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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일본천황 옥음방송(1985년 8월 15일)
옥음방송(玉音放送)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뉴스에 방송된 일본 제국의 종전 선언이다.
천황의 조서(詔書) 낭독 녹음본을 재생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쇼와 덴노가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무조건적인 항복)을 수락한다는 것으로, 이 방송을 기점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종말을 맞이하고, 한반도는 8.15 광복을 맞이한다. 또한 이후 일본은 미국이 점령하여 태평양 최고사령부(SCAP)와 연합국 최고사령부(GHQ)의 통치를 받게 된다.
옥음방송의 ‘옥음’이라는 단어는 ‘임금의 목소리’라는 뜻이다. 한국 사극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옥체(임금의 몸)처럼 똑같이 임금을 높이는 표현인 것이다. 해석하자면 ‘임금이 친히 목소리를 내어 하시는 방송’이라는 뜻이다.
‘옥음방송’이라는 단어 자체는 임금이 국민에게 하는 방송이라는 보통명사지만, 이 방송 이전까지 일본에서 천황이 국민을 대상으로 방송을 한 전례가 없었다. 방송을 듣는 백성이 무릎 꿇고 듣는지, 불경하게 누워 듣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항복 선언을 한 이 방송을 하면서 최초로 천황의 ‘옥음’이 방송을 타게 된다.
종전 이후에는 천황의 신격화가 부정되었고, 일본의 문화도 여러모로 달라지면서 천황의 취급도 단순 상징 정도로 많이 격하되었다. 따라서 TV, 라디오 등 대중매체에 많은 ‘옥음방송’이 있었지만 이 선언의 임팩트가 워낙 컸기 때문에 일본에서 ‘옥음방송’이라 하면 대개 이것을 일컫는다.
다만 이전에도 천황의 목소리가 전파를 탄 사례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우연히 어느 스포츠 행사의 NHK 실황중계 중에 히로히토의 육성이 마이크에 잡혀서 송출된 적이 있다. 히로히토가 이 사실을 긍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지만, 당시 NHK의 기술진부터 총재까지 모두 궁내청에서 불경죄가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는 후문. 물론 어디까지나 목소리가 섞여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정식으로 방송을 한 것은 이때가 최초다.
전제군주국 또는 군주의 권위를 크게 내세우는 국가에서는 다양한 관례 때문에 서민이 제왕과 직접 접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이야기할 일이 있으면 평민-신하-신하-신하-시종-군주으로 이루어지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천황과 직접 대화할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직접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으로 취급된 것인데, 보통 천황의 말이나 의사, 뜻은 시종장이 대신 전달하며 대외적인 입장표명이나 의사 표현도 궁내청이 대신한다. 현재야 인식의 변화 및 미디어의 발달로 직접 의사표시나 발언 등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이 시대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평상시에 국민에게도 말씀을 아끼던 높으신 분이 입을 처음으로 연 것이 하필 항복선언이었다는 셈이다.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드러나듯 영국의 조지 6세가 연설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여러 번 한 것과 대조된다. 이는 동양에 비해 서양의 교육과 문화가 발표를 매우 중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을 포함한 여러 서양 국가들의 대학에서는 발표와 토론이 상당히 발전돼있다. 한국 유학생들이 서양의 대학교에서 상당히 애를 먹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어느 주제를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흔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지 6세도 말더듬이라 연설을 잘 하지 못해 방송하기 전에 강도 높은 특훈을 받았다. 서구권도 라디오로 연설을 잘 하는 리더가 나오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부터이고, 보수적인 기존 왕족들은 대중 앞에서의 연설에 능숙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어찌 보면 최고의 쇼맨인 아돌프 히틀러 + 최고의 작가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조합이 막강한 지지를 얻게 된 건 우연이 아닌 셈이다.
이후에도 일본 황실의 공식 발언은 직접 송신되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 각료나 아나운서의 말을 거쳐 전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소위 옥음방송에 해당하는 사례는 현대에도 많지 않다. 당시로부터 66년이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뒤인 3월 16일 오후 4시 35분에 아키히토가 위로 메세지를 발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옥음방송이라는 용어 자체가 지극히 일본을 기준으로 한 표현이기에, 타국에서는 ‘임금의 목소리’라는 ‘옥음’이라는 용어 자체에 불쾌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래서 대체로 항복선언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옥음방송이라고 하면 십중팔구는 반어법이다.
영어권에서는 옥음방송을 직역한 ‘Jewel Voice Broadcast’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하나, 위키백과 문서를 비롯해 더 널리 쓰이는 명칭은 ‘Hirohito surrender broadcast’, 즉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이다.
당시의 공문서는 헌법과 법령을 비롯한 대부분이 문어체였고 옥음방송의 원고(原稿)인 ‘종전의 조서(終戰ノ詔書)’ 역시 문어체 공문서다. 그러므로 일반인은 알기 어려운 낡은 표현이 떡칠되어 있는 건 예사였기에, 얼핏 들으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거기에 다음 문단에서 나오겠지만, 천황의 전쟁책임을 회피하려는 목적으로 이리저리 꼬는 바람에 더욱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나왔다. 무엇보다,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지만 항복이란 표현 자체가 들어가지 않은 항복선언이기도 하다.
이에 심지어 당대의 일본인들조차도 이 연설이 무슨 내용인지 처음에는 제대로 이해한 이들이 많지 않았다는 언급이 있으나, 이는 당시 증언들이 엇갈린다. 나중에 방송국에서 해설방송이 나갔다고 한다.
이 방송 이후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무장해제 되었는데도 항복이라는 용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은 것이 특징.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지나(중국), 소련 4개국의 공동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라는 문구에서 이 조서의 성격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즉, 쇼와 덴노는 이 조서에서 자신의 신민들과 제국 정부를 분리하면서, 제국정부가 아닌 일반 신민들에게 포츠담 선언 수락 사실을 알린 것이다. 항복 사실 자체는 제국 정부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고, 애초에 쇼와 덴노의 결정 자체가 정부회의에서 나온 것이라서, 이 방송이 제국 정부에 알리는 목적은 아니다.
이에는 당시 내각과 천황, 그리고 메이지헌법과 일본 국내 상황이 얽혀 있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 내에서 본토결전을 운운하는 육군 중심의 강경파와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외무성을 중심으로 한 화평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대립 속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는 사이, 연합군은 폭격과 핵폭탄 공격을 퍼부었고, 소련도 참전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사실상 일본의 컨트롤 타워였던 최고전쟁지도회의(긴급 비상 어전회의)에서는 항복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지만, 포츠담 선언 수락에 일본도 조건을 붙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자 그럼 그 조건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다시금 대립하기에 이른다. 핵심은 ‘국체 보전’, 즉 ‘천황제 유지’를 절대적 선결조건으로 함을 뜻한다.
이에 사태를 현실적으로 보고자 했던 외무성 측에서는 그것만 있으면 충분하다, 빨리 수락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육군의 수장이었던 아나미 고레치카는 그것을 위한 추가 조건으로 일본 내 연합군 주둔지 및 그 기간의 최소화, 일본 주도의 무장 해제와 전범 처벌을 더 내세우며 뻗대고 있었다. 외무성은 이후에도 아나미 육군대신이 다시 어깃장을 놓을까봐 상당히 전전긍긍했다.
이렇게 뻗대고 있던 중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마저 핵이 투하되었고, 보다 못한 내각총리대신 스즈키 간타로는 당일 심야에 곧바로 임시 각의까지 열며 결론을 내고자 했으나 도무지 대립은 끝날 줄을 몰랐다.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와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 기도 고이치 내대신이 포츠담 선언(무조건적인 항복 조건) 수락에 찬성했고 아나미 육군대신을 중심으로 우메즈(육군) 참모총장, 토요다(해군) 군령부총장이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내각총리대신 스즈키 간타로는 히로히토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그 자리에서 히로히토는 ‘내 생각은 외무대신 생각이랑 같음’이라고 말했다. 즉, 포츠담 선언의 수락이라는 큰 틀 자체는 8월 9일 23시경에 이미 결정된 사실이었다.
8월 10일, 스즈키 간타로는 연합군 측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는 뜻을 통보했다. 연합군은 8월 12일에 답서를 보냈는데, 그 답서의 내용을 가지고 다시금 일본 육군이 반발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천황과 일본 정부는 연합군 사령관에게 ‘subject to’ 한다는 구절이었다. 외무성은 연합군 사령관의 제한 하에 둔다고 번역했지만, 육군성은 연합군 사령관에 예속된다고 번역, ‘그렇게 되면 국체 유지(천황제 보존) 불가능함’을 외치며 최종결재를 하지 않고 뻗댄 것이다. subject to는 본래 ‘∼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다.’, ‘∼의 명령을 따른다.’, ‘∼의 통치를 받는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히로히토 평전을 쓴 미국의 역사학자 허버트 빅스는 “외무성 측이 원문을 축소해서 의역을 했다”고 본다.
이에 8월 14일부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 오전 8시 40분 총리대신 스즈키 칸타로와 내대신 기도 고이치가 급히 만나 오전 11시에 긴급 어전회의를 여는데 합의했다. 어전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오전 10시, 히로히토는 비황족 출신 육해군 원수 3인인 육군의 스기야마 하지메와 하타 슌로쿠, 해군의 나가노 오사미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스기야마 하지메, 나가노 오사미는 항복에 반대했으나 하타 슌로쿠는 “항복에 찬성한다.”고 진언했다고 전해진다. 오전 11시, 합동 긴급 어전회의가 열렸다. 역시나 위의 3명은 옥쇄(=결사항전)를 주장했지만, 쇼와 덴노는 다시금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나는 이 자리에서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고 말하기에 이른 것이다. 도조 히데키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말했듯이 ‘일본의 고관이 천황의 뜻에 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 발언이 나온 후 6일 뒤, 도조는 이 발언을 철회한다. 이 발언은 도조가 자신은 전쟁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발언이 아니라, 기도 고이치가 평화를 바라는 천황의 생각에 반하여 이런 저런 행동을 한 것을 알고 있느냐는 변호인의 질문에 나온 대답이었다. 결국 포츠담 선언에 반대했던 군부 인사들도 이제는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8월 14일 오후 선언의 초안이 작성되고 녹음 준비를 위해 NHK의 기술진들과 총재가 국민복 차림을 한 채 궁내청으로 들어갔다. 일본 황실은 전쟁 중에도 드레스코드(Dress code)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평상복 차림으로라도 들어오라는 특별지시가 따라붙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초안이 정서되지 않았다.
인쇄본을 신문사에 돌리기 위해 붓글씨로 쓰지 않고 등사용 철필로 긁었다. 그리고 궁내청 특유의 끝단 맞추는 정서법으로 인해 끝부분 7자를 남기고 다시 정서했다. 굳이 그래야 했던 이유는 조서 마지막에 어새를 찍어야 하는데, 이 어새가 보통 큰 게 아니기 때문. 도장 찍을 자리가 모자라서 처음부터 다시 썼다. 그래놓고도 맞추는데 실패해서 결국 12자는 4행에 작성했고, 마지막 5자는 인영에 겹친다. 일본 역사상 조서의 본문이 어새 인영에 겹치는 사례는 이게 유일하다고 한다.
밤 9시경까지 초안이 완성되지 않았고, 기껏 정서를 끝냈더니 또 ‘전세가 불리하여’란 구절을 ‘유리하지 않아’로 바꾸게 된다.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이 ‘불리하여’라는 구절에 반대하였고, 이 때문에 몇 시간이 지나갔다. 요나이 미츠마사 해군대신이 통 크게 양보하여 ‘유리하지 않아’로 겨우 바꿀 수 있었다. 결국 이 부분은 붓글씨로 가필했다.
이런저런 잘못으로 인해 녹음 기술진들과 쇼와 덴노는 7시간 가까이 대기하게 된다. 이윽고 3번에 걸친 녹음 끝에 오후 11시 30분 조서 낭독 녹음이 종료되었고, 이를 우여곡절 끝에 다음날 15일 정오에 방송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태평양 전쟁의 종결에 이른바 천황의 결정이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대공황으로 허우적대던 일본 내에서 군부가 대두하여 전쟁을 일으키더니 그 전비의 지출로 다시 허우적대다가 일으키게 된 것이 태평양 전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은 군부와 그들이 점거한 정부내각에 책임이 있고 쇼와 덴노는 죄가 없다’는 식의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전후에 만들어진 오늘날의 상징 천황제를 과거에 투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제 시절의 천황은 상징 천황도 아니었으며, 무가 정권기의 허수아비도 아니었다. 특히 전후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이미 당시의 각료들은 ‘전범’으로 처형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메이지헌법에 따르면 선전포고는 국무대신의 보필 사항에 속했다. 당시 헌법에서는 “국무 각 대신은 천황을 보필하고 그 책임을 진다.”라고 규정했다. 즉, 천황의 ‘군주무책임론’이 성립 가능한 것은 천황의 결정에 국무대신들이 보필하고, 그 책임도 대신들이 지기 때문인 것이다.
문제는 개전(전쟁개시), 특히 태평양전쟁의 시작인 진주만 공습이 내각이 아니라 보필 책임이 없는 참모총장, 군령부총장, 육해군 차장 등이 참석하는 대본영-정부 연락회의(연락간담회)에서 사실상 결정된 것이라는 데 있다. 결국, 국무대신의 보필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쇼와 덴노는 전쟁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이 맞다.
천황의 결정이 있음으로써 종전이 가능했다면, 반대로 ‘천황에게는 개전 책임도 있다’는 논리가 가능해진다. 이를 위해 개전 조서에서는 다른 신민들과 분리되어 서술되지 않았던 ‘제국정부’가 분리되는 등의 작업이 진행되었다. 21세기에 와서는 상징천황제를 과거에 투영하여 히로히토도 재가만 하는 기계라는 인식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내려져서는 안 될 결정이 내려졌으니, 그럼 왜 이제 와서 천황이 그러한 결정을 내렸는지 온갖 구실을 붙여야만 했고, 그 결과물이 이 조서였던 것이다. 때문에 조서에서는 ‘덴노 자신이 바래왔던 것은 만방공영과 같은 좋은 것이지, 전쟁을 벌여 타국을 침략하는 등의 나쁜 행위는 바라지 않았다’는 식으로 서술된다.
‘그러나 전국이 호전되지 않았고, 세계의 대세 역시 유리하지 않으며(결코 ‘불리해져 갔다’가 아니다!)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해 빈번히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했기 때문에, 결국 인류 문명의 보호자인 천황이 제국 정부로 하여금 포츠담 선언에 응하도록 지시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또한, 중일전쟁에 대한 서술을 생략하여 태평양전쟁 4년만을 전쟁으로 상정한다.
즉, 이러한 조서 내용은 ‘국체 보전(=천황제 유지)’을 위해 안간힘을 쓴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짜 맞춰진 조서는 히로히토와 일본 정부의 태평양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과 종전의 명분 그리고 그 이유 또한 규정해버리는데 결론적으로 옥음방송은 이 전쟁은 아시아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고, 전쟁의 종결은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해, 잔학한 적의 공격으로부터 일본 신민과 인류 문명을 보호하기 위해 천황의 성스러운 결단에서 비롯된 것이란 인식을 일본인들에게 박아넣었고, 결국 일본인들이 전후 이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결정해버리고 만다. 거기에 덴노는 침략 전쟁을 주도한 이가 아니라 위험에 처한 일본을 전쟁의 참화에서 구해낸 이로 포장되었다. 전후 일본의 전쟁책임 회피와, 우익들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버린 셈이다.
8월 14일 오후 9시 뉴스, 그리고 15일 7시 21분 뉴스로 2번에 걸쳐 방송을 예고하였다. “15일 오전 중 천황이 직접 조서를 발하여 발표가 있을 예정이니, 모두 빠짐없이 잘 들으라.”는 안내가 그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평소에 전력부족으로 인하여 주간 송전을 중단하던 지방의 임시방송소 14곳 모두에도 15일 오전에는 특별송전이 실시될 예정이었다.
와다 노부카타 아나운서의 멘트. - 이 사람은 1912년 도쿄 출생. 와세다대학 중퇴 후 22세의 나이로 NHK 아나운서 입사. 1952 헬싱키 올림픽 중계방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평소 폭음으로 인한 건강 악화가 원인이 된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부터 중대한 발표가 있겠습니다.”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3. 정보국(내각정보국이라고도 하나 정보국이 공식 명칭) 총재 시모무라 히로시의 멘트.
“천황 폐하께서 황공하옵게도 친히 전 국민에 대하여 조서를 발표하시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삼가 옥음(玉音)을 방송해 드리겠습니다.”
4. 국가 기미가요 반주 연주. - 국가적 차원의 방송이라서 기미가요를 조서 낭독 전후(前後)에 틀어준다. 보통의 라디오 방송을 들을 때는 딴 짓을 하며 듣거나 누워서 듣는 경우가 많은데, 군국주의로 미쳐 돌아가던 당시의 일본에서는 덴노의 옥음방송을 이와 같은 자세로 듣는 것은 심히 불경하다고 생각하였기에 기미가요 연주를 방송하여 전원 기립시키기 위함이었다.
7. 정보국 총재 시모무라 히로시의 멘트.
“삼가 천황 폐하의 옥음방송을 마칩니다.”
8. 와다 노부카타 아나운서의 멘트.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서는 만대를 위하여 태평시대를 열고자 하시어, 어제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네 국가에 대하여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하시었습니다.”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서는 동시에 조서를 발포하시어, 제국이 네 국가의 공동선언을 부득이 수락하게 된 경위를 교시하시어, 금일 정오 어진 마음으로 조서를 방송하시었습니다.”
“이 미증유의 일은 삼가 살피건대 지극히 어진 결정이시오며, 일억 국민이 모두 감읍(感泣)하였습니다.”
“우리 신민은 다만 조서의 뜻을 반드시 삼가 받들어 국체의 유지와 민족의 명예 보전을 위하여, 멸사봉공을 맹세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삼가 조서를 봉독하겠습니다.”
10. 와다 노부카타 아나운서의 멘트.
“삼가 조서의 봉독을 마치겠습니다.”
정식 명칭은 ‘대동아전쟁 종결의 조서(大東亞戰爭終結ノ詔書)’이다. 줄여서 종전조서(終戰詔書)라고도 부른다.
이하의 원문은 일본어를 아는 사람도 읽기가 쉽지 않은데, 이는 이 글이 일본어 문어체로 쓰여 있는데다가, 히라가나 대신 가타카나가 사용되고 한자도 현대의 신자체가 아닌 구자체로 되어 있는 등 역사적 가나 표기법의 영향 하에 작성되었다. 현대 가나 표기법은 패전 이후인 1946년에 제정. 또 탁음을 표현할 때 쓰이는 탁점(゛)도 사용되지 않는 등 표기법이 현대 일본어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상술했듯이 문장 자체가 논점을 돌려 말하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어 문어체를 알아도 곧바로 해석하기 어려운 건 덤이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그대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지·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대저,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皇祖皇宗)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은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함과 같음은 본디 짐의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戰),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의 여정(勵精), 짐의 일억 중서(衆庶)의 봉공(奉公)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戰局) 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거듭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慘害)가 미치는 바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破却)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億兆)의 어린 백성을 보전하고 황조황종(皇祖皇宗)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이런 이유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제맹방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죽고 직역(職域)에 순직했으며 비명(非命)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戰傷)을 입고 재화(災禍)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에 이르러서는 짐이 깊이 진념하는 바이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무론 심상치 않고, 그대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 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國體)를 호지(護持)하고, 그대 신민의 적성(赤誠)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그대 신민과 함께할 것이다. 만일 감정이 격해지는 바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동포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다면 이는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擧國一家)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神州)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義)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華)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進運)에 뒤쳐지지 않도록 하라.
그대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쇼와 20년(1945) 8월 14일
조서의 내용이 표현이 어렵고 우회적이어서 일본인들이 당시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많으나, 이는 확실치 않은 사항이다. 당장, NHK 와다 노부카타 아나운서나 종전조서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 이후, 일본 정부는 다음날인 7월 27일 프로파간다용으로 써먹기 위해 이 내용을 일본 국민들에게 공표했기 때문에 선언 자체의 내용은 상당수 일본인들이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수락한다는 것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임을 의미하는 것임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조서를 봉독한 와다 아나운서는 당시를 회고하며 “조서 녹음본이 방송되는 중에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많았다.”고 증언하는가 하면, “당시 방송을 들으며 우는 이들의 모습은 짜여진 각본이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는 증언도 있다. 혹자는 “알아 들었어도 울기는커녕 웃을 일이었다.”며 전쟁 말 일본의 상황을 증언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우는 이들의 연출은 실제 당시에 대동되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도 증명되었다.
애당초 직접 천황이 방송을 한다는,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 벌어진다고 했을 때에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을 것이고, 더욱이 정보국 시모무라 총재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이라는 것을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알아챘을 것이다.
근래에도, 2011년 12월 한동안 보이지 않던 리춘히가 갑자기 북한 방송에 나왔을 때에, 김정일이 사망했다는 뭔가 큰 일이 났음을 눈치 빠른 사람들은 짐작했을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심지어 리춘히의 성명 발표에 앞서 프로그램 편성을 안내하던 보도원 역시 검은색 옷을 입고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이를 보고 눈치 챈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옥음방송과 관련하여 NG가 나서는 안 되었기에, 미리 방송국에는 언질을 주었고 신문사에서도 관련 보도를 이미 인쇄 완료하였다는 증언들도 있다. 가령 조서 본문이 어렵고, 음질마저 안 좋아 못 알아 들었어도 뒤이은 뉴스의 내용 때문에 뭘 의미하는지는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덴노가 친히 발표한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고 하나, 2차례에 걸쳐 옥음이 방송될 예정이니 임시로라도 장비를 마련하여 방송 취약지대도 모두 잘 들을 수 있도록 대비하라는 말이 내려왔다고 한다.
한편, 이게 무슨 소리냐는 고민하는 일반인들과 달리 일본 육군은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이미 내각에서 수락 반대의 의견을 밀고가지 못한 채 종전조서에 서명한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는 육군 내 강경파들의 지탄 속에 할복자살하였고, 이에도 분이 풀리지 않은 강경파는 이 음반을 방송 전에 탈취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예기치 못한 사태가 일어날 것을 대비해 미리 백업판을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도 당연히 일본 땅이었고 조선인들도 차별이 있었다. 잘 알려져 있지만 조선인들은 광복 때까지 2등, 열등국민 취급당했으며 전쟁 기간 동안 온갖 수탈의 대상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만행이나 군함도 사례를 비롯한 강제 징용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형식상으로는 조선 사람도 일본 국민이었기 때문에 NHK 월드 라디오의 전신인 동아방송에서 단파방송으로 그대로 전달되었다. 한반도 외에도 당시 일본령이었던 대만과 만주국, 중국 점령지 등에도 방송은 진행되었다.
그러나 단파방송의 특성상 수신이 잘 안 되는 지역에서는 음질이 너무 구렸고, 거기에 녹음본 자체의 음질도 문제가 있는데다가, 잘 들렸어도 일본어를 아는 이들도 많지 않았다. 1943년을 기준으로 일본어를 아는 식민지 조선인의 비율은 22.1%에 불과했다는 자료가 있다. 게다가 문장이 일본인도 알아듣기 힘든 만큼 난해했던 탓에 조선에서는 일본어를 아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하였다.
이후 다음날 대대적으로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 사실이 보도되자, 한반도에서는 사실상 조국이 해방된 것이나 다름없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광복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 때문에 보통 매체에서 나오는 것처럼 항복방송이 나오는 와중에 사람들이 뛰쳐나와 환호를 지르며 기뻐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당시 사람들이 증언했다. 실제로는 그 다음날(16일)에 가서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실이 신문을 통해 보도되자 사람들이 뛰어나와 기뻐했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1945년 8월 15일 자료라고 나오는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기뻐하던 사진은 대부분 16일에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 특히 당시에 이미 민족말살정책으로 황국신민화 교육을 받았던 어린이들은 자신이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국이 항복하는데 왜 즐거워하냐고 어리둥절하거나 슬퍼한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역사학자 앤드루 고든은 『현대일본의 역사』에서 당시 히로히토가 국민뿐 아니라 일본 국가를 전쟁의 희생자로 묘사하며 막 끝난 전쟁을 해방전쟁으로 정당화하며 천황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려 했다는 사실을 설명하며 비판했다.
이 발표는 막 끝난 전쟁을 해방을 위한 전쟁으로 정당화하고, 곧 뒤바뀔 세상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계속 지키려는 천황과 측근들에 의한 최초의 주목할 만한 노력이었다. 그것은 일본국민을, 나아가 일본국가조차도 전쟁과 잔학한 무기의 희생자로 묘사했다. 라디오 방송을 마무리 지으면서 히로히토는 서구세계의 진보를 보고 배우려 했던 메이지 시대의 레토릭(Rhetoric)을 끄집어낸 사용했지만, 방송 전체를 통해 국민에게 변혁이 아니라 인내를 호소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쇼와 덴노는 이 방송을 3번에 걸쳐 녹음하였다. NHK의 엔지니어는 처음에 OK를 냈으나 히로히토 본인이 ‘너무 톤이 낮은 것 같다.’며 다시 녹음하고자 했고, 2번째는 발음이 씹혀서 NG를 냈다. 3번째 녹음이 방송에 사용되었다. 총 6분 남짓한 분량을 녹음기 2대로 녹음했다. 1면당 3분에서 4분 반 정도밖에 녹음할 수 없었던 당시 SP 음반의 기술적 한계 때문에 6분 남짓한 분량을 2장에 걸쳐 녹음했다.
다만 당시 NHK 엔지니어들은 처음 고쿄에 들어갈 때 1대의 녹음기만을 소지했다. 나머지 1대는 추후 예비용으로 보관중이던 녹음기를 1대 더 급히 들고 온 것이다. 당시 사용된 녹음기는 일본 전기 음향의 DP-17-K가 사용되었고, 일본 NHK 방송국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이 녹음 본은 SP 녹음임을 감안해도 음질이 좋지 않다. 우선 당시 일본의 방송 기술이 딸려서 노이즈가 심한 것도 있다. 1930년∼1940년대에 일본과 방송 교류를 했던 독일 측 기술진들은 “일본 방송의 음질이 너무 나빠서 중계하기 민망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반대로 일본 측 기술진들은 독일 방송의 음질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또 오픈릴 테이프가 없었기 때문에 잡음이 심한 아세테이트 디스크에 녹음해야 했던 상황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천황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게 하려고 임의로 출력을 증폭시킨 것이 되레 심한 잡음을 유발했다는 설도 있다. JOAK의 경우 평시 10kW 내외이던 출력을 60kW까지 증강시켰다. 근거 중 하나로 당시 입궐했던 NHK의 음향기술자들은 DP-17-K를 갖고 간 이유를 일본에서 가장 최신식 기계라서라고 증언했다.
녹음된 SP반은 궁성사건에 휘말려 제작 당시부터 2개 세트로 제작되었다. 군 수뇌부와 정부 각료들은 쿠데타의 정확한 정보는 몰랐지만, ‘저 또라이 청년장교단이 분명히 2.26 사건 때처럼 일을 낼 것’이란 소문은 이미 파다하게 퍼진 뒤였다.
이에 처음 녹음한 것을 부(副), 나중에 녹음한 것을 정(正)으로 정하고 각자 따로 보관하였다. 이때 부본은 화려한 오동나무 상자에 일본 황실 문장이 자수 놓인 보랏빛 천에 감싸는 등 아주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정본은 네모진 가방(생긴 것이 딱 방독면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어 궁내청 시종 숙소에 처박아 놓았다. 중간에 쿠데타군에게 탈취당할 것을 우려한 도쿠가와 시종의 아이디어가 그대로 들어맞은 셈이다.
15일 새벽, 마침내 다나카 동부군 사령관에 의해 쿠데타가 제압된 후에야 정본과 부본 모두 NHK로 이송되었으며, 정오가 막 지난 후 NHK 제8스튜디오에서 정본이 송출되어 일본 전국과 점령지에 방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