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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랑하는 님들 안녕하세요
*서희장군*
서희장군은 고려의 명장입니다.
본관은 이천. 자는 廉允(염윤).
아버지는 내의령을 지낸 필(弼)입니다.
960년(광종11)과거에 갑과로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을 거쳐
내의시랑이 되었습니다.
972년에는 10여 년 동안 외교적으로 단절되어 있던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검교 병부상서의 벼슬을 받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좌승을 거쳐 983년(성종2)에는 병관어사가 되었고,
얼마 뒤 내사시랑이 되었습니다.
993년 고려의 북진정책과 친 송 외교에 불안을 느낀 거란은
동경유수 소손녕이 이끄는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조정은 이미 여진을 통해 거란의 침공계획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가 10월이 되자 전국에
영을 내려 병사를 동원 했는데, 이때 내사시랑 서희는
중군사가 되어 상군사인 시중 박양유 및 하군사인 문하시랑 최량과
함께 북계(지금의 평북 지방)에서 적을 방어하게 되었습니다.
80만 대군으로 봉산군을 빼았은 거란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항복하라는 위협을 되풀이했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지금의 평양)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이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서희는 거란의 출병 목적이 영토 확장에 있지 않음을 간파하고
거란과 담판 지을 것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의 의견을 민관어사 이지백이 지지하자 성종도 이를 찬성했습니다.
이때 소손녕이 청천강 남쪽의 안융진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에게
패하게 되자 고려와의 담판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거란 진영에 도착한 서희는 소손녕이 신하의 예로 뜰에서
절할 것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여 서로 대등한 예를 행하고
대좌하도록 했습니다.
소손녕은 침입의 이유를 첫째,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는데도
거란이 소유하고 있는 고구려 땅을 침식하고 있으며,
둘째, 거란과 땅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을 하면
무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서희는
“우리 나라는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일 지계로 논한다면 요나라의 동경도 모두 우리 경내에 있는 셈이니
어찌 침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또 압록강 안팎도 우리 경내였는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에 도거하여 완악 하고 간사한 짓을 하므로
도로의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을 통하지 못한 것은 여진 때문이니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아 성보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라고 대답 했습니다.
이는 고려의 북진정책이 역사적으로 타당함을 밝히고, 고려와 거란의
교빙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그 중간에 위치한 여진족의 평정이라는
선결조건을 공동으로 해결하자고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거란은 이러한 서희의 대답을 인정하고 군사를 돌이켰으며,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의땅을 개척하는 데도 동의하는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이처럼 서희 장군은 고려의 위대한 장군입니다.
특히 거란과의 외교적 담판에 성공한 이후 세력이 신장되어
현종대의 지배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사랑하는 님들 위대한 고려의 서희장군의 업적을
보면서 오늘도 행복 하시고
복 많이 받는 하루 되십시요.
꽃을 든 남자 / 김동아
외로운 가슴에 꽃씨를 뿌려요
사랑이 싹틀수있게
새벽에 맺힌 이슬이 꽃잎에 내릴때 부터
온통 나를 사로 잡네요
나는야 꽃잎되어 그대 가슴에
영원이 날고 싶어라
사랑에 취해 향기에 취해 그대에게 빠져버린
나는 나는 꽃을든 남자
메마른 가슴에 꽃씨를 뿌려요
사랑이 싹틀수있게
하얗게 두손 흔들며 내곁에 내릴때 부터
온통 나를 사로 잡네요
나는야 꽃잎되어 그대 가슴에
영원히 날고 싶어라
사랑에 취해 향기에 취해 그대에게 빠져버린
나는 나는 꽃을든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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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사시랑이 무엇인지요?
고려시대 벼슬로 병관어사 바로위 벼슬을 내사시경 이라고 하였단니다.저도 검색 창에서 검색하였서 정확한지 모려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