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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전쟁터인가? 놀이터인가?
I. 세상에 대한 이해
어떤 시인은 자기의 삶을 가리켜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것이라고 표현했다. 소풍, 참으로 여유로운 표현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이 세상이 어떤 곳이라고 느끼는가? 이 세상이 여유롭게 즐길만한 것들이 많은 곳이라고 느껴지는가?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이 사는 현장은 전쟁터인가? 아니면 놀이터인가?
만일 이 세상의 통치자가 사탄이라는 것을 안다면(눅4:6)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더 이상 놀이터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사탄은 권능과 왕국들의 영광을 소유한 자다. 그는 이 세상의 신(神)이라고 불려질 정도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이 세상이 사탄에 의해 장악된 세상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이 곳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적진이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북파공작원을 훈련시킨 적이 있다. 그런데 적진에 보내기 위해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놀이가 아니었다. 총 맞고도 다시 살아나는 서바이벌 게임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은 적진에서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적진에 보내지면 그들은 아무것도 성취할 수가 없다. 자, 그런 혹독한 훈련을 통해 북쪽으로 넘어갔다고 하자. 그들은 관광객으로 간 것이 아니다. 그들은 놀러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즐기기 위해 그곳에 보내진 것이 아니다. 적진에 있는 그들에게는 임무가 있다. 적진에 있는 그들에게는 긴장감이 있다. 적진에 있는 그들에게는 어느 때 치열한 싸움을 해야만 한다. 그런 그들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이 놀이터인지, 아니면 전쟁터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지금 놀이터에 있는가? 아니면 전쟁터에 있는가?
II. 이 세상을 놀이터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문제점
왜 이런 문제 제기를 하는가? 이 세상을 놀이터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는 이 도리가 많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놀이터로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재미를 찾게 된다. 재미가 없으면 그들은 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 찬송도 재미있게 불러야 하고, 재미없는 찬송은 입맛이 당기지 않는 음식과 같다. 만약 당김음을 없애고 엇박자를 없앤다면 정말 찬송은 재미없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그런 찬송은 구닥다리이며 한 물 간 것이다. 예배는 쇼이다.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재미가 없으면 은혜도 없다. 코믹해야 하고 볼거리도 있어야 하며 귀를 즐겁게 해줄 부드러운 음악도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을 위한 공연을 원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세상을 놀이터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 그들이 믿기 전에 즐기던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일요일에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여지고 나머지 육일 동안은 세상의 방법을 따라 즐길 수 있는 대로 즐기는 것이 그들의 신조다. 어쨌든 죄는 용서되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으니 그것을 누리며 세상 방법대로 살아가도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이 세상을 놀이터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굳이 서둘러서 하늘나라를 갈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고난당하심으로 구원받아 어차피 가게 될 곳이라면 좀더 이 세상에서 즐긴 다음에 간들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좀더 즐겁고 편한 인생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육신적인 안락함을 잃게 된다면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받는 것, 수치를 당하는 것,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충대충 타협하면서 갈 것이지 지나치게 광신적이 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그들에게 있어서 재림에 관한 설교는 그리 반갑지 않다. 그분이 다시 오신다는 설교보다 이 땅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설교, 복 받을 수 있다는 설교, 잘될 수 있다는 설교에 더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귀띔해준다. 또 이 땅에서의 성공 사례를 발표하는 연예인이나 어떤 스타가 간증하는 것에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은혜 받았다고 한다.
이 땅을 놀이터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죄와 싸워야 하는 사람(히12:4)인 것을 알지 못한다. 죄가 다가오는데도 무기력하다. 마치 롯이 처음에는 소돔 성을 바라보고(창13:10), 나중에는 그곳을 향해 장막을 치다가(창13:12), 이제는 아예 그 안에 거주하며(창14:12) 그 곳의 유력한 사람이 되어서(창19:1, 잠31:23) 하나님이 빠져나가야 한다고 재촉하는데도 망설이는 사람(창19:16)이 된 것처럼 재미를 위해 발을 디뎌놓은 곳으로부터 나오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신앙생활하고.......
이 세상이 놀이터라고 말씀해주신 구절이 없다. 우리를 이 땅에서 잘 놀기 위해, 혹은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잘 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를 군사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어 내라. 전쟁을 치르는 자는 아무도 이 세상 삶의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자기를 군사로 택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3,4)
III. 사탄의 전략과 전술
사탄의 전략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려는 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초기 교회에서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칼로 위협한다면 그들이 가진 신앙을 포기할 줄로 알았다. 그리스도인들을 불 속에 태워버린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사라질 줄로 알았다. 그리스도인들을 사자들 앞에 세운다면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중단될 줄로 알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물 속에 던져 넣어버린다면 주님의 교회가 쇠약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틀렸다. 그의 생각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믿음을 지켰으며,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했다. 또한 주님의 교회는 여전히 존속하게 되었다.
이제 이 마지막 시대에 사탄은 전술을 바꾸었다. 투쟁적인 모습을 감추고 사람들을 넘어뜨릴 수 있는 새로운 것을 내놓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놀이라는 것이었다. 오락이었다. 게임이었다. 세상에 있는 수없이 많은 놀이감을 모아서 정신 못 차리게 해놓고 이제 교회 안에서 마저도 신앙을 놀이로 여기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다.
마치 일본인들이 이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기 위해 화투라는 것을 유포시킨 것과 같다. 물론 그 전부터 우리나라에는 투전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화투는 더 세련되었고 다양한 류의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이 화투는 명절 때는 물론이거니와 피서지에서도 즐기는 아주 심각한 오락이 되었다. 사실, 오늘날 친일 청산을 외친다면 이런 놀이부터 뿌리 뽑아야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에서 과거 5공화국 시대에도 그런 것이 있었다.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통치자는 어떻게 하면 국민들의 정치의식을 환기시켜 정치적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을까를 골몰했다. 자기의 집권에 대해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국민들을 어리석게 하는 정책을 썼는데 그것이 3S라는 정책이었다. 그것은 스크린(Screen), 섹스(Sex), 스포츠(Sports)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그 중에 스크린에 관한 것을 생각해보자. 1980년 12월부터 실시된 컬러TV 방송과 컬러TV 수상기 및 VTR 보급은 사람들의 눈을 통치자에서부터 브라운관으로 몰고가버렸다. 섹스에 관한 것도 정책적이었다. VTR의 보급과 초기 포르노 테이프의 확산은 백성들로 하여금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백신이 되고 말았다. 통치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세 번째 전술도 펼쳤다. 그것은 스포츠였는데 1980년 10월 말에 우리나라에 프로야구단이 창단된 것이다. 당시 이 프로야구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창단이었는데 자연스럽게 지역감정까지 조장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해태는 전라도 삼성은 경상도 삼미 슈퍼스타는 경기도 MBC 청룡은 서울, OB 베어스는 충청도.......사람들은 이제 놀이감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것에 푹 젖어드느라 광주사태의 장본인들에게 굽신 거리게 되었고 그 다음으로 올바르지 않게 바통이 넘어가는데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 다음 바통을 이어받은 통치자는 한 술 더 떠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이라는 것으로 국민들을 사로잡았다. 국민들은 정권의 정당성을 따지기보다 그 놀이에 몰두하게 되었다. 가히 성공적이었다.
사탄은 이와 같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전투적이 되지 못하도록 이 세상에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뿌려놓았다. 오락거리가 많아졌다. 볼거리도 들을 거리도 많아졌다. 음악, 영화, 예술, 놀이, 스포츠, 컴퓨터 게임 등등.......할 수만 있다면 거기에 푹 빠져들어서 자기의 세력에게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 사탄의 전술이 되었다. 거기에다 최근 사탄이 또 한 가지 히트를 한 게 있다. 엿새 동안에 수고하여 네 모든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출20:8)과 상관없이 주5일 근무라는 것이 도입되면서 더 많은 시간을 놀이와 오락과 여흥을 위해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믿음의 선조들에게는 죄송하지만 “16세기나 17세기의 성도들이 그들의 믿음을 지켜 가는데 더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식이다. 간단했다. 그들은 오직 진리만을 위해 투쟁하면 되었다. 거짓된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경건한 삶을 유지하면서 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이제 어떤 것들이 싸워야 할 대상인지 끌어안아야 할 것인지 조차 모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분별하지 못하고 뜸을 드리는 사이에 어느덧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에 길들여지고 게으르며 태만하게 되었고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그런 성도들이 되고 말았다. 사실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에게 놀이터가 아니다. 전쟁터이다. 그런데도 전쟁터임을 잊고 여유롭게 지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졌다.
IV. 발람의 교리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
왜 성경은 발람의 잘못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유11). 그가 태양신 산당에 올라간 것 때문인가? 그가 발락의 제안에 눈이 어두워 끝끝내 그를 따라간 것 때문인가? 물론 그것도 잘못이다. 그런데 발람의 가장 큰 잘못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교묘한 술수를 부린 것이다.
“그러나 네게 몇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거기에 발람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네게 있기 때문이로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걸림돌을 놓아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고 또 음행하게 하였느니라”(계2:14).
발람은 이스라엘을 넘어뜨리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걸림돌을 놓아둔 사람이다. 도대체 발람이 놓아둔 걸림돌은 어떤 것인가? 모압왕 발락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시키신 이스라엘 백성이 점점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락은 발람을 불러서 그들을 저주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발람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백성을 저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시팀(싯딤)에 거할 때였다. 그 때, 발락 왕이 바람에게 묘책을 묻자(미6:5) 발람은 발락을 위한 꾀를 내놓았다.
그것은 그들을 향해 칼을 들고 쳐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진영에 불화살을 집중적으로 쏘아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또 그들을 향해 잘 훈련받은 기병들을 기습적으로 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봤자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백성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발람의 꾀는 그런 게 아니었다. 발람의 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을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는 꾀였다. 쉽게 말해 그것은 섹스 작전이었다. 미인계였다. 이스라엘을 넘어뜨리기 위해 나선 자들은 용맹한 모압의 용사들이 아니었다. 모압의 군대가 아니었다. 모압의 여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이 시팀(싯딤)에 머무르더니 백성이 모압의 딸들과 행음하기 시작하니라”(민25:1).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여자들은 칼을 차지 않았다. 여자들에게는 창이 없었다. 여자들에게는 화살도 없었다. 오히려 여자들에는 미소가 있었으며, 여자들에게는 부드러움이 있었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가슴을 콩당거리게 할 만한 눈빛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그 여자들에게 아무런 적대감도 느끼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그 여자들을 따라갔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그 여자들과 붙어서 뒹굴게 되었다.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그들의 친구들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숭배하는 바알브올 앞에 서게 되었다. 주님의 분노가 불같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발람의 계락은 성공적이었다.
“그 여인들이 자기 신들에게 희생물을 드릴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니라. 이스라엘이 스스로 바알브올에게 연합하므로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해 불같이 타오르니라”(민25:2,3)
이제는 그들 가운데 굳이 이방 여인들을 찾아가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회중으로 들어오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런데, 보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중의 성막 문 앞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이 모세의 눈앞과 온 회중의 눈앞에서 미디안 여인 하나를 데리고 자기 형제들에게로 오니라”(민25:6)
교회 안에도 세상의 놀이가 들어오고 있다. 교회 안에도 세상의 문화가 침투해오고 있다. 마치 한 이스라엘의 남자가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자기의 회중의 형제들 앞에 자랑스럽게 들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적인 문화를 교회에 침투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쇼라는 여자를 교회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자랑스럽게 형제 자매들 앞에 소개한다. “예배는 쇼여야 합니다. 예배는 볼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들이 즐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데리고 온 이 쇼를 보십시오. 예쁘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배는 쇼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세속적인 음악이라는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비록 이방 여자이긴 해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여자가 얼마나 나를 즐겁게 하는지 모릅니다. 대단한 여자입니다. 우리 이 세속적 음악으로 교회 안에서 노래하도록 합시다. CCM 그거 내가 해보니까 괜찮습디다.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이 여자랑 하루 밤만 잠을 잔다면 이 여자를 가까이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될 겁니다. 거기에 얼마나 짜릿함이 있는지 아십니까? 거기에 얼마나 흥분을 자아내는 게 있는 지 아십니까? 그런데 왜 이걸 마다합니까? 근본주의자들은 멍텅구리예요. 이런 좋은 것을 마다하다니, 꽉 막혔어요. 이런 달콤한 것을 즐길 줄 모르다니.......오늘도 나는 이 여자를 데리고 내 장막 안으로 들어갈 겁니다. 날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런데 보라.”(민25:6) 이 말이 얼마나 주의를 환기 시키는 말인가? 아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는 뜻이다. 이미 모압 여자들과의 행음으로 인해 이스라엘 진중에 재앙이 시작되었다. 주님의 노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백성의 우두머리를 모두 붙잡아 해를 향하여 주 앞에 목매어 달라”(민25:4)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는 이방 여자를 진중에 데리고 와서 함께 누우려는 사람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그림이다. 세상에서 즐기던 것을 거룩한 주님의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오려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때, 이 세상을 전쟁터로 여긴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손에는 창이 있었다. 그가 비느하스였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요,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이것을 보고 회중 가운데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장막에 들어가서 그 두 사람 곧 그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으니.......”(민25:7,8)
“거 재밌겠구만. ” “혼자만 즐기지 말지, 그래” “친구하나 소개시켜 달라고 해.......” 놀이터로 아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그곳은 놀이터가 아니었다. 전쟁 중이었다. 비느하스처럼 창을 들 사람이 필요하다. 부드럽게 다가온 여자를 찔러 죽일 창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그 여자를 끌어들인 남자를 찔러 죽일 용사가 필요하다. 언제든 주님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전사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이 비느하스의 행동을 통해 재앙을 중단하셨다.
지금이 전쟁 중인 것을 알지 못하면 교회들은 타락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 전쟁 중인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가정이 세속화될 것이다. 지금이 전쟁 중인 줄 알지 못한다면 나 개인의 신앙은 게으름과 제멋대로가 될 것이다. 지금이 전쟁 중인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가 전쟁터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더 고도의 전술로 사탄이 우리를 쓰러뜨리려 하고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단순히 놀이터로만 여기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은 기도할 때도 그리스도께 기도만 드리면 경건한 태권도 선수가 다른 선수를 때려눕혀 눈알이 풀리도록 도우시는 분으로 알고 있다. 한 사람은 의식불명의 순간이 되었지만 무릎을 꿇고 기도하므로 그 사람을 때려눕힌 것이 신앙의 힘인 것처럼 보여주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닌데도 그렇게 저속하게 하나님이 인간의 싸움에 끼어드는 분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축구선수가 멋진 오버헤드킥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돕는 분이고 그리스도는 육상대회에서 일등 하도록 돕는 분이라는 인상만을 갖게 되었다.
어떤 사업가가 만일 그리스도께 기도만 한다면 경쟁자를 크게 이겨서 다른 사람을 제치고 바라는 계약을 맺도록 도우시는 분으로 여겨졌다. 또 창녀들조차도 부끄러워할 배역을 맡은 어떤 그리스도인 여배우가 기도만 하면 쑥스러워 하지 않으며 연기를 잘하도록 도와주시는 분으로 생각해왔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팀이 이기도록 금요일 심야기도회 시간에 예배당에서 축구를 생중계해서 보여주며 함께 응원 기도를 하는 것이 신앙적인 것처럼 보여주었다. (자칭)여호와 증인도, (자칭)하나님의 교회도, 몰몬교회도 이단이지만 이런 것도 이단이다.
V. 전쟁하는 그리스도인
교회 안에 들어오지 말아야 할 것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오늘날 교인들이 믿는 그리스도는 육체의 편리나 도모하고 그들의 오락이나 여흥을 도와주는 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왜 그런가? 그들은 이 땅이 전쟁터라는 것을 알지 못하며 놀이터로 여기기 때문이다.
“버릴 필요 없어요. 버리지 마세요. 그냥 예수만 믿는다고 하세요. 그렇게 하면 당신이 하던 거 계속 할 수 있어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즐기세요. 신앙은 재미있는 겁니다”
이런 목회자들을 용납하지 말자. 어떤 이가 말한다. “세속음악을 할 수만 있다면 교회에 다니겠어요.” “술을 끊지 않아도 된다면 예수님을 믿겠어요.” 그러면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게 하세요. 예수님만 믿으면 문제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사역자들을 조심하자. 그런 것처럼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타협하는 사람을 거절하자. 한 설교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영혼을 구원하려는 시도는 그분의 영광을 빼앗는 것이며 결국 영혼 구원에도 실패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개종자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A.W. 토저)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옛 삶을 포기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 전도자들을 경계하자. 그들은 복음과 이 세상의 다른 점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비슷한 점만을 가르친다. 그들은 기독교가 결코 불쾌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대중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기독교는 당신이 옛날에 즐기던 그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안심시키려 한다.
사람들의 재미와 감격과 즐거움만을 느끼기 해주기 위해 집회를 갖는 사역자들을 경계하자. 당신이 재미있었고 즐거웠다면, 감격이나 기분 좋음이 있었다면 은혜 받은 것이라고 제시하는 사역자를 조심하라. 사람들의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와서 그리스도를 위해 당신을 내세워라.”라고 말하는 사역자를 조심하라. “와서, 주안에서 너희의 자랑과 재주를 맘껏 늘어놓아라!”라고 설교하는 사역자를 조심하라. 사람의 비위를 맞추어서 지켜야 할 것들을 포기하고 놀이와 재미와 즐거움으로만 몰고 가는 기독교 사역자를 조심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사역자를 조심하라. 그는 진정한 회심자가 아니라 교인만을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종교 놀이꾼을 만들기 위해 땀 흘리는 사람이다. 오늘 이 땅에 필요한 것은 놀이터를 배회하는 놀이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나설 수 있는 용사가 필요하다. 주님은 군사를 부르고 계신다. 왕이 오시기 전까지 싸울 군사를 부르고 계신다. 당신은 전쟁터에 있는지 유원지에 와 있는지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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