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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지금으로부터 아주아주 오랜 시절. 그러니까 세종대왕의 치세 때 집현전에서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고 한다. 왜 그런고 하면 그건 어느 장씨성을 가진 악질 학자 덕분이라고 한다.
집현전 앞마당. 사람들을 한가득 불러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자신을 부른 누군가를 기다리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보게 자네. 도데체 우리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뭔가?”
한 관리가 옆에 있던 학자에게 물어보았다. 학자는 왠지 모르게 초연해 보이는 모습이... 체념한 듯 하다.
“장 실장님의 발명품 발표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방패는 왜 가져왔는가?”
실제로 학자는 무슨 전경들이나 쓸 커다란 방패를 들고 있었는데 그 외에도 집현전의 학자들은 각자 나름대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어디 전쟁하러가나?”
“차라리 전쟁이면 좋겠습니다.”
관리는 점점 장영실이란 인물의 존재에 의구심을 느끼며 자신이 이곳에 있어도 좋은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번 대보름 사건 기억나십니까?”
“물론이고말고. 그때 궁이 발칵 뒤집혔잖은가. 한 십여 명이 단체로 골절상을 입었으니...”
“그게 달에서 자란다는 견과를 부럼으로 쓰자며 학자들을 거대 새총에 싣어 날려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학자의 입에서 ‘쥐불놀이-방화사건’ ‘설날- 까치의 생태조사. 그들의 설날은 어저께인가? 오늘인가?’ ‘단오-그네 360도로 타기’ 등등. 추석 때 다시 한 번 학자들을 달로 쏘아보자며 화약을 가지고 나오는 대목에서 관리는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려 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때 집현전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발랄한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연구실에 처박혀 있던 덕에 검댕이를 여기저기 묻히고, 상당히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보호경’을 머리위에 올려놓은 미래지향적 복장을 한... 소녀였다.
관리들은 장영실의 업적만 알지 그 모습은 처음 보는 듯. 놀라는 눈치였고 학자들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를 바라보는 눈으로 각자의 무장을 한번 더 확인했다.
“뭐야? 악기도 연주하고 좀 기뻐해 보란 말야!”
하지만 좌중은 여전히 고요했고 가끔 한명씩 ‘수고 했소.’라고 말할 뿐. 학자들은 그녀를 계속 경계했다. 그러나 이 눈치없는 아가씨는 전혀 상황파악을 못하고 약품을 담은 시험관을 빙글 돌리며 계단을 내려왔고, 그럴 때 마다 사람들은 뒤로 슬금슬금 피했다.
“그러나 저러나. 우리 세종이는 어디있나?”
왕에게 세종이라니! 그때 좌중을 주욱 둘러보던 그녀에게 한 꼬마가 달려와 안겼다.
“어이구 우리 귀여운 세종이.”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꼬마와 누나사이지만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보자면 종묘에 누워있던 태종께서 대노하여 걸어 나오리라.
그렇게 세종을 안아든 장영실은 어디론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전하를 다시 되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조용히 장영실이 건넨 말에 세종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이 도착한 곳에는 장영실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꽤나 웃긴 포즈의 동상이 서 있었다. 장영실은 세종을 내려놓고 그 동상 앞에 서서 약품이 들어있는 실험관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들어보이며 자신의 발명품을 실험할 준비를 했다.
“자, 그럼 이 약을 저기 저 나무에 뿌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성장 촉진제가 제대로 완성이 됐다면 저 나무는 쑤욱쑥 크겠지요?”
그리고 신하들이 ‘그 나무는 태조께서 손수 심으신 매우 귀중한 유산’ 어쩌고 떠들기 전에 약을 통째로 부어버렸고, 학자들은 그저 그 약을 자신들에게 먹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며 그녀의 행동에 수수방관했다.
“흐음... 어떻게 될까나.”
그리고 정확히 한 다경(15분)이 흘렀다.
“이게 아닌가? 할 수 없지. 오늘 실험 끝!”
제멋대로 해산령을 내린 장영실은 세종에게 ‘갈께’ 하며 밝게 인사하고 휘적휘적 연구실로 돌아가 버렸다.
“다.. 다행이다.”
설마 이상한 폭발이라도 일어날까 조마조마하던 관리, 학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각자의 갈길로 향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차라리 이때 폭발해버렸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날 저녁. 늘 엄중한 궁궐의 경계를 담당하는 병사들이 그날도 어김없이 순시를 돌고 있었다.
“응?”
서릿발 같은 눈매의 고참이 멈칫하자 군기가 바짝 든 신참들은 모두 긴장했다.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듣지 못했느냐?”
신경을 날카롭게 세운 그는 곧 어둠속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마.. 말도 안돼.”
경악에 물든 그의 얼굴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피리를 가져와 젖 먹던 힘까지 짜내듯 힘껏 피리를 불었다. 삐익. 날카로운 소리가 밤중을 매웠고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날. 집현전에서 팔자좋게 늘어진 장영실은 어제도 늦게까지 연구를 했는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고 아무렇게나 책상 한가운데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장공! 장공!”
그때 누군가가 급히 그녀를 찾아왔다. 매우 급박한 상황임을 알리는 그의 얼굴과는 달리 이제 막 잠에서 깬 얼굴로 ‘왜 떠드느냐’는 듯 쳐다보는 영실은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뭐에요? 급한일 아니면 나가요.”
“매우 급한일이니 일어나게.”
그제서야 밍기적 거리며 상체를 일으키는 영실의 얼굴에는 ‘귀찮게 시리’라는 말이 노골적으로 드러났지만 상대는 어찌됐든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자신이니 할 수 없었다.
“뭔데요?”
“지금 궁궐이 온통 난릴세!”
“끄아악!”
둔탁한 타격음을 내며 무언가에 얻어맞은 병사가 나동그라졌다.
“당황하지 말고 전열을 가다듬어라! 방패수 열을 맞추고. 부월수와 장창수는 대기한다. 편전수 조준!”
제법 일사분란하게 지휘를 하는 지휘관덕에 병사들은 착실히 무언가에 대응해 나갔다.
“제길 어디서 저런 괴물 나무가 튀어나와선.”
그들이 싸우고 있는 상대란 바로 장영실이 약 먹인 그 나무였다. 기괴하게 나무줄기를 휘두르며 방패를 쳐내고 가끔 빈틈을 비집고 병사들의 발목을 붙잡아 날려버리는 괴물의 기습은 어제 저녁부터 시작해서 궁궐의 주요지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을 장악해버리는데 성공했다.
“발사!”
거의 무의미하게 발사되는 애기살은 간혹 줄기를 찢어놓는 강한 위력을 보이곤 했으나 나무는 금방 회복되었고 그나마도 대부분은 나무의 두께를 이기지 못하고 박혀버렸다.
“도데체가.... 하필이면 저 녀석이 맨 처음 점령한 곳이 화약고라니....”
게다가 이제 저 녀석을 함부로 태웠다간 궁궐 전체가 불바다가 되어버릴 판이다. 다행인건 종묘나 왕이 계신 궁궐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저지한 덕에 아직도 무사하다는 점. 그러나 이제 그 저항도 서서히 무의미해져간다.
“이제 끝인가... 조선왕조가 개국이래 이리 허망하게 무너지다니.”
“도대체 뭔데 그래!”
“일단 나와 보시오!”
하이톤으로 짜증을 내는 장영실을 억지로 끌고 나온 관리는 집현전 바로 앞까지 들이대는 나무들을 보여줬다.
“이게 뭐?”
아직 상황파악이 안된 장영실은 도리어 물어보았고 학자는 대답했다.
“이게 바로 어제 실험에 쓰시던 그 나무요.”
“그래? 실험에 성공 한 건가?”
“서.. 성공이라니! 지금 그 나무가 날뛰는 바람에 온 궁궐의 병사가 싸우고 있단 말이오!”
“그래서? 난 싸우는 게 일이 아니잖아.”
도대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자각을 못하는 장영실 덕에 속 타는 건 애매한 관리였다. 그때 관리의 뇌리에 무언가 기발한 묘책이 떠올랐다.
“내가 듣기론 그 괴물나무가 맨 처음 초고속 발육을 시작하면서 주변에 있던 것들을 죄다 초토화 시켰다는데...”
“그... 그게 어쨌다고?”
관리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길게 끌 것 없이 쐐기를 박았다.
“나무하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장공의 동상이 있지 않았던가?”
그 순간 장영실의 신형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어디론가 질주했다.
“이 망할 나무괴물! 동상에 손하나 까딱해봐! 집현전 1년치 장작으로 패버릴테다!”
조금씩 꿈틀대는 나무를 사정없이 짓밟으며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관리는 잠시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크윽. 여기까지 인가?”
이제 밀리고 밀려 결국 최후의 보루. 세종대왕의 거처까지 오게 된 병사들. 이제 변변한 장비도 남아있지 않은 그들은 그야말로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모두들... 그동안 못난 선임 만나서 고생했다. 다음 생에는 병사 같은 거 하지 말아라.”
“크흑.”
이제 슬슬 나무줄기가 뻗어온다. 병사들은 비장한 얼굴로 무기를 거머쥐고 그것들을 노려보았다.
“꺄아아아!”
히스테릭한 울부짖음이 온 궁궐에 울렸다. 주변에 죽거나 나무 덩굴에 묶여있는 병사들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장영실이 처참하게 부서진 자신의 동상을 보고 낸 소리였다.
“이... 이... 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강렬한 살기가 피어오르자 주변에 있던 나뭇가지들이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물마저 한 수 접고 들어가는 희대의 마녀 장영실은 곧 이놈을 어떻게 하면 가장 처참하고 확실하게 죽일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제초제를 갖다 뿌려? 톱으로 사정없이 조져버려? 아, 그보다 좋은게 있었지.”
음산하게 말을 내뱉던 장영실은 더욱 더 무서운 속도로 어디론가로 날아갔다.
“후후후후후. 확실하게 알려주지. 이 영실님을 건드린 대가를 말야.”
“사.. 상감마마! 어째서...”
“나도 싸우려 하오. 이 나라의 백성의 아버지라는 내가 언제까지 뒤에 숨어있을 수 만은 없잖소?”
“하.. 하오나.”
백성의 아버지라기 보단 귀염둥이에 가까울 왕이 제 몸통만한 환두대도를 들고 걸어 나오는 모습에 병사들은 기겁했다. 하지만 세종의 고집은 쉽게 꺾일게 아니었다.
“나를 보호하고 싶다면 나와 같이 싸워주시오. 백성이 있고 왕이 있지. 왕이 있고 백성이 있는 게 아니잖소? 그대들도 나의 백성들. 우린 함께 있어야 신하도 되고 왕도 되는 것이오.”
“저.. 전하.”
당장이라도 오체투지를 하고픈게 병사들의 심정이겠지만 상황이 허락해 주지 않은 터라 그들은 왕과 나란히 서서 진을 쳤다.
“전하를 보호하라! 단 한 놈도 전하의 옥체에 손을 댈 수 없을 것이야!”
“충!”
“크크큿. 다 뒤졌어.”
이미 정신이 반쯤 훼까닥 돌아버린 장영실이 무언가를 들고 궁궐의 남문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별로 어려울 것 없이 작업을 끝낸 그녀는 각도 조절하고 화약을 대충 털어 넣은 뒤 버튼이 달린 손잡이를 들었다.
“후후후. 아직 첫 시연도 하지 않은 물건인데 잘 되려나 모르겠어. 어쨌든 구례모와(具禮模渦) 발사!”
공기가 떨린다. 엄청난 폭발이 궁궐을 덮쳐오기 시작했고 아직 살아있던 사람들은 화력이 미치지 않은 곳으로 정신없이 피하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요?”
“뭔진 모르겠지만 피하십시오!”
한참 나무와 씨름하던 그들은 멀직이서 달려오는 거대한 불기둥에 질려 각자 양 옆으로 찢어졌다.
“오호호호호호호”
불길에 싸인 궁궐을 배경으로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넘실대는 불이 나무괴물을 포함해 궁궐의 모든 것을 날름거리며 삼키고 있었다.
얼마 후.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 장영실은 결국 자신의 사비를 털어보아 궁궐을 재건축했고-어디서 이런 돈이 나왔는지는 아무도 말 못했다-다시금 성장발육 촉진제를 만들려는 장영실의 의욕에 세종이 직접 달려가서 만류를 하며 이 소동은 끝이 났다.
영실은 대신 자신이 그 약을 만들지 않는 대신에 중국으로 유학을 보내달라고 간청했고, 궁궐사람들 전원 만장일치로 장영실은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하아... 유학이다~”
“영실공. 부디 놀러가는 거 아니니까 괜히 돈만 까먹고 오지 말고 뭐라도 좀 배워가지고 오시오.”
“네에~”
왠지 ‘흥청망청 돈 까먹고 오겠습니다.’라는 의미를 압축한 듯 한 영실의 대답에 영조판서마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 옆에 있던 세종은 친히 궁궐외곽까지 마중을 나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참.”
뭔가 잊은 듯 잘 가던 길을 다시 돌아오는 장영실. 세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단 둘이 서 있게 된 그들. 영실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한쪽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춰서 말했다.
“그럼 그때까지 좀 크시길 빕니다.”
서서히 다가오는 영실의 얼굴. 세종은 그저 조용히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듯 가만히 서 있었다. 붉게 얼굴을 붉힌 영실은 평소 보여주지 않던 모습으로 어색하게 웃어보인 뒤 힘차게 대륙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때를 기대하겠소. 장공.”
첫댓글 오오오~~ 흥미진진 하네요. 이건 거의 프롤로그 같네요..^^ 다음 편 기대할게요~~
구례모와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어어어어!! 진소원 분 아니신가요?! 진소원분을 요런데서 만나뵈니 정말 반갑네요 이 소설 킥킥거리며 너무 재미있게 봤었는데 ^^;; 제 기억이 맞다면 진소원에 올리신 글에도 리플을 달았었구요;; 아무튼 반가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