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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에스컬레이터 인생/엡 2장1-10
몇년 전 국내 프로야구에 대기록이 세워졌습니다. 삼성 라이온즈의 양준혁 선수가 341호 홈런을 터트리며 통산 홈런왕이 됩니다. 이 기록이 대단한 것은 이 선수는 17년간 시즌 가운데 단 한 번도 홈런왕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그 당시에 홈런왕은 장종훈 선수 같은 팀의 이승엽 선수에게 돌아갑니다. 그럼에도 특유의 성실함으로 새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제 양준혁 선수가 홈런을 때릴 때마다 새로운 기록을 세워 나가는 것이고, 은퇴 할 때에 그의 기록도 마무리가 될 것 입니다. 저는 이런 소식을 접하며 우리가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과거의 하나님을 알기전의 우리의 모습은 부끄럽고 죄악 된 모습입니다. 주목받지 못 하는 삶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BC와 이후 AD의 삶으로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한마디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워지고, 주님께서 주목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마치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처럼 주님의 등에 엎혀 사는 삶입니다. 계속해서 올라가고 올라가는 삶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구원 받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바뀌였으며, 달라져가고 있는가 생각해보겠습니다.
1. 구원을 받기전의 인간의 모습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공평한 것은 잠과 죽음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땅에 와서 주어진 시간을 살다가 죽게 됩니다.
그럼에도 짧은 인생가운데 ‘그가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 얼마나 많은 업적이 있느냐’ 많은 것이 비교되어지고, 평가가 되어집니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인간에게 던져지는 실존의 질문은 딱 한 가지 무엇입니까?
“그가 주님을 만났느냐 만나지 못하느냐”로 하나님의 평가로 인생을 구분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 받기 이전의 인간의 모습이 있는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1절에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허물은 원어적인 의미로, 율법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상태를 이야기하며. 죄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삶을 말 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하나님과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창조주이신 주님과의 단절은 전적인 무능과 혹은 전적인 부패의 상태로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보겠습니다.
① 2절 “이 세상의 풍속을 쫓았습니다” (영토)
여기서 이 세상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아가는 땅의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의 풍속은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자기의 생각에 옳은 대로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예화 :
이것을 어떻게 설명을 드릴 수 있는가하면, 외국에 있을 때 보면 중동에서 온 친구들을 봅니다. 대부분 중동의 나라들은 이슬람의 원리들을 엄격하게 지키기에 술이라든지 여자라든지 가까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는 묘해서 밖에 나가면 안 해보던 것 다 해보고 싶어 합니다. 술도 마시고 도색 잡지도 보고 영토 밖을 벗어나서는 나라의 법을 따르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영토 밖에 살던 사람입니다.
②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감 (주권)
예화:
2004년 개봉한 영화가운데 톰 행크스 주연의 터미널이라는 영화가 있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동유럽의 크로코지아 나라에 사는 한 남자가 자기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하여 미국 뉴욕으로 옵니다. 그의 아버지의 소원은 유명한 재즈 연주가들의 싸인을 받아 수집해 놓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명연주가의 싸인을 다 받았는데 딱 한사람의 싸인이 필요해서 뉴욕공항으로 옵니다. 그런데 공항에 도착하니까 입국이 거절이 되면서 공항에 묶이게 됩니다. 동유럽의 이름 없는 그 나라에서 분쟁이 일어나 그 나라와 외교 관계가 두절이 됩니다. 결국 오도가도 못 하는 톰행크스는 그곳에서 영어를 배우고 스튜어디스와 사랑에 빠지는등 좌충우돌 이야기를 재미있게 그려냅니다. 결국 그 뒤로 그는 다시 나라의 분쟁이 가라 앉게 됨에 따라 공항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그로써 그는 그의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나라의 주권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는 말의 의미는 주권이 어디에 있느냐. 이 주권을 이야기할 때 공간적인 개념이 나옵니다.
이 공간의 개념을 이야기하면 유대인들은 3층천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후 12:2)
첫째는 사람이 사는 땅의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층은 마귀가 사는(마귀가 지배하는 공중)
세 번째는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 위의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다니엘이 기도하였을 때 천사 미가엘로부터 하늘의 응답을 받습니다. 그런데 미가엘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이 땅에 올 때 21일이 지연이 되는데 하늘에서 바사군과 미가엘의 전쟁이 있게 됩니다. 바로 이 마귀가 이 땅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기 전에 악한 영의 계획을 따르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라 악한 영의 주권에 사로잡혀사는 모습입니다.
③ 3절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았습니다”
여기서 육체의 욕심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거절하고 사단의 악한 지배아래서 종노릇하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귀의 지배를 받기에 마귀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악한 군주의 나라의 백성의 삶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북한 치하에 있는 굶주림의 북한 동포들과 폴포트 치하에 있는 킬링필드의 땅, 캄보디아를 기억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완전한 타락에 빠져있는 죄인들은 마귀의 나라의 국민으로 종노릇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앞에 철저한 패망과 지옥의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2.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마귀의 지배아래 살던 사람이 되었는데,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까?
누구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까?
따라서 할까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죽으셔서 그들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믿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었던 상태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아 새 생명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이 구원의 역사가 참 놀랍고 감사한일입니다.
예화:
제가 아는 여자 집사님의 딸이 삼성에 입사를 합니다. 지방대학을 나와서 삼성에 입사했다는 것도 대단한데 사연을 들어보니까 재미있습니다. 이전에 대전 엑스포 도우미를 삼성에서 600명 뽑는데 6천명이 응시를 합니다. 그래서 대전 엑스포 도우미로 삼성관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나니까 이제 삼성에서 수고했다고 그 도우미로 수고한 사람가운데 5명만 특채로 삼성직원으로 뽑는다고 했는데 그 5명안에 뽑힙니다. 6천명에서 6백명으로 뽑히고 다시 5명안에 들고 참 특별한 기회다. 그런데 그 권사님은 이게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의 밀접한 부분에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사경회를 드리고 있지만 목사님께서 자기 신분을 이야기할 때 “충북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를 강조하시는데 용식이 대근이 다른 친구들은 다 술을 먹고 죽었는데 자신은 목사가 되어서 구원받고 부르심 가운데 있다는 것을 감사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감사 속에는 그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봄이 있습니다. 우리가 에덴 동산에서 죄악을 범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남자에게는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는 노동의 형벌을 주시고 여자들에게는 해산의 수고를 겪게 하십니다. 많은 벌 가운데 왜 노동과 해산의 수고가 있었을까 생각해보시면 예수님의 사역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분이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안식일에 일하시는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이 핍박할 때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아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인의 해산의 수고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바로 생명을 낳는 일입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해산하는 고통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영적인 새 생명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화:
그래서 저는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를 바라보시며 서로를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으시길 바랍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기업이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업은 분깃 몫 소유, 땅 이런 것으로 표현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는 그분의 백성이 되는 신비의 관계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며 자신의 것을 나누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의 마음과 생활과 육체를 서로 나누어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밖에서 일을 하다가 녹초가 되어 들어오시는 남편을 보시면 어떻게 생각을 하면 됩니까? “아이고 저 OO 매일 늦게 들어오고 내가 못살아”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노동이라는 거룩한 사역에 참여하고 저렇게 피곤하구나 아끼시기를 바랍니다. 아내에게는 늘어가는 뱃살을 보며 “잘 한다 매일 집에서 잠이 나자”고 이렇게 생각마시고 예수님 닮은 해산의 수고가 있던 것이고, 자녀를 키우느라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뱃살이 저렇게 나오는 구나 이렇게 아껴주시기 바랍니다. 남자와 여자의 사역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이 사실을 생각할 때 감사가 넘쳐 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어떤 조건을 보고 뽑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분의 하신 일을 믿느냐 그것을 인격적으로 감사하고 그분의 뜻대로 사느냐 믿음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이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셔서 보여 주신 사랑에 응답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가 고백해야하는 것은 “나는 아무 공로 없습니다” 공로가 없다는 것은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겠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도우심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10절에 “우리를 위하여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
선한일이 무엇입니까
나만 구원 얻고 나만 복을 누리는 것을 선한일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죄악에서 나를 위한 삶을 살았는데 주님의 은혜를 알고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직도 주님을 일지 못하는 내 형제 내 친척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선한일이라고 합니다.
나오는 말
이런 구원을 생각을 하면 마트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바라보게 됩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이나, 무릎이 시원치 않은 사람 모두에게 에스컬레이터는 공평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곳에 오르는데 어떤 조건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무거운 몸을 그위에 얻게 되면 우리를 목적지까지 편하게 옮겨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이 에스컬레이터는 뒤로 가는 후진이 없습니다. 그 위에 올라탄 순간부터 상승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편리한 기능을 보며 주님을 생각해봅니다. 우리에게 그분의 구원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으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되지 않는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런데 주변에는 이런 에스컬레이터를 모르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계단을 올라가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기에 나에게 짊어진 인생의 무게가 왜 이리도 무거운가 탄식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화:
지난 월요일에 제가 살던 동네에 있는 한분의 부음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큰아들의 이름을 따서 정춘이 엄마라고 불렀기에 저는 어릴 때부터 정춘이 아줌마로 부르던 분입니다. 제가 어릴때 살았던 동네는 가난한 동네였는데 가난한 동네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편견이 있는데 ‘동네가 드세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서로 가난하였기에 아끼고 마음이 남달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분은 시어머니를 모셨는데 동네 호랑이 할머니로 소문이 나신 분이고 아들만 4형제를 키우신 분입니다. 특별히 이분이 불쌍하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남편이 가족을 버리고 다른 지역에서 작은 부인을 데리고 삽니다. 이혼하고 싶었지만 인연의 끈이 길어서, 아버지와 남편의 관계는 유지 하는데 생활 대책은 세워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시어머니와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서 막노동을 하시며, 개인적인 즐거움은 이웃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정을 나누는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마음이 짠하는 것은 그런데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동네 분들과 술을 마시고 자신의 운명을 기억했는지, 동네 분들에게 모두 전화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삶을 그렇게 어렵게 했던 작은 부인에게도 전화를 남기고 집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60대 중반의 치열했던 삶을 그렇게 마감 한 것에 동네 분들이 같이 슬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엇인가 자신의 이야기를 호소했을 것인데 사람들은 그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술김에 하시려했을까? 그분이 돌아가시며 도대체 인생이 무엇인가?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이라면 ‘나는 참 억울하다’이런 생각을 가졌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분은 운명이 기구하여서 슬프다고 하지만 부자가 되어서 헬스클럽에서 건강을 관리하고 좋은 식당에서 웰빙의 음식을 먹고, 좋은 주택에서 산다고 하여도 주님 없는 삶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잠시간의 세상적인 찬사나 얼마간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는 있어도 그것이 주님 앞에 복된 인생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말 가치인생, 복된 인생은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조성하시고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을 아는 인생이 복된 인생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구원을 안다면 그분의 역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에컬레이터의 기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탈수 있고 편리한 기능을 가진 구원의 기쁨을 알게 하고, 함께 권해서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하는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계속되어지는 말씀 사경회가 있습니다. 시간 시간 은혜의 말씀이 임합니다. 함께 들어야할 분들이 계십니다.
주님은 어떤 분인가 소개하며 권면해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들의 영혼이 주님을 만나고 에스컬레이터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권면하시고 우리의 증거가 복음의 선한 일을 위해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 처| 윤태성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