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작가 ; 톨스토이(1828-1910)
연재 ; 1865-69)
《전쟁과 평화》(Война и мир)는 레프 톨스토이의 장편소설이다. 데카브리스트를 둘러싼 중편소설 모체가 되어 구상된 것으로, 1865~1866년에 걸쳐 첫머리 2장만이 <Ру́сский ве́стник>에 게재되었다. 나머지 부분은 1869년 단행본으로 일괄해서 발표되었다.
톨스토이가 이 작품에서 의도한 것은 크림 전쟁의 패배로 상처 입은 러시아에, 조국의 영광과 국민정신의 위대함을 나폴레옹 군대를 패주시킨 1812년의 역사적 사건에 되돌아감으로써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톨스토이는 인류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한 인격' 나폴레옹에 대항해서 '운명에의 유순한 순종'의 체현자, 즉 러시아 농민병사와 그 사령관 쿠투조프가 승리한 것이 바로 러시아의 승리라고 보는 것이다.
이 두 개의 개성의 투쟁과 승패의 귀추는 톨스토이의 분신으로서 등장하는 두 사람의 중심인물에을 통해서 표현했다. 그들의 정신의 갈등과 발전으로서도 표현하였다. 지성이 높고, 교만한 야심가 안드레이 공작은 나폴레옹의 숭배자였다. 죽음을 앞에 놓고 신의 법도는 자기 희생에 있음을 깨닫는다. 한편 세련되지 못한 낙천적 이상주의자 피에르도 또한 나폴레옹을 영웅시하고 있었으나 농민병사 플라톤 카라타예프와 만나 자기가 구하고 있던 진리를 찾게 된다. 그는 신의 의지를 믿으며 모든 것을 용인하고 거역하지 않는다. 톨스토이에게 있어 이러한 눈에 띄지 않는 민중이야말로 러시아 정신의 체현자이자 역사를 움직이는 주인공인 것이다.
『전쟁과 평화』는 다면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어 주인공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작품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로스토프가(家)의 딸 나타샤이다. 나타샤는 이 작품에서 톨스토이의 생명 긍정의 사상을 체현(體現)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천진 난만하고, 조금의 꾸밈도 없이 항상 자연 그대로 행동을 한다. 백작이라는 귀족의 딸로 태어나 넓은 저택 안에서 고이 자랐지만, 사냥 후, 가난한 지주인 백부의 집에서 민요 가락에 맞추어 멋지게 춤을 춘다. 모든 러시아인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그녀는 선천적으로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은둔 생활을 하다가, 그녀를 알게 된 안드레이 공작이 「자기의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인생 전체가 새로운 광명에 휩싸일만큼 강한 삶에의 의지를 가지게 된 것도, 그녀의 개방적인 영혼의 힘에 의하는 것이다. 나타샤는 순수한 러시아 여성이고, 러시아 문학에 묘사된 어느 여성보다도, 가장 싱싱한 매력있는 여성의 한 사람이 되어 있다.
<줄거리>
전쟁과 평화는 두 명문 가문 볼콘스키 가문과 로스토프 가문의 가족들이 겪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빌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과 숙명적으로 전쟁을 치루어야 하는 러시아의 상황을 묘사한다., 톨스토이는 도시 전체의 분위기, 군대의 이동, 사회 전반에서 느껴지는 전쟁의 전조 같은 것을 빠뜨리지 않고 묘사하였다. 개인이 겪는 개인사를 러시아 역사와 연결시켜서 숨막히는 긴장감을 만든다. 때문에 이 책을 완독한다는 것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1805년, 나폴레옹의 통솔하에 유럽을 석권한 프랑스군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청년 공작(公爵) 안드레이 포르콘스키는, 영지(領地) 벽촌에 은둔하고 있는 아버지와 누이 동생 마리아에게 만삭이 된 아내를 맡기고, 크로우조프 장군의 부관으로 일선으로 출발한다.
이 전쟁이야말로, 그에게 빛나는 미래와 영광을 안겨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안드레이의 친구로서, 유학에서 갓 돌아온 피에르는 모스크바 굴지의 자산가 베즈호프 백작의 사생아였지만, 백작의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서 전 재산을 상속받고 일약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다. 여기에 눈독을 들인 후견인 역인 크라긴 공작은, 미모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품행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자자한 자기의 딸 에렌을 피에르와 결혼시킬려고 획책하고 무난히 성공한다.
이 해 11월, 안드레이는 아우스테르리쯔의 결전(決戰)에서 패배한 러시아군으로서, 단신 군기를 들고 적진에 돌격하여 중상을 입지만, 문득 제정신이 들어 머리 위의 푸른 하늘을 쳐다 보고, 그 장엄함에 크게 감동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자기의 야심이라든지 명예욕, 위대한 인물로 숭배하고 있었던 나폴레옹 등이, 사실은 보잘 것 없이 사소하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한편, 피에르는, 결혼 후 친구 드로포프와 아내 에렌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결투를 신청하여, 상대를 쓰러뜨린 후 아내와 별거를 한다. 그리고 나서부터, 그는 선악이라든지 생사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을 하지만, 프리이메이슨(Freemason; 1723년 런던에서 성립하여 전유럽에 퍼진, 인류애를 위한 세계적인 평화와 행복의 실현을 목표로, 국제 적 조직을 가진 비밀 결사)의 지도자를 알게 되고, 새로운 신앙 생활에 들어간다.
전사한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던 안드레이가, 뜻밖에 영지(領地)의 벽촌으로 돌아온 바로 그날 밤, 아내 리자는 사내 아들을 낳고 그대로 숨을 거둔다. 안드레이는 이미 자기의 인생은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영지에서 일생을 보낼 결심을 한다.
1807년 6월, 러시아와 프랑스는 강화(講和)를 맺고 평화가 다시 찾아 온다.
1809년 봄에, 안드레이는 귀족회(貴族會)의 용무로 로스토프 백작의 집을 방문하고, 생명력이 넘쳐 흐르는 백작의 젊은 딸 나타샤를 만나 마음이 강하게 끌린다. 그 해도 저물어 가는 어느 날, 두 사람은 무도회에서 다시 만나, 곧 사랑하게 되고 약혼을 하지만, 영지의 노공작(老公爵)의 완강한 반대로 1년간의 유예 기간을 두기로 하고, 안드레이는 외유를 한다. 그러나 젊은 나타샤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피에르의 아내 에렌의 오빠 아나토리의 유혹에 빠져, 사랑의 도피를 할 약속을 함에, 안드레이와의 약혼은 파기되고 만다.
1812년에, 다시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나고, 안드레이는 포로지노의 결전에서 중상을 입는다. 러시아군은 패주를 거듭하고, 마침내 모스크바를 적에게 내 주게 된다. 로스토프가(家)에서는 가재(家財)를 운반하기 위하여 준비해 놓은 마차로 부상병들을 수송하기로 결심한다.
나타샤는 부상병들 속에서 반사 상태의 안드레이를 발견하고, 자기의 죄를 사과하고 필사적으로 간호를 한다. 그러나 그 보람도 없이 안드레이는 숨을 거둔다.
피에르는 모스크바에 머물어 농민으로 가장하고, 나폴레옹을 암살할 기회를 노리다가 프랑스군의 포로가 된다. 아내 에렌은 전화(戰火) 속에서도 연신 난행(亂行)을 계속하다가, 낙태약을 잘못 먹고 몸부림을 치면서 죽는다.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고, 모스크바에서 나타샤를 만난 피에르는 그녀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그녀와 결혼을 한다. 안드레이의 여동생 마리아도 나타샤의 오빠 니콜라이와 결혼하고, 각각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간다.
첫댓글 작자의 생애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1828년에 툴라 현의 야스나야 폴랴나의 부유한 명문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2세에 모친을 잃고 8세에 모스크바에 이주했으나 그 해에 부친도 사별했다.
친척에 의해 양육된 후 카잔 대학에 입학했으나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1828년에 툴라 현의 야스나야 폴랴나의 부유한 명문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2세에 모친을 잃고 8세에 모스크바에 이주했으나 그 해에 부친도 사별했다.
친척에 의해 양육된 후 카잔 대학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자퇴하고 1847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농민의 생활개선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목적을 달성치 못하였다. 대학은 학문의 매장소(埋葬所)이다」라고 생각하고, 2년도 못가서 중퇴하였다. 모스크바에서 100킬로 쯤 떨어진 남부의 영지(領地) 야스나야폴랴나에서 농지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자포자기로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1851년에 카프카즈의 군대에 들어갔다. 한편 창작에 몰두하여 잡지 [동시대인]에 익명인 L.N.T로 자서전적인 처녀작 "유년시대", "소년시대"(1854)등을 발표 일약 유명해졌다.
포병 장교로 근무하는 한편, 문학 활동을 개시하여, 처녀작 『유년시대』가 잡지 「현대인」에 발표됨으로써, 작가로서 출발하게 되었다. 크리미아 전쟁 때에는 세바스토포리의 격전에 참가하고, 한편으로는 『소년 시대』 기타의 작품을 차례로 발표하여, 55년에 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하였을 때에는, 눈부신 신진 작가가 되어 있었다.
군에서 퇴역한 다음해인 1857년에, 최초의 유럽 여행에서 그는 길로틴(단두대)에 의한 사형집행을 목격하고, 서구 문명에 깊이 절망하였다. 귀국 후에는 교육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1862년 소피아와 결혼하고 이 후 문학에 더욱 주력하여 [폴리쿠시카]를 저술하고 [전쟁과 평화]를 완성했다. 이 소설은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시대에 취재한 것을 기초로 그 예슬성, 내용의 깊이, 웅대한 구상 등에 있어서 세계문학 사상 비교할 수 없는 최고봉으로 알려진다.
그 후 다시 2제의 대작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 러시아의 국가 조직과 특권 계급의 생태와 모랄을 비판 작가의 최고 걸작으로 톺이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소설 후 정신적 위기에 봉착 과학과 철학 에 몰두했으나 결국 만족을 얻지 못하고 다시 종교에 마음을 기울여 자신의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견해 뿐만 아니라 제정 러시아의 모든 가치를 재검토하고 국가 교회를 부정, 초대 기독교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이때는 예술가로서 보다는 종교가로서 더욱 위치를 높혔다. 이런 세계관의 기초에는 악에 대한 무저항, 선과 사랑에 의한 구원, 사회생활의 모든 경제적 형식의 부정의 사상으로서 이는 혁명의 부정과 결부되어 있다. 그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다시 예술적 향기가 높은 [문명의 열매], [부활] 그리고 희곡 [살아있는 송장]등을 발표했는데 [부활]은 만년을 장식한 대작으로 카츄샤란
[부활]은 만년을 장식한 대작으로 카츄샤란 이름은 전세계에 알려졌다.
그는 1882년 [참회]에서 내적인 고민과 절망을 해명키 위해 눈물겨운 종교적 탐색과정을 적라라하게 고백하고 있다. 특히 말년의 시리즈[나의 신앙],[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는 어느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인생독본] 등이 그것이다.
이들 작품들의 공통점은 무저항주의, 반국가, 반문명, 반토지사유론, 이웃에 대한 사랑, 선과 악, 신앙과 불신, 죽음과 삶의 의의 등의 무거운 주제가 톨스토이 특유의 설득력과 함께 이해하기 쉽고 힘있게 담겨있다. 레프. 톨스토이는 1828년에 태어나 1910년까지 82세란 긴 세월의 생애 동안 9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작품은 현재에도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쌍벽을 이루는 러시아의 최대 작가로 알려진다.
구도자(求道者)로서의 자기 모순과, 부인 소피아와의 가정적 갈등에 번민하다가, 1910년 10월 미명에, 가출을 하여 방랑의 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여행 길에서 발병하여, 11월 7일에, 랴쟌 우라르 철도의 아스타포보라 역의 역장 관사에서, 82살의 생애를 마쳤다.
작품들의 공통점은 무저항주의, 반국가, 반문명, 반토지사유론, 이웃에 대한 사랑, 선과 악, 신앙과 불
작품들의 공통점은 무저항주의, 반국가, 반문명, 반토지사유론, 이웃에 대한 사랑, 선과 악, 신앙과 불신, 죽음과 삶의 의의 등의 무거운 주제가 톨스토이 특유의 설득력과 함께 이해하기 쉽고 힘있게 담겨있다. 레프. 톨스토이는 1828년에 태어나 1910년까지 82세란 긴 세월의 생애 동안 9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작품은 현재에도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쌍벽을 이루는 러시아의 최대 작가로 알려진다.
*도스트예프스키와 톨스토이와의 비교에서, 도스프예스키는 앞의 ‘백치’에서 말했다.
여기서는 톨스토이를 보기로 하자.
톨스토이는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미래보다는 안정적인 과거를 재구축하려고 했다.( 때문에 동양의 공자 사상과 노자의 道를 가져왔다.)
사도들의 복음을 바탕으로 하는 정교회의 복음 해석이 왜곡되었다면서(교의신학) 정교회의 신학을 이성적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왜곡된 교의신학을 바로잡아서, ‘선’의 생활(도덕적 생활)을 함으로 러시아를 인류를 구원하는 빛이 되고자 하였다. 우리의 실제 생활을 윤리, 도덕으로 무장하는 생철학(生活哲學)을 주장했다.
(도스프예스키는 정신적인 방황(자유-현실 생활에서 예술적으로 접근)을 거쳐 신의 길을 찾는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1864), 안나카레리나(1877) 이후에 정신적 갈등을 겪으면서 정교회와 불화하고, 파문당한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공동체 선(농민사회의 선)을 주장했다. 이것을 톨스토이주의 라고 한다. 그는 러시아아의 민중과 농민을 신뢰하고, 그들의 민중성을 옹호했다.
그는 복음서, 특히 4복음서를 윤리적으로 해석하면서 정교의 해석을 비판했다.(종교는 윤리보다는 신성을 중심으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 파문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 농민(민중)은 정교의 신과는 무관하게 자연에 순응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자연에의 순응을 신으로 모셨다고 말하였다; 레빈이 말하듯이 ‘모든 인간 속에는 자연에 순응하는 선(善)을 원칙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원칙에 기초한 이웃 사랑이 진정한 신의 모습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로고스’를 태초의 말씀, 이성으로 해석하지만 톨스토이는 생명에 대한 이성적 분별력이라고 해석하였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명력에 대한 분별력이라고 해석했다. 이것은 바로 선(善)이다 라고 했다. 선을 통해서 인간과 인간사이를 맺어주는 공동체 삶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배제하고, 윤리적인 면만 강조함으로 파문당했다.
1882년부터 동양철학인 공자 사상과 노자의 道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善-사랑을 접목시켰다. 불교 사상도 善(도덕)으로 해석했다. 서양의 로고스는 원래 善의 개념이다.(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였음은 인간에게 도덕적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