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
아득히 저 멀리서 들려오는 한 밤중의 소쩍새 울음소리, 새벽이면 새들의 지저귐, 건너 산에서 곰들이 다투는 소리, 계곡물 흘러가는 소리가 그윽한 산중... 초록 산색에 밤나무 꽃꿀 향기 달콤하다. 대나무 죽순은 쑥쑥 자라 낚싯대 보다 긴 장대가 되었다. 마당에 비질을 하면서 들여 쉬는 산소와 피부에 스치는 산뜻한 감촉, 누구와 나눌까 돌아보아도 더불어 나눌 이 없어 아쉬운 날들이다.
이 쪽 마당 끝과 저 쪽 마당 끝에 반환점을 두고 뒷짐을 지고 왔다 갔다 일 없이 소요하니, 사노라 분주한 이들에겐 미안하기도 하지마는, 누가 한가하게 못 살도록 훼방하는 이도 없건마는 세상사 번다하다 못해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쁜 이는, 언제 해가 뜨고, 달이 지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다 자기의 세계가 있고 인생이 있어서 꼭 이렇게만 살아야 한다고 고집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떠한 믿음 속에 적을 두고 사는 사이라면 서로가 멋있게 잘 사는 일들을 공유하고, 이러 이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의논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믿음의 영역 안에서 믿음과 전혀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우리가 최소한 불자라면 불교도라는 테두리 안에서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서로의 역할을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이 첫째다. 그 다음에 수행해야 하고 그 다음엔 행복해야 한다. 오늘은 역할 수행 행복에 관해서 이야기를 좀하고 한적을 말해야겠다.
평신도들의 역할은 첫째가 보시다. 수행자들과 물질적으로 나누는 것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재가신도가 출가승을 가장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보시다. 어려울 때 보시한 신도들은 평생 은혜롭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 스님들이다. 때론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으나 늘 마음에 고마움을 지니고 있다.
그 다음은 수행이다. 나중에 가서는 수행이란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수행이다 라는 곳까지 가지만, 그럴수록 처음 초심자처럼 저마다 하고 있는 염불, 간경, 참선, 다라니 중에 선택한 자기방법을 곧이곧대로 잘 챙겨야 한다. 살, 도, 음, 망, 주, 라는 오계를 잘 지켜야 하는 것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행복이란 보시 잘 하고, 계 잘 지키고, 수행 잘 하는 그 자체를 즐기는 삶이다. 나중에 행복해지기 위해서 보시하고 계 잘 지키고 수행한다면 그 일은 한 템포 늦은 행복 찾기이다. 붓다의 마지막 유훈이 “수행 잘해라. 게으르지 말고” 아니었던가? 바로 이 시간과 공간에서 행복하는 일이 불교의 핵심인 현법낙주다. 최소한 내가 아는 불자들은 이점을 명심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못하는 것은, 한평생 익힌 나름대로 즐기는 방법에 중독이 되어서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리저리로 재미있는 일을 찾아 동분서주하기 때문에 참 즐거움은 늘 뒤로 쳐진다. 참 즐거움이란 수행을 통한 선열, 진리를 이해하는 법열의 즐거움이지만 중생의 업은 참으로 무섭다. 좋은 길로 가지 않고 마음을 유혹하는 쪽으로 시종일관하려고 하니 문제인 것이다.
도현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