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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크게 여긴 것
전도서 9:11-18
1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12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13 내가 또 해 아래에서 지혜를 보고 내가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14 곧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어떤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15 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16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17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18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전 9:11-18 / [시간과 우연] 내가 또 이 세상 일을 자세히 살펴보니 빠르다고 경주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며 강하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다. 슬기롭다고 부유해지는 것도 아니며 솜씨가 있다고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우연히 이루어진다. 12) 그런데도 사람들은 언제 어떤 일이 자기에게 닥칠지를 알지 못한다. 그물에 잡히는 물고기처럼, 올가미에 걸리는 들짐승처럼 인간들은 누구나 갑자기 재앙을 만나 내리덮치는 죽음의 덫 속으로 똑같이 빠져 들어간다. 13) [지혜는 유용하지만 허약하다] 내가 또 이 세상 일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지혜에 대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 이 사실이야말로 매우 주목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14) 어느 곳에 작고 인구가 별로 많지 않은 성읍이 있었다. 그런데 이웃의 큰 나라 군주가 대군을 이끌고 와서 성을 에워싸고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15) 그때 그 성안에는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살고 있어서 지혜로 자기 마을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아무도 그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주지 않았다. 16) 그래서 나는 `지혜가 힘보다 낫지만 가난한 사람의 지혜는 무시당하여 아무도 그의 말을 존중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7) 지혜자가 조용히 타이르는 말을 듣는 것은 통치자의 어리석은 고함 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낫다. 18) 지혜는 어떤 무기보다 더 강하다.
세상의 모든 결과는 한계가 있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관자 되신 완전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있습니다. 이를 인정하기에 더 열심히 사는 것이 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11-12) 인간은 누구나 바라는 것을 얻고, 일에 성공하고 싸움에서 승리하려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강해지려고 하고, 똑똑해 지려고 하고, 자본을 축적하기도 하고, 권력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전합니다. 시기와 기회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하지만 회중적인 결과를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시기를 모르는 인생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항상 겸손한 태도로 살아야합니다.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13-18) 전도자는 지혜가 병기보다도 더 낫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 예로 전쟁에 있었던 실제 사건을 들어 이를 증명합니다. 가난한 지혜자가 그의 지혜로 멸망당할 뻔한 성읍을 구해내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공감력 있는 지혜자의 설득이 소통함 없이 크게 소리만 지르는 권력자의 힘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가난한 사람의 지혜가 아무리 전쟁을 이겨 성읍을 구하는 가치가 있다고 말하더라도,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편견으로 그를 오래 기억하기 않았고 그를 멸시하여 지혜자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지혜를 얻지 못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말합니다. 사람이 자신이 지혜를 가지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좋지만 주변에 있는 지혜자를 알아보고 그 사람과 함께하고 그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편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얻어지는 신본주의적 지혜 속에 선한 사람들과의 연합이 더욱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를 통해서 이 세상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적용: 무엇인가 당신이 이룬 결과의 모양과 이룬 시기가 당신이 원하는 것과 다를 때 당신의 노력과 힘을 바라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바라봅니까?
사람은 누구나 위기에 봉착하게 되면 전혀 다른 본심이 나온다고 합니다. 평소에 용감한 척하고 신사인 척하고 침착한 척해도 위기에 직면해 보면 압니다. 어떤 부부가 사는 집에 밤에 도둑이 들어왔습니다. 밖에 무슨 소리가 들립니다. 도둑이 들어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누가 나가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남편이 아내보고 나가보라고 합니다. 얼마나 못났습니까. 그런데 아내가 용감하게 방망이를 들고 나가보니 고양이가 마루에 앉아 있었습니다. 긴장을 풀고 방에 들어가 보니 남편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어 있더랍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변명했던 상황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 설 교 >
삶의 의외성
염두철목사 / 전도서 9:11-18
먼저 시작한다고 앞서가는 것이 아니며, 매일 운동한다고 병들지 않는 것이 아니며, 학벌이 좋다고 고난이 없는 것도 아니며,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진실한 것이 오히려 이 세상에서 조롱당하고 무시당하며 주목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진실한 것은 요란하지 않으며, 작고 겸손하며, 조용하고 느립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외모와 학벌과 물질 등의 외적인 화려함을 추앙하느라 참된 것을 놓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정상일 때는 머리가 좋고 많이 노력한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일은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 때문에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이 실패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나중이 먼저 될 수 있으며(마 19:30), 무명하나 유명할 수 있으며, 가난하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할 수 있으며,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일 수 있습니다(고후 6:9-10). 우리 삶은 이렇게 의외성이 많습니다.
전도자는 이렇게 변수와 의외성이 있는 인생을 말하면서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려는 것일까요?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1 /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이 세상에는 아주 빠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사인 볼트처럼 빨리 달리는 사람 뿐 아니라 눈치도 빠르고, 동작도 빠르고, 선수 치는데도 빠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이 세상에는 힘이 강한 용사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싸움을 잘합니다. 또 이 세상에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 지혜와 명철이 반짝이는 박사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런 사람들이 꼭 앞서는 것이 아니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많은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고 은총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 의외성이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모릅니다.
계획대로 자신의 목표한 곳에 가지 못했다고 해서 지나치게 우울해할 것도 없고, 자신이 목표한 곳에 갔다고 해서 지나치게 우쭐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이 목표한 곳에 가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 왔다고 해도 훗날 그 결과가 어떻게 연결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반대로 목표한 곳에 갔다고 해도 그것이 훗날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로널드 레이건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취업 전선에서 엄청난 고배의 잔을 마셨습니다. 몽고베리 판매직에는 당연히 될 줄 알고 지원했는데 거기서도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결과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만약에 레이건 전 대통령이 몽고메리 판매직에 취업되었다면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생에는 의외성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오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불안하고 불확실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사건 하나하나로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예상 밖의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우리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에 용사라고 다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군사력이 전쟁을 좌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안 영국의 크롬웰 장군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최선을 다해 준비하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시다.”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머리를 잘 쓰면 돈을 잘 벌 것 같고 명철하면 재물이 모일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의외의 변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사하는 머리는 따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재리에 밝은 사람들이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돈을 위해 몸과 마음과 뜻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끝까지 돈이 남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지만 늘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인생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짐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으로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손안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의외성에 크게 놀라지 않는 것입니다.
시기와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일이 잘되면 교만해져서 우쭐댑니다. 욕심을 부려 가속 페달을 밟다가 너무 과속해서 대형 사고를 만납니다. 또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자포자기하거나 술을 퍼마십니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려울 때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믿음을 견고하게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오면 그동안 훈련받았던 믿음을 실천에 옮겨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12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물고기가 미끼를 물면 이미 낚싯줄에 끌려올라 가는 것입니다. 새가 올무에 걸리면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 힘으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역경을 만날 때입니다. 이럴 때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그물에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때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판도가 달라진다. 자포자기도 아니고 몸부림치는 일도 아닌 획기적인 방법은 믿음으로 결단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연단하시려고 어려움 가운데 집어넣었을 때 살 수 있는 방법은 욕심과 세상적인 방법을 버리고 철저하게 신앙으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이 40년이었고,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고난에는 반드시 일정 기간을 보내야만 마치는 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길어질 때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장기전을 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철저히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고난이 끝나고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13-15 내가 또 해 아래에서 지혜를 보고 내가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곧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큰일을 했지만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지혜의 삶을 포기해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생각해서 버린 돌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버림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인정해주지 않고 무시하고, 배신당해도 보이지 않는 우리 주님을 의지하고 사람들을 죄에서 건지는 삶, 참으로 도와주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 6:9).
16 /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가난한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외모가 허름하면 일단 무시합니다.
모스크바의 한 출판사에 헙수룩한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의 원고를 책으로 내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출판사 주인은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런 원고는 얼마든지 굴러다니고 있고 출판비용을 다 부담한다 해도 맡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헙수룩한 사람은 원고 뭉치를 품에 넣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대중이 나의 글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썼는데요.” 이상스러운 말에 놀란 주인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요”라고 묻자 그는 “내 이름은 톨스토이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기절 할 듯이 놀라 의자에서 뛰어 일어난 주인은 급히 사과를 하며 원고를 부탁했으나 톨스토이는 그냥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는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다 할지라도, 원하는 결과가 곧 나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불법과 편법과 어리석은 모략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7-18 /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보다 하나님의 조용한 말씀이 더 위력이 있습니다.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 오히려 무기보다 낫습니다.
지혜는 마치 코치가 경기장에서 지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자기 혼자서는 경기의 흐름을 읽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코치가 지시한 대로 정확히 하기만 하면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아간과 같은 숨은 죄,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숨은 죄가 하나님의 능력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 때문에 공동체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옛날 옛적에 한 왕이 잔치를 베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여러 가지 어려운 경제 여건을 감안해서 왕은 음식장만을 하고 신하들에게는 잔치에 올 때 각자 포도주 한 병씩을 가지고 오도록 했습니다.
잔칫날이 되어 신하들은 저마다 포도주 한 병씩을 들고 왕궁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신하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온 포도주를 연회가 열린 큰 방 입구에 마련된 커다란 술독에 붓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윽고 술독이 찼고 잔치에 참여한 왕은 모든 사람에게 포도주 한 잔씩 부으라고 명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자리에 포도주 한 잔이 놓여졌습니다.
왕이 건배를 제의하자 모든 사람이 잔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주 맛이 이상했습니다. 술독에 모여진 것은 포도주가 아닌 물이었습니다. 맛을 본 왕은 불같이 진노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신하들은 모두가 나 하나쯤이야 포도주 대신 물을 부어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 많은 포도주에 물 한 병 섞여도 누가 알겠는가 싶어 포도주 병이 아닌 물병을 가져온 신하들의 생각에 왕은 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에 젖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나 하나쯤이야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이 바이러스가 한번 유포되면 순식간에 퍼지게 되고 공동체는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후진국에서는 ‘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으로 삽니다. 그러나 선진국 사람들은 ‘나 하나라도’라는 생각으로 삽니다.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나라가 싱가포르입니다. 백인들이 생각하는 아시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1위는 싱가포르입니다. 아시아에서 무역 및 금융의 중심국가, 아시아에서 가장 부패가 없는 나라, 국가 경쟁력이 가장 높은 나라,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가 싱가포르입니다. 싱가포르는 어떻게 해서 이런 나라가 되었을까요?
싱가포르에서 어느 관광객이 길을 지나다가 휴지 조각을 길에 버렸습니다. 그러자 길을 지나던 어린 학생이 재빨리 그 휴지를 주워서 그 관광객의 호주머니에 넣어주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갔습니다. 그 관광객은 충격을 받았으며 자기 나라에 돌아와서 휴지를 길에 내버리는 행동을 다시는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학생 한 사람의 ‘나 하나라도’라는 생각 때문에 싱가포르 온 나라가 깨끗해질 수 있었고 아시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는 모두 힘을 모아야 합니다. ‘나 혼자 기도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하는 생각을 버리고 ‘나 한 사람이라도’라는 생각으로 기도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할 때, 그 뜻이 뭉쳐 치고 확산될 때 교회도, 우리 사회도, 나라도 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의외성이 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새의 집을 찾아가 아들 중에서 기름을 부으려 했을 때 다윗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상 밖에 하나님은 다윗을 기뻐하시고 그에게 기름을 붓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는 의외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인생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모릅니다. 그것을 짐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으로 나와 신앙생활을 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의외성에 불안하여 점을 치거나 무당을 찾습니다.
인생의 의외성이야말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손안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의외성에 크게 놀라지 않고 담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뜻밖의 상황에서도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담대하게 여유 있게 행하며 평안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영혼의 경주자인 청년들
전도서 9장 11절 / 이성희목사
오늘은 총회가 정한 청년주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청년들이 일어나고 살아있어서 교회가 살고 우리 사회가 살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 나라가 산다고 합니다. 정말 청년이 살아야 미래가 있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삽니다. 우리 교회도 청년이 살아야 교회에 희망이 있습니다.
‘청년’이란 말은 헬라어의 ‘네아니스코스’란 말입니다. 이 말은 ‘네오스’란 새롭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청년은 새로워야 합니다. 청년은 날마다 새로운 것을 찾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청년이 새롭지 않으면 청년의 기백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일하고, 새로운 일을 계획하는 이것이 청년의 기백입니다.
자기가 익숙한 곳에만 맴돌면 이미 노인이라고 합니다. 안 먹어본 것을 아예 먹으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도 늙었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노화의 무서움은 ‘경직’입니다. 마음이 경직되고, 정신이 경직되고, 사고가 경직되고, 행동이 경직되고, 육체가 경직됩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고 선입관이 항상 새로운 생각을 가로막습니다. 고장 난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편견에 사로잡히면 이미 노인입니다. 청년은 경직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물리적 연령이 높더라도 새 것을 시도하고 생각한다면 청년입니다.
현대 문화는 젊어 보이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입니다. 젊음이란 불확실한 미래를 지연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비타민 보조제나 다이어트 프로그램이나 운동기구 등, 젊음의 환상을 지켜주는 산업이 점차 번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젊음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티 에이징’(Anti Aging) 즉 노화 방지 클리닉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이런 안간 힘을 안 써도 젊음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젊음은 그 자체가 아름다움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덕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양극화입니다. 경제가 양극화하고, 지식과 정보가 양극화하고, 영성도 양극화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연령대의 인구도 양극화합니다. 시골에는 청년 없는 마을이 많습니다. 노인들이 있고, 아이들이 있는데 젊은이가 없습니다.
농어촌의 심각한 문제는 연령대의 균형이 안 맞다는 것입니다. 총각들이 처녀가 없어 결혼을 못하여 다른 나라에서 처녀를 데리고 와서 국제결혼을 합니다. 사기 결혼도 있고 문화 충격도 있어서 문제도 많습니다. 더 웃지 못 할 일은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시골 어느 교회는 청년이 없어서 61세 된 노인이 교회의 청년회장을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환갑이 넘어도 청년이면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청년이 없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중간층이 엷은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나라는 큰 나라는 아니지만 올림픽을 이미 성공적으로 치렀습니다. 대구는 세계육상선수권 대회를 유치하게 되었습니다. 인천은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평창이 동계올림픽까지 유치하게 되면 우리나라는 문자 그대로 스포츠 대국이 될 것입니다. 올림픽, 유니버시아드대회, 아시아경기대회, 월드컵경기를 다 치르고 이제 동계올림픽만 유치하면 다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스포츠는 중요한 현대의 정신이며 경제적 부가가치도 엄청납니다. 우리는 영혼의 경주에 힘쓰고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청년들이 영혼의 경주에 힘써서 우리나라가 미래가 밝은 영성 대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는 “젊은이들을 신앙 없이 교육시켜라. 그리하면 틀림없이 그들은 영리한 악마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영리한 천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려면 영혼의 경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첫째, 인내로서 경주하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의 청년들이 인내로서 끝까지 경주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청년들에게는 지난날보다 남은 날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날 동안 열심히 인내하며 달려야 합니다.
경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경주는 끝까지 해 봐야 압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달려야 합니다. ‘경주’(race)란 말은 헬라어 ‘agon’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고통’(agony)이라는 단어의 어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달리기는 가벼운 조깅이 아니라 녹초가 되도록 힘들며 때로는 심한 고통이 따르는 경주입니다. 경주의 95%는 인내입니다. 신앙의 경주에서도 인내는 절대적입니다.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주님이 오실 때 까기 쉼 없이 달리는 것이 신앙의 경주입니다.
‘천로역정’에는 순례자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갈 때까지 많은 시련과 장애와 방해를 이겨내며 인내하며 나아가는 십자가의 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 인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내를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도 내 힘이 아니라 성령님께 맡겨버릴 때에 가능합니다.
경기에서도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야구는 9회말부터라고 합니다. 농구에서는 마지막 버저가 울릴 때 손에서 떨어져 나간 공이 링으로 들어가 그물을 출렁이며 승패가 바뀌는 ‘버저 비터’가 있습니다. 축구에서는 정해진 시간이 다 끝나고 3분 정도의 경기 시간을 연장하는 ‘인저리 타임’이 있습니다. 인저리 타임에도 승패가 바뀌기도 하고 다 진 경기가 비기기도 합니다. 골프에도 선두가 두 사람일 때 한 홀에서 결판을 내는 ‘서든 데스’가 있습니다. 한 타라도 적으면 그대로 경기가 끝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경기하는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고 인내해야 할 이유입니다.
‘열세 살 키라’라는 책에는 “우리 마음속에는 도움꾼과 방해꾼 두 가지 존재가 함께 살고 있다. 방해꾼은 늘 ‘포기해, 의미 없는 일이야’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도움꾼은 언제나 포기하지 말라고 우리를 격려하지”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방해꾼은 마귀입니다. 도움꾼은 성령님입니다. 7세기의 영성가 클리마쿠스는 “우리가 세상을 포기한 후에 우리를 공격하는 귀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터넷 동영상을 보니 아주 억울한 선수가 있습디다. 사이클 선수가 경기를 하다가 결승지점을 눈앞에 두고 승리를 예감했는지 두 손을 번쩍 들고 승리를 자축하다가 앞바퀴가 뒤뚱뒤뚱하더니 넘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그 뒤를 따라오던 선수가 앞질러 갑니다. 일어나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고 타려니 급한 마음에 또 넘어지려 합니다. 결승점 앞에서 자전거를 끌고 뛰어 겨우 이등을 하였습니다. 끝까지 가보지도 않고 너무 일찍 승리에 취하는 것도 좋은 경주자가 아닙니다.
영적 경주에도 이등한 사람들이 성경에 있습니다. 영적 경주에서 완전히 몰락한 대표적 인물은 가룟유다입니다. 그는 화려한 출발에 비하여 너무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10에도 그런 사람들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이 사람들이 영적 경주에서 낙오된 사람들입니다.
‘참을성’(patience)이란 말은 수동적으로 기다린다는 뜻이지만 ‘인내’(endurance)란 말은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내는 고통을 동반합니다. 고린도전서 9:27에는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이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이런 자기 제어가 인내입니다. 인내는 자기를 쳐야 가능합니다.
야구에서의 3루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느 선수는 생애 첫 홈런을 쳤습니다. 그런데 너무 흥분한 나머지 3루를 안 밟고 뛰어 그 홈런이 무효가 되고 말았습니다. 선수의 발이 3루에 달라붙어 있는 동안에는 홈으로 달릴 수 없습니다. 안전지대에 머물려고 하기 때문에 기회를 잃는 수도 있습니다. 경기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디모데전서 4:15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그리고 자신은 빌립보서 3:12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합니다. 힘차게 끝까지 달리는 것이 경주인 것을 그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NATO’라는 말이 있습니다. ‘No Action Talk Only’라는 말의 약자입니다. 행동은 하지 않고 말만 그럴 듯하게 늘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행동이 없이 말만 가지고는 경주할 수가 없습니다. 또 ‘갤러리족’이란 말도 합니다. 골프장에서 선수들의 경기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경기는 하지 않고 구경만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경주자입니다. 선수입니다. 구경만 하는 것은 신앙인의 참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청년들이 열심히 경기하고 열심히 신앙의 경주를 하는 행동하는 청년들이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경주하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합니다. 경주는 목표가 있습니다. 경주의 목표를 벗어나면 경주가 아닙니다. 경주는 골인 지점을 벗어나면 아무리 달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빌립보서 3:14에서 바울은 목표를 말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목표가 확실하면 늦어도 승리자입니다. 그러나 목표가 없거나 목표를 맞추지 못하면 빨라도 실패자입니다. 목표를 뜻하는 ‘goal’은 그 어원이 분명치 않지만 지금은 사라진 어떤 운동경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그것은 원래 넘어야 할 선 즉 일종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지난주에는 우리나라 실버원정대인 60대의 두 산악인이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하였습니다. 8,848 미터의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였는데 원정대의 평균 연령이 66세라고 합니다. 참 대단한 노익장입니다. 목표가 분명하고 열정이 있으니 그 일이 가능했으리라고 봅니다.
산을 오를 때는 목표가 있어 올라갈 때보다 목표가 없이 내려올 때가 더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의 경주가 그렇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26에서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달음질이 방향이 없고, 싸움이 허공을 치면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이미 경기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싸움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돈을 따라가는 일이 향방이 없는 일입니다. 허공을 치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쾌락을 따라가는 일이 향방이 없는 일입니다. 허공을 치는 일입니다. 이런 것을 따라가다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인생의 실패자로 주저앉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선교선 한나호를 섬겨보니 배에 대하여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말레이시아에서 죽을 고생을 하며 한국까지 왔습니다. 높은 파도가 열흘 내내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그 배의 선장도 멀미를 하였답니다. 이럴 때는 절대로 속도를 늦추지 않고, 파도를 향해 더 세게 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파도를 겁내거나 멈추면 배는 뒤집힙니다. 윈스턴 처칠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파도는 수없이 많고 배는 단 하나밖에 없는데 배가 파도를 이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배가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서 9:11에는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라고 합니다. 빨리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목표가 없이 빨리 가는 것보다 목표가 있으면서 천천히 가는 것이 낫습니다.
사막의 교부 압바 안토니는 영성훈련의 목적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달군 쇠를 해머로 내려칠 때는 먼저 무엇을 만들 것인지, 즉 낫을 만들 것인지 칼이나 도끼를 만들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떤 덕성을 함양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목표가 분명해야 무엇이든 만들 수가 있고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클로비스 채플 목사님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척의 외륜선 이야기입니다. 두 배가 멤피스를 출발하여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 올리안즈로 향하고 있습니다. 느린 배를 보며 서로 비웃습니다. 결국 두 배는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배가 뒤로 처졌는데 연료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항구까지 가기엔 충분하지만 경주엔 부족하였습니다. 결국 선장은 배의 화물을 연로로 써서 결국 경주에는 승리했지만 수송해야 할 화물을 다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경주에서 일등을 하기 위하여 화물을 태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인생의 경주에서 빨리 가는 게 아니라 정확하고 바르게 가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7에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합니다. 선한 싸움은 규칙대로 하는 싸움입니다. 규칙대로 하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반칙왕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반칙왕이 잘 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문제입니다. 선한 경주자가 잘 되어야 선한 사회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은 경주의 목표, 방법, 경기 규칙이 확실하고 분명한 방법입니다. 져도 이기는 경기를 하세요.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를 찬송하며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경주하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어느 동생이 형에게 “내일부터 아침형 인간이 되겠다고 다짐 했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형은 “인간이 먼저 되어라”고 하더랍니다.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참 인간이 문제입니다. 경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입니다. 기술보다 기본입니다. 자세와 인격이 중요합니다. 목표와 규칙이 소중합니다.
목표 없이 열심만 가지고 달릴 수 있습니까? 기본이 없이 기술만 가지고 살 수 있습니까?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술이나 재주가 아니라 목표입니다. 분명한 초점입니다. 든든한 기본입니다.
세상사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면 청년입니다. 세상사에 어떤 일도 잘 모르겠고 확신도 없다면 중년입니다. 세상에 대해 나름대로 알고 있지만 아무도 묻지 않는다면 노년에 접어 든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기백을 가지세요. 그러나 배울 것이 끝없이 많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인내로 열심히 달리세요. 그리고 무작정 달리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선한 경기를 하세요.
인내로 열심히 달리고 예수님이 확실하고 분명한 목표가 되는 이런 청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전 9:11-12 / 김원효목사
국어사전에 보면 ‘우연’이란 원인과 결과가 아무런 관계가 없이 뜻밖에 일어나는 것(일, 사건)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우연의 반대말은 ‘필연’이라고 하는데, 이 뜻은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는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정된 일이라는 겁니다.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 그리고 앞으로 있을 당신의 죽음은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 그리고 당신이 이곳 캐나다 캘거리에 온 것은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 그리고 당신이 지금 그렇게 사는 것은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 그리고 당신이 지금 여기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거의 대부분 우연과 필연이 함께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믿는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국 속담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너와 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불교에서는 “사람이 옷깃만 스쳐도 3,000겁의 인연이다.”고 말을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겁’이란 시간을 나타내는 단위로, 계산할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겁’이란 하늘과 땅이 한번 개벽한 후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입니다.
이게 3,000번이 일어나야만 너와 내가 옷깃을 한번 스친다는 것입니다. 즉 거의 일어날 수 없는 확률인데 그게 일어나야만 옷깃을 한번 스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끼리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겁니다. 결혼하신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남편(혹은 아내)이 만난 것은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이 질문에 어떤 분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목사님, 우리들의 만남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사람과의 만남은 분명히 악연입니다. 아- 저는 이 악연 때문에 괴롭습니다. 이게 우연이라면 저는 이 악연을 이혼으로 끊어버리고 싶습니다. 아- 너무 힘듭니다.“
반면 아주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에게 주위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봐. 그러니 저렇게 좋은 배우자를 만났지.” 물론 기독교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의 개념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개념은, 이 땅에서 행한 일로 말미암아 죽은 후에 상과 벌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상이 하나님을 잘 믿으면 그 후손이 천대까지 복을 받고, 반대로 조상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악을 저지르면 3-4대까지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우연이 아니고 필연입니다. 고로 부모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아낀다면 하나님을 잘 믿어야합니다. 그래야 자녀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됩니다.
구약성경 룻기서 마지막 장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족보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입니다. 즉 예수님이 탄생되기까지 사람들의 만남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조상 중에 보면 이방 사람인 룻이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조상이 되기까지 참으로 우연 같은 필연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룻기2:3 말씀입니다. “룻이 이삭을 줍다가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에 이르니라.” 룻이란 이방 여인은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했지만 얼마 후에 남편이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일단 먹고는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남의 밭에서 추수하다가 땅에 떨어진 곡식을 줍고 있었는데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보아스를 만나게 되고, 그 보아스란 사람과 재혼을 하게 됩니다. 이 보아스가 바로 예수님의 조상입니다. 즉 예수님이 탄생되기까지 우연 같은 필연의 만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혼하신 분들 중에 두 분이 다 예수님을 믿고 중매로 만나서 교회에서 결혼하신 분들의 경우는 자기들이 배우자를 만남 것이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셨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은 상태에서 우연히 오다가다 길거리에서 만났든지, 혹은 어두운 조명의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다가 우연히 눈이 맞아 순식간에 연애를 하여 결혼에 이른 분들을 보면 잘 살 때는 괜찮은데, 결혼생활이 힘이 들면 “과연 이 사람과의 만남이 옳았는가? 이건 그저 인간적인 우연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데, 이미 결혼을 했으면서도 “아- 하나님! 이 사람은 하나님이 짝지어 준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냥 우연히 일어난 사건에 우리가 휘말려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한 사이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이 짝지어주지 않은 이 사람과는 이혼해도 되지 않겠어요? 더구나 이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이혼허락을 받으려고 딜을 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제가 앞서서 물어본 겁니다. 당신과 당신의 남편(혹은 아내)이 만난 것은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이 질문에 여러분들이 필연이라고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연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필연을 보는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결혼식을 한 그 당시에는 두 분이 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만남이 오다가다 우연히 만나고, 죄악의 나이트클럽에서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이 사람은 하나님이 나에게 짝지어준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결혼 후 부부간에 위기가 닥쳐도 이혼하지 않고 버텨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녀들의 탄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가질 때 부부가 다 같이 마음을 먹고, 계획을 하고, 자녀를 갖기보다는 그냥 결혼했으니까 같이 자고, 그러다보니 임신이 되고, 임신이 됐으니 아이를 낳고... 뭐- 그러다 보니까 자녀가 생긴 것이지. 꼭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필연적으로 자녀가 생겼다고 보는 시각이 적어지는 겁니다.
성경은 분명히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라고 했는데, 자기 자녀가 진짜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자기들이 실수로 낳은 것인지 헷갈리는 겁니다. 그러니 자녀를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녀라는 믿음이 있으면 부모가 책임감을 갖고 돌보지만, 실수로, 우연히, 뜻하지 않게 생긴 자녀라고 하면 아무래도 책임감이 좀 떨어지게 됩니다.
더구나 배우자와 사이가 좋지 않으면 그 자녀도 미워지게 되고 학대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고통스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연 같은 일에서도 하나님의 필연의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즉 인간이 보기에는 그것이 우연 같아도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필연이요, 만세 전에 계획된 섭리입니다. 고로 이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우연 속에서도 필연인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면 순종도 할 수 있고, 인내도 할 수 있고, 감사도 할 수 있고, 평안도 얻을 수 있고, 신앙도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를 깨닫지 못하면 좋지 못한 일들이 생길 때에 인내도 못하고, 불평과 원망이 나오고,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맙니다. 당연히 신앙이 어린애 신앙에 머무르고 맙니다.
오늘의 본문입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때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대저 사람은 자기의 때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전9:11-12)
여러분, 이 세상에는 확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확률 99%라고 하면 이것은 거의 필연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확률대로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종종 우연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도박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거의 90%는 돈을 잃습니다. 그런데 10%의 확률을 바라보고, 즉 우연을 기대하면서 도박을 합니다. 아주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확률 99% 필연을 바라보고 해도 때로는 우연이란 것이 발생하여 실패를 하는데, 우연을 바라보고 도박을 하는 사람들은 참 못 말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보다 나은 확률의 성공과 행복의 길로 가려고 합니다. 좋은 대학을 가서 더 많은 공부를 하는 것도 그것이 확률적으로 더 큰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결혼 배우자를 고르고 또 고르는 것도 더 큰 행복을 보장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르고 골랐는데 도리어 반대로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우연이라는 것이 발생하여 일이 꼬이는 겁니다.
사실 인생이 자기가 마음먹은 그대로 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기치 못한 우연이란 것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자기 주위에 여러 사람들의 죽음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어제 누가 죽었대. 그제는 누가 죽었대.” 그러나 잠시 후 자기도 그렇게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고 했습니다. 즉 너와 나도 언젠가는 병이 들어 죽든지, 사고를 당하여 죽든지 그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입니다. 기르던 강아지가 죽는 것도 필연이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도 필연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죽는 것도 필연입니다.
고로 하나님이 정해놓은 필연을 억지로 거스르려고 하면 그게 죄이고, 그게 불순종입니다. 그리고 그런 필연을 우연이라고 착각해도 안 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필연을 우연이라고 스스로 우길 필요도 없습니다. 좀 어려운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주의 종으로 쓰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부릅니다. 신학적으로 '소명(Calling)‘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주의 종의 길로 가야되는 것은 필연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주의 종으로 가기가 싫습니다. 고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는 여러 모습의 사건들을 그저 우연이라고 돌립니다. 그게 불순종입니다. 반면 우연한 일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의 필연의 뜻을 발견하고 따라가면 그것이 순종입니다.
저의 경우 저는 주의 종이 되는 생각을 1%도 안했고 못했습니다. 저의 부모님도, 제 주위의 친구들도 제가 목사님이 된다는 것을 1%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국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정하신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은 우연히 자기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필연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정하신 예정, 즉 필연을 볼 줄 알고, 그 필연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길이 자기가 생각한 만큼의 성공과 행복의 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도리어 짜증이 나고, 때로는 그렇게 자기를 인도한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그 필연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막상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죽으려니까 너무나 힘이 듭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돌려 달라.”고 몸부림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필연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필연의 십자가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가신 자국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 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물론 예수님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정하신 그 필연적인 길을 순종하며 간다고 사람들이 칭찬과 격려의 박수를 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조롱하며 비웃었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네가 구세주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너를 메시아로 믿겠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그 필연의 길을 다 마치고 예수님이 죽자 그 후에 진정한 승리가 일어났습니다. 부활이 일어났고, 구원 사역이 완성되고, 하나님이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할렐루야!
결론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정하신 필연의 길이 있습니다. 물론 그 길이 내가 원했던 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연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재수가 없다고 말하지도 말고, 누구를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그 길은 너와 내가 가야할 하나님이 정하신 필연의 길입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그 길을 묵묵히 순종하며 가므로 그 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영광이 주어지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때와 섭리를 바라보면서 2006년을
전도서 9장 11~12절 / 지태일목사
희망찬 2006년 새해 벽두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삶의 변화와 이적을 일으키려면, 맛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난 주 드린 말씀처럼 먼저 삶의 포도주가 없음을 고하는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주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되 아구까지 채우는 희생적이고 최선을 다하시기 바람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떠다 주시기 바람니다. 포도주를 떠다 주는 것이 아니라 항아리에 물을 떠다줄 때 이적이 일어남니다. 역사가 일어남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새해 2006년에 이런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바람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지난 11, 12월에 드린 다섯 번째 말씀에 이어 마지막 여섯 번째로 어떻게 우리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지침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다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왕 솔로몬이 기록한 책입니다. 솔로몬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왔던 사람이며 왕이 된 후에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누려 본 사람입니다. 이것 저것 다 누려보고 나서 그의 인생을 깊이 연구하며 고백한 말씀이 전도서입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인생이 사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그렇다면 유한한 우리 인생은 어떻게 살 것인지? 솔로몬이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한 지혜와 비결을 고백한 것이 바로 전도서 9장 말씀입니다.
요즘처럼 우리 인생의 가치관이나 삶의 의미와 목적이 흔들리는 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정치계를 보면 모두 권력이나 대권 도전에 모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과학이나 의학계를 보더라도 무엇인지 옳은지 그른지 모를 정도로 복잡합니다. 다 적이요 경쟁자입니다. 다 자기들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한 때 같이 동고동락했더라도 동료, 후배, 선배, 다 배반합니다.
요즘 계절의 변화, 날씨를 보더라도 호남에는 사상 최대의 폭설이 와서 생명이나 재산을 잃습니다. 일본에는 3m 폭설이 내려 즉석에서 30여명이 죽는 일이 일어났고, 대구 서문시장에 원인 모를 화재가 나서 이틀이나 지나 불을 껐고 수 천명이 졸지에 사업이 곤경에 처하고, 일 자리가 사라지고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서로 밀고 당기는 어처구니 없는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 누가 진짜 잘하는지 이해하기 어렵고 잘하는 것인지, 참으로 혼란스럽고 생의 의미가 실추한 시대도 없는 것 같습니다.
펜싱을 잘 모르지만 어느 여선수가 눈썹이 눈을 찔러 아예 쌍거풀 수술을 받고 내친김에 얼굴 성형수술을 국가대표선수 훈련기간중 받았다는 이유로 선수생활을 그만두라는 ‘자격정지 2년’의 중징계를 받고 한 동안 말을 하지 못하다 “무섭다”며 한없이 흐느끼며 울었다는 소식입니다.
평생에 국가대표가 되려고 주변에서 운동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중1 때부터 열심히 노력하여 태극마크를 달게 되었고, 이제 2008년 중국 올림픽 금메달의 목표도 세웠는데 이렇게 선수생활을 접어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다”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렀다는 소식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본보기로 기강을 잡는다고 한 사람을 이렇게 남의 인생을 그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한 사람의 행복이 이렇게 무너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주 6일에는 경남 창녕에서 손위의 처남의 삼우제를 드리고 오다가 25톤 덤프 트럭과 승용차가 충돌해 승용차가 논 아래로 추락해 그 안에 타고 있던 처남매제 등 6명이 그 자리에서 한꺼번에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죽은 사람 묘지에 갔다오다가 갔던 6사람이나 한꺼번에 사고를 당한다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어처구니없는 안타까운 사고입니다.
이렇게 험하고 복잡하고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힘든 세상에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도들이 산다는 것, 그것도 우리가 올바르고 참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항상 주시는 말씀들을 꼭 부여 잡고 성도의 본분을 잘 지켜 삶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희망찬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람니다.
오늘 행복한 인생을 살기위한 마지막 6번째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인간의 지혜나 능력, 또는 노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깨닫고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때와 섭리속에 있음을 믿고 2006년을 믿음으로 시작하기를 바라는 말씀입니다.
1. 빠른 경주자나 유력자라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11절)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전 9:11a)
이 말씀에서 먼저 달리기 선수가 빨리 달린다고 해서 경주에서 다 우승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빨리 달린다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상을 받게 되는 것도 아니고, 먼저 도착하게 되는 것도 아님니다. 경기하는 선수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경기하는 법을 어기고 빨리 들어왔다고 승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실격 처리가 되어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이솝 우화중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했습니다. 누가 봐도 토끼가 이기는 경기입니다. 비교가 안되는 경기입니다. 원래 토끼는 잘 뛰도록 지음을 맏았고 거북이는 느리게 걷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경주를 시작하여 조금 지나자 가북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자 토끼는 자신을 너무 믿은 나머지 누워 낮잠에 빠집니다. 토끼가 낮잠을 자는 동안 거북이는 쉬지 않고 한 발짝씩 나아가 결국 먼저 도착하여 승리를 했습니다. 잘 뛰는 토끼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님니다.
우리 주변에는 토끼 같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남보다 똑똑하고 잘났다고, 돈을 먼저 모으고 먼저 출세했다고 교만하여 자신을 너무 믿은지 낮잠을 잡니다. 그러는 동안에 거북이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먼저 정상에 오른 경우를 많이 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충성하는 사람, 순종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마지막에는 승리하게 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고 열심히 부지런히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하는 사람, 수요일, 금요일에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오는 사람, 적은 물질이라도 하나님께 정성껏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높이 들어 쓰시고, 영광과 상급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거대한 몸집의 공룡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몸집이 커도 공룡은 결국 멸종되었습니다. 근래에 발견된 공룡 화석은 노아 홍수의 결과로 보여집니다. 너무 커서 노아 방주에 들이지 못함으로 홍수에 의해 쓸려가다가 죽어 화석이 된 것으로 봅니다. 아무리 커도 변화에 둔감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커다란 공룡도 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작아도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여 알차게 일하는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견고하게 지탱해 나갈 수 있습니다. 살아 남는 법입니다.
항상 겸손하게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삶을 사는 사람이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힘이 센 용사, 거인이나 장수라고 해서 전쟁에서 다 승리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서 이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사람이 싸우면 그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다윗이었습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에게 이르기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고 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7)고 말한 뒤에 돌을 취하여 골리앗을 향해 던졌더니 골리앗 이마를 향해 명중합니다.
조그만한 돌을 던진 것은 다윗이지만 골리앗을 쓰러뜨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바로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대가 아무리 거대해 보일지라도 겁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면 항상 승리하는 것입니다.
잠언 21:31절 말씀에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실 때 승리하는 것입니다.
2. 지혜자나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님니다.(11절)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전 9:11b)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고 총명한 지혜자라고 해서 식물을 모으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배우고 앞섰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재물을 모으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도, 우리의 삶이 풍족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재물도 보존을 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겸손한 사람의 재물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이지, 교만한 사람의 재물은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신명기 8:18절 말씀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재물을 모았다면 마땅히 그 재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재물을 얻을 능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역대상 29:12절 말씀에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크게 되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크게 될 수 없습니다.
전도서 5:19절 말씀에도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재물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허락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므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앞으로 여러분, 재물은 선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즉 값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내가 노력을 많이 하고, 지혜가 총명하다고 얻는 것이 아님니다. 하나님의 선물로서, 값없이 받은 것입니다. 값없이 받은 선물로 좋은 일 많이 하시기 바람니다. 그것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나라 옛말에 “小富由勤 大富由天(소부유근 대부유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소부. 작은 부자는 근면이 만들지만/ 대부. 큰 부자는 하늘이 만든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노력으로 작은 것을 성취할 수는 있지만, 큰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게 되시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날마다 구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인생에서 있어서 무엇을 하든지 가장 중요한 결정 중 하나는 바로 협력자를 잘 선택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재산가를 협력자로 삼고,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인, 정치가를 협력자로 삼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협력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람을 믿었다가 실망하고, 권력을 믿었다가, 자기 힘만을 믿었다가 허탈해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배반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협력자로 삼아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과 지혜로 승리하고 성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언젠가도 말씀 드린 최근 현대사에서 최고의 부자, 세계 최고의 부자, 세계적인 석유 재벌이 되었고 수천 곳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웠고, 록펠러 의학 연구소와 록펠러 제단을 세워 세계인류를 위하여 많은 업적을 남기고 1937년 그의 신앙의 유산을 안겨준 어머니가 기다리는 곳으로 떠난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여 그 엄청난 재물을 모을 수 있었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어머니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워 가장 부자이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도와 주셨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재물의 축복을 주시고, 건강의 축복을 주시고, 명예를 주시고, 영광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이 세상을 풍족하고 만족하게 살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3.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님니다.(11절)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전 9:11c) 말씀하심니다.
여기서 기능자는 많이 배워서 아는 것도 많고 능력도 많은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도 아니고 총애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11절 하반절 말씀처럼 시기와 우연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기는 ‘때’를 말하고, 우연은 ‘기회’를 말합니다. 즉, 많이 배우고 기술이 있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때를 주시고 기회를 주실 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자랑하고 주장하고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늘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잠16:1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인생 성공의 여부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말씀합니다. 때와 시기가 바로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출애굽기 33:19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은혜줄 자, 긍휼히 여길 자,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심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아야 하고, 영광을 돌려야 하고,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너무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계략과 책략을 부려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습니다. 너무 자신의 생각만으로 꽉 차 있어서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욕심과 탐심과 교만으로 꽉 차 있어서 하나님께서 거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하고 가르치시는 것을 받아들일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더 하나님께 겸손해져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 나의 인생을 인도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생각이 나에게 충만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넘쳐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은 것처럼 구름 기둥 불기둥만을 따라가야 하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앞서고 하나님께 따라오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행하여 가시는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라가는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십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게 하시고, 많은 사람을 위로하게 하시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영광과 승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어야 합니다. 믿고 싶으면 믿고, 싫으면 관두는 자기 멋대로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함으로 믿어야 합니다.
오래 전 이야기인데 어느 자매가 전문대를 졸업하고 대한항공에 입사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수백 대 일의 경쟁력이라 합격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인 오빠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오빠의 조언대로 기도원에 가서 3일 금식기도를 드린 후, 친구와 함께 입사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합격을 하고 그는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실망이 되어 “하나님, 내 친구는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합격을 하고, 나는 기도원에 가서 기도했는데도 왜 떨어졌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마구 따졌습니다.
그렇지만 불합격으로 인해 풀이 죽은 그는 그래도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후, 그의 원망은 감사의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97년 8월 약 9년 전에 대한항공의 비행기가 괌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약 400 여명이 불타 죽는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같이 시험을 보았던 그 친구가 그 안에 타고 있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합격했더라면 당했을 사고를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서야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그 다음해에 다시 시험을 봐서 그 엄청난 경쟁을 뚫고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뒤늦게 감사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미리미리 감사합니다.
4. 마지막으로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합니다.(12절)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전 9:12)
우리 사람은 과거와 현재는 경험해서 조금 알고 있지만, 사실 인생의 미래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앞날을 모르고 욕심과 탐심을 가지고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려고 애쓰고 발버둥치고 야단을 치다가 결국 어리석게 헛수고로 끝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름니다.
잠언 27:1절 말씀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알아도 내일은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심지어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 알지 잠시 후에 일어날 일도 인간은 모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사도는 야고보 4:14절 말씀에서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연장시키시고 보존을 해 주셔야 오래 사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바로 가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모름니다. 언제 인생이 끝날런지, 성공 할런지, 실패할런지 그 시기를 모르고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구해야 합니다. 기다리시기 바람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시기고 따라 가시기 바람니다. 충성 다하시기 바람니다. 서두르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고 거짓에 치우치지 아니할 그 때에 복이 있습니다.
♬ 찬양/ 주를 의지하고 교만하지 않으면 거짓에 치우치지 아니하면 복이 있으리라 여호와 나의 주는 크신 권능의 구주라 주의 크신 권능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여 주시네.(시 40편)
말씀을 맺습니다.
희망찬 새해 2006년을 맞이하여 우리의 생애의 모든 일들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때와 섭리만을 바라보시기 바람니다. 사람의 노력이나 지혜, 의지만을 가지지 말고 중심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중심하여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나가시기 바람니다. 그래서 2006년 한해가 그 어느 해보다 하나님의 축복의 귀한 한 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입는 성도의 삶
전도서 9장 11~12절 / 최종천목사
우리 인생이란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살아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설사 그렇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가 늘 같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도무지 계측할 수 없는 불분명한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삶에는 그만큼 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전에 아는 학생 중에 공부를 참 열심히 잘했던 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시험을 치르기 전날 그 앞집 부부가 밤새도록 싸워서 잠을 못자고 잠 때를 놓쳐서 잠을 제대로 못자서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 시험을 망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제일 점수가 높은 학교는 들어가질 못했습니다.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억울함 때문인지 상과대학에 들어가고 싶어 했는데 다른 대학에 들어가서 더 열심히 공부해서 학기 중에 회계사 시험에 일찍 합격해서 좋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삶의 변수는 너무 다양해서 내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경우도 있고 늘 그만큼만 하면 되던 것이 전혀 다른 수준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예기치 못했던 순적한 바람이 불어서 일이 순조롭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일정시간 지나서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보게 되면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달라졌을까하고 깜짝 놀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면에서도 그러하고 나쁜 면에서도 그러합니다.
우리 인생의 특징은 이렇듯 예측성과 또 한 가지는 예측을 넘어서는 불가측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예상한대로 되는 때도 있고 그 예상을 넘어서서 전혀 다른 데로 이루어지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언제나 성실히 준비하되 그 성실을 넘어서는 또 다른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잘 준비했어도 겸손해야 하고 준비가 부족해도 미리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입는 성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며 우리에게 생각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우리의 삶은 성실함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내 생각의 수준을 넘어서는 때로는 우리의 작은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는 더 높은 수준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삶의 우선적 원칙은 성실함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을 보게 되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즉, 삶은 심은대로 거둡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운행의 법칙을 가장 잘 보여주시는 것은 자연입니다. 하나님은 그 대자연속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반영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심은대로 거두게 한다는 법칙입니다. 우리 삶에 무엇보다도 이 인과응보의 법칙을 인정하고 삶을 진행해야만 합니다. 다른 이에게 선을 베풀면 하나님의 선대하심으로 우리를 받아주시고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칭찬하실 겁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뒤에서 흉본다거나 하나님이 하실 일을 마치 자신이 하나님처럼 평가해버리고 판단한다면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에 대한 징계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도움이 되는 생각과 행동에는 축복할 것이고, 하나님 나라에 방해가 되는 생각과 행동에는 고통의 징계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섬기는 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심은대로 거두는 은혜의 법칙을 믿는 자의 바른 삶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생각, 하나님 앞에서 바른 언어, 하나님 앞에서 바른 행동,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야 할 바른 일이 무엇인가 알고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겁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광야의 방황이 끝나지 않는 고통의 연속일 것입니다.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불편한 분들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그 마음을 불편하게 하셨을까요? 아니면 그 스스로의 죄악으로 인하여 이런 불편한 마음을 벗어나지 못하는 징계의 상태에 있습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스스로 죄악과 내 잘못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해 스스로 불평과 불만 속에서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다보면 불평하고 다른 사람 험담하고 깎아내리는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을 욕하는 사람은 평생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돕고 칭찬하고 감사하고 높이고 세워주는 사람은 평생동안 그렇게 살다가 갑니다. 성실히 노력하고 애써 행복을 심고 그것을 거두며 기뻐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노력보다는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따라서 불만족이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을 야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늘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 삶의 축복의 비결일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축복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사람은 사람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인간들을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의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말씀의 준행의 성실함과 근면함입니다. 심은대로 거두기 위한 삶의 성실성과 진실성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사실에 근거한 진실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사실에 근거한 진실”
우리는 보통 진실이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나 그렇게 믿어. 확실해. 나는 거짓이 없어. 진실해”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진실이 사실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내가 믿는 진실이-내가 거짓말하지 않는 내가 믿는 진실이 과연 사실일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잘못된 지식을 습득할 수도 있고, 우리는 그릇된 내용을 신봉할 수도 있고, 우리는 편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사실인가에 대한 확인 작업이 없으면 “나는 진실이야”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오류를 우리는 흔히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대는 혼미한 시대입니다. 여기저기서 이사람 저 사람이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미혹합니다. 심지어는 우리 자신조차 우리 스스로를 옭아매는 올무를 우리 자신에게 씌우기도 합니다. 사실에 근거한 진실이 아닌 경우 우리는 내 자신을 망치고 하나님 역사에 방해하며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고 결국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모두가 감사합니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혹은 ‘아니면 미안하고’ 식으로 무책임하게 인생을 살면 반드시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교역자들에게 어떤 일을 맡겼을 때, 반드시 보고를 해야 될 때 세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거듭 부탁을 드립니다.
정직성, 정확성, 신속성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해야 합니다. 또 정직할 뿐 아니라 정확해야 합니다. 그리고 꼭 그것이 필요할 때 말을 해야 되는 신속성입니다.
정직성이 가치를 발휘하려면 정확해야 합니다.
정확의 요체는 숫자의 정확과 표현의 정확입니다.
그리고 지체하지 말고 꼭 필요한 시간에 맞추는 신속성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도 내일이나 모레 될 일을 지금 했다고 미리 말해놔서는 안 됩니다. 내일 분명하게 될 것이니까 지금 했다라고 말하고 내일 하려고 생각하면 우리는 흔히 실수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제 경험으로 꽤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됐다고 얘기해요. 그런데 살펴보면 되지 않고 내일 하려는 일을 오늘 됐다고 말하고 말했으니까 내일 급히 그 일을 마치려고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 시간이 지나서 결과의 여부를 물어보면 아직 못했을 때 됐다고 얘기하고 그 일을 하려고 허겁지겁 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거나 체험하거나 실행하지 않고 남에게 들은 것이나 생각한 것을 마치 보고 행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될 것 같은 일을 됐다고 말하고 미리 보고하는 것 옳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시켜놓고 결과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마쳤다고 보고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전해들은 것을 마치 보고 들은 것처럼 말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금방 파악되고 보고 들으면 금방 알게 되죠.
적어도 30년간 비슷한 일을 했는데 모르겠습니까?
사기꾼이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믿고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그럴 것 같다라는 소망이나 추측을 마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급기야는 자신도 그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바를 말하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삶의 현실은 꼭 희망사항대로 되어주지는 않습니다. 기대처럼 꼭 맞추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사기꾼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잘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결국 사람에게 잘못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하는 것이 돼서 더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감격함과 더불어 공의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두려움으로 우리자신을 돌아보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교역자들뿐 아니라 우리 성도들도 내 눈으로 확인한 분명한 제한된 사실이 아니면 우리는 믿거나 말하거나 가르치지 않아야 된다고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내 눈으로 확인한 것도 어떤 편견을 가지고 보면 잘못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편견을 가지고 있을 때 내 눈앞에 모든 것은 그렇게 해석이 됩니다. 저는 때로는 우리 사람들의 생각이 참 다르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에 제가 말씀을 들었는데 우리 일천번제 헌금봉투를 우리가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구멍을 뚫었어요. 왜냐하면 이게 여러 장이다 보니까 내용물을 때로는 미처 빼지 못하고 그냥 두면 안 되잖아요. 성도들의 정성어린 것인데. 그래서 어떤 작은 것이라도 잘 관리를 해야 돼서 이렇게 구멍을 뚫었어요. 처리하시는 분들이 아주 잘 돼서 고맙다라고 얘기하시는데요. 그런데 어떤 분이 있냐면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매일 새벽기도 나오셔서 헌금을 드리시는 분은 매일 드리시는데 혹시 주일날 모아서 드리시는 분은 처리하시는 분이 이걸 또 일일이 써야 하니까 모아놓으면 쓰기가 좋잖아요.
그래서 고무줄로 이렇게 묶어서 내시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어떤 분은 고무줄로 묶는데 어떻게 묶느냐하면 여기 구멍이 뚫려 있잖아요. 고무줄을 구멍에 끼워서 그러니까 헌금은 절반을 접어서 밑으로 넣어서 보이지 않고 고무줄을 구멍에 끼워서 이렇게 묶어서 내시는 분이 있다는 거예요. 너무 신기하죠?
고무줄로 묶어서 내라니까 그 말을 그렇게 알아들은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잘못했습니까?그 분은 그렇게 인식한 거예요.
묶어서 내라니까 여기에 구멍이 있으니까 구멍에다 이렇게...
사람마다 똑같은 말씀을 드려도 너무나 다르게 알아듣는다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마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사물을 보면 모두가 그렇게 해석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믿는다는 것 내가 확신한다는 것에 대해서 때로는 정말 바른 사실을 확신하는가? 라고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저는 점점 말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판단에 대해서 말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내가 그 사람을 알면 얼마나 알고 내가 그 상황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런데 내가 어떻게 확신을 가지고 그 사람에 대해서 말을 하고 내가 그 상황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라고 분명하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점점 오류의 가능성에 대해서 조심스러워집니다. 제가 확실하게 아는 것만 조심스럽게 말하고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자신에 대해서조차 불확실성에 대해서 조심스러워집니다.
제가 다른 곳에서 설교를 잘 안 하려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 한 사람에 대해서 국한된 것입니다. 다른 분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또 초청받아서 가게 될 경우에 처음 가는 곳인 경우가 많겠죠. 처음 가는 곳에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다보면 말이 강도가 좀 강해지는 것 같아요. 짧은 시간에 전해야 하고 늘 처음 전해야 하는 것이다 보니까, 또 한 번 전하고 없으면 마는 거거든요. 그러다보니까 강하고 자극적인 말을 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본 교회에서는 이제까지 전한 말씀의 맥락에서 전하니까 그 한번으로 모든 것이 결판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면에 있어서 한 번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다른 곳에 가면 그 순간 모든 것이 결판이 나야 되니까 자꾸 말이 강해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 확실한 것 같고 더 은혜를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은 공허해지는 것 같아요. 혹시라도 사실보다도 극적으로 감동을 위해서 더 강하게 전한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어요. 은혜 받은 것도 보다 극적으로 전달하게 돼요.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극적으로 임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오랜 시간을 끌면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요즘 인생이나 삶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든 것이 더 조심스러워집니다. 정말 오래 생각하고 조심해서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옳은 말하고 바른 말하지만 상대에게 상처가 되고 어려움이 되고 유익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옳고 바른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생각이 됩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사람을 비난하고, 은혜를 말하면서 베푸는 것은 없고, 구원을 말하면서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망하기를 바라고, 주님이 이 땅위에 펼치신 희생과 사랑의 복음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요즘 초신자의 상태를 벗어나 헌신자가 되고자 말씀드리는데 정말 우리가 초보믿음을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안에 들어와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믿음이라는 것은 진정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예수 믿으면 달라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무언가 우리 인생이 달라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인생에는 내가 이해하거나 납득하지 못하는 더 높은 수준의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습니다.
오늘 <11절>을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고 힘 있는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아니며 지혜가 있다고 해서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고 명철이 있다고 해서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고 지식인이라고 은총을 얻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시기와 기회가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내 수준에서는 납득되지 못하는 하나님의 더 높고 멀리 보는 뜻과 섭리가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과 같은 수준입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노력을 덜 했는데 나보다 더 잘되는 것 같아요. 불합리하고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정말 불공평하십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번 생각을 바꿔보면 어떻겠습니까?내가 혹시 저 사람을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억울하다 편법을 썼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정말 내가 모르는 어떤 수고를 저 사람이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 수고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내가 저 사람에 대해서 잘못 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잘 되는 데는 또한 잘되는 이유가 있고 안 되는 데는 안 되는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고 내 자신의 부족을 더 생각해 보고 그것을 보완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수고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평생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일생을 망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부족한 은혜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다 알지 못해도 더 큰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틀렸겠습니까? 하나님이 불합리하겠습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는 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와 같은 안타까운 상황들을 볼 때 우리는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수준에서 납득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틀렸다라고 판단하지 않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와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은혜와 능력과 길을 구해야 합니다.
삶에 이해 못할 부분이 있을 때 우리의 짧은 지식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더 겸손해지며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짧은 지식과 능력을 가졌음을 하나님 앞에 죄송히 여기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은혜와 지혜를 구하는 것이 믿음의 길일 것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자신의 앞일과 한치 앞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삶의 흐름에 실려갈지 우리는 알지 못하는 인간의 제한됨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12절>을 보니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한다 물고기에게 재난의 그물이 덮치듯이 새에게 올무가 덮치듯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그들에게 임하면 거기에 걸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그 누구도 그 어떤 재앙을 피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인생의 한치 앞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인생의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내일 재앙이 닥칠지, 내일 내 인생이 마쳐질지, 내일 하나님의 예상치 못했던 자비와 은혜가 임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죄악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대신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을 구원해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어찌 우리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참고 참으셨던 하나님이 그 어느 날 손을 들어 이 세상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죄악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씻어 내버리실 때 그 때를 우리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겸손하게 살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앞일을 볼 수 없다면 그 때마다 적절히 대처할 수 없으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늘 준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내일을 알 수 있다면 적절히 대처하겠죠. 그런데 그것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언제나 겸손하고 준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전도서 7장 14절>을 보면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셔서 사람으로 장래 일을 능히 헤아리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형통함과 때로는 곤고함을 주셔서 정말 우리의 앞길을 우리 스스로가 알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무릎 꿇고 머리 숙이는 인생의 모습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굴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아름다운 인간의 겸허한 삶입니다. 우리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으니 그러한 연약함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한치 앞을 알지 못하니 진리대로 은혜대로 말씀의 가르침대로 살아감이 더 필요합니다. 어려움이 닥쳐와도 적어도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 아니라 최선껏 살았으니 후회없어 감사합니다라는 후련함이 우리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삶이란 시간 지나면 후회하지 말고 시간이 지났을 때 아름다운 인생 소풍처럼 살고 가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고백과 은혜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인간이 더럽고 죄악 되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발붙이고 숨 쉬며 살겠습니까? 과연 내가 말한 내가 믿는 진리가 얼마나 진실하고 내가 행하는 것이 얼마만큼 하나님 앞에 합당할까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고개들 수 없죠.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 더러운 옷을 입고 내가 깨끗한 줄 착각하고 죄악에 손을 휘두르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어느 날 가장 초라한 자는 나 자신임을 깨달을 때 그 좌절 속에 우리인생이 끝난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겠습니까?
내일 인생에 재앙이 닥치게 될 때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재앙이 닥쳐 후회하기 전에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때 바로 살고 하나님 앞에 겸허한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지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재앙이 닥쳐올 수 있음을 알고 더욱 더 겸손하게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에게는 물고기에게 재난의 그물이 새에게 올무가 덮침같이 언제고 그 어려움은 닥쳐오게 됩니다. 인생의 재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편안함이 있으면 재앙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하고 담담한 태도로 인생을 맞이해야 됩니다. 요즘 우리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가엾은 인생에 대한 연민과 애처로워함과 자비의 마음이 커진다면 우리 인생은 따뜻해질 겁니다. 그러나 나를 주장하고 하나님의 자비와는 상관없는 내 말과 내 생각과 행동을 이루려고 좌충우돌한다면 인생은 한없는 슬픔의 계곡을 헤매게 될 것입니다.
혹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는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기쁨으로 살게 하셨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물질을 거두어가셨다면 이제까지 사용할 수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건강을 거두어갔다면 이제까지 건강하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모든 관계가 어려워졌다면 이제까지 좋은 관계를 누렸음을 감사합니다. 세상에 가져온 것도 없고 우리는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 자신 혼자 살아갈 수도 없었고 우리는 어떤 관계도 없이 이 세상에 홀홀 왔는데 그동안 좋은 관계를 누리고 좋은 건강을 누리고 좋은 기쁨을 누렸다면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배가 고팠어요. 어느 집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초청해서 그 집안에 들어가서 밥을 한 상 잘 차려서 대접받았어요. 갈데없으니 오늘 주무시라고 해서 거기서 자고 2~3일을 그렇게 먹고 잘 지냈습니다. 새로운 손님이 오시니 이제는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 받았을 때 우리가 뭐라고 대답해야 될까요?
“감사합니다. 잘 먹고 잘 지내다 갑니다.” 하고 그 집 나와야 되지 않겠어요? 나오면서도 인사하고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오면서 마치 그 집의 주인인 양, 그 모든 것이 내 것인 양, 누렸던 것에 대해서 오히려 화내고 왜 이제까지 잘해주고 지금 나를 보고 나가라고 그러냐고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제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또 다시 새로운 은혜를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겸손은 우리를 더욱 더 아름답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누리게 합니다. 내 앞에 다른 이의 어려움을 바라보는 인생의 태도입니다. 언제고 내게 어려움이 닥칠 것입니다. 다만 시간과 때가 문제입니다. 진정으로 위로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자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빠진 자를 위로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의 재앙 중에 임할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우리 인생에 참된 사랑과 은혜의 심정으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과 재앙을 비웃는 자는 그것보다 더 심한 재앙을 당하며 결국은 심은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갔을 때 문화는 판단하는 법이 아닙니다. 그것이 그들의 최선입니다.
수천 년을 지나며 이루어진 소중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생각하기에 낙후된 문화라고 할지라도 역시 어려운 여건 속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사나?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곳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는데 우리가 판단할 일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고통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게을러서 고통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자비와 온유와 은혜의 심정을 가지고 바라봐야 합니다. 재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비난하는 자는 자신의 더 큰 죄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그러한 것을 봅니다. 격렬히 비판하는 자는 자신의 비슷한 약점을 변호하려는 심정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자는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우리 삶에서 다른 이의 아픔과 어려움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큰 은혜의 눈길로 바라봐야 합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세상에 다 없어져야 한다면 이 세상에는 결국 나 혼자 남아 고독과 절규 속에 처참한 인생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이 내가 가장 죄악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다 떠나보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버린 겁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버린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초라한 자가 될 겁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없어져야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안 들어도 그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으면 오히려 내가 그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나 재앙당하는 사람을 돌아봐야 합니다.
심지어는 내 원수가 재앙을 당해도 그를 비난한다면 내 인격의 바닥을 말합니다.
정말 어떤 때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기독교인들의 영적수준, 인격적 수준이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는 무엇인가? 그들의 세속적 욕망과 무엇이 다를까를 생각합니다. 말하는 수준, 생각하는 수준, 다른 이를 배려하는 수준이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하면 사단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입는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분노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감사하며 앞으로 주실 은혜를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여 그것을 이루는 성도입니다.
인생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뜻을 잘 파악하여 이루는 이들이 축복의 백성입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징계하시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속히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려움을 통해서 나를 연단시켜 더욱 더 강하게 하시고 축복을 받을 그릇으로 만든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어려움 속에 오히려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더욱 더 수고하고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도 그 백성을 쉽게 키워서 사용한 적이 없어요. 언제나 어려움을 주시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심으로 만인 앞에 우뚝 세우십니다. 그리고 어려움 당한 이를 돕게 하셨습니다. 환란과 곤고를 기뻐해야 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자에게는 어려움조차 주시지 않습니다. 방치할 뿐입니다.
내게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생각하며 마음을 강하게 먹고 극복할 의지와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언젠가 내게도 어려움이 닥쳐올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면 그 어떤 상태에서도 교만할 수 없고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어떤 계단을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와야 됩니다. 어떤 곳에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와야 합니다. 올라갈 때는 내려올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도 만약에 내가 저 사람과 헤어질 때 어떤 모습으로 헤어질 것인가를 생각해서 배려해줘야 되고 사려 깊게 말해야 되고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뒤를 바라보며 우리의 모든 언행을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일도 시작이 중요한 것 아니라 마지막 마칠 때가 더 중요하다를 생각하고 우리는 그 때를 바라보며 지금 현재의 모든 일을 진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도 어떤 어려움이 분명히 닥칠 텐데 그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해두고 그 순간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나타내 드릴 것인가를 생각해두고 그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내게도 어떤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면 나는 어려움 겪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욥의 친구는 고통당하는 욥에게 와서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회개해야 될 사람은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남을 지적하는 사람은 자신을 돌봐야 합니다.
어려움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그 어떤 순간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역사를 이뤄가야 합니다.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우리 인간들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려움 없는 기간을 감사하며 어려움이 온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그것을 아름답게 해결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만약에 재앙을 당한다면 어려움을 겪는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 어려움과 재앙에게 이렇게 인사하셔야 됩니다.
자,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이제야 오셨군요. 함께 아름다운 역사를 이뤄 보십시다.”
그래요. 어려움 당하고 재앙당하면 이렇게 인사해야 돼요.
어려움과 함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나의 어려움을 극복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려깊은 성도들이 돼야 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이런 생각해요. 누구나 닥치는 것이다. 또 내 인생의 어려움은 끝까지 평생 계속해서 끝까지 지속될 것이다. 큰일도 아니고 놀랄 일도 아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하는 것이다. 이 해결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영광을 받으실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다만 우리의 몫일뿐입니다.
저는 요즘 기도 가운데 강력한 도전을 받으며 우리 성도님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이제까지 적으면 2,30년 많으면 수십 년을 어떻게 사셨습니까?마음에 원하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꿈을 이루기 위해서,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살아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수십 년을 살아오셨는데 과연 그 꿈을 이루셨습니까? 그 계획을 이루셨습니까? 모든 것이 차질없이 진행됩니까? 흡족하십니까?
우리는 살다보면 그렇게 원하는 것이 내게 다 이루어지지 않아서 흡족하지 못한 삶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애쓰고 살아왔는데 정말 내 인생 흡족하십니까?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생각을 한 번 바꿔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이제까지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고, 내가 이제까지 나를 위해서 살았고, 내가 이제까지 내가 계획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 살아왔는데 그 결과 아직까지 내가 수십 년을 노력해도 그것을 이루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생각을 한 번 바꿔보자.
내 삶을 한 번 바꿔보자.
이제는 내 삶을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자.
내 삶을 전적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자.
그리고 내 인생을 마칠 때 과연 내가 어떤 마음으로 주 앞에 설 수 있을까?
내가 앞으로 남은 생애, 정말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으로 또 몇 십 년을 더 유지하여 정말 그렇게 살 것인가? 이제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해서 주님 앞에 살아 주님 내가 어떤 능력이 얼마큼 있었는지 주님께서 잘 아시지만 주어진 여건 속에서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남은 몇 십 년을 살아왔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렇게 살아왔음을 감사합니다.
내가내 인생 이렇게 살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하고 고백하고 주님 앞에 가는 것이 기쁨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 인생에 고정된 것은 없어요. 언제고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언제고 다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있을 때, 힘 있을 때, 능력 있을 때, 시간 바쁘도록 나를 인정받을 때 우리는 주님의 뜻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제는 방향을 전환합시다.
주님의 뜻을 파악하고 그것을 이루어드립시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삽시다.
우리 인생의 새로운 전기의 역사가 있도록 합시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입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의 때와 섭리
전도서 9장 11~12절 / 김성광목사
설교개요
A. 때와 섭리에 대하여
1. 하나님의 때와 섭리, 뜻
2. 본문 배경 설명
B. 하나님의 때와 섭리
1. 빠른 경주자나 유력자라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 승리는 하나님의 때와 섭리에 달려있다(전 9:11a)
2. 지혜자나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다
- 재물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때와 섭리에 달려있다(전 9:11b)
3.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다
- 은총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때와 섭리에 달려있다(전 9:11c)
4.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한다
- 죽음도 하나님의 때와 섭리에 달려있다(전 9:12)
C. 겸손히 하나님의 때와 섭리를 구하고 최선을 다하여서,
승리하고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A. 때와 섭리에 대하여
1. 하나님의 때와 섭리, 뜻
우리는 어떠한 일 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모든 일을 행할 때는 먼저 그 일 속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이 행복하고 축복받는 삶을 삽니다. 승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647년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서는 기독교의 신앙고백을 33장으로 요약해서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미국과 영국의 신앙기준이 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이 신앙고백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극하신 지혜와 거룩하신 섭리로 가장 큰 것에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의 행위들과 생각들을 보호하시고 지도하시고 처리하시며 다스리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2002년 월드컵대회에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이번 대회를 놓고 모든 축구전문인, 언론계, 도박사들의 예상이 빗나가는 이변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대회였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세계 1위였던 프랑스가 예선 탈락을 했고, 월드컵 첫 출전 국가인 세네갈이 8강에 진출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랭킹 40위이던 국가가 5위인 이탈리아와 6위인 포르투갈, 7위인 스페인을 이기고 4강에 진출했습니다. 감독, 선수들, 응원하는 사람들 모두 열심히 했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마지막 경기에서 터키에게 3:2로 지긴 했지만, 터키는 6·25 전쟁 때, 무려 1만병이상이나 군사를 보내서 우리를 도와주고 지켜준 나라입니다. 그래서 터키에게 진 것은 아깝지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경기를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골든골을 성공시킨 안정환 선수는 경기 후 부인과 통화하면서 “하나님께서 내 머리에 공을 얹어주신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볼을 막아낸 이운재 선수도 경기 후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나도 모르게 몸과 손이 나갔다. 하나님께서 손을 이끌어주신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우리 한국선수들의 뒤에는 기도로 후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안정환 선수의 부인은 경기를 앞두고 40일 아침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시합 당일에도 중앙침례교회 기도원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골을 넣고 두 손 모아 기도했던 이천수 선수도 출석하는 교회 성도들이 항상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영락교회를 출석하는 유상철 선수의 어머니는 매일 5시에 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터키전에서 두 번째 골을 넣고 무릎 꿇고 기도하던 송종국 선수의 어머니도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또 최태욱 선수, 이영표 선수, 차두리 선수의 뒤에도 그들의 부모님과 출석교회 성도들의 끊임없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4강에 진출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고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상(환상)을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창 15:1 ; 행 10:10~11) 꿈을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창 31:11) 성경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시 119:105 ; 딤후 3:16~17 ; 히 10:7) 마음의 소원, 기도를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잠 19:21 ; 빌 2:13) 하나님의 종,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단 2:28,47)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알기만 하면 여러분의 가정이나, 사회생활이나, 모든 것이 다 형통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오늘 본문말씀은 솔로몬 왕이 노년에 인생을 돌아보면서,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깨닫고, 모든 일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때와 섭리 가운데 있음을 교훈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달리기 선수가 빨리 달린다고 해서 경주에서 다 우승하는 것도 아니고, 힘이 센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다 승리하는 것도 아니며, 지혜와 명철이 있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고, 많이 배웠다고 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라, 세상만사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때에,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죽음조차 알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항상 겸손하게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때와 섭리’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빠른 경주자나 유력자라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지혜자나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넷째,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B. 하나님의 때와 섭리
1. 빠른 경주자나 유력자라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 승리는 하나님의 때와 섭리에 달려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전 9:11a)
빨리 달린다고 해서, 날쌔다고 해서, 앞선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상을 받게 되는 것도 아니고, 먼저 도착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법을 어기거나 교만한 사람들은 경주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힘이 세고, 거인이나 전사라고 해서 반드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무엘상 17장 말씀을 보면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서 이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에게 이르기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고 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7)고 말한 뒤에 돌을 취하여 물매를 던졌습니다.
돌을 던진 것은 다윗이지만 골리앗을 쓰러뜨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바로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대가 아무리 거대해 보일지라도 겁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면 항상 승리하는 것입니다.
잠언 21장 31절 말씀에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승리하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하면 승리합니다.(시 20:5) 담대하면 승리합니다.(요 16:3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승리합니다.(롬 6:17~18) 성령 충만하면 승리합니다.(갈 5:16~17,22~23) 믿음을 가지면 반드시 승리합니다.(히 11:33)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Homeros ; B.C. 800?~B.C. 750)는 유명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입니다. 그는 “싸우는 것은 사람이지만 승리를 주는 것은 하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늘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토끼와 거북이라는 이솝이야기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했습니다. 누가 봐도 토끼가 이기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토끼가 먼저 앞서 가다가 자신이 잘 뛴다는 것을 믿고 그만 낮잠을 잤습니다. 토끼가 낮잠을 자는 동안 거북이는 쉬지 않고 한 발짝씩 나아가서 결국 승리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토끼 같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남보다 똑똑하고 잘났다고, 돈을 모으고 출세했다고 교만하여 낮잠을 잡니다. 그러는 동안에 거북이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충성하는 사람, 순종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마지막에는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고 열심히 부지런히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하는 사람, 수요일, 금요일에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오는 사람, 적은 물질이라도 하나님께 정성껏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높이 들어 쓰시고, 영광과 상급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거대한 몸집의 공룡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몸집이 커도 공룡은 결국 멸종되었습니다. 여러분의 회사가 대기업이 되고 재벌그룹이 된다고 할지라도, 대규모의 주식회사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교만하다면 실패하고 망하게 됩니다. 변화에 둔감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작은 중소기업이라 할지라도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알찬 기업이 된다면, 공룡 같은 대기업이 망할지라도 견고하게 지탱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2. 지혜자나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다
- 재물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때와 섭리에 달려있다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전 9:11b)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고 총명한 지혜자라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많이 배우고 앞섰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재물을 모으는 것은 아닙니다. 또 명철자라고 해서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도, 우리의 삶이 풍족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재물도 보존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겸손한 사람의 재물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이지, 교만한 사람의 재물은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신명기 8장 18절 말씀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재물을 모았다면 마땅히 그 재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재물을 얻을 능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역대상 29장 12절 말씀에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크게 되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크게 될 수 없습니다.
전도서 5장 19절 말씀에도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재물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허락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므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앞으로 여러분, 재물은 선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것이 아닙니다. 이 선물로 좋은 일을 많이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소설가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 1898~1963)는 “하늘의 것을 목적하라. 땅의 축복은 저절로 따라온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옛말에도 “小富由勤 大富由天(소부유근 대부유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작은 부자는 근면이 만들지만 큰 부자는 하늘이 만든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노력으로 작은 것을 성취할 수는 있지만, 큰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제학의 대부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 ; 1723~1790)는 “경제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 곧 하나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바탕으로 경제 이론을 세우고, 『국부론』을 집필했습니다. 그는 경제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 평가했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파레토(Vilfredo Pareto ; 1848~1923)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중 하나는 협력자를 선택하는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산가를 협력자로 삼고,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인, 정치가를 협력자로 삼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협력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람을 믿었다가 실망하고, 권력을 믿었다가 허탈해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협력자로 삼아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과 지혜로 승리하고 성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근 현대사에서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 1839~1937)만한 부자는 없습니다. 이 최고의 부를 누렸던 록펠러에게 어떤 사람이 “당신은 어떻게 하여 그 엄청난 재물을 모을 수 있었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어머니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워 가장 부자이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단지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재물의 축복을 주시고, 건강의 축복을 주시고, 명예를 주시고, 영광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이 세상을 풍족하고 만족하게 살도록 만들어주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3.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다
- 은총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때와 섭리에 달려있다
기능자는 능력이 많은 사람을 말합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깨달아서 경험이 많은 사람을 말합니다. 시기는 ‘때’를 말하고, 우연은 ‘기회’를 말합니다.
즉, 많이 배우고 기술이 있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고, 기회가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9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아야 하고, 영광을 돌려야 하고,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8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출 20:6)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욥 33:26), 겸손한 사람(잠 3:34),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잠 14:9),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히 10:29)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너무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계략과 책략을 부려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습니다.
너무 자신의 생각만으로 꽉 차 있어서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욕심과 탐심과 교만으로 꽉 차 있어서 하나님께서 거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하고 가르치시는 것을 받아들일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더 하나님께 겸손해져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 나의 인생을 인도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생각이 나에게 충만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넘쳐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은 것처럼 기둥을 따라가야 하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앞서고 하나님께 따라오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 1880~1968)는 미국의 맹·농아 저술가이자 사회복지 사업가입니다. 그는 삼중 장애자입니다.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책도 많이 쓰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어떤 기자가 그에게 “당신은 육체적 고통과 함께 한 평생을 살아왔는데, 혹시 하나님을 원망해 본 적은 없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헬렌 켈러는 웃으면서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없는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도 부족한데 원망할 시간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너무 감사하고 기쁘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 기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따르는 사람은 원망하고 낙심할 시간이 없습니다. 절망할 시간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라가는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십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게 하시고, 많은 사람을 위로하게 하시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영광과 승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어야 합니다. 믿고 싶으면 믿고, 싫으면 관두는 자기 멋대로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순종함으로 믿어야 합니다.
어느 자매가 전문대를 졸업하고 대한항공에 입사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수백 대 일의 경쟁력이라 합격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인 오빠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오빠의 조언대로 기도원에 가서 3일 금식기도를 드린 후, 친구와 함께 입사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합격을 하고 그는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실망이 되어 “하나님, 내 친구는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합격을 하고, 나는 기도원에 가서 기도했는데도 왜 떨어졌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마구 따졌습니다.
그렇지만 불합격으로 인해 풀이 죽은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후, 그의 원망은 감사의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대한항공의 비행기가 괌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같이 시험을 보았던 그 친구가 그 안에 타고 있다가 죽은 것입니다. 만약 합격했더라면 당했을 사고를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그 때서야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그 다음해에 다시 시험을 봐서 그 엄청난 경쟁을 뚫고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뒤늦게 감사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미리미리 감사합니다.
4.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한다
- 죽음도 하나님의 때와 섭리에 달려있다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전 9:12)
과거와 현재는 알고 있지만, 우리 인생의 미래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욕심과 탐심을 가지고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려고 애쓰고 발버둥치고 야단을 해도 결국 어리석게 헛수고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구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 36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신명기 32장 39절 말씀에는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잠언 27장 1절 말씀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알아도 내일은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 말씀에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연장시키시고 보존을 해 주셔야 오래 사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바로 가야 합니다.
모든 인간의 삶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작년에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9·11 테러사건입니다. 제가 아는 미국 교포의 아들이 대학 졸업 후, 월드트레이드센터에 입사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옆의 작은 증권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가 난 후,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를 드렸는지 모릅니다. 그때, 합격해서 월드트레이드센터에서 근무를 했더라면 건물이 무너질 때 죽었을 수도 있는데, 떨어지는 바람에 그 옆에 작은 빌딩의 회사에 들어가게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북한의 장기 집권자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의 운명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통일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어제 29일 서해 연평도에서 북한과 포격전이 벌어져서, 우리 해군, 4명이, 전사하고, 1명이 실종되고, 19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낙심할 필요도, 놀랄 필요도 없습니다. 겁먹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잘 될 것을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월드컵만 4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도, 경제도, 국가도, 모든 분야에서 한국이 축복받은 국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나라가 될 것을 믿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돈이 너무너무 많아서 죽는 것이 원통하고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80세까지 살다가 하나님께 “하나님, 내 재산의 절반을 하나님께 드릴 테니 오래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래. 네 재산 전부를 주었으면 2천년을 살게 해 주었을 텐데, 절반을 준다고 하니 나도 반을 잘라서 천 년을 더 살게 해주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며 천년을 더 산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그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서 “하나님, 하나님도 거짓말을 하십니까? 분명히 천년을 살게 해주시겠다고 해 놓고 하루 만에 부르시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너는 성경도 모르느냐? 베드로후서 3장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나와 있지 않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이래저래 손해를 봅니다.
여러분, 아무리 재산을 아끼고 모아도 언제 죽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써야 할 곳에는 써야 합니다. 쓸 만큼 쓰고, 좋은 일도 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준다고 자녀들이 모두 잘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기 위해 나쁜 일을 많이 해서 결국에는 지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자 아들도 지옥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아, 나는 너를 위해서 재산을 모으느라 나쁜 짓을 했지만, 너는 무엇 때문에 지옥에 왔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저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재산을 모두 쓰느라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자녀들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준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돈으로 착한 일을 많이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충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겸손히 하나님의 때와 섭리를 구하고 최선을 다하여서,
승리하고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교만하게 인간의 지혜와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때와 섭리에 순종해서, 승리하고, 축복받고, 은혜 충만한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리가나 주식회사의 사장인 면목제일교회 조기원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1990년, 약 10년 전 신촌 세브란스병원 중축 공사장에서 목재 철거작업을 하던 중 목재가 무너지면서 철근들이 솟아 있는 곳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병원에 실려가 6시간 30분 동안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온 몸이 철근에 찔려 장이 세 군데나 파열되었고, 한 군데는 수술을 할 수 없어서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절망한 그는 ‘하나님만이 나를 살리실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다행히 생명은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치료받고, 새 사업으로 축복도 받는 기적을 바라고 산동네의 교인이 50명 밖에 안 되는 조그만 교회로 새벽예배를 나갔습니다. 그리고 새벽예배가 끝나면 교회 청소를 했습니다. 또 집집마다 전도지와 주보를 나눠주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교회 성전 건축을 할 때에도 빚을 내어 5천만 원 헌금을 했습니다. 주위의 친척들과 이웃들이 그에게 ‘예수에 미쳤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나를 통해서 영광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20년 전에 그의 과거가 생각이 났습니다. 아내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정수리 부분의 모발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괴로워하는 아내를 보기가 안쓰러워 동의보감을 읽으며 탈모증에 대한 것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검정콩과 검정참개 등의 검정 색소를 지닌 곡식을 갈아서 6개월간 복용을 시켰더니 다시 솜털처럼 모발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생각이 나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탈모증을 치료하는 제품을 개발하여 사업을 하라는 뜻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毛(모)리가나’라는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한국, 일본, 미국에 상표 등록을 신청하고 특허출원도 했습니다.
시제품을 일본에 보내어 복용하게 했는데 6개월 만에 효과를 보았다며 연속으로 잡지에 기사가 나고, ‘모리가나’ 열풍이 일어났습니다. 일본, 미국, 전국에서 바이어들이 찾아와 천만 달러를 수출했습니다. 명동과 남대문 등지에도 관광객들이 찾아와 ‘모리가나’를 찾았습니다.
건강도 주시고, 재물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충성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맨 손으로 시작했어도 거부가 되게 하시고, 건강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주십니다.
하나님의 때를 알고, 그의 섭리를 깨달아서 순종하여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광 돌리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측할 수 없는 인생
전도서 9장 11~18절 / 김경년목사
지난 목요일 서울시 행정 수도 이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었습니다. 이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 그 누구도 위헌 결정이 나올 것이라고 장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각하나, 기각으로 예상했고, 어떤 이는 재판관 9명 이 팽팽한 비율로 위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8대1의 압도적인 비율로 ‘위헌’ 판결이 났습니다. 이로써 모든 행정수도이전에 대한 추진이 전면 중지된 상태입니다.
서울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번 일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앞날을 결코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하여 우리 모든 인생은 아무도 그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미래뿐만 아니라 잠시 후에 일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솔로몬은 본문에서 인생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더 잘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능력이 성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11절에서 다섯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합니다. 토끼가 꼭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거북이가 이길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다윗과 골리앗이 싸웠습니다. 덩치로 보면 골리앗이 훨씬 더 큽니다. 그런데 골리앗이 졌습니다. 인간의 육체의 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머리의 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는 지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머리 좋다고 해서 잘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11절 끝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아무리 능력 많은 사람이라도 때를 잘못 만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도 뜻밖의 사고를 만나보세요.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능력이 좀 부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때를 잘 만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또 우연도 그렇습니다. 우연이 사람의 편에서 보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일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형통한 길을 주시면 능력이 부족해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시기와 우연이 인생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또 인생이 시기와 우연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12절 말씀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한치 앞에 되어질 일도 모르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뜻밖의 사고가 우연히 일어나면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렇게 인생이 무력하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또한가지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울 송파에 배드멘트 동호회 회원들이 단풍 구경을 갔다가 돌아오는 중에 관광버스 사고로 15명 이상이 죽고 나머지도 중경상을 입은 것을 들었습니다.
단풍 구경할 때만해도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대부분 6-70대 노인들이었는데 너무나 안타까운 소식이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이 싸울 때를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 물매로 던진 작은 돌멩이 하나가 골리앗의 머리에 정통으로 박히게 될지 골리앗이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덩치 크고 힘있는 골리앗이었지만 시기와 우연이 그에게 나쁘게 임할 때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은 계속해서 13절 이하에서 때와 시기가 우리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때를 잘못 만나니까 소용이 없다는 것을 솔로몬은 보게 되었습니다. 크게 깨달았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하나의 작은 성읍이 있었습니다. 그 성읍 안에는 사는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큰 임금이 쳐들어 왔습니다. 수많은 군사를 끌고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 주위에 큰 흉벽을 쌓았습니다. 이 작은 성읍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게 되었습니다. 힘으로는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앞에서도 말했지만 유력자라고 해서 반드시 전쟁에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작은 성읍이었지만 이 성읍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 성에는 지혜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지혜자는 비록 육체의 힘은 없었지만 그 성을 구할 수 있는 계략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고 하여 이미 건진 것처럼 번역이 되었습니다만 번역이 조금 잘못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지혜자의 말을 듣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 성읍은 건져질 수 있었습니다. 가능성이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번역이 되어야 문맥에 맞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이 지혜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입니다. 지혜자가 때를 잘못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지혜자가 가난했습니다. 볼품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외모로 그를 판단해 버렸습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솔로몬이 16절에서 이렇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힘 가지고 싸워서는 그 큰 임금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지혜자의 말을 듣고 그 지혜로 이겨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지혜자가 때를 못 만난 것입니다. 시기를 잘못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17절 말씀입니다.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지혜자가 비록 큰소리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그 지혜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만 했더라면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그 성읍의 두령이 아무리 큰소리로 호령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힘을 가지고 싸워서는 안될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18절 말씀을 계속 읽겠습니다.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
병기로 싸워서는 그 작은 성읍이 큰 임금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혜자가 시기를 잘못 만났습니다. 때를 잘못 만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궤케 하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죄인은 앞에 나오는 성읍의 두령, 우매자의 어른을 말합니다. 성읍을 몰락시킨 장본인입니다. 사람들이 지혜로운 자의 말을 듣기만 했더라면 다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누릴 수 있던 많은 선이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시기와 우연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지금 솔로몬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에게 능력이 있느냐? 자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기와 우연이 나쁘게 임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없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복 주시면 시기와 기회가 얼마든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오늘 본문에서 인생의 두 전제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인생은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인생은 자기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전제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어차피 죽을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인데 되는 대로 살지 뭐. 그럭저럭 살다가 가지 뭐." 솔로몬의 의도가 그것입니까? 아닙니다. 대학 입시를 앞 둔 수험생이 "붙을지 안 붙을지도 모르는데,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하고 공부 안하고 손을 놔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입니까? 앞날을 알지 못하니까 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야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앞날을 알지 못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이니까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더욱 최선을 다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누리면서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솔로몬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훈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우리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틀림없이 우리를 의의 길로, 좋은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가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결 론
잠언 27장 1절에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알 수 없음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인간의 계획이 잘 세워졌다고 해도 힘써 노력하노라고 해도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사람의 계획이나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잠언 20장 24절에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이 솔로몬을 통하여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삶의 바른 자세는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의 사람을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아멘
소리를 줄이고 회개하라
전도서 9장 17-18절 / 이한규목사
소리를 줄이고 회개하라
< 큰소리를 치지 말라 >
전도자는 고백했다.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17절).” 이 고백은 지혜의 가치를 잘 보여준다. 지혜가 있으면 큰소리를 치면서 누군가를 윽박지르고 설득할 필요가 없다. 큰소리를 치는 것은 지혜로운 행동과는 가장 반대되는 행동일 수 있다.
소리만 크면 안 된다. 요새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부정적이다. 무리한 건축, 헌금 강요, 세미나적인 목회, 일부 큰 교회 및 성공한 목사의 힘 과시, 교회 세습 등이 자주 비판의 소재가 된다. 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믿음에 대한 오해와 남용이다. 교인이 남의 말을 경청하지는 않고 남을 가르치기만 좋아하고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를 치면서 기본예절조차 무시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여러 명이 쓰는 병실에서 지나치게 큰소리로 찬송하거나 기도하는 교인도 있고 심지어는 사찰 마당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교인도 있다. 좋게 보면 열정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몰염치와 몰상식이다. 생각과 문화와 종교가 다른 사람을 가차 없이 정죄하고 심지어 불상에 낙서를 하고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파괴적이고 몰지각한 일부 종교인 때문에 진실한 믿음이 오해된다면 불행한 일이다. 교회는 조용히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 및 영성으로 알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들로부터 말씀을 듣고 깊은 친교와 애찬을 나누고 기도에 힘쓰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았던지 교회 밖의 사람들도 호감을 가지고 교회를 찾아왔다. 지금 교회의 현실은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그런 흐름을 되돌리려면 조용히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주라.
< 회개를 앞세우라 >
전도자는 또한 고백했다.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18절).” 지혜가 무기보다 낫다는 말은 지혜의 큰 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처럼 지혜가 큰 힘이 있어도 때로는 한 죄인의 작은 죄가 지혜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선을 망가뜨릴 때도 많다. 지혜의 힘보다 죄의 힘이 무서운 것이기에 가장 지혜롭지 못한 행동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한 사람의 죄가 지혜롭게 만들어놓은 일을 다 망칠 수 있다.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아간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전쟁에서 패하고 사기가 크게 꺾였다. 그런 죄의 문제와 죄인의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막힘없이 임한다. 결국 가장 지혜로운 삶은 바로 회개하는 삶이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잘못은 별반 차이가 없지만 가룟 유다는 영원한 실패자가 되었고 베드로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었다.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회개하는 삶의 차이였다. 가룟 유다의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인가? 그는 목매어 자살할 만큼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회개하지 않은 것이 그가 버림받은 결정적인 이유였다. 만약 그가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그도 베드로 이상으로 멋지게 쓰임 받았을 것이다.
인간의 사랑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엔 한계도 없고 끝도 없다. 사람의 허물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고 사람의 실수보다 하나님의 용서는 더 크고 사람의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다. 탕자가 거지꼴을 하고 힘없이 걸어올 때 아버지는 한눈에 그가 아들임을 알아보았다. 자식이 아버지를 먼저 알아보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알아보고 맞이해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의 눈은 사람의 회개보다 늘 빠르다. 그래서 진실한 회개는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최상의 지혜가 된다.
지혜의 소리를 듣기에 더욱 힘쓰라
전도서 9:11~18
1. 인생의 한계(11~12절)
11) 내가 또 해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았더니
발이 바르다고 해서 경주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고,
힘이 센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아니며,
지혜롭다고 해서 먹을 것을 얻는 것도 아니고,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이라고(배웠다고) 해서 은총을(총애를) 받는 것도 아니더라.
이는 시기와 우연이 그들 모두에게 임하기 때문이라
(불행한 일과 재앙이 그들 모두에게 닥쳐오기 때문이라).
12) 대저 사람은 그런 때(불행과 재앙의 때)가 언제 자기에게 닥쳐올지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잔인한(촘촘한)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덫)에 걸리는 것처럼,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 시기와 우연(11절) : 에트, 페가
‘시기와 우연’이 개역개정에서는 ‘시기와 기회’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 ‘시기’에 해당하는 ‘에트’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나 사건 등이 발생하고 성취되는 때’를 말하고,
• ‘우연(기회)’에 해당하는 ‘페가’는
‘우연히 부딪히다, 우연히 만나다’에서 유래한 말로,
‘예측할 수 없이 임하는 사건이나 기회’를 뜻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시기와 우연(기회)은 불행한 일과 재앙이 닥쳐오는 때를 말합니다.
2. 지혜가 무시당하는 현실(13~16절)
13) 내가 또 해 아래에서 지혜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것이 이러하니
14) 사람이 조금밖에 살지 않는 작은 성읍에 어느 강력한 큰 왕이 자기 군대를
이끌고 와서 그 성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그 성읍을 무너뜨리려 할 때에
15) 그 성읍 안에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살고 있어서 그가 그의 지혜로
그 성을 구한 것이라. 그러나 아무도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16) 그러므로 나는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기는 하다마는,
지혜로운 자가 가난하면 그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이 신청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의 말을 인정해주는 자가 아무도 없다)”하였노라.
3. 지혜의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라(17~18절)
17)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지혜로운 자의 조용한 말)이
우매자의 어른(어리석은 왕)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18) 지혜가 전쟁의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궤케 하느니라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기도 하느니라).
* 묵상 point
1. 인생의 한계(11~12절)
1) 힘센 용사하고 해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아니며(11절)
솔로몬은 인생이라는 것이 항상 능력과 재능이 있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더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발이 빠른 자가 경주에서 지는 일도 있고,
힘이 센 용사가 약한 자에게 지기도 하며,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도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고,
지식인이라고 해도 왕에게 미움을 받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2) 앞으로 당할 일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으므로
그들 모두에게 불행한 일과 재앙이 예고 없이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발이 빠른 자라도 경주하는 날 다리가 불편하면 경주에 이길 수 없습니다.
힘이 센 용사라도 불행한 일이 닥치면 아주 약한 자에게도 전쟁에서 질 수 있습니다.
마치 물고기가 잔인한(촘촘한)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덫)에 걸리는 것처럼,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그렇게 속절없이 그 재앙에 걸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 인간의 한계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불행한 일이 있고,
사람이 아무리 준비해도 막을 수 없는 재앙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의 능력으로 자기 앞에 닥쳐올지 모를
모든 불행한 일과 재앙을 막겠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 묵상 :
오늘날을 가리켜 과학 만능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학의 시대라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전 세계가 두려워 떨고 있고,
지구 온난화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두려워하고 있으며,
화산과 지진에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의 힘으로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성도가 되십시오.
2. 지혜가 무시당하는 현실
1) 지혜가 무시당하는 한 가지 예화(13~16절)
솔로몬은 세상에서 지혜가 얼마나 무시를 당하고 있는지를
한 가지 예를 들며 말합니다.
사람이 얼마 살지 않는 아주 작은 성읍이 있었는데,
아주 강력하고 큰 왕이 자기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그 성읍을 에워싸고는
큰 흉벽을 만들어 그 성읍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성읍에는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그의 지혜로 그 성을 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성읍의 사람들은 자기들을 구한 이 지혜로운 자를
기뻐하며 칭찬해주었어야 했는데, 그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자기를 구해준 이 지혜로운 자를 무시하고 멸시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이 장면을 보고
“지혜가 힘보다 낫기는 하지만, 지혜로운 자가 가난하면 그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아무도 그의 말을 인정해주지 않는다”하고 말합니다.
2) 이 예화는 : 지혜의 조용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
이 일은 솔로몬이 직접 본 실제 일어난 사건이겠습니다만,
지혜자가 가난하다는 것은 또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지혜의 소리는 아주 세미하게 작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주의 깊게 경청하여 듣지 않으면 지혜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세상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한 사람은
결코 그 지혜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 묵상 :
똑같이 성경 말씀을 보아도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의 말씀을 깨닫는 자가 있고,
전혀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신학박사라고 다 그 말씀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겨우 한글만 아는 시골의 할머니들이
지혜의 말씀을 더욱 잘 깨닫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주께 지혜를 구하고 또 구하십시오.
3. 지혜의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라
1) 지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17절).
솔로몬은 어리석은 왕의 호령하는 소리보다
지혜로운 자의 조용한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자의 조용한 소리라고 한 것은,
지혜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 욕심과 이기심에 사로잡힌 자는 지혜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불평이나 미움과 같은 것으로 마음이 복잡해진 사람도 지혜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 묵상 :
그러므로 지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순전한 마음이 되게 하십시오.
날마다 말씀을 보고 묵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순전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길입니다.
2)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한다(18절).
13~15절에서 솔로몬이 예로 든 바와 같이 지혜가 전쟁의 무기보다 더 낫지만,
죄인 한 사람 때문에 그동안 쌓아 온 많은 선들이 한꺼번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지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많은 경우에 힘 있는 자는 권모술수와 같은 악행으로 힘을 가진 자들이고
그리고 지혜자는 가난하고 나약한 자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때에 백성들은 힘없고 나약하더라도
그에게서 나오는 지혜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어리석지만 힘 있는 자의 말을 듣습니다.
그래서 많은 지혜자들이 수고하여 이룬 선한 일들을 한꺼번에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군중들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풀어주려 했던 빌라도의 말을 듣지 않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악한 소리만 들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게 하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 묵상 :
그러므로 다윗 같은 훌륭한 왕은 되지 못할지라도
누가 다윗인지 누가 아합인지는 구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선거로 국회의원과 대통령까지 뽑는 시대이니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가 누구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누구인지 구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을 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기도제목
1.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2.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가 누구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3. 그래서 악한 자를 지도자로 선택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