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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筆분과 방 작가와 작품(87) -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이동민 추천 0 조회 185 22.07.29 06:49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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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2.07.29 08:47

    첫댓글 작자의 생애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1828년에 툴라 현의 야스나야 폴랴나의 부유한 명문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2세에 모친을 잃고 8세에 모스크바에 이주했으나 그 해에 부친도 사별했다.
    친척에 의해 양육된 후 카잔 대학에 입학했으나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1828년에 툴라 현의 야스나야 폴랴나의 부유한 명문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2세에 모친을 잃고 8세에 모스크바에 이주했으나 그 해에 부친도 사별했다.


    친척에 의해 양육된 후 카잔 대학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자퇴하고 1847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농민의 생활개선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목적을 달성치 못하였다. 대학은 학문의 매장소(埋葬所)이다」라고 생각하고, 2년도 못가서 중퇴하였다. 모스크바에서 100킬로 쯤 떨어진 남부의 영지(領地) 야스나야폴랴나에서 농지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자포자기로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1851년에 카프카즈의 군대에 들어갔다. 한편 창작에 몰두하여 잡지 [동시대인]에 익명인 L.N.T로 자서전적인 처녀작 "유년시대", "소년시대"(1854)등을 발표 일약 유명해졌다.

  • 작성자 22.07.29 08:48

    포병 장교로 근무하는 한편, 문학 활동을 개시하여, 처녀작 『유년시대』가 잡지 「현대인」에 발표됨으로써, 작가로서 출발하게 되었다. 크리미아 전쟁 때에는 세바스토포리의 격전에 참가하고, 한편으로는 『소년 시대』 기타의 작품을 차례로 발표하여, 55년에 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하였을 때에는, 눈부신 신진 작가가 되어 있었다.
    군에서 퇴역한 다음해인 1857년에, 최초의 유럽 여행에서 그는 길로틴(단두대)에 의한 사형집행을 목격하고, 서구 문명에 깊이 절망하였다. 귀국 후에는 교육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 작성자 22.07.29 12:02

    1862년 소피아와 결혼하고 이 후 문학에 더욱 주력하여 [폴리쿠시카]를 저술하고 [전쟁과 평화]를 완성했다. 이 소설은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시대에 취재한 것을 기초로 그 예슬성, 내용의 깊이, 웅대한 구상 등에 있어서 세계문학 사상 비교할 수 없는 최고봉으로 알려진다.
    그 후 다시 2제의 대작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 러시아의 국가 조직과 특권 계급의 생태와 모랄을 비판 작가의 최고 걸작으로 톺이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소설 후 정신적 위기에 봉착 과학과 철학 에 몰두했으나 결국 만족을 얻지 못하고 다시 종교에 마음을 기울여 자신의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견해 뿐만 아니라 제정 러시아의 모든 가치를 재검토하고 국가 교회를 부정, 초대 기독교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이때는 예술가로서 보다는 종교가로서 더욱 위치를 높혔다. 이런 세계관의 기초에는 악에 대한 무저항, 선과 사랑에 의한 구원, 사회생활의 모든 경제적 형식의 부정의 사상으로서 이는 혁명의 부정과 결부되어 있다. 그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다시 예술적 향기가 높은 [문명의 열매], [부활] 그리고 희곡 [살아있는 송장]등을 발표했는데 [부활]은 만년을 장식한 대작으로 카츄샤란

  • 작성자 22.07.29 12:03

    [부활]은 만년을 장식한 대작으로 카츄샤란 이름은 전세계에 알려졌다.

  • 작성자 22.07.29 17:53

    그는 1882년 [참회]에서 내적인 고민과 절망을 해명키 위해 눈물겨운 종교적 탐색과정을 적라라하게 고백하고 있다. 특히 말년의 시리즈[나의 신앙],[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는 어느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인생독본] 등이 그것이다.

    이들 작품들의 공통점은 무저항주의, 반국가, 반문명, 반토지사유론, 이웃에 대한 사랑, 선과 악, 신앙과 불신, 죽음과 삶의 의의 등의 무거운 주제가 톨스토이 특유의 설득력과 함께 이해하기 쉽고 힘있게 담겨있다. 레프. 톨스토이는 1828년에 태어나 1910년까지 82세란 긴 세월의 생애 동안 9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작품은 현재에도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쌍벽을 이루는 러시아의 최대 작가로 알려진다.
    구도자(求道者)로서의 자기 모순과, 부인 소피아와의 가정적 갈등에 번민하다가, 1910년 10월 미명에, 가출을 하여 방랑의 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여행 길에서 발병하여, 11월 7일에, 랴쟌 우라르 철도의 아스타포보라 역의 역장 관사에서, 82살의 생애를 마쳤다.

    작품들의 공통점은 무저항주의, 반국가, 반문명, 반토지사유론, 이웃에 대한 사랑, 선과 악, 신앙과 불

  • 작성자 22.07.29 17:54

    작품들의 공통점은 무저항주의, 반국가, 반문명, 반토지사유론, 이웃에 대한 사랑, 선과 악, 신앙과 불신, 죽음과 삶의 의의 등의 무거운 주제가 톨스토이 특유의 설득력과 함께 이해하기 쉽고 힘있게 담겨있다. 레프. 톨스토이는 1828년에 태어나 1910년까지 82세란 긴 세월의 생애 동안 9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작품은 현재에도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쌍벽을 이루는 러시아의 최대 작가로 알려진다.

  • 작성자 22.07.29 22:44

    *도스트예프스키와 톨스토이와의 비교에서, 도스프예스키는 앞의 ‘백치’에서 말했다.
    여기서는 톨스토이를 보기로 하자.
    톨스토이는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미래보다는 안정적인 과거를 재구축하려고 했다.( 때문에 동양의 공자 사상과 노자의 道를 가져왔다.)
    사도들의 복음을 바탕으로 하는 정교회의 복음 해석이 왜곡되었다면서(교의신학) 정교회의 신학을 이성적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왜곡된 교의신학을 바로잡아서, ‘선’의 생활(도덕적 생활)을 함으로 러시아를 인류를 구원하는 빛이 되고자 하였다. 우리의 실제 생활을 윤리, 도덕으로 무장하는 생철학(生活哲學)을 주장했다.
    (도스프예스키는 정신적인 방황(자유-현실 생활에서 예술적으로 접근)을 거쳐 신의 길을 찾는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1864), 안나카레리나(1877) 이후에 정신적 갈등을 겪으면서 정교회와 불화하고, 파문당한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공동체 선(농민사회의 선)을 주장했다. 이것을 톨스토이주의 라고 한다. 그는 러시아아의 민중과 농민을 신뢰하고, 그들의 민중성을 옹호했다.

  • 작성자 22.07.30 08:12

    그는 복음서, 특히 4복음서를 윤리적으로 해석하면서 정교의 해석을 비판했다.(종교는 윤리보다는 신성을 중심으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 파문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 농민(민중)은 정교의 신과는 무관하게 자연에 순응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자연에의 순응을 신으로 모셨다고 말하였다; 레빈이 말하듯이 ‘모든 인간 속에는 자연에 순응하는 선(善)을 원칙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원칙에 기초한 이웃 사랑이 진정한 신의 모습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로고스’를 태초의 말씀, 이성으로 해석하지만 톨스토이는 생명에 대한 이성적 분별력이라고 해석하였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명력에 대한 분별력이라고 해석했다. 이것은 바로 선(善)이다 라고 했다. 선을 통해서 인간과 인간사이를 맺어주는 공동체 삶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배제하고, 윤리적인 면만 강조함으로 파문당했다.
    1882년부터 동양철학인 공자 사상과 노자의 道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善-사랑을 접목시켰다. 불교 사상도 善(도덕)으로 해석했다. 서양의 로고스는 원래 善의 개념이다.(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였음은 인간에게 도덕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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