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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智異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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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방 ♡ 스크랩 나누는 즐거움 논산, 육군 신병훈련소!
nolboo 추천 0 조회 365 10.03.07 09:22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논산, 육군 신병훈련소!

 

50여년 전 여름, 군 입대를 했습니다.

지금은 육군 신병훈련소가 각 사단별로 전국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엔 충청남도 논산, 한 곳에만 있어 전국에서 군에 입대하는 자는 모두 그  곳에 집결하여 훈련을 받았습니다.

고향 친구들, 그리고 학교 선후배 등 많은 무리가 함께 입대를 하여, 훈련을 받으며 힘들어도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자위를 하고 입대했습니다.

훈련소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군번을 받아 신병 교육대 부대 배치를 받았습니다.

 

고향에서 함께 입대한 친구들은 모두 29연대 1대대 내로 배치 되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간 모든 친구들은 같은 중대 같은 소대로 여러명씩 몰려 배치 됐는데, 배기석이라는 친구와 나, 둘이만 1중대 1소대로 외롭게 떨어져 배치를 받았습니다.

둘이 소속된 소대원 36명중 우리 둘을 제외한 34명은 모두 공민학교 출신이었습니다.

 

지금은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도 학력 미달로 입대를 면제시킨다는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 중학교 까지가 의무 교육이지만 그때는 의무교육 기간이 설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시에서도 빈민층은 어린이 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집안 일을 돕거나 생활 전선에 일찌감치 뛰어들어 학교 공부를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군에서는 새로 입대하는 신병중에 학교 공부를 못한 문맹자들만 모아서, 신체 검사를 하고 입소시킨뒤 훈련소 내 공민학교에서 40일 동안 한글과 숫자 등 생활에 필요한 기초교육을 시킨 뒤, 훈련에 임하도록 했습니다.

배기석이와 나를 제외한 우리 1소대원은 모두 고등공민학교 출신이었습니다.

시골 출신은 대개 어려서 부터 집안 농사일을 도우며 힘들게 살아 온 순박한 사람들이었으나, 도시 출신들은 어릴적 부터 보잘것 없는 생활 필수품을 들고 돌아 다니며 행상을 했거나, 주먹을 휘둘러 남의 물건을 탈취했던 깡패, 그리고 좀도둑, 소매치기 등 경력이 다양했습니다.

 

첫쨋 날 키가 작고 피부가 새까맣게 그을린, 그리고 눈망울이 매서운 소대장이 들어왔습니다.

"나는 훈련기간 너희 훈병들의 교육을 책임질 소대장 최칠웅이다."

우리들은 막사 사이에 두 줄로 선채 부동자세로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각자 군화 벗고 침상 위로 올라가 내 쪽을 보고 앉아라"

"너희들 중에 학보나 교보가 있을게다. 앞으로 나와라."

사회에서 대학 다니다 입대한 사람은 '학보'이고 교사로 근무하다가 입대한 사람은 '교보'입니다. 학보는 군 복무 기간이 1년 6개월이고 교보는 1년입니다.

배기석이와 나는 소대장 앞에 나가 섰습니다.

"우리 소대는 너희 둘만 빼 놓고 나머지는 모두 '공민학교' 출신이다.

공민학교 출신만으로는 소대를 운영, 관리할 수 없어 너희들을 차출해 왔다. 너희 둘은 소대에서 필요한 일종과 이종품의 수령, 배분, 관리를 책임지고, 그들의 출납 일지와, 훈련일지 등 소대 일체의 관물을 관리하고, 장부를 기재, 정리하여 매일 내게 검열을 받는다."

어느 명령이라고 거절을 합니까. 우리 둘은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다음에는 훈련기간 동안 실지로 현장에서, 훈련병의 앞장에 서서 총 지휘할 자치회장 "향도"가 있어야 한다. 훈병 교육은 각 교장의 교관과 조교가 담당한다. 그 외의 생활은 나와 소대 선임하사가  너희들을 책임진다. 그러나 내가 항상 너희들을 따라 다니며 지휘 감독할 수는 없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너희들 끼리 쓸만한 사람을 이 자리에서 선출해라."

소대원들끼리 두리번 거리며 살피기만 하지, 추천하는 사람이나, 내가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난 후

"제가 해 보겠습니다" 하고 일어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두 뒤쪽을 돌아보았습니다.

덩치가 커 레슬링 선수 '김일'쯤 되고, 피부가 시커멓고 입이 가로로 쭉 째졌으며, 큰 눈망울을 두룩뒤룩 볼상 사납게 굴리는 매우 험상궂은 놈이었습니다.

"너 이리 나와 봐라."

그 놈이 그 큰 덩치를 뒤뚱거리며 소대장 앞에 나와 섰습니다.

소대장은 그 놈을 아래 위로 한번 쭉 훑어 보더니

"너 출신지가 어디냐?" 하고 물었습니다."

"서울입니다,"

"너 사회에서 무었하던 놈이냐? 혹시 조직폭력배 쯤 되는 놈 아니냐?"

"---------.'묵묵부답으로 고개만 조금 숙여졌습니다."

"맞는 모양이구나, 너 같은 놈 향도를 시켰다가 소대원을 무지막지하게 괴롭히지 않을까?

너 나이가 든것 같은데 몇살이냐?"

"스물 일곱살입니다."

"너 병역 기피자로 도망 다니다 잡혀 온 놈이로구나."

"병역 기피자로 도망다닌 건 맞느데 잡혀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입대했습니다."

"왜, 더 도망다니지?"

"기피자로 도망다니며 나쁜 짓 많이 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많이 후회하고 뉘우쳤습니다. 늦게라도 군복무를 마치고 새 사람이되어 돌아가 바르고 성실한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소대장님. 믿어 주십시오,"

"그러면 네가 뒤로 돌아서서 소대원들에게 네 각오를 이야기 하고 먼저 양해를 구해봐라."

박대식은 뒤로 돌아 섰습니다. 그리고 소대원 들에게 정중히 거수경례를 했습니다.

"나, 박대식입니다. 내가 방금 소대장님과 나눈 말씀을 되풀이 하지 않겠습니다. 내 각오는 이번 군 생활을 남보다 더 열심히 마치고 새 사람으로 고향에 돌아가 부무님과 형제들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훈련소 생활 부터 다른 사람들의 앞장에 서서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아우님들을 절대로 괴롭히지 않고, 받들고 봉사하는 자세로 모시겠습니다.

힘든 일, 궂은 일, 어려운 일들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사회에서 저지른 많은 죄를 용서, 탕감 받을 기회를 주십시오 ."

그렇게 사납게 생긴 박대식이 말을 마치며 손등으로 눈물을 훑었습니다.

소대원들로 부터 우뢰 같은 박수가 터졌습니다.

소대장이 박대식이를 불렀습니다,

"너를 믿기로 했다. 소대원과 나, 그리고 부모님과 형제에게 한 맹세를 배반하지 않도록 명심해라. 너는 앞으로 큰 사람이 될 싹수가 보인다."

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습니다.

박대식은 두손으로 소대장의 손을 잡으며,

'고맙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소대장님과 박훈병(훈련병)은 탁자 위에서 필기를 해가며 한동안 이야기를 하더니

"너희들끼리 잘 상의해 결정해라." 하면서 소대장은 밖으로 나갔습니다.

 

박대식 향도의 주재로 우리는 앞으로의 우리 소대 운영계획을 협의했습니다.

우리 1소대 막사의 야간 불침번의 입초(立哨)와 동초(動哨)는 자기 관물함 번호 순으로 각각 2명씩 교대로 선다. 한 조는 1회 2시간씩 서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식사 당번은 막사 불침번과는 상관 없이 매일 6명씩으로 한다. (지금과 달리 그 때 훈련소에는 별도 식당이 없었고 소대 급식 당번이 식당에서 날라와 각 개인에게 배식(配食)하고 뒷처리 까지 책임을 졌습니다.)

막사 내와 주변 및 화장실의 청소는 아침 기상과 동시, 저녁 취췸 전에  소대원이 모두 함께한다. 그 외에 가끔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역은 나, 향도가 알아서 배정한다.

자기 몸이 아프거나 불편해서 맡겨진 시간의 역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주저하지말고 즉시 향도에게 알려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한다.---------등등.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어 일어섰습니다.

"우리 소대의 잡다한 모든 일을 총괄해서 지시, 관리하시는 것이 향도님이신데, 향도님의 역할이 너무 많고 힘이 드실 것 같습니다. 소대원 여러분, 이 분은 각종 당번 및 사역 활동에서 제외 해 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두 우뢰 같은 박수를 치면서 "좋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는 말들이 튀어 나왔습니다.

박대식이가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섰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사양하겠습니다. 7년 동안을 못된 짓만하고, 군 입대를 하지 않기 위해 도망쳐 다니던 내가 '거북한 짚자리에 누워 쓰디 쓴 쓸개를 씹으며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각오로 늦게나마 입대 했습니다. 입초, 동초, 불침번, 취사당번, 청소활동, 그 외의 사역등 모두를 여러분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특히 여기와서 보니 식사 당번이 가장 힘든 것 같습니다. 드럼통 만한 크기의 주식과 부식통을 봉(棒)막대기를 가로 질러 어깨에 메고, 먼 거리를 날라다 배식하고, 그릇을 씻어서 반납하는 일은 몸이 약하거나 키가 작은 사람에게는 힘든 고역(苦役)입니다. 나는 매 식사 때마나 식사 당번을 따라 다니며 함께하고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을 위한 일이 아니라, 태어나서 27년 동안 사회에서 저지른 내 악행(惡行)에 대해 속죄하고, 새로 태어 나겠다는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내 뜻대로 하도록 버려 두는 것이 나를 위해 도와주시는 길입다."

소대원 모두의 함성과 함께 우뢰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배기석이와 나는 넋을 잃고 서로 쳐다 봤습니다.

학교 문턱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는 향도의 달변(達辯)에 기가 찼습니다.

어려서 부터 사회의 응달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못된 짓도 많이 했겠지만, 머리도 좋고 바탕은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협의한 대로 각자 최선을 다 하도록 하고, 다른 분 말씀이 없으시면 여기서 마치겠습니다."하고 향도 최대식이가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때 키크고 하얀 피부의 여자처럼 생긴 소대원이 배기석이와 나를 훑어 본 뒤 일어 섰습다.

"향도님, 제가 한가지 여쭤볼게 있습니다."

"예. 이야기해 보시요."하고 향도가 다시 의자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 소대에 교보대원이 두분 있는데, 소대장님이 불러서 우리 소대에 지급되는 1종, 2종 등 관급품(官給)의 수령, 보관, 관리, 배분, 수거 등에 관한 일과, 각종 대장과 일지의 기재와 관리를 맡기셨습니다. 이 분들에게 너무 과중한 업무를 맡기신 것 같습니다.

우리로서는 이 분들의 노고에 대한 배려(配慮)가 있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심히 놀랬습니다. 학교 문턱도 안가 봤다는 무학자(無學者)가 저렇게 어려운 말과, 남의 사정을 알고 도와 주려는 관대한 아량을 가졌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향도 최대식이가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려고 했었는데 깜빡 잊었습니다.

그 분들이 맡으신 일도 많고 힘든 것  들입니다.

그런데 그 일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4주 동안 한글과 숫자 공부를 공민학교에서 배웠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한글을 공부해, 내 손으로 편지를 써서 부모님께 자랑도 하고, 안부도 여쭤보고 싶은데 -------. 여러분들 중에 편지와 봉투까지 바르게 써서 고향으로 부칠 자신이 있는 사람 있으면 손을 들어 봐요. "

향도의 말이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면서 모두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우리를 가르치신 공민학교 교관이 열심히 배우라고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공민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하는 어떤 장병이 제딴에는 고민해 집으로 써 보낸 편지글 첫머리에

'어머님 본지도 까맣고, 형수님 본지는 더더욱 까맣고---'라고 쓰느라고 했는데,

'본지, 본지'에서 'ㄴ'받침을 빠뜨렸다고 했지요?'

가족이 모인 곳에서 초등하교 1학년 손자가 글자 그대로 읽었다쟎아요?

'어머님 보지도 까맣고, 형수님 보지는 더더욱 까맣고 라고!----------'

고지식한 어머니는 돌아 앉으며 혼잣말로 투덜 댔대요.

'내 거시끼는 지가 나올 때 봤겠지만, 제 형수 거시끼는 언제 또 봤노? 고얀 놈!' 이라라면서.

 

또 어떤 친구는 

 '아버님, 연세도 높으시고, 몸도 불편하신데 밭일은 하지 마세요. 제가 제대하고 나가면 우리 집안의 밭일은 모두 맡을테니, 그간은 형님께서 전부 하시도록 하세요.'

라고 적어야 할 것을 '밭'의 'ㅌ' 받침을 "ㅁ"으로 잘못 썼다고 했지요?

집 식구중에 한글을 아는 사람은 국민학교 2학년 손녀뿐이라 글자대로 읽었대요

'아버님, 연세도 높으시고, 몸도 불편하신데 밤일은 하지 마세요. 제가 제대하고 나가면 우리

집안의 밤일은  모두  제가 맡을테니 그간은 형님께 맡기세요."

아버지가 가족들 앞에서는 차마 입을 열어 말은 못하고, 헛기침을 두어번 하고 나와, 댓돌에 앉아 담뱃대에 불을 붙어, 긴 호흡으로 흠뻑 빨았다 내쉬면서

"밤일도 밤일 나름이지. 내가 할게 있고, 저희들이 할게 따로 있지. 불쌍놈이구나. 에----헴"

하고 가래침을 '캭!'하고 봉당에 뱉었다쟎아요.

소대원들은 그럴수도 있을 것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왁자지껄하게 떠들었습니다.

 

방향이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장가들어 첫 아기까지 낳은 사람이 늦게 군에 입대했대요, 군에간 남편의 천번째 편지를 받고

답장을 썼어요. 피곤한 몸으로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연필심에 침을 발라가며 썼어요.

"땅 한뙈기 없이 가난한 집안, 그리고 나이가 많으셔서 몸이 불펀하신 부모님과 식구들을, 당신 혼자 막노동일을 해서 생활해 온 살림인데, 지금 끼니를 어떻게 이으시냐는 당신 걱정 알만해요. 걱정 말아요. 밤과 낮으로 열심히 봉지 장사를 해서 식구들 굶기지는 않고 있어요.

여기에서 부인이 실수를 한거래요.

"봉지 장사"에서 'ㅇ'을 빠뜨린거죠. 어떻게 됐겠어요?

"보지 장사를 한다,?

사실은 상점에서 물건을 팔때 넣어주는 종이봉지를 만들어서 파는 건데요.

남편에게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맑은 하늘에 날버락이었대요.

앞뒤도 생각하지 않고 아내의 편지를 꾸겨 주며니에 넣은 채 철조망을 넘어 탈영을 한거죠.

탈영을 하다가 붙잡혀 군 헌병대로 끌려갔어요.

헌병 수사관들이 취조를 하고, 몸 수색을 하다가 그 편지를 발견했답니다.

사실을 중대장에게 보고하고, 중대장은 탈영병에게 15일간의 특별 휴가를 주어 고향으로 보냈다고 했쟎아요? 우리는 사회에서 한글도 못깨치고 입대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소대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습니다. 쥐죽은 듯이 조용했습니다.

 

 "고향집을 떠나온 지 겨우 4주뿐이 안 됐는데 나도 고향집이 그립습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이 많이 보고 싶고, 어떻게들 사시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집에 편지를 써 보낸 사람 있습니까? 4주 동안 배운 짧은 지식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쓰고, 편지 봉투에 주소를 정확히 적어서 사랑하는 고향의 가족에게 보낼 자신이 있습니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분위기가 숙연해 졌습니다. 말 없이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 사람도 있습니다.

박대식 향도는 우리 교보 두명을 바라 봤습니다.

"교보 선생님. 불쌍한 우리들의 당면한 고민을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매우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훈련이 없는 날 우리들이 고향 집으로 보낼 편지를 대필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조용한 침묵 속에 모두가 고개를 돌려 우리 둘을 바라 볼 뿐입니다. 배기석이와 나도 서로 쳐다 보고 말 없이 서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 났습니다.

"예. 우리 둘이 기꺼이 하겠습니다. 그런데 단 조건이 있습니다.

여러 분들의 고향집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내 편지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편지입니다.

여러 분들의 각 가정에 관한 나의 정보는 백지 상태입니다.

그러고 여러 분들의 가정에서 받고 싶은 편지가, 비록 글쓰기가 서툴고 내용이 좀 부실하더라도 내 아들 내 형제가 직접 써 보낸 것이라면 그 기쁨이 몇배 더 클것입니다.

사실 한글을 40일간 배워서 편지글을 바르게 써 보낸다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 합니다.

많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편지지와 봉투는 우리 둘이 준비해서 우리 소대 관물함 속에 넣어 두겠습니다.

아무 때고 누구나 와서 가져 가세요, 편지지에다 연필로 고향에 보낼 편지를 써 보세요, 글씨가 서투르고, 말이 잘 안되고, 빼 먹은 글자가 있어도 좋습니다. 내 소식이 궁금해서 안달을 하실 그 분들을 머리 속에 그려보며 정성껏 쓰세요.

그렇게 쓴 편지를 우리들에게 가져 오세요. 우리가 읽어 가면서, 지우개로 지워 가면서, 빠진 곳, 틀린 곳, ? 부칠 곳을 고쳐 드릴께요.

그렇게 고쳐드린 편지를 새 편지지에 정성껏 옮겨 써서 저희들에게 가져 오세요.

저희들이 다시 검토하고 봉투의 주소는 우리 손으로 써서 부쳐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아주 불가능한 분은 우리들에게 와서 써 보내고 싶은 내용을 말씀으로 해 주시면 우리가 대필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절대로 오해하지 마세요. 각자가 보내고 싶은 사연을 듣고, 그대로 대필해서 보내는 것이 사실은 시간도 절약되고 저희들로서도 쉽고 편합니다.

군 생활을 3년을 해야 됩니다. 그때마다 남의 대필로 편지를 보내기는 매우 불편합니다.

이 만큼이라도 한글을 깨쳐서 편지를 보내면 한글 배운 것을 자랑할 수도 있고, 부모님과 가족들이 얼마나 대견해 하고 기뻐하시겠습니까!'

여기서도 부족한 공부를 더 하신다고 생각들 하시고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좋습니다."하는 소리가 연이어 나오며 박수들을 쳤습니다.

 

찌는 듯한 삼복 더위에  낮에는 교장(敎場)을 찾아가 뛰고, 달리고, 구르고, 기고, 포복. 사격하면서 땀과 진흙을 두집어 쓴채 고된 훈련을 받았고. 저녁에 막사로 돌아 오면 청소, 불침번, 식사 당번, 세탁, 샤워, 내무교육 등으로 해가 뜨고 졌습니다.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 배기석이와 나는 작은 책상을 각각 갖다 앞에 놓고, 소대원들이 써 온 편지에서 잘 못된 곳을 찾아 수정, 보완하도록 지도했습니다.

속 주머니에 잘 접어 보관한, 주소 적은 쪽지를 꺼내게 해 봉투에 써서. 부대 우편 발송함에 넣어 보냈습니다.

편지를 쓰는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은 막사에서 조촐한 파티가 이루어집니다.

배기석이와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다고,

편지를 보낼 사람들은 꼬깃꼬깃 접어, 은밀한 곳에 보관했던 그 알량한 비상금을 털어 부대 매점에서 과자와 빵 그리고 음료수를 사와 편지 쓰는 탁자 위에 올려 놓습니다.

우리는 고향, 부모님, 가족들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향수를 달래는 조촐한 파티를 나눕니다.

그 사람들이 못 배운게 그 사람들의 죄입니까?

뭐 그렇게 대단한 도움을 준다고, '고맙다.' '수고하신다.'라고 미안해 하면서 송구스러위 해야 합니까?.

 

소대원들은 한 몸, 한 마음이 되어, 열심히 훈련 받고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학교 문턱에도 못가 본, 한글도 못 배운 시골 무지랭이!

소위 조직 폭력배, 소매치기, 도둑놈, 야바위 꾼------. 타고난 못된  천성이 아닙니다.

비참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차마 죽지 못하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훈련소 퇴소식에서 우리 소대는 연대장님 '모범 소대 표창장'을 받았습니다.

조직 폭력배 두목, 스물 일곱살의 늙은 훈병 박대식은

감격에 겨워 온 몸을 흔들어 흐느끼며 , 연대장님의 '모범 훈련병 표창장'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훈련소 수료 전날 저녁, 과자, 빵, 음료수 등을 앞에 놓고

서로 친형제 처럼 지낸 지난 날들을 회상해, 어깨를 겯고, 흔들고,

흐느끼는 함성으로 몇번이고 같은 노래를 합창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고향의 봄. 이원수 詩, 홍난파 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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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3.07 19:25

    첫댓글 펀글이지만 쓴사람의 열정을 ~~~ 읽지는 못합니다^^

  • 10.03.10 18:08

    논산훈련소 30 연대 8 중대 교육계라는 기간사병 직책으로 1 년이 넘도록 복무를 하면서 3.15 선거와 4.19 혁명을 거기서
    겪었는데, 어쩌면 이 토록 전문가 솜씨로 글을 쓰셨는지 감탄을 하겠습니다.
    제가 근무할 당시 4.19 때는 공민학교가 과거의 이야기로만 있었고, 한글 철자문제의 웃으게 이야기도 당시에 도 있었
    지만 다른 상황은 아주 정확하게 쓰셨습니다 ....

  • 10.03.11 11:42

    아들이 지금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화도 오고,편지도와서 간간이 소식을 듣고는 있지만 그래도 항상 마음은 아들곁에 있는데
    그당시의 부모님들은 얼마나 아들소식이 궁금하고 기다려 졌을까요?
    야간행군,각개전투,화생방훈련등..
    힘들지만,친구들과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임무완수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며
    그나마 안심하고 대견스럽고 든든하답니다.
    남자들만의 끈끈한 인간미가 넘치는 글보며 가슴이 찡해 오네요.
    그렇게 힘들게 나라를 지키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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