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의 첫걸음은 시냇가 버들강아지의 모습이나 번화가(繁華街) 의상실의 쇼윈도에서만 시작 되는 것은 아니다.
지루한 겨울방학을 마치고 졸업과 입학으로 부산해진 학생들의 활달한 모습 또한 단절 없이 이어져가는 세대 간의 가교(架橋)를 의미하며 새봄을 열어가는 사회적 의식(儀式)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오랜 기간의 학창생활을 사각모로 마감하고 사회생활의 첫걸음을 내딛는 대학졸업생들은 이제 그들 생애에서 인생의 봄을 꽃피우기 시작하는 것이리라.
졸업과 입학 시즌이다. 각 급 학교에서 많은 졸업생이 배출되고 있다.
졸업식의 형식이나 내용은 수 십 년 전이나 요즈음이나 크게 달라 질 것은 없겠으나 식장의 분위기는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이다. 지금 5-60대 이상 세대들의 졸업식이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이었든 데 반해 지금 신세대들의 졸업식은 밝고 명랑한, 이를테면 축제의 분위기에 가깝다.
수 십 년간의 학창생활을 마치고 자신의 포부를 한껏 펼쳐 보일 밝은 미래를 향해 교문을 나서는 지금 주춤거리고 침울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들 사는 형편이 옛적과는 비교 할 수도 없이 여유로워 진만큼 이런 세태가 당연한 현상으로 인정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적지 않게 아쉬움이 남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요즈음의 졸업식장에서는 학생들의 진지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대학총장님을 위시하여 꼭 필요한 분들의 치사(致辭)마저도 외면되는 산만한 분위기, 아예 식장을 이탈하여 가족 친지들과의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는 졸업생이 태반이다. 무릇 의식(儀式)의 중요성에 합당한 내재적(內在的) 가치를 도외시 해 버린다면 그것은 뜻있는 행사가 아니라 공허한 해프닝에 더 가까울 것이며 지성인들이 취할 태도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요즘과는 달리 졸업식장이 온통 눈물바다를 이루던 때가 있었다.
5-60년대의 시골 초등학교 졸업식장이 그러했다. 우수상과 모범생들에 대한 상장수여가 끝나면 교장선생님의 치사가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식장의 분위기는 숙연해 졌고 이어지는 식순에 따라 재학생대표의 애틋한 송사(送辭)와 이에 답하는 졸업생대표의 석별(惜別)의 정이 절절한 답사가 시작되면 벌써 식장 여기저기에서는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지막 순서인 졸업가를 다 같이 부르는 대목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그만 눈물바다를 이루고 말았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 하고 재학생들이 일절을 끝내면 이어서 졸업생이 “잘 있 거 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의 2절을 부르기 마련인데 끝까지 채 맺지 못하고 다들 어깨를 들먹이며 그만 흐느끼기 시작했다. 선생님들마저도 눈시울을 적시고 있는 터라 졸업식장은 그야말로 봇물이 터져 버린 것 같은 통곡의 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날 우리 반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우리를 다시 교실로 불러 모으셨다. 그리고 마지막 당부의 말씀과 석별의 정을 토로 하시다가 다하지 못한 아쉬움을 대신 하시겠다며 노래를 시작하셨다. -지금도 선생님을 생각하면 세계적 테너인 플라시도 도밍고가 떠오를 정도로 훤칠한 미남이었고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였다- 노래는 연인과의 이별의 아픔을 호소하는 “오 내 사랑”이었는데 선생님의 열창(熱唱)은 도중에 그만 통곡으로 바뀌어 버렸고 우리 또한 다시 한번 그만 오열(嗚咽)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노래 도중에 끓어오르는 격정을 가누지 못하여 교무실로 뛰쳐나가셨고 우리는 한참동안 선생님을 기다리다가 스스로 해산(解散) 할 수밖에 없었다.
끼니를 제대로 잇기가 어려웠던 그 시절, 대부분이 상급학교(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가난이 졸업식을 그렇게 비탄(悲嘆)의 장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은 하나같이 엄하고 무서웠지만 들어내지 않은 진한 사랑과 존경스런 사도(師道)로 우리들 인생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지난 6년간 결코 잊을 수없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오히려 우리에게 학창생활에 대한 더 큰 애착을 갖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점심때 도시락을 지참 해 온 애들은 채 절반을 넘지 않았고 한 겨울에도 양말조차 신지 못한 아이가 있을 정도로 의복은 부실했으며 더군다나 의자와 책상은 군인 아저씨들이 (공비토벌을 위해 주둔했던) 몽땅 부셔서 땔감으로 했던 까닭에 우리는 한 겨울에도 차가운 마루 바닥에 엎드려서 공책을 써야만 했다. 어디 그뿐이랴, 운동장 구석에 가마솥을 걸고 끓여 낸 구충제를 한 사발씩 마셨던 곤욕, 한번 맞으면 사나흘 간씩이나 팔이 퉁퉁 붓고 아파서 고생하였던 무지막지 한 예방주사, 모택동 모자를 씌우고 한 여름에 군인이상으로 제식(制式)훈련을 시켰는가 하면 걸핏하면 구서(驅鼠)기간을 정해서 쥐의 꼬리를 열 개 씩이나 잘라 가져가야 하는 숙제 아닌 과제, 쩌렁쩌렁 교정을 울렸던 훈육선생님의 무서운 기합, 이렇게 보낸 6년간의 학창을 어떻게 눈물 없이 마감 할 수 있을 것인가__ .
그렇게 힘들고 사연 많았던 초등학교시절...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가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 이었는지도 모른다.
첫댓글 갑자기....기억 희미한 졸업식 생각이....감사 합니다...
둥이님..하시죠
정말 실감나게 글을 잘 그려 가셨네요..이제는 사뭇라진 식장 분위기에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춘곡님..잘 지내시죠오늘은 햇님이 방실거리는 봄날에 와 있는 듯 하군요..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늘 건강하시길 빌어요..감사합니다..행복하세요^^
이젠 경칩도 지났으니 하루 하루 봄볕이 더 밝아 지겠지요... 밍지님의 배려가 항시 고맙습니다. 좋은 나날이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