던 중 이미 학위를 받고 쥐박공화국에서 교수를 하는 선배들이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쥐박공화국의 관련논문을 세 개 정도 구해 짜깁기하여 내놓았다.
지도교수는 “군의 논문엔 전혀 새로운 무엇이 없어. 쥐박공화국 관련 사항 정도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니 관심이 좀 갈 정도고.”
난 계속 지도교수를 찾아가 선물공세를 하며 졸랐다.
“그래도 그냥 박사학위만 주시면 안돼요? 늙으신 노부모가 저의 귀국을 학수고대하고 계십니다.”
그래도 통하지 않아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도 하고 더 비싼 선물을 하기도 하면서 갖은 방법을 동원하였다. 매일 찾아가 귀찮게 굴자 지도교수는 차라리 학위를 주어 보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어느 날 박사학위를 주겠다며 부르더니, 그 고집 센 늙은이 왈,
“유-어-낫-마이-디싸이플.(You're not my disciple. 넌 내 제자가 아니야.)”
미국에서 활동하지 않는 조건으로 박사학위를 따는 바람에, 별 수 없이 고국으로 돌아와 강단에 섰다. 별 볼 일 없는 약소국인 이 나라에선 난 미국에서와 달리 봉이었다. 선구자의 자세로 불쌍하고 초라하며 무지한 쥐박공화국 사람들에게 미국이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이며 미국식 민주주의, 미국식 가치가 얼마나 합리적이고 선진적인지에 대하여 강의하였다. 이런 내용을 잘 정리해 놓은 책으로 인해 나는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학술상을 받았으며 마침내 훈장도 탔다. 나의 제자들은 이곳저곳에 퍼져 나의 사상과 학문을 전파하고 있다.
어느 날 집 전화벨이 울렸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고대하던 자의 목소리다. 장관이 되어 그 일을 우리나라 전체에 파급시키지 않겠느냐고. 나는 나에게 강의를 들은 적 있다는 그에게 대답했다.
“오-케이! 요 마 베슷 디싸이포(You're my best desciple; 넌 내 최고의 사도야).”
장관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협상을 하게 되었다. 미국대표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이였다. 난 허리를 깊숙이 굽히며 두 손으로 그의 오른손을 감쌌다. 그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미국 어느 대학의 무슨 학 박사이며 그 대학에서 이런 저런 미국 정신을 배웠노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굿!’을 연발하며 자기가 다닌 대학의 정신도 그와 비슷하며, 그것이 모두, 인류의 평화와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한 미국정신과 통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신이 나는지 미국 정신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한 후 자신이 미국정신에 대해 쓴 책이라며 책 한 권을 내놓았다. 난 이리저리 넘겼다. 미국 대표는 한 쪽을 펼치더니 이 부분을 잘 읽어보라고 했다. 제목이 <미국이 제3세계를 지배해야 하는 이유>였다. 다음 장의 제목은 <제3세계를 불만 없이 착취하는 방법>이었다. 내가 눈길을 주는 동안 미국 대표는 친절하게도 그것을 쥐박공화국과 연결시켜 설명해 주었다. 난 오랜만에 듣는 본토 발음과 본토박이 담론에 담긴 논리성과 합리성에 취하여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난 개인적으로 우리나라가 미국의 53번 째 주가 되는 것이 약소국으로 지내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란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독립국? 포스트모던 시대에 국가, 민족 이런 것들은 모두 환상이다. 국민들이 더 잘사는 길이 무엇인가. 별로 자원도 없고 게다가 부조리와 부패가 심한 땅에서 그리 아등바등 사느니, 아예 미국에 복속되어 정치, 경제, 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선진 제도와 법과 시스템을 수용한다면 미국 국민처럼 잘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난 이번 협상도 우리 경제와 시장이 미국에 통합되는 디딤돌을 놓았다고, 그것이 진정 이 민족을 위한 길이라고 자부한다.
말을 마친 미국 대표는 협정서를 내밀며 자기 말을 알아듣겠느냐고 물었다. 난 내 나라 백성들의 먼 미래를 생각하여 미국 대표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양보해 주었다. 그러자 미국 대표는 악수를 다시 청하며 말했다.
“오-케이! 유-어 마-이 베-스-트 디-싸-이-플.”
그러고 쥐박공화국에 돌아왔더니 세계정세도 모르고 미국정신에 깡통인 무지한 시민들이 불평등협상이니 뭐니 하며 재협상하라고 아우성이었다. 날 매국노라 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쥐박신문들이 연일 민족의 먼 장래를 위한 위대한 결단이라고 평가하는 기사를 싣지 않았으면 너무 억울해서 화병이 낫을 것이다. 참, 답답한 민족이다. 멀리 보지를 못한다.
시민들은 연일 시청 앞에서 촛불시위를 하였다. 산성 안으로 넘어오려고 하여 간신히 군인을 동원하여 제지하였다. 그럭저럭 쥐박산성 안에서 미국귀족 흉내를 내며 잘 살았는데, 내 협상으로 인하여 우리의 본토 미국과 쥐박산성 안 사람들은 잘살게 된 대신 쥐박공화국의 경제는 좀 궁핍해진 모양이다. 게다가 우리 공화국의 대통령이 실정을 거듭한 것이 도가 지나쳤고,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시민들에게 발포명령을 내려 저항을 부추겼다.
분노한 민중의 봉기가 드디어 산성을 넘었다. 나는 허겁지겁 짐을 챙겨 쥐박산성 안에 있는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가 망명 신청을 하였다. 그동안 미국에 족히 수 천 억 원의 이익을 주도록 했으니 당연히 칙사 대접을 받으리라 생각하며 소파에 앉아 캘리포니아산 쥬스를 마시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이미 본토에 가서 미국 국적을 가지고 미국인처럼 살고 있는 아들, 딸, 손자, 손녀들과 곧 만나자며 통화도 하였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영사는 몇 군데 전화를 걸어보더니 나에게 이리 오라는 신호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미안하네, 쥐통장관!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자네는 자네가 소속된 나라를 단박에 가난하게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지녔으니, 미국으로 오면 미국이 쫄딱 망할지도 모른다며 다른 나라로 보내라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