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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26
효궁 뒤편, 인적 드문 우물에 오늘도 은과 언주, 그리고 흰 고양이가 있다. 언주는 반응 없는 은에게 열심히 몸을 부벼대는 흰 고양이를 보며, 제가 알아본 이러저러한 정황들을 은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것 같아. 그래서-”
첨벙. 우물 안으로 바가지를 놓쳐버린 은이 멍하니 행동을 멈추고 우물 속만 바라보고 있다. 그 소리와 함께 은을 쳐다보는 언주의 말도 멎어 버렸다. 굳어버린 양, 은은 움직이지 않는다. 의지를 놓아버린 사람처럼, 마음속에 큰 탈이라도 난 사람처럼. 마지못한 언주가 조금 목소리를 높인다.
“은아, 듣고 있니?”
“아, 미안해요..”
은은 줄을 끌어당겨 바가지로 퍼 올린 물을 부어 먼지 묻은 다기들을 닦았다. 무성의하기 그지없어 헛손질뿐인데도 은은 그나마의 일을 하려 노력했다. 머릿속은 온통 우겸으로 인해 전쟁터 같은 혼란뿐인데도.
“소용마마의 세답(洗踏) 궁인을 은근슬쩍 떠봤어. 아무래도 수상해, 저번 달부터 달거리를 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는 거야.”
언주의 손에서 미끄러진 향유가 데굴데굴 굴러 은의 발치를 툭, 건드렸다.
“..네?”
“제대로 들어..! 소용마마께서 달거리를 하지 않으신다는 게 무슨 뜻이겠어, 게다가 폐하께선 요 근래 후궁 근처에 가신 일도 없는데..!”
“소용마마가-”
언주의 손이 흠칫하며 잠시 멈춘다. 은이 초점 없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임이라도 하신 모양이죠.”
“너-”
은의 어깨가 거칠게 돌려세워진 것은 언주의 손 때문이었다. 언주가 무섭게 은을 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무슨 일 인진 모르겠지만 정신 똑바로 차려.”
“........”
“이제 다 놔버리고 될 대로 되라는 거야?”
“........”
“얼마나 많은 공녀들이 너만 바라고 있는지 알아? 말은 안 해도, 겉으로 티는 안 내도 다들 너한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데. 하다못해 니가 후궁이라도 된다면, 일벌레 취급당하며 사는 처우만큼은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다들 기대해. 내가 널 돕기로 결정한 것도 그 때문이고. 너도 알잖아, 공녀들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대우를 받고 사는지.”
“내가 그렇게 해 줄 거라고 누가 말했는데요.”
“뭐..?”
“그렇게 되길 바라면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들 해요..! 나 하나 가진 문제만으로도 벅차니까...!!”
당장에 은의 뺨이라도 올려붙이고 싶었던 언주는 화를 억누르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우는 사람을 내리칠 정도로 냉정한 마음은 갖고 있지 않아서였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주는 것이 먼저였을까. 언주는 억지로 울음을 참으려 새빨갛게 충혈 되어가는 은의 눈을 본다.
은의 먹먹한 가슴은 이렇게 소리를 쳐도 도저히 풀리지 않았다. 환했던 길이 깜깜하게 막혀버린 것 같은 절망이었다. 이제 정말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는 곳에 버려진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 고집스런 늙은이의 말 따위 믿지 않으려고 노력 해봐도, 우겸의 얼굴조차 잘 떠오르지 않았다. 금방 돌아오겠다는 약속에도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던 이유가 이것이었을까. 이제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고, 그 어떤 것도 해낼 수 없을 것만 같다. 시끄러운 저자 한복판에서 어머니의 손을 놓쳐버린 작은 꼬마가 된 기분이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구요..”
언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살갑지 못하게 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단정히 묶여있던 은의 머리칼이 풀려 흩어져 내리고, 붉은 매화 장식은 언주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야오옹- 흰 고양이가 언주를 본다.
“그럼 더 이상 이런 걸로 뻔뻔하게 다른 사람 기대하게 만들지 마. 차라리 고려로 돌아가 버려.”
“...놔요.”
은이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빨갛게 젖어버린 눈에 아직도 눈물이 맺힌 채로 무섭게 고한다.
“내놓으라구요.”
//貢女 奇皇后//
평소에 비해 조금 늦잠을 잔다 싶었다. 그래봤자 반 식경 남짓인데, 싶어 황후의 방 앞을 지키는 궁인은 사위를 물려 철저히 고요를 지켰다. 누군가 찾아온다는 약속도 없었고, 특별히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씀도 없었기에. 해가 점점 오르는 것을 지켜보다가 방 안에서 이내 흠흠, 하고 낮은 헛기침소리가 나는 것을 듣는다. 이제 기침하셨나보다, 궁인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다 말았다.
“황후마마, 간밤 편히 침수-”
황후는 자다 일어난 모습이 아니었다. 말끔한 얼굴로 이미 화장까지 하고는 어제와 다름없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침상이 아니라 탁상 앞 의자에 앉아 뭔가를 생각하던 모습이었다.
“마마, 침수들지.. 않으셨사옵니까?”
“새벽에 깨었을 뿐이다. 소란 떨 것 없으니 어서가 차를 들이라 하거라. 아침을 먹을 생각은 없구나.”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궁인은 서두르게 문 밖으로 사라지고, 주 황후는 다시금 탁상에 팔을 올려 이마를 괸다. 하- 하고 낮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깊은 새벽녘, 홀로 깨어 앉았던 것은 꿈 때문이었다. 누군가에 목이 졸려 각혈을 하며 죽어가던 지아비의 모습. 그리고 그 목을 누르던 손은 바로 제 것이었다. 비명도 없이 식은땀으로 깨어난 황후는 누구를 부르지도, 기척을 내지도 않은 채 그렇게 밝아오는 아침을 맞았다.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곧 그것이 현실임을 깨닫자 잠이 오지도 않았다. 천연덕스레 양처(良妻)임을 자처하며 독초가 진득하게 우러난 차를 매일 같은 시간에 찾아가 권하고, 그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연기를 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웃어주고. 그런 일들이 반복될수록 마음속엔 짐이 쌓였던가. 차를 들이키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속이 다 시원하다고, 아버님께 그리 말씀드리기까지 하였는데.
“마마-”
“왔거든 어서 들이거라.”
“그것이 아니라, 연 대인께서 듭셔 계시옵니다.”
이제 아버지가 아무 때나 드나드는 것은 예삿일이 되어버렸다. 밤을 새워 시간관념이 흐릿해진 지금이라면 그리 이른 시간 같지도 않다. 연제는 제 여식을 황실로 시집보내던 날 처럼 함박웃음을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셨나봅니다.”
“있지요. 있구말구요. 헌데 마마의 옥안이 어리 그리 상하셨습니까.”
“잘못 보신게지요. 자, 이리 앉으세요.”
연제가 맞은편으로 앉자, 가까이서 보는 얼굴은 더욱 밝다. 그는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그러나 감추려 애쓰는 모습으로 입을 연다.
“태의원이 밤새 술렁술렁 했다지요.”
“그것 때문에 그리 기분이 좋으셨습니까.”
“이것보다 두근거리는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간밤에는 범상찮은 꿈도 꾸었습니다.”
“꿈..이라니요.”
“선황제가 나타나 무어라 고함을 치더니 제 아들을 데려가더이다.”
“...폐하를 말입니까!!”
저도 모르게 지나치게 큰 소리를 내고 만다. 황후는 스스로도 놀라 손등으로 입을 가린 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연제는 흐뭇한 미소까지 지으며 여러번 고개를 끄덕인다. 일의 종착이 눈앞에 있기라도 한 양, 아니 벌써 이뤄지기라도 한 양 만족스런 표정이다.
“머지않았음을 암시하고 있사옵니다. 경하 드리옵니다, ‘폐하’”
눈을 빛내며 제게 ‘폐하’라는 호칭을 건네는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였다. 그에 대한 분노는, 울분은 여전히 가슴에 남아있는데 그 한켠에 미적지근하게 자리 잡고 가시지 않은 이것은 무엇일까. 주 황후는 형식적인 웃음만으로 연제에게 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가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듣는다. 멀리부터 저를 부르며 달려온 궁인이 문 앞에서 멈춰 헉헉거린다.
“마마, 황후마마-!!!”
“웬 소란인게야.”
“폐하께서, 폐하께서 간밤 혼절하시어 지금 태의들이 모두 황제궁으로..!!”
//貢女 奇皇后//
은은 태연한 모습으로 후궁의 소란에게로 찾아갔다. 우겸의 일로 좌절한 마음과 복잡한 머릿속이야 여전했지만, 언주가 말해준 소란에 관한 일은 꼭 짚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런 방문이었지만, 소란은 동요하지 않았고 여유를 부리며 은에게 차를 대접하기까지 했다. 물론 은은 차는커녕 찻잔에조차 손도 대지 않았다.
“마마에 대한 수상한 소문이 있어 직접 여쭙고자 찾아왔습니다.”
“수상한 소문이라니, 들어나보자꾸나.”
“참으로 괴이하지요. 회임도 하지 않으신 마마께서 달거리를 하지 않으신다니, 어디 말이나 될법한 이야기겠습니까.”
“호호, 그런 소문이 돌았단 말이더냐.”
“그러합니다. 어찌된 영문인지요.”
“폐하가 오시기를 기다려 태의들에게 일러 달거리를 늦추는 탕약을 지으라 명했다. 그 때문이다. 되었느냐.”
“...탕약이요?”
“그렇다. 이 후궁 안에서야 다반사인 일을 궁인인 너 따위가 어찌 알겠느냐. 무지함을 탓하진 않을 터이니 조용히 물러가거라.”
이런 순간이야말로 완벽한 패배였다. 은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무릎 위로 올려놓은 제 손만 바들바들 떨며, 그럼 몸조심하시라는 입에 발린 말로 일어서려는 순간,
“몸조심은 네가 해야지.”
...
“죄인 ‘은’은 어서 나와 오라를 받으라!!!”
첫댓글 어머. 은 어떡해요; 결국 덫에 빠지고야 만 것인가요.. ㄷㄷ 은이 잘 빠져나올 수 있길 바래요 ㅠ_ㅠ
이제 어찌되는 건가요?/ 은이는?? 글구 우겸이는 살아있는건가요??? 담편이 빨리 나왔으면...... 모두 무사길......
왜, 어찌하여 은이 죄인이 되는 것일까요... 어서 연 가문과 소란이 벌인 일이 발각되었으면 좋겠군요. 다음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흔들리는 황후마마 지독한 연대인과 소란 과연 그들의 끝은 어딜지 궁금하네요~^^ 혼절한 황제를 살리는건 그 자신일까요 황후일까요 은일까요 아님 제 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