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는 9세기 성왕 때의 발해를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해동성국
해동성국이란 말은 바다 동쪽에 번성하는 나라라는 의미로, 당나라에서 발해를 부른 호칭이다. 당나라에서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부른 까닭은 당나라의 제도를 발해가 받아들여 발해의 문화가 당나라와 엇비슷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해동성국으로 불린 것은 발해의 국력이 전체적으로 크게 향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발해의 전성기
818년 왕위에 오른 선왕은 흑수말갈을 포함한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켰고, 요하 이동, 대동강 이북의 사방 5천리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확보했다. 발해의 영토는 남으로는 신라, 북으로는 흑룡강, 동으로는 동해, 서로는 거란과 맞닿는 큰 나라가 되었다. 발해인 셋이면 호랑이를 당해낸다고 외국에 알려질 정도로 발해는 강하고 굳센 나라로 알려지기도 했다. 선왕(818∼830) 시기를 거치면서 전성기를 맞이한 발해는 경왕 대현석(870∼893) 시기에 와서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발해는 단지 영토만이 커진 것이 아니고, 문화와 경제가 함께 발전했다. 발해는 지역이 넓은 만큼, 각 지역별로 생산되는 특산물로 달랐다. 미타호의 붕어와 게, 솔빈부의 말, 막힐부의 돼지, 부여부의 사슴, 태백산의 토끼, 남해부의 다시마, 낙유의 배, 환도의 오얏, 노성의 쌀, 책성의 된장 등과 같이 자연물이 특산물인 경우도 있었지만, 용주의 비단, 현주의 삼베와 같이 발해의 뛰어난 옷감 생산 기술이 특산물인 경우도 있다. 또 위성의 철은 발해의 강성함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물건이었다. 발해 사람들은 철을 다루는 기술이 매우 뛰어나서, 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요나라에서 철을 생산하는 일에 종사하기도 했다.
[수레굴통쇠 나온 곳- 상경용천부 터]
[세발솥 나온 곳- 청해도 성터]
[부엌말과 송곳칼 나온 곳- 청해도 성터]
대외무역
발해는 무역이 활발한 나라였다. 일본, 당나라, 돌궐, 거란, 신라 등이 주된 교역 상대국이었다. 발해의 담비 가죽과 인삼 등은 중요 수출품으로 당과 일본 등에서 인기 있는 상품이었다. 또한 발해에는 멀리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소그드 상인들도 왕래했다.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발해의 수도 상경성은 크게 번창했다.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버금갈 만큼, 큰 규모를 자랑했다. 상경성 주변의 목단강에는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음을 보여주는 상설 다리인 칠공교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발해에는 외국으로 향하는 주요 도로가 있었다. 신라와 통하는 신라로, 거란과 통하는 거란로, 당나라와 통하는 영주로, 등주로, 일본으로 통하는 일본로가 있었고, 그 밖에도 담비길로 불리는 북쪽의 여러 부족과 연결하는 길들이 있어 중앙과 지방을 연결해주고 있었다. 발해는 농업과 목축, 수렵을 통해 얻은 생산물과 철제품을 비롯한 각종 수공업 제품들을 이러한 교통 체계를 통해 상인들이 원활히 국내외의 시장에 유통시켜가며 경제적 번영을 누려갔다.
발해의 정치제도
발해는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전국을 5경과 15부 62주 100현의 3단계의 조직으로 구분했다. 15부에는 도독을, 주에는 자사, 현에는 현승이란 관리를 파견했으나, 현 아래의 촌락은 촌락의 지배자인 수령을 통해 지배를 했다. 또한 중앙군으로 좌맹분위, 우맹분위 등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 경비를 맡겼고, 각 지방에는 지방군은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했으며, 부여부와 장령부와 같은 군사 요충지에는 별도의 독립 부대를 두어 지켰다.
중앙 정치 조직은 3성 6부를 줄기로 편성했다. 3성은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이다. 정책을 집행하는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고, 좌사정은 인사를 맡은 충부, 재정을 담당하는 인부, 외교와 예의를 담당한 인부를, 우사정은 군대를 관장한 지부, 형벌을 맡은 예부, 공업을 관장한 신부를 각각 관할했다. 정책 자문의 역할과 비판을 맡은 선조성은 좌상이 관할했고, 정책의 기초와 심의를 맡은 중대성은 우상이 관할했다. 그밖에 감찰기구인 중정대, 비서실인 전중시, 서적관리와 문서를 담당한 문적원, 교육기관인 주자감 등의 행정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발해의 문화
주자감이 설치된 것은 발해에 유학이 널리 퍼졌음을 뜻한다. 유학 뿐 아니라 불교도 번영하였는데, 발해 문화를 대표하는 큰 석등, 이불병좌상 등의 유물이 발해 불교의 융성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장생불사를 위해 불로초와 금단을 제조하거나 찾는 도교가 아닌, 인간의 수양을 통해 원기를 모아 장생을 추구하는 수련도교가 발달하고 있었다. 소그드 상인 등과 함께 동쪽으로 전파된 크리스트교의 한 갈래인 경교도 발해와 신라에 전해졌다. 십자가와 성모상 등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처럼 발해는 다양한 종교가 골고루 발전했다.
고구려의 문화적 기반과 말갈족의 문화, 새롭게 받아들인 당나라의 문화와 초원길을 통해 들어온 서역의 문화까지 어우러져 발해 문화는 크게 꽃피워졌다. 말을 타고 막대기로 공을 쳐 넣은 격구라는 새로운 놀이도 발해에 전파되어 크게 유행했다. 이 놀이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래되어 당나라를 거치거나 또는 직접 전래된 것이다.
국제적인 문화를 발전시키고, 경제적 번영과 정치 군사적 안정을 이룬 나라였기에, 발해는 해동성국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tip 발해는 황제국가였다.
과거 동아시아에는 각국 사이에 국력의 우열에 따라 황제국과, 임금이 다스리는 왕국 등으로 나누는 질서가 있었다. 당나라는 우월한 국력과 인구를 바탕으로 황제국으로 군림했었다. 발해 역시 당과 마찬가지로 황제국의 위상을 과시했다. 3대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 무덤에서 발견된 묘지석에는 문왕을 일컬어 황상, 성법대왕 칭호를 사용했다. 또한 허왕 등의 제후왕을 거느리고 있었고, 세계의 지배자로 불릴만한 힘이 있는 임금 즉 황제만이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연호 또한 발해에서 만들어 사용했다. 현재 전하는 발해의 연호로는 인안, 대흥, 주작, 태시, 건흥, 함화 등이 있다. 발해는 하늘 자손의 나라인 천손의 나라임을 자랑하였고, 당시 최대 강국인 당나라와 버금가는 나라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정효공주 묘비석]
* 지도 : 발해의 지역별 특산물과 발해의 주요 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