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퍼우드의 오솔길
윤태원
너를 처음 만났을 때는
오래된 돌담 사이에 스며든 은은한 기도소리였다
바닷가 성글라라수도원
미사가 끝난 성당 노곤히 잠든 피아노
일과를 내려놓은 평온이었다
너를 다시 만났을 때는
바람에 흔들리는 사제관의 커튼이었다
제본이 갈라진 오래된 경전
손마디가 굵어진 하얀 초
세속을 밀어내는 고결이었다
너를 또 다시 만났을 때는
검은 말들의 읊조림이었다
이시돌목장 풀밭을 스치는 바람
초대가 없어도 들어가고 싶은 별장
한쪽을 비워둔 여백이었다
너를 어제 만났을 때는
저녁의 짙어가는 십자가였다
못 주위로 말라붙은 나의 피
침 한번 뱉지 않고 숨 가다듬으며 아껴둔 말
면사포로 감싸주는 따뜻함이었다
너를 먼 훗날 만났을 때는
우상처럼 성스러운 밤의 석상이었다
달빛 사이 길고 완고한 그림자
발걸음 옮겨 나란히 선 나의 모습
정겨운 선율에 감싸이는 속삭임이었다
*고퍼우드(gopherwood) : 노아의 방주에 쓰인 나무. 어쿠스틱 기타 상표명.
웹진 『시인광장』 2022년 9월호 발표
윤태원 시인
2016년 《열린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현재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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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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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30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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