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산령 영아자
작년까지는 주말이나 방학이 되어야 산행이나 강둑으로 트레킹을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올봄부터는 퇴직 이후 얽매임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라 평일에도 길을 나서 뚜벅뚜벅 걷는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가운데 어느 계절이라고 여유로움이 더 하고 덜 하는 구분이 있겠느냐마는 봄이면 더 분주하다. 한 뼘 땅을 소유하지 않아도 길을 나서면 온 산야가 내 텃밭이나 마찬가지다.
사월 셋째 화요일 이른 아침 마산역 광장으로 나갔다. 번개시장 들머리에서 김밥을 두 줄 마련해 진전 둔덕으로 가는 76번 농어촌버스를 탔다. 버스는 어시장을 둘러 댓거리를 지나 밤밭고개를 넘었다. 동전터널을 빠져나와 진동 환승장에 들렸다가 진북을 거쳐 진전 면소지에서 진전천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갔다. 차창 밖 이모작 경작지는 가뭄에도 보리와 양파가 싱그럽게 자랐다.
양촌과 대정을 거쳐 더 깊숙한 골짜기로 들어가니 승객은 점차 줄어 골옥방에 이르니 나 혼자였다. 버스 기사는 종점에서 시동을 끄고 십여 분을 대기했다가 다시 출발해 둔덕에 이르렀을 때 나를 내려주고 되돌아갔다. 군북으로 가는 오곡재를 향해 걸으니 주변에 에워싼 산들은 신록으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오실골 입구 당산나무에 해당하는 높이 자란 굴참나무도 잎이 돋아났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지만 자동차는 한 대도 다니질 않아 매연이나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산행객이라고는 한 명 볼 수 있는 호젓한 길이었다. 자동찻길에서 미산령으로 오르는 임도들 따라 걸으니 길섶에는 왕제비꽃과 구술붕이꽃이 피어 나를 반겨주었다. 참나물이 보여 한 가닥 끊어 입안에 넣었더니 즙이 나와 향긋했다. 건너편은 여항산 험준한 산세가 서북산으로 뻗어갔다.
미산령 못 미친 산모롱이를 돌아가다 숲으로 들어 너럭바위에 앉아 배낭의 김밥을 먹었다. 배낭의 부피를 줄여야 산나물을 뜯으면 채울 수 있었다. 쉬었던 자리에서 일어나 가랑잎을 밟으면서 개척 산행을 하니 고라리 한 마리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숲속의 주인은 고라니고 나는 나그네인데 녀석이 착각했던 모양이다. 내가 주인의 편안한 휴식의 방해를 놓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숲 바닥에는 참취가 싹이 트긴 했으나 가뭄으로 생육이 부진해 뜯을 정도가 못 되었다. 바디나물은 아까 사리진 고라니가 시식한 흔적이 보였다. 두릅은 순이 진작 돋아 쇠어서 나물로써 가치를 잃어 그냥 스쳐 지났다. 산마루에 오르니 오곡재에서 미산봉으로 가는 등산로였다. 등산로 주변의 두릅나무는 누군가 순을 따서 말끔했다. 고지대라 각시붓꽃과 금붓꽃이 이제 한창이었다.
미산봉에서 미산령으로 내려가니 두런거리는 사내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제복을 입은 군인들로 상데미봉에서 한국전쟁 때 산화한 유해를 발굴하는 지원 병력이었다. 그들과 잠시 얘기를 나눴더니 이번에 수습된 유해가 4구라고 했다. 그밖에도 녹이 쓴 철모와 병기들도 나왔다고 했다. 유골은 상부의 관련 기관으로 보내져 유전자 감식을 통해 전사자 신원을 추적한다고 했다.
미산령 정자에 이르니 상데미봉 유해 발굴 병사들의 지원 물품이 쌓여 있었다. 미산령에서 파수마을로 가는 북향으로 내려섰다. 길섶에는 산딸기나무 사이 보드랍게 자라나온 영아자가 보여 뜯어 모았다. 영아자는 초롱꽃과의 여러해살이로 생채로도 먹을 수 있는 향과 맛이 좋은 산나물이다. 해발고도가 어느 정도 되는 고산지대 그늘에 잘 자라는 영아자는 여름에 피는 꽃도 예뻤다.
영아자와 함께 까실쑥부쟁이와 나비나물도 보여 뜯어 보탰다. 임도를 내려가다 석간수 흐르는 계곡에서 배낭의 나물을 꺼내 검불을 가렸다. 임도가 끝난 동네는 온통 감나무 과수원이었다. 가을에 곶감으로 유명한 미산과 파수마을 지나 가야읍으로 나갔다. 목마름과 허기가 느껴져 추어탕집으로 들어 요기를 달래고 마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더니 길어진 해가 설핏 기우는 즈음이었다. 22.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