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둑애호가인 mbc스포츠플러스 손혁 해설위원(왼쪽)과 프로기사 야구단 '棋'팀의 구명준 감독이 김영삼 9단과 더불어 바둑과 야구 이야기를 나눴다. |
프로야구 판에 촉망받던 투수가 있었다. 포수가 공을 넘겨주면 공을 잡자마자 바로바로 던지니까 팀의 선배 한명이 바둑을 권했다. 신중하게 한수씩 두는 바둑을 보고 템포 늦추는 걸 배우라는 뜻이었다. 두집 내는 정도야 어릴 적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워 알고 있었지만 그때부터 바둑의 묘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내가 LPGA 통산 6승을 거둔 골퍼 한희원이었어도 취미는 오로지 바둑과 만화, 두가지만 고수했다.
프로기사 야구단 '棋'팀이 있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고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도움이 된다면 한번 지도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 옛날 ‘가수’ 송창식이 ‘명인’ 서봉수에게 기타를 가르치고 바둑을 배운 것처럼 야구에 대해 코치하고 바둑을 배우겠다 했다. MBC스포츠 플러스 프로야구 손혁 해설위원의 얘기다.
손혁은 고등학교 때 이미 초고교급 투수로 손꼽혔다. 동기 박찬호를 능가하는 구위로 공주고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으나 고려대에 입학한 뒤 조성민과 손민한에 가려 처음으로 에이스 자리에서 밀려나는 설움을 겪었고, 1996년 프로야구 LG에 2차지명 1순위로 입단하면서 1998년(11승)과 1999년(10승)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볼이 빠르지는 않았지만 완벽한 제구력과 두뇌 피칭은 일품이었다. 하지만 투수의 생명이 걸린 2번의 어깨수술(2000년 회전근, 2007년 신경계)로 재활과 은퇴(2000년. 2004년, 2007년 3번)를 반복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프로 통산성적은 36승31패, 평균 자책점 4.07. 인터넷에서 접하게 되는 ‘선수’ 손혁에 대한 대략적인 프로필이다.
박찬호나 후배 류현진만큼 각광받는 선수시절을 보내진 못했어도 그의 굴곡진 경험은 명 코칭과 인기 해설자로 거듭나게 만든 자양분이 되었다. 분야는 달라도 야구와 바둑은 상통하는 점이 많다. 특히 타자와 두뇌싸움을 벌여야 하는 투수는 바둑의 수읽기처럼 치밀해야 한다. 외롭고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점도 닮았다.
스타는 화려한 인기에 취해 자기가 선 곳을 제대로 돌아보기 쉽지 않지만(그래서 때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잃지만) 마운드에서 내려와 해설자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승부세계’는 선수시절 못 보았던 폭과 깊이를 깨닫게 한다. 훈수꾼의 시야 같은 것이랄까. ‘야구의’ 손혁 위원을 만나 ‘바둑의’ 승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이유 중 하나이다. 바둑세상 바깥 전문가는 바둑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번쯤 들어볼만하다 생각했다.
또 하나는 프로기사 야구단 ‘棋’팀과의 인연이다. 손혁 위원은 지난해 말 ‘棋’팀의 마지막 경기에 걸음한 데 이어 김영삼 감독과 약속한 대로 한국기원에서 열린 한국리그 포스트시즌 정관장 대 신안천일염의 플레이오프 첫 경기에도 와 프로기사들과 어울렸다. 사이버오로는 2005년 8월에 만들어진 ‘棋’팀을 8년째 후원하고 있는 인연(곽민호 부사장이 구단주)을 내세워 연말연시 김영삼 9단과 손혁 위원에게 대담취재를 제안했고 이 자리에 구명준 ‘棋’팀 감독이 동석했다. 애초 ‘棋’팀의 주전 윤현석 9단과 한종진 9단도 함께 해 두서없이 바둑과 야구 이야기를 할 예정이었으나 급작스런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봇물 터지듯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나 바둑과 연관된 내용 위주로 간추렸다.

2005년 창단한 프로기사 야구단 ‘棋’팀은? 초창기에는 사이버오로에서 팬 공모를 받아 ‘흑백 스톤즈’라 이름 지었다. 경희대 야구감독을 지낸 강진규 씨가 팀을 조련했으나 타계하면서 현재는 구명준 감독이 팀을 지도하고 있다. 포수 출신으로 대학시절 강타자로 이름을 날린 구감독은 상무팀에서 현역생활을 했다.
손혁:(이하 손): ‘棋’팀을 사이버오로에서 후원하고 있다면서요?
김영삼(이하 김): 8년째 후원하고 있어요. 그거 엄청 큰돈이에요. 안 해주면 저희가 회비 엄청 내야 돼요. ㅎㅎ
손: 올해도 후원하시는 거예요?
정용진(이하 정): ...뭐, 경기가 급속히 나빠지지만 않는다면야...ㅡㅡ;; 그나저나 ‘棋’팀이 만들어진 지 꽤 오래되었는데 최근에 아셨나 보죠?
손: 3~4년 전 있다는 거 알았지만...가고 싶었는데 안면 있는 사람도 없고, 무작정 가긴 또 그렇잖아요. 한번은 인터넷 프로기사가 하는 중계방에 들어가서 제가 손혁인데요, 하고 채팅을 했더니 누가 “쉐이야, 니가 손혁이냐? 그럼 난 박찬호다.” 그래서 황망해서 얼른 나온 적도 있어요.
김: 예전에 조훈현 국수님이 고스톱 아이디가 바둑황제였는데, 상대방이 “에이씨...니가 조훈현이면 나는 클린턴이다.”고 했다는 얘기와 비슷하네요.
정: 1997~98년 현역시절 늦게 바둑을 배웠다고 들었는데, 그때는 인터넷도 없었는데 합숙과 연습뿐인 선수시절에 누구랑 바둑을 뒀나요?
손: PC통신이 있었어요. 선수로는 투수 임선동, 최창호 선배(현 SK 와이번스 루키 투수코치), 홈런왕으로 이름을 날렸던 김상호, 원주출신의 안병원(현 넥센 히어로즈 코치) 그렇게 뒀지요. 한 9급쯤 되었을까. 정석, 포석도 모르고 두었어요. 지금도 정석 잘 몰라요. 실력이 안되니까 무조건 깔고 뒀어요. 바둑책이라고는...그때는 이창호가 영웅이었는데 이국수의 책을 보긴 했지요. 제가 공격적인 투수인데 수비적인 바둑을 배워 놓았으니...ㅎㅎ 오늘도 8판 뒀는데 겨우 2판 이겼네. 열심히 둬서 1단까지 올라갔거든요. 에이쉬~. 그 형제기사...형인데 이름이...아, 안형준! 맞아맞아...지난번 그 사범님이 비법을 알려준 뒤로 더 어려워요. 더 많이 졌어요.
김: 야구도 폼이 중요하듯...처음엔 몸에 안 맞으니, 어설프니까...바둑도 마찬가지에요. 계단식으로 늘지요.
구명준:(이하 구): 전 앉아있는 건 못하겠더라고요. 포수인데도 말에요. 포커는 이틀 밤도 새겠던데 바둑은 못해요. 하하.
손: 구감독 바둑 못 두는구나. 그래도 명색 프로기사 야구단 감독인데 당장 배워야겠다.

▲ 바둑과 야구에 대한 대화는 반주를 곁들이며 끝없이 이어졌다. 야구와 바둑은 멘탈게임
정: 바둑을 마인드스포츠라고 하잖아요. 야구는 근육운동이지만 정신력이 참 중요할 거 같은데...
손: 야구는 ‘멘탈’이 1번이에요. 정신력과는 좀 다르죠. 아직도 그런 지도자가 있진 않겠지만, 저희 어릴 때는 야구하는 도중 물을 못 마시게 했어요. 정신력이 해이해졌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목이 마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물을 마셔야지 안 마셨기 때문에 정신력이 떨어지는 거 아니겠어요. 안 그래요? 이건 정신력이 없는 게 아니라 없게 만드는 거야. 요즘은 좋은 걸 먹고 좋은 걸 배우고 좋은 생각하는 사람이 이기는 세상입니다.
김: 바둑도 멘탈게임이라고 할 수 있죠. 바둑을 지면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해이해졌다고 하는데, 그런 말이 어딨어요? 가장 이기고 싶은 사람이 누구야, 누구겠어요? 상대가 나보다 잘 둔 거지. 물론 준비하는 과정에서 해이해질 순 있겠지만...
구: 야구하는 애들은 머리가 엄청 좋은 거 같아. 나쁘면 수싸움이나 이런 거는 안되니까. 바둑도 머리 무지 좋아야겠더군요. 그렇지만 머리를 받쳐주는 건 연습, 공부지요. 투수가 140~50킬로미터 구속으로 던지는 공을 치려면 반사와 반응이 0.4초...0.3초 안에 나와야 가능한데 이거 과학적으로는, 정상적으로는 못 치는 거예요. 끊임없는 반사신경 연습과 반복 훈련, 수싸움이 갖춰줘야 좋은 타격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손: 투수가 상대방에 대한 데이터 갖고 있어야 하는 거야 당연하고...그런데 저희는 대신 포수가 같이 있으니까, 경기 전날 포수랑 대충 전략을 짜죠. 저쪽 2, 3번이 잘 맞으니까 무조건 1번을 잡아야 한다는 식이죠. 그걸 비디오로 찍으러 다니는 사람도 따로 있어요. 그런데 바둑은 야구에 비하면 더 철저한 개인싸움이잖아요? 그렇다면 공부(전략)가 더 필요할 거 같은데...
김: 입단공부는 ‘목숨을 걸고’ 하지만 입단한 뒤에는 그렇지 않아서 안타까워요. 토너먼트 승부사로 각을 세웠다면 입단한 다음이 정작 더 공부할 때죠. 일류, 정상급들도 마찬가지에요. 잘나갈 때 혹사당하는 데다, 어렸을 때에 비하면 방망이 연습량이 많이 떨어져 있죠. 가정 등 신경써야할 것들이 많아질 테니 아무래도 어릴 적 바둑에만 전념할 수 있을 때와는 다르죠. 이세돌, 이창호 같은 정상급 기사가 더 공부할 필요 있나 싶겠지만, 애들보다 훨씬 연습량이 적습니다. 지금은 정상급과의 승부호흡으로 버티는 겁니다. 그러다 나이 들면 하락하는 거죠.

▲ 손혁 위원은 지난해 11월 친한 김영삼 정관장 감독을 응원하러 신안천일염과 벌이는 한국리그 플레이오프 1차전 검토실을 찾았다. 이에 앞서 손위원은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인 정관장과 넷마블의 경기에도 걸음한 바 있다. 양팀 감독 김영삼 9단과 한종진 9단이 모두 棋팀 선수들이다. 이세돌 9단이 직접 스케줄을 관리한다고요?
정: 이왕 얘기 나온 김에 이세돌 9단의 부진에 대해서도 한번 말해보죠. 작년 연말부터 극도로 좋지 않잖아요. 제가 보기엔 실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집중력 문제로 보이고, 이는 곧 체력의 문제로 보이는데...국내는 물론 중국 여기저기 대국에 행사에, 오버페이스한 여파가 아닌가 합니다. 야구로 치면 5일 로테이션을 지키지 않고 연투한 셈이죠. 자꾸 져 버릇하면 자신감을 잃게 된다는 게 문제죠. 전에는 대적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적수까지 "이젠 해볼만한 거 아냐?" 하는 자세로 덤벼들게 되는 게 승부세계의 속성입니다. 일인자의 프리미엄을 잃게 되는 거죠.
김: 이창호 9단도 누가 곁에 있었으면 훨씬 오래 갔다고 봐요. 좀 쉬었어야죠. 20대 때야 피곤해도 한숨 자고나면 바로 컨디션이 회복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이 회복시간이 예전 같지 않게 되죠. 마음이야 항상 청춘이고 항시 자신감이 앞서니 본인은 잘 감지하지 못합니다. 작년 12월 대국이 폭주할 때 제가 이세돌이었다면 염치불구하고 한국기원에 스케줄 조율을 부탁했을 겁니다. 하루건너도 아니고 결승대국을 연이어 치른 기전도 있었잖아요. 안타깝더라고요. 그 와중에 중국리그, 10번기 개막식 같은 데도 다녀오고...
손: (매우 놀란 표정으로) 그걸...스케줄을 본인이 다 짜요?
정: 바둑계는 아직 연예계나 스포츠계처럼 매니저나 에이전트를 둔 기사가 없습니다. 시장이 크고 작은 걸 떠나 그럴 만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서일 겁니다. 대국 폭주와 과다대국은 일인자라면 누구나 겪어온 일이긴 하지요. 잘 나가니까 아무래도 대국이 많을 수밖에요. 게다가 “누가 내 노후를 책임질 거야? 메뚜기도 한철인데...”라는 논리를 펼치면 그 누구도 선별출전과 휴식을 권할 수 없게 되지요.
손: 스트라이크 던지고 싶어도 볼이 될 때가, 정말 안들어갈 때가 있어요. 진짜 던지고 싶은 사람은 누구겠어요? 마운드에 오른 사람이잖아. 사이클 떨어지는 시점, 그러니까 체력이 떨어졌다든지 자신감이 떨어졌다든지 이럴 때 “체력이 부치는 거 같아...자신감을 잃었다”고 인터뷰하는 사람은 결코 없어요. 투수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체력이 떨어졌다는 말이에요. 절대 자기 입으로 실토 안합니다. 코치가 보기에 공이 높아지잖아요. 무릎각도 자기도 모르게 일어서...피곤하니까. 그렇지만 투수는 일년내내 이걸 했어요. 본인은 절대 몰라. 어느 순간 체력이 떨어진 걸 알지만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내내 준비해 오른 마운드잖아요. 자존심이죠. 정상권이면 더 자존심이 세요. 공 달라는 감독에게 버티는 투수를 가끔 보는 것도 그래서예요.
그걸 조절해 주는 사람이 코치입니다. “야, 체력 떨어졌다 하루 쉬자.” 이러면 “저 괜찮은데요.” 이럽니다. “혁아. 요 경기보다 하루 더 쉬고 던지자.” 하면 인정합니다. 야구선수들은 시즌 끝나면 한달 동안은 여행하거나 친한 사람과 맥주도 한잔 마시고 이럽니다.
이세돌 9단의 지금 상황이라면, 이럴 때 곁에서 가족여행 한번 다녀오면 어때? 하고 권할 사람, 한 대회 쉬고 어디 여행 갔다오는 게 어때?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코치가 있다면, 이세돌 9단이 어떤 성격인 줄 잘 모르겠는데 오히려 고마워할 거 같아요. 한 대회 안 나간다고 당장 추락하는 것도 아니고 길게 보면 이것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배움보다는 대화할 상대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심리상담 측면에서라도...
타이거 우즈도 코치를 둔다
구: 현역이라면 더 필요한 부분이지요. 내가 지금 잘두고 있는데 필요해? 이런 생각 가질 수 있겠지만 그러면 타이거 우즈 같은 선수들에게 굳이 레슨이 필요 없거든요. 가족이나 친구에게 털어놓기엔 자존심 상하고 스스로 인정하기는 싫지만 내가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듣는 거야. 코치든 심리학자든...
손: 타이거우즈도 천문학적인 액수를 벌 때 코치 한명이 무조건 있었어요. 정상일수록 코치가 필요하다고 봐요. 야구는 3억 이상 연봉은 에이전트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요...상담 역할뿐 아니라 마케팅 측면에서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바둑시장도 결국은 다른 사람도 봐야 커지는 거잖아요. 특히 여자가 봐야 되는데...류현진의 이미지는 ‘괴물’이지만 윤석민은 괴물이 아니거든요.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서 잘 포장해 상품가치를 높일 존재(역할)가 필요합니다. 에이전트 비용 조금 나가는 걸 아까워하기보다는 파이를 키워야지요. 꼭 연봉만으로 버는 건 아닙니다.
세 종류의 코치가 있다고 합디다. “야, 개새끼야!” 하기만 하는 코치. “야, 개새끼야!” 하면서 가르쳐 주는 코치. 마지막 유형은 아무 말도 않고 선수가 오히려 질문하게끔 만드는 코치가 있지요. 타자는 여기를 못쳐. 그런데 코치는 거기만 계속 던져준다는 거야. 그러면 선수가 “코치님 전 왜 여기를 못 칠까요?” 묻게 되고 그때 비로소 알려줍니다. 바둑 연구생이라면 사범에게 질문하겠지만 이세돌 9단이라면 누구한테 질문해야할까요?
제가 좀 일찍 야구를 그만뒀잖아요. 손혁이란 마운드에 있을 때지 은퇴하고 나면 아무것도 아녜요. 찬호가 이런 말을 했지요.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심리학자를 믿게 되었다고. 와이프한테도 친구한테도 자존심상 하지 못한 얘기를 정말 상반된 분야의 사람에게 말하게 되었다는 경험담이죠. 중언부언이지만, 이9단에겐 정말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필요할 거 같네요. 분야는 달라도 자기가 믿는 사람, 아니면 그런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 필요하겠죠. 흐흐 내가 에이전트 한번 해볼까? 팬으로서 제 경험을 조언해줄 기회 있었으면 참 좋겠네요. 만나고 싶은 영웅이기도 하고...야구를 잘 모를 테니 손혁이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때마침 미국 이주 계획이 있다 하니 제가 미국생활도 하는 처지라 더욱 관심이 가네요.
제가 받으면 바로 던지고 받으면 바로 던지는 스타일이라 바둑을 권유 받았는데, 그런데 어느 속기전에선가 한 프로기사가 무지 빨리 두는 거야. 이창호 9단은 여덟, 아홉할 때만 착점하는 수비적 스타일로 일관하는데, 어? 저런 사람도 있는데...내 초속기 투구가 그리 지적받을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꼭 한번 만나고 싶었던 기사가 이세돌 9단이었습니다. 하하. 담배 한다는 소린 들은 거 같은데 술도 하나요? 당연히 운동은 하겠죠?
김: 술이 세다는 말을 듣는 편이죠. 이9단이 한 스무살 때 10킬로미터 마라톤을 뛰면 40분, 뭐 이렇게 막 끊었어요. 이거 엄청 난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50분에 주파하는 사람을 보면 그게 사람이냐 그래요. 하하. 바둑은 체력을 상당히 요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운동은 조금 해야 하고요, 술 먹으면 집중력이 떨어지게 돼 있어요. 바둑하는 사람은 원래 술 먹으면 안돼요. 제가 어렸을 때 많이 마셔서 망가진 사람이잖아요. ㅡㅡ;;

▲ 한국리그 경기장을 찾은 날 손혁 위원은 '바둑황제' 조훈현 9단과도 인사를 나눴다. ‘창의성’을 키워야한다
정: 지난해 대만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 다녀오셨더군요. 기사를 보니 손혁 위원께서 "한국야구의 색깔이 필요하다"고 하셨던데, 한국바둑도 요즘 천편일률적인 스타일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개성과 창의성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데 대한 경각이지요.
손: 야구는 합숙훈련이 많았는데 낮에 연습 끝나고 야간연습, 야간연습 뒤에는 새벽연습...밥먹고 자는 시간만 빼고 연습이었죠. 그런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구: 그랬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뭐든 빨리 잘하잖아요. 소수에 불과하지만 핸드볼 보세요? 유럽을 이기는 거...연습을 그리 하니까 따라가는 거지요.
손: 연습을 그렇게 하니까 서른 살까지는 이기고 그 다음부터 안하잖아. 제 와이프도 마찬가지고...어릴 때부터 연습만 시키니까...연습하는 이유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혼나지 않으려고 하니까. 초중시절에 부족한 걸 스스로 어떻게 알아. 그러니 어느 정도 성적을 내면 다들 지쳐버려. 젊은 코치들이 많이 공부하면서 과학적이고 새로운 걸 받아들여서 지금은 많이 바뀌고 있어요.
투수어깨는 분필하고 마찬가지여서 이렇게 쓰면 천천히 닳고 저렇게 쓰면 왕창 닳기도 하죠. 고무줄 한번 당겼다 놓으면 원래 탄력을 절대 가질 수 없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는 인적자원이 부족하니까 쓸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반대로 돼야죠. 자원이 없으니까 좋은 자원은 더 아껴야지. 살펴보면 류현진 같은 자원은 많이 있어요. 그러나 아끼지 않으니까 제2의 류현진, 박찬호를 보기 힘든 거예요. 현진이도 고2 때 벌써 어깨 수술했잖아요.
가장 섹시한 여자골퍼로 꼽히는 LPGA의 폴라 크리머(Paula Creamer)나 이런 애들을 보면 지금이 정말 재미있어요. 2005년에 LPGA 투어에 입문했으니 올해로 9년째 아닙니까. 86년생이니 벌써 우리나이 28세인데 말이죠. 그런데 우리나라 선수들을 보면 이 나이만 되면 자꾸 은퇴할 생각을 가져요. 내가 정상에도 섰고 이젠 내 생활도 갖고 싶고...이런 거죠. 왜냐? 14세에서 20세까지의 생활이 없는 거야. 오로지 연습, 연습뿐이었으니...
정: 바둑계도 비슷해요. 연구생은 더 어린나이부터 바둑에 올인하죠. 축구에서도 ‘창조축구’를 자꾸만 되뇌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겠죠. 창조성은 얼마나 오래 붙잡고 달려드느냐보다 어떻게 배우고 매진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봅니다. 승부세계에서는 이기는 자가 강한 자라니 우선 이기고 보는 게 중요하지만 길게 보면 어떤 식으로 이기느냐가 더 중요한데 말이죠. 요즘 우리 바둑계가 오로지 이기는 길만 추구하다 보니 검증된 수법, 안전한 길만 고수하려는 ‘안전빵’ 경향이 강합니다. 이 결과는 백인백색이 아니라 ‘붕어빵’ 바둑으로 나타나고 있죠.
손: 우리나라는 어릴 때 글로브로 이렇게 잡으며 수비하면 건방지다고 야단치며 요렇게 잡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자기가 잡기 가장 편한 자세로 잡는 게 자연스런 거죠. 어릴 때부터 창조성을 말살하는 거지요.
투구폼이 사이드암이건 언더핸드건, 아니면 오버핸드건 타고난 유전인자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원시시대 사냥하며 던지던 조상부터 대대손손 이어받은 투구폼은 웬만하면 건들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어릴 때 건들어버리면 성장이 멈춰질 수 있다는 거지요.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스폰지마냥 그대로 흡수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혼내는 사람이 많지요. 컨트롤 없는 투수는 대부분 어릴 때 혼난 경험이 많아요. 두려워서 못 던지는 거야. 이런 가르침...인구가 많은 중국 같으면 워낙 자원이 넘치니 이해가 돼요. 우리나라는 땅도 좁고 인구도 적으니까 그럴수록 자기 거를 더욱 살리는 교육을 해야죠. 18세 청소년야구를 하면 거의 이기다가도 성인야구에 접어들면 일본, 미국 애들에게 잘 안되는 이유 중의 하나죠.
정: 누군가,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대학 때까지 공은 무지 빠른데 들쭉날쭉한 제구력 덕분(?)에 혹사당하지 않고 싱싱한 어깨를 간직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을 펼친 바 있었는데...
손: 찬호는 우리가 이젠 평가할 수 없는 단계죠. 운동을 워낙 열심히 한 친구예요. 우리나라에서 열심히 한 걸로 랭킹에 들어갈만한 사람이죠. 그럼 열심히 한다고 다 되냐?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요. 요는 아이들 저마다의 적성과 사례에 맞춰줘야 한다는 겁니다. 지도자는...바둑에서도 빨리 두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빨리 둬야죠. 생각하면 더 안 좋아지지 않을까요?
김: 빨리 두면서도 큰 실수 안하면 괜찮은데, 옛날엔 빨리 두면 실수하는 버릇 들까봐 걱정했는데 요즘은 빨리 두면서도 실수 안하는 사람 많거든요. 적성과 사례에 맞춰야 한다는 말 공감합니다. 박정상이가 자기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공부한 선배가 입단하지 못하는 걸 보고 한 말이 있어요. 기보 10만 판 놓아봤는데도 프로 못 됐는데 기보 1천 판도 안 놔본 최철한이를 보면...바둑이 과연 노력에 따라 좌우되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고요. 하하.

▲ 대화를 마치고 명동거리에서 한 컷. 왼쪽부터 김영삼 9단, 손혁 위원, 구명준 감독. 나무배트, 알루미늄배트
정: 청소년야구에서는 알루미늄 배트를 쓰잖아요? 추신수 선수는 우리도 미국처럼 나무배트를 쓰자고 했던데...이게 어떤 연관이 있는 겁니까?
구: 나무배트는 알루미늄에 비해 무겁고 탄력이 작으니까 어지간한 힘을 갖추고 정확히 맞추지 못하면 넘기기 힘들어요. 자연 풀스윙보다는 톡톡 갖다대게 되죠. 풀스윙이 줄어드니까 거포가 줄어들겠죠. 대형타자 출현이 뜸해진 이유입니다.
정: 힘이 없으면 나무방망이로 넘길 수 없으니 짧게짧게 치는 습관이 생기고...일단 경기는 뛰어야 되고 성적을 올려야 대학을 갈 수 있으니까 어릴 적 창조적인 야구를 구사할 사고와 능력을 키울 여유를 갖지 못한다, 이런 건가요? 우리 연구생들이 장기간 입단만을 위한 공부에 묶여 마음껏 자기 바둑을 구사하지 못한다고 일갈하는 배태일 박사의 지적이 생각나는군요. 국내 기전이 속기전 일색이고 거기에 맞히다 보니 장고바둑인 세계기전에서 성적이 저조한 거라는 분석도 있지요.
손: 청소년 국제대회에선 다 150킬로미터쯤 던지는 애들이 옵니다. 국내에서 130킬로미터대에는 크게 치던 애들도 150킬로미터에서 자기스윙으로 크게 치면 밀리니까 더 짧아지는 거야. 나무와 알루미늄 배트는 각각 장단점이 있어요. 어떤 게 옳다고 얘긴 못합니다. 어차피 성인이 되면 나무방망이를 써야 되니까 어릴 때부터 적응하자는 말도 일리가 있고요. 정답은 없어요. 그 순간순간 적용해야지.
구: 그러나 인정은 해야지. 협회에서 묵살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야구의 기싸움, 바둑의 기싸움
정: 야구경기를 보면 더러 투수와 타자 간 기싸움이 대단할 때가 있던데요?
구: 스윙이 빠른 타자가 있고 나한테 항상 죽는 타자가 있고...이런 거 잘 찾아서 잘하는 쪽을 살리는 거죠. 이게 스타일이죠. 바둑도 그런 거 같아요. 일대일로 붙는 거니까.
손: 여기서 한번 잡아놓으면 한참 가는 게 기싸움이에요. ㅎㅎ 야구도 바둑처럼 심리전 요소가 많아요. 타이밍이 참 중요하죠. 제 공 잘치는 타자에겐 뭘 던져도 이상하게 맞을 거 같고...병아리 때 쫓기면 장닭 돼서도 쫓긴다고, 처음에 완전히 제압해 놔야 다음이 편하죠. 바둑도 한두 집 이길 수 있어도 완전 박살내놔야 할 거 같은데...
김: '완전박살'은 이세돌 바둑이 그렇고요...이창호 바둑은 조금씩 이기는데도 마샤오춘을 완전히 밀어버리더군요.
손: 이세돌 9단은 착수 후 자주 상대를 쳐다보더라고...이것도 일종의 기싸움인가요?
김: 고의라기보다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쳐다보는 기사가 몇 있긴 하죠. 솔직히 매너상으론 안 좋은 겁니다. 자칫 상대방 ‘간’을 보려는 행동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고요.
손: 그래요? 투수 입장에선 나무랄 일이 아닌데...차이점 있는 거 같군요. 우리는 여기 던지다가 맞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던져야 되는 상황이 있어요. 안타만 맞고 내려올 순 없으니 살아남기 위해서 최대한 몸쪽으로 붙이려고 하는 거지 맞추려고는 생각 안해요. 상대투수가 우리 타자에 그러면 우리도 그만큼 더 붙이게 되지요. 서로 이기려는 기싸움입니다. 예의를 안 지키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거, 내 볼이 130킬로미터인데 150킬로미터로 보이게 만들려면 80킬로미터짜리의 장난처럼 보이는 커브를 구사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인상 팍 쓰면 승부사가 아니지요.
저 혼자 이룬 결실은 없다
정: 마지막으로 지도자로서, 해설자로서 활동하면서 선수로 뛸 때 미처 느끼지 못했던 점들이 분명 있을 텐데요?
손: 저도 미국 가서 많이 배웠다는 생각 많이 드는데요. 톰 하우스(Tom House)에서 피칭이론을 배울 때 가장 인상에 남은 공부는 "칭찬은 무조건 여러 사람 앞에서 하고 안 좋은 얘기는 둘만 따로 하라"는 가르침이었어요. 투수가 컨트롤이 없는 건 주위에서 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전 프로입단 때까지만 해도 컨트롤 없는 투수였는데 입단 후 한번은 코치에게 컨트롤 좋다는 말을 듣고 그 뒤로 더 잘 보이려고 애쓰다 보니 어느 순간 제구력 좋은 투수란 소리를 듣고 있더군요. 지도자들이 명심해야할 대목입니다.
두 번째는 선수생활의 자세입니다. 어느 분야나 그렇듯 프로선수 가운데에도 요즘 건방진 애들이 좀 있어요. 바둑계도 그런 선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 야구로 비유하면 이세돌 같이 타고난 선수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선수는 저 혼자 스스로 만들어진 게 아님을 상기해야 합니다. 정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선수라 하더라도 정말 좋은 코치가 있고 정말 좋은 트레이너가 있기 때문에 정말 좋은 선수 하나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선수 재능만 가지고선 절대 안되는 겁니다. 나중에 내가 좋은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기에 좋은 선수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십상인데 혼자만의 결실이 절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네요.
반대로 좋은 코치는 절대 자기가 뛰어나지 않다, 좋은 선수가 있었고 좋은 트레이너가 있었기 때문에 좋은 코치가 된 거지요. 코치나 트레이너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장수하는데, 나중에 대부분 자기 공으로만 돌리기 예사지요. 하긴 선수시절은 잘 모르지...야구는 은퇴해버리면 짧거든요. 야구할 때나 그 사람이지 은퇴하면 그 느낌이 확 떨어집니다. 전 조치훈 명인의 이 명언이 이 모든 것을 함축한 최고의 명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사진취재/ 김수광 기자]

▲ 미국 LPGA 투어 중 2011년 미국프로야구 샌프란시스코의 홈구장 AT&T파크를 찾은 손혁-한희원 부부. (사진/ 손혁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