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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 미술 명작전 6.7-7.20 춘천문화예술회관
지금 춘천문화예술관에서는 고려대학교 협찬, 춘천시 후원으로 한국 근현대 미술의 흐름을 보여 주는 대규모 전시회가 진행 중이다. 계승-수용-혁신-자립, 이렇게 네 파트로 구성한 전시에는 구한말을 지나 전쟁과 분단 이후, 급변하는 세계 속에 대응하는 한국의 근현대사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술은 작가의 독창적 영감이 빚어낸 산물로만 정의되지 않고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별 굴곡진 한국의 근현대 미술은 외세로부터의 국가 수호, 전쟁 트라우마로 인해 세계화와 한국적인 것 사이에 항상 ‘전통’을 의식해 온 것으로 보인다. 전시를 통해 그 맥락을 보도록 하자.
근현대 미술과 전통의 문맥
봉건사회 개혁이라는 과제와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이중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던 구한말, 근대화의 물결은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과의 충돌 속에 전시의 첫 번째 파트-계승(繼承)-이 전개된다. 채용신의 '초상'과 김은호의 '순종어진'으로 그 시작을 알린다. 1894년 동학운동은 조선의 불합리한 봉건 계급사회를 자주적으로 개혁하고자 하나, 일본제국의 침략으로 조선 민중의 타도 대상은 양반이 아닌 외세로 전회하게 된다. 이는 이후 근현대 미술사에서 매 시기마다 우선 순위로 등장하는 ‘전통’이 강조되는 첫 번째 계기다.
(왼쪽부터) 채용신의 '초상'과 김은호의 '순종어진'. (사진 제공 = 김연희)
일본 제국주의의 마지막 단계인 문화 통치 시기, 미술계에서는 최초의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리고 평가자인 일본의 시선을 의식한 아카데미즘으로 점철되기도 한다. 이에 반하는 새로운 전시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작품들은 재료의 형식과 소재를 전통이나 관전 등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환경과 시대를 예술적으로 물화한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담뱃갑 은지에 송곳으로 선을 긋고 색을 칠한 뒤 헝겊으로 문질러 그린 이중섭의 은지화에는 주로 게, 꽃, 나무, 복숭아, 아이들이 나온다. 가난과 병고로 비참한 마지막 생을 보낸 화가이기에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싶은 몽유도원(夢遊桃源)의 그림 속 세상은 재료의 적절함 그 이상의 애절함이 묻어난다. 전시의 두 번째 파트-수용(受容)-에 소개된 이중섭의 작품은 '꽃과 노란 어린이'(1955)다.
이중섭, '꽃과 노란 어린이', 1955. (사진 제공 = 김연희)
박원서의 소설 "나목"의 스토리를 연상하게 하는 작가 박수근의 작품들 역시 전후의 암울하지만 여명과도 같은 느낌을 납작납작 눌러 그려진 유화적 붓질에서 볼 수가 있다. 죽은 나무가 아닌 잠시 겨울을 견디고 있는, 지금은 누운 듯 있지만 서서히 일어날 것만 같은 마티에르(프 matière, 물감·캔버스·필촉 등에서 만들어 내는 대상의 재질감)를 표현한 작품의 물성은 그 당시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박수근, '복숭아', 1957. (사진 제공 = 김연희)
한편, 원하던 독립은 이루었으나 전쟁과 분단은 ‘정체성’이라는 전통의 연장된 트라우마를 지속적으로 소환한다. 근대화와 조국 통일이라는 두 가지 모순된 소망은 실체 없는 한국적 정체성을 독재와 군사정권의 문화 정책으로 오도하고,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자유에 대한 갈망은 4.19, 5.18 혁명 등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에 전시에서 ‘혁신(革新)-자립(自立)’ 파트에 오게 되면 권위에 도전하고자 하는 작가들은 전위적인 미술 흐름 속에 유럽 앵포르멜을 받아들이기도 하는 등, 해외 유학파를 중심으로 혹은 자생적으로 ‘추상미술의 시대’가 열린다.
그러나 소위 이러한 추상과 함께 등장한 한국의 현대 미술은 서구 문화의 추종이라는 반작용과 함께 군사정부에서는 전통 미술, 한국적인 것, 한국적 정체성 등의 문화 정책을 내세워 국가통치 이념으로 재생산한다. 이에 부응하듯 행위의 반복과 재료의 물성을 통한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전통(동양) 서사는 ‘세계화’라는 욕망과 ‘한국적 정체성 추구’라는 두 가지 조건을 해결한다. 단색조 회화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박서보, '묘법', 1963. (사진 제공 = 김연희)
그 외에도 우리의 자연 풍경을 소재로 오방색을 강조하거나 한국적 서정성을 강조한 작품들은 국제화된 기법과 재료를 수용하면서도 전통을 강조하는 등 전통의 다양한 문맥은 민중미술을 포함해 80년대까지 이어진다. 또한 지속적인 수묵(水墨) 운동으로 80년대 이후 동양화는 한국화라는 용어로 사용된다.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갈망과 집착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쟁점이었던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다뤄지는 작품들 역시 그러한 하나의 흐름 속에 존재하면서도 주류를 벗어난 다양한 작품도 전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전시다.
전통의 트라우마와 생산자로서의 작가
자크 라캉에 의하면 ‘대타자(the Other)의 욕망’은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우리의 현재 위치에 의존하게 만든다. 특히 한국 전쟁의 트라우마를 직접 겪은 세대들이 문화 정책을 수립하던 시기, ‘국가주의와 국제화’라는 딜레마 속에서 서구의 모더니즘 회화와 차별화하기 위한 ‘한국적’인 것에 대한 정체성 담론들은 지속적으로 양산되었다.
“비평가가 자신이 대변하는 집단이나 사회 계층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후원자가 되어 버리는 것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모습”이라는 발터 벤야민의 유명한 경고에서와 같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의 역할이 있다면 작품을 조심히 다루어 연구하고, 순진한 신봉자이기보다 함께 모여 토론과 논쟁의 자리를 만들어 주는 일일 것이다. 그런 비평의 모습은 같은 작품일지라도 하나의 총체성을 가진 모습이 아닌 여러 가지 다른 해석으로 우리와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김연희
홍익대학교 예술학 박사(미술 비평 Art Theory and Criticism ph.D)
미술 평론 및 대학에서 예술 이론 강의를 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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