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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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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찰 스크랩 한국최초의 석굴 팔공산 군위 삼존석굴
현림 추천 1 조회 233 15.12.29 06:3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최초의 석굴 팔공산 군위 삼존석굴(제2석굴암)

2석굴암이라고 불리는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軍威 阿彌陀如來三尊 石窟)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군위군 부계면 남산동(南山洞)의 석불사(石佛寺)에 있는 석굴이다.

 

 

(제2석굴암으로 가는 길목의 한밤마을 입구에 세워진 돌탑)

 

이 석굴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27년 지금 석굴이 있는 아랫마을(한밤마을)에 사는 한 농부에 의해서다.

이 석굴은 한 동안 방치되었다가 1962922일 정부의 발굴 사업으로 석불사(石佛寺)에서

석탑, 종각, 불상(佛像) 등 신라시대의 많은 유적이 발견되어 국보 제109호로 지정되어

경주 토함산(불국사)의 석굴암과 구별하여 <2의 석굴암>으로 불리게 되었다.

규모, 각상(刻相) 등이 경주의 것에 비하여 많이 다르며, 축조식인 경주의 석굴암과 달리

천연 암석을 파서 조각한 것이 특히 주의를 끌고 있다

 

 

 

 

현존하는 석굴사의 건물들은 1985년 조계사 법등스님이 중창한 것으로

석굴은 지상으로부터 약 6미터 높이의 천연적인 암벽을 뚫어 만든 석굴로

중앙의 본존좌상(本尊坐像)인 아미타불은 높이 2.88미터,

오른쪽으로 향한 관세음보살 입상(觀音立像)1.8미터,

왼쪽으로 향한 대세지보살(勢至菩薩)은 높이 1.8미터로 조성되어 있다.

 

 

(석굴사의 선방) 

 

@사찰안내서에 의하면 신라 19대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절을 짓고 수도 했던 곳으로

그 후 원효대사가 절벽동굴에 미타삼존불(아미타,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을 조성 봉안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출처를 밝히지 않아 다소 의아한 점이 든다.

 

 

 

 

@눌지왕은 눌지 마립간(訥祗 麻立干, ? ~ 458, 재위 417~ 458)으로 불리며 신라의 제19대 임금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최초로 마립간의 칭호를 사용한 임금이다.

신라본기에서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길

마립간이란 방언으로 말뚝을 이른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는데 관위에 따라 배치했다.

즉 임금의 말뚝을 위주로 신하의 말뚝들을 그 아래 벌였으니 왕호를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도화상은 삼국 시대 경상북도 일원에서 활동한 승려로 법명은 아도(我道아두(阿頭).

삼국유사(三國遺事)아도본비(我道本碑)에 의하면,

240~248[위나라 정시 연중]에 고구려 사람인 어머니 고도령(高道寧)과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던

조위인(曹魏人) 아굴마(我堀摩) 사이에서 태어났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서축(西竺)[인도] 사람이라고도 하고,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도 하였다.

 

 

 

 

아도화상에 대해서는 여러 책에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해동고승전에서는 서축 사람이라고도 하고, 오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도 하였지만,

삼국사기』에 눌지왕조에 등장하는 묵호자와 동일 인물로 보는 설도 있다.

김천시의 직지사는 418(눌지왕 2) 아도화상이 선산의 도리사(桃李寺)를 개창할 때 함께 지은 절이라고 한다.

절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한 후 멀리 황악산 직지사 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곳에 절을 지으라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원효대사는 (元曉, 617~ 686428(음력 330), 신라의 고승이다.

 

 

 

 

 

 

 

 

 

 

 

 

 

 

 

 

 

 

 

 

 

 

 

 

 

 

 

 

 

 

 

 

 

@이 석굴의 조성시기를 추정한다면 옷자락주름의 형태로 보면 굽타왕조시대의 불상형태로

인도에서 직접 유입되는 6세기 중엽 북위에서 7세기로 당()에 이르는 시기에 조성된 불상형태로 보이며

이는 신라 말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유행한 아미타신앙을 바탕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모두 무거운 양감을 느끼며 본존불은 긴장된 엄숙한 얼굴이며 코는 낮고 목은 짧다.

몸은 삼곡형을 띄고 있다. 삼곡(三曲, Tribhanga)이란 인도의 불상에서 시작하여

당나라의 천룡산 석굴에서 많이 나타나는 불상형식으로 허리를 비튼 모양을 가리킨다.

 

 

 

 

 

 

 

불상의 무거운 장엄함과 기념비적인 성격은 타산석굴(駝山石窟) 같은 수나라 시대의 조각과 유사성을 띄고 있다.

그러나 본존불의 대좌 앞에 늘어진 천의(天衣)의 주름은 북위(北魏)의 용문석굴(龍門石窟) 같은 데서 흔히 보는

특색 있는 수법에서 발전해 온 형식이며 보살들의 목에도 당의 전성시기에 조성된 불상에서 볼 수 있는

두터운 삼도(三道세 줄기 주름)와 기다랗게 늘어지는 경식(頸飾)이 감겨 있다.

 

 

 

 

 

@아미타불의 광배(光背)는 뒷벽을 새겨 무늬를 넣었는데 새로 회를 발랐고,

관음보살의 광배는 별도로 조각하여 무거운 쇳조각을 붙여놓았으며,

세지보살의 광배는 현재 없으나 불상 뒷머리에 꽂혔던 흔적이 있다.

특히 본존불인 아미타불은 경주 석굴암의 석가여래상과는 다르게 이마의 백호(白毫)가 없고,

머리모양도 육계(肉?)로 되어 있다. 불상의 조각도 극히 단조롭고 직설적이지만

관음보살의 의상은 섬세한 수법으로 되어 있다.

이 고장 주민들은 석불사를 양산(陽山), 학소산(鶴巢山), 또는 서원사(書院寺)라고 한다.

이에 관한 확실한 내력은 알 수 없으나 석굴암이 위치한 산기슭에 학이 살았기 때문이며,

서원사라 하는 것은 벌문(閥門)을 이루고 있는 홍()씨문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인 듯싶다.

 <2석굴암><군위삼존석불>이라 명명되고 현재 국보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2석굴로 불리는 이 석굴암은 평지에서 22m 높이에 위치하여

 6m 크기의 굴로 그 안에 조성된 아미타삼존불은 남쪽을 향해 정좌하고 있으며,

또 석굴암 아래에는 근래에 지은 암자(석굴사)가 있고, 석굴암 앞에서 30m 떨어진 곳에 단층석탑,

서쪽 20m 지점에 미륵불이 있다.

이곳에 주춧돌이 발견되어 이 자리가 바로 오래 전에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은 본래 3층이었는데 해방 후 개축할 때 단층밖에 올리지 못했는데 지금은 3층으로 증축되어 있다.

또 이외에 2.8m의 미륵불과 종각으로 짐작되는 건물이 있다.

 

 

 

 

한밤 마을에서 발견된미륵불은 석굴암의 불상보다는 키는 크지만

면상의 각 부분과 땅 속에 묻혀있는 옷자락 무늬 등 수법이 거의 비슷하며,

 또한 100년에 뜯어 본 뒤 기록하였다는 건물의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100년 전 상량문을 뜯어 봤더니 500년 전에 이모, 최모라는 사람이 이 집을 보수했었다

적혀 있다는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1000년 이상 묵은 집으로 짐작되니

아마 석굴암과 거의 같은 시대에 이룩된 것이 아닐까 학자들은 추측한다.

 

 

 

 

또한 군위군지(軍威郡誌)에 의하면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선제(宣帝)

오봉원년(五鳳元年: 신라 박혁거세1) BC57년에 세워졌다고 하며,

처음 석굴 안에 불상이 세워지고 그 뒤에 절이 이룩되어 석굴사 또는 대율사(大栗寺)로 불렸으며,

한 때는 이 절에 사명대사가 주지로 있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어느 정도 믿어야 할지 분명치 않다.

 

 

 

 

한국사대사전(2000년판)에 의하면 경주 석굴암과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1)경주 석굴암은 웅장하고 정교한 돔(dome)의 구조인데 팔공산 석굴암은 천연의 암벽으로 되었으나 석질이 나쁜 돔의 내부가 잘 다듬어지지 않아서 천연동굴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2)경주 석굴암은 동쪽으로 향해 있는데 팔공산 석굴암은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3)경주 석굴암의 좌대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데, 팔공산 석굴암은 부처의 옷자락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좌대에 부처의 옷자락을 새긴 점은 인도의 석굴암에서 보는 것과 꼭 같은 조각이다. 따라서 좌대에 연꽃무늬가 생긴 것은 인도식 석굴암이 직접 수입된 이후의 일이므로 팔공산 석굴암은 경주 석굴암보다 그 창건 연대가 앞서는 것으로 짐작된다. 팔공산 석굴암은 약 2m 되는 입구에서 본존불을 모신 뒷벽까지의 깊이가 약 4m, 굴의 폭도 약 4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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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도/김수철작곡(대금연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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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12.29 07:19

    첫댓글 _()_
    나무 아미타불,
    감사히 봅니다,행복하세요,

  • 15.12.29 10:56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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