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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00.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료한 오후였다. 6월을 맞이하는 여름의 햇볕은 지독히도 강렬했고, 올려다 본 하늘은 높디 높았다. 꽤나
오랫동안 시달려온 불면증 때문인지 두 눈에 초점이 없긴 했다. 본디 직업이 직업인지라 밤, 낮을 바꿔서 생활하는 내가 한
밤중이나 다름없는 오후 1시에 지하철역 앞에 쪼그려 앉아있으려니 잠시 짜증이 몰아쳐 오긴 했지만, 이내 다시 가라앉았다.
근데 진철이 이 새끼는 뭘 한다고 이렇게 늦어. 험한 소리가 절로 꽉 다문 입새로 새어나왔다. 내 성격을 빤히 아는 놈이
행동거지가 어찌 이리도 굼뜬건지.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워 잠시 고개를 숙였다. 다른 신참내기 조직이 벌건 대낮에 우리 구역
클럽을 건드렸다기에 정리를 좀 하러 나섰더니. 5분만 더 기다렸다가 오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덮쳐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땡그랑. 발밑에서 울리는 쇳조각 떨어지는 소리에 슬며시 숙인 고개를 올렸다. 씹, 뭐야 이건- 투덜거리며 들어올린 시선 끝에
보이는 오백원짜리 동전 하나. 순간 벙찐 기분에 고개를 치켜들자,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이름모를 남자가 시야에 비친다. 밝은
햇볕 때문인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뭐냐?"
저거 설마 나한테 던진거냐?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껏 지어보이자, 목을 살짝 덮는 검은색의 웨이브진 머리를 긁적이던 그가
대답한다.
"거지아냐?"
"하, 뭐?"
"아니, 불쌍하게 앉아서 그러고 있길래 거진 줄 알았지."
"지랄하네."
"흐응-.생긴 건 딱 고딩인데, 이 시간에 이런데서. 야, 너 가출했냐?"
이 자식은 왠 오지랖이야. 손목에 걸쳐져있는 시계를 흘끗, 보고서 굽혔던 두 다리를 쭉 폈다. 1시 15분. 박진철 개새끼,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왔구만. 한숨을 작게 쉬고 내 앞을 가로막은 남자의 얼굴로 시선을 돌린다. 높아진 시야에 역광으로 가려져있던
녀석의 얼굴이 서서히 제 모양을 찾아간다.
"남이사. 가던길 가라."
"꼬마야, 허세떨지 말고 얼렁 집에 가라. 넌 티비도 안 보냐.
왜 있잖아 그거 - 집나오면 개고생이다."
남자치고 하얀 얼굴이었다. 창백할 정도는 아니고, 적당히 하얀 얼굴에 싱긋, 미소가 걸려있어서 부드러워보이는 인상이었다.
장난기가 섞인 입꼬리는 약간 기울어져 올라가 있었고 이빨은 가지런한 게 보기 좋았다.
"썅, 나이 먹을만큼 먹었으니까 신경끄고 갈길 가라고."
"떽, 이게 어디 오빠한테 욕짓거리를. 집 소중한 줄 알아."
"너 진짜 안 꺼질...!"
신경질적으로 시선을 옮기던 나는 순간 하려던 말을 멈추고 말았다. 잘 뻗은 코 위쪽에 자리 잡은 두 눈동자. 이때까지의 능글맞던
말투와는 달리 그의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눈 속 깊이 존재하는 비소와 냉랭함. 한쪽은 푸른 바다를 닮은 파란색이었고, 다른
한쪽은 무심하기 짝이 없는 검은색이었다. 오드...아이라고 하던가, 저런 눈을.
"오빠 말 새겨들어. 나처럼 되지말고."
"...너처럼 되는게 어떤건데?"
장난스레나마 걸려있던 웃음기가 모두 사라진다. 바다빛의 눈동자는 시리게 얼어버리고, 탁한 검은색은 초점없이 흐려진다. 붉은
그 입술이, 살짝 열렸다가 조급하게 닫힌다.
"나? 몸파는 거지새끼."
이게 너와의 첫 만남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해 봐도, 너는 정말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 여왕님의 개 ]
Episode 01.
"하나."
"헉헉, 나...나 박진철은!"
컴컴한 창고에서는 퀘퀘한 냄새가 났다. 씨발, 조폭이라고 티내는 것도 아니고. 사무실도 꼭 이런데로 해야겠는지. 어렸을 적,
영화에 나오는 악당마냥 어두운 창고에 모여서 작당질을 하고있는 할아범과 아저씨들을 보며 퉁명스레 '영화찍어? 왜 추잡하게
이런데서 맨날 꽁냥질이야, 꽁냥질이.' 하고 물었었다. 노땅은 그저 웃는얼굴로 '이게 남자의 로망이란 거야, 이년아.' 하며 내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둘."
"보오...스의 말...을 헉, 신의 뜻으로 아알...고!"
기룡파 행동대장 박진철은 구호에 맞춰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다. 감히 이몸을 지하철 앞에서 45분이나 기다리게 한 벌이다. 백
스물하나, 백 스물둘. 속으로 갯수를 세어가며 나는 무덤덤하게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는 진철이를 주시한다. 갈수록 말이
늘어지는게, 곧 쓰러질 듯한 얼굴이다.
쯧, 비실비실하기는.
"하나."
"보스으으으....! 의 명령을...헉,헉, 목숨을 다해 지키이이..! 지키기로!"
어쭈, 자세봐라. 눈을 새초롬히 뜨고 살려달라는 표정의 진철이를 흘겨보았다. 멀었어, 새끼야.
"둘."
"맹세에...! 후욱, 맹....세...에에...!"
"어허, 목소리가 작다."
"맹세에에에....!!!"
짧은 스포츠 머리아래, 땀이 흥건한 이마가 찌푸려질 때로 찌푸려 져 있다. 갈색으로 반짝이던 진철이의 눈이 드디어 흰자를
보이며 부르르 떨린다. 안그래도 조금 타서 보통보다 좀 더 어두운 톤의 피부인데. 온 얼굴이 새빨게 진 것이...불쌍하니까 이쯤 봐
주...
"매,맹세에....악, 씨바알!!!"
"허, 뭐 씨발?"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새끼야.
-
"진철이 얼굴이 왜 저렇습니까?"
"뭐가."
"눈덩이가 새파란데요?"
"애정의 표시야. 특별히 듬뿍 담아 몸소 보여줬지."
쿨럭. 등 뒤에서 기침을 내뱉는 진철이를 무시한 체 강이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었다. 기룡파 구역에서 관리중인 클럽, 바, 도박장,
룸살롱의 매출과 이런저런 상황을 정리해서 올린 보고서들. 한 장씩 넘기며 유심히 살펴보았다.
벌여 들어오는 순이익에서 몇 프로는 가게오너나 마담들의 손에 떨어지고, 또 몇 프로는 머릿수로 나누어서 일하는 애들에게
돌아간다.
그런 후에 남은 9할 정도의 이익은 조직에 떨어져서, 굶주린 건달들의 손에서 나뉘어지는 것이다.
"LARA에서 금교파 몇놈들이 행패를 부렸나 보더군요. 룸으로 들어온 아가씨 뺨을 때렸던가 봅니다. 알바생은 죽이 되도록
패놓고. 깨먹은 글라스에, 테이블에. 경비장부에 구멍이 크게 하나 났습니다."
유흥가가 집중적으로 모여있는 구역의 연 매출이 많이 늘었다. 그만큼 꼬이는 날파리도 늘어만 간다. 이번 달로 들어서 벌써
서너번의 도발이 있었다. 돈벌이가 되는 가게들은 쉽게 주변 조직들의 표적이 된다. 돈때문에 죽고, 돈때문에 산다. 이 바닥이란게
원래 그렇다. 구질구질한 인생들이 모여서, 그래도 입에 풀칠은 하고 큰소리 한번 내보고 살려고 발악을 한다.
뭣 하나 보답해준 것 없는 이 더러운 세상에서, 다른거 하나없이 더럽게 살아간다.
"아무래도 주변이 어수선하다보니, 밑에 애들도 수근거리는 게 많나 봅니다."
리스트를 살펴보던 눈을 들어 강이의 시선을 마주한다. 망설이는 표정이, 뻔한 얘기를 할듯 해서 말을 가로막고 장난섞인 말투로
씁쓸함을 대신한다.
"어련하시겠어. 영감탱이 밤시중이나 들던 년이 보스질을 한다니 다들 할 말들이 많겠지."
"보스!"
"쿡쿡, 내가 뭐 없는 말 한것도 아니고."
강이와 진철이의 얼굴이 찡그려진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조폭질하는 새끼들 답지않게 충성심이랍시고 내가 쓴소리 듣는
것을 싫어한다. 웃기는 놈들.
"지들 고추달린 걸 탓해야지, 왜 내 탓을 하나들 몰라."
몇 달전 칼에찔려 죽은 영감탱이, 기룡파 전 보스 박기태는 간암말기 환자였다. 40대 초반에 조직을 이어받은 그는, 쉰 하나라는
나이에 간암 초기를 선고받았다. 온갖 더러운 짓, 치사한 짓 다해서 올라온 보스라는 자리가 죽음앞에서 덧없어 짐을 느낀 그는
매일을 술독에 빠져살다고 했다.
그의 횡포가 잦아지자, 이를 보다 못한 간부 중 하나가 슬그머니 이런 말을 꺼내더란다.
어린여자아이를 끼고자면, 원기가 회복되어서 건강이 좋아진다고.
내 나이 열 한살때 박기태를 처음 만났다. 고아원에서 고르고 골라 데러온 아이가 나, 공진아였다. 처음 만난 날, 무스인지 젤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흰 머리카락이 섞인 머리를 바짝 넘긴 체 커다란 키로 내려다보는 자신에게 '뭘 봐, 할배.'하며 대들던 내가
귀여웠다나 뭐라나. 보배 진, 아이 아. 보배로운 아이는 그렇게 40살 더 먹은 노땅의 첩이 되었다.
양심이라는 건 있는지 처음에는 그저 같은 침대에서 안고 자기만 했다. 그건 참 미묘한 기분이었다. 어린시절 부모에게 버려져
시설에서 자란 내게, 옆에서 느껴지는 온기란 무언가 이질적이고 낯설었다.
아버지같은 사람이었다. 다정한 만큼 잔인했고, 선량한 만큼 치졸했다. 그는 내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쳤고, 독해지는 법도
가르쳤다. 내게 있어서는 인생에 내려진 한 가닥의 동앗줄과도 같았다. 이왕 더럽게 핥고 기어야 할 인생, 좀 더 나은 자리에서 길
수 있게 해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처음 관계를 가진 건 열 여덟, 내가 고등학교 2학년에 들어서면서였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요구한 것은 다름아닌 나, 공진아
본인이었다.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 그의 건강은 나빠져만 가고 있었고, 나는 그가 죽은 후에도 보장받을 수 있는 자리가 필요했다. 또래에
비하면 영민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영악해 질수록, 나의 삶은 좀 더 안정적이여 졌다.
나이 답지않게 정정한 그는, 꽤나 탄탄한 몸에 어려보이는 인상이라 그리 역겹지는 않았다. 다만 그 스스로는 딸로, 손녀로 여기던
나를 품는 것을 탐탁치 않아했고, 결국 우리들의 이러한 관계는 네, 다섯번 이어지다 내가 성년을 맞으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죽었을 때는 신기하게도 눈물이 났다. 그는 내게 있어 유일한 가족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와 닿았다.
"제 몫으로 떨어지는 돈이 조금이라도 늘어나면 나불거리는 주둥이를 닥칠테지. 어쩔 수 없어- 영감 죽은지 이제 겨우 넉 달인데.
신경쓰지 말고 구역관리에나 힘써."
"네, 보스."
"보고 끝났으면 나가서 볼일 봐."
"그리고, 저..."
"음?"
확인 후 다시 건넨 보고서 뭉치를 받아든 강이가 끼고있던 안경을 한 번 치켜올린 후, 말을 이어간다.
"저번에 한씨에게 내준 돈 말입니다."
"아, 그래. 그 포장마차 한다던."
"네. 사정이 어렵다며 빌길래 이자를 월 15%에서 12%로 내려서 돈을 내어줬었습니다. 원금은 500만원 이었구요."
"그래서?"
"돌려받아야 할 금액이 이번 달로 정확히 2천 800만원인데, 아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더군요."
"장사 한두번 하는 것도 아니고. 애들 풀어서 찾던지 아님 자식새끼들을 잡아 오던지."
"털어 보니 집안 살림이라고는 식기에 고물 TV하나가 다랍니다. 누더기 이불 두장이랑요."
"가족은? 혼자 살았나?"
"암으로 병원에 몸져 누워있는 부인과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들놈 얼굴은 반반한지 동네 호스트바에서 일을 한답니다."
"잘됐네. 어느정도 굴러봤으면 긴소리 필요없이 가져다 쓰면 될테지."
"보통놈이 아닌지 잡기가 쉽지 않답니다. 허락만 하신다면 진철이 놈을 잠시 빌릴까 합니다만."
호오? 기룡파는 큰 조직이다. 규모가 큰 만큼 꽤나 실력있는 놈들이 많이 모여있는데. 그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간다라?
내 두 눈에 떠오르는 흥미를 읽어낸 것인지 크흠, 하고 강이가 목을 한 번 가다듬는다.
"크게 관심을 두실일은 아닙니다. 일의 효율적인 처리를 위해 진철이가 필요할 뿐. 저녀석 체력을 따라가는 이가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더군요."
"...강아,"
"말씀하십시오."
"내가 요즘 막 몸이 근질거리고 그래."
"...예?"
"무력하다 해야할까. 더위를 먹은 건지...영 기운이 안 나네."
"갑자기 그게 무슨...?"
"피식, 심심하던차에 잘 됐다는 소리야. 직접 구경이나 한 번 하자. 호스트짓 한다는 그 놈 새끼 반반한 면상떼기."
-
밤의 거리는 현란한 네온사인 불빛들로 가득하다. 형광색의 물결들이 잔잔하게 가라앉은 밤하늘을 밝히고, 조용하던 거리는
저질스런 대화들과 경박하기 그지없는 웃음소리로 채워진다. 구석 작은 골목에서 나는 묵묵히 담뱃불을 밝힌다. 후욱,
들이마셨다가 내뱉는 담배연기에 시야가 잠시 뿌옇게 흐려졌다가, 이내 깨끗해진다.
"잡았답니다."
옆에서 통화를 마친 강이가 쥐고있던 휴대폰을 자켓 안쪽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툭툭, 타들어간 담뱃재를 털어내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시간이 흐르고 담뱃대가 짧아지자 강이가 그것을 손수 빼어내 바닥에 버리고 새 담뱃대를 입에 조심스레 물려준다. 찰칵,
불이붙던 순간이었다. 좁은 골목 안으로 시꺼먼 무리가 몰려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그래."
조직원들은 나를 형님이라 부른다. 박기태의 명령이었다. 혹여나 여자라고 내가 무시당할까, 그도 나름 걱정했었나보다.
대략 일곱명 가까이의 덩치들이 물러나자, 그들 사이로 진철이와 그가 끌다시피 해서 데려오는 남자 하나가 보인다. 푹 숙인
고개가 왠지 낯익다 싶을 때 털썩, 진철이가 그를 내 앞에 던지다시피 해 무릎꿇힌다. 어디, 그 잘난 면상이나 한 번 보자.
물고있던 담배를 그대로 뱉어버린 뒤, 무릎꿇은 남자에게 다가가 같은 높이로 쪼그려 앉았다. 입안에 머금고 있던 담배연기를
후우-하고 그 머리 위로 뿜어주고서 숙여진 남자의 고개를 손가락으로 처억, 들쳐 올렸다.
그리고,
"...어?"
"...?!"
눈에 익은 얼굴. 검은색 머리카락이 살짝 흘러내려 매력적인 오드아이를 가린다. 그도 날 알아보았는지 눈동자가 커다랗게
늘어났다가, 곧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너였냐, 오백원.
"아버지 이름이 한서명씨 되시나?"
"..."
"묻잖아. 니 새끼 애비이름이 한서명이냐고."
"...이런. 가출소녀가 아니라 조폭계집애였...쿨럭!"
대답대신 딴소리를 중얼거리는 남자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진철이 그의 옆구리를 발로 차버린다. 찌푸린 표정의 오백원이
더 할말이 있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 그치고서는 빤히 나를 바라본다.
"이건 뭐 병신도 아니고. 세번째로 묻는거야, 제대로 대답해. 니 새끼가 한서명이 새끼냐?"
"몰라, 그런사람."
"저런. 멀쩡히 호적에 니 아비라 돼있는데 모르면 쓰나."
"...모르는 사람이야."
하아-. 뻔한 레퍼토리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기야 아비 잘못만난 네 죄지, 누구를 탓하겠니. 몸파는 거지새끼라더니. 아비는 돈
털어먹고 날라버리고, 엄마는 오늘내일 시급을 달리고. 저는 호스트바에서 몸이나 굴리니 너도 참 딱한 인생이다.
"후우-.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주겠는데...금액이 적지 않아서 말이야. 대신 좀 메꿔주셔야겠는데?"
"아 글쎄 모른다니까, 그런사람...!"
"초원병원 704호 강경아님. 아마 유방암 3기시라지?"
"...!!"
눈앞의 상황 속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옅은 여유를 풍기던 오백원의 몸이 흠칫, 하고 굳어버린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의 표정.
어금니를 꽉 깨물고 날 노려보는 그의 두 눈에 분노의 색을 띄는 짙은 얼룩이 가득찬다.
"너는 니 아비 새끼가 아닐지 몰라도 니 어미는 한서명이 마누라가 분명한 듯하니, 어쩌나. 대신 갚아주셔야 할 빚이 꽤 되는데."
"빌어먹을! 우리 어머니 건들면 가만 안 둬!"
가만 안 두면 어쩌게. 잔뜩 비꼬아진 말이 혀끝에서 맴돈다. 사실 참 영양가 없는 대화다. 일단 손에 잡혔으니 배를 갈라 장기를
팔아먹든, 유흥가에 넘겨 몸을 굴리든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아비가 서명한 신체포기각서에는 분명 서명한 본인이
없어질 시에는 그의 가족으로 그 댓가를 대신한다는 구절이 상세히 명세되어있기 때문이다.
원래 그를 잡은 목적 역시 그러했지 않은가. 호스트바에서 일을 했다니 적당한 재벌집 할머니들 애인으로 보내 한 몫 두둑히 챙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오후의 찬란한 햇볕아래서 빙그레 웃던 네 미소가 생각이나자,
나는 네가 왠지 조금 아깝다.
"제안을 하나 하지."
"...뭐?"
지독히도 차갑게 얼어있던 그의 얼굴이 살짝, 빈틈을 내 보인다. 흔들리는 푸른색과 흑색의 눈동자가 꽤나 봐줄만하다.
"나 있잖아, 사실은 동물을 참 좋아하거든."
"...?"
갑작스런 내말에 오백원뿐만 아니라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진철이와 강이의 표정까지 희미한 당혹감으로 물든다.
그래, 나도 지금 내가 뭐라 지껄이는지 당황스러운데. 너희들이야 오죽하겠니.
"그런데 고양이를 키우자니 발톱을 새울까 무섭고. 강아지를 키우자니 똥오줌 못가리는게 영 탐탁지 않아서 말이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
"개새끼가 되라."
"뭐?"
긴장을 놓지않고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주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순가 버엉, 순진하게 변한다. 굽혔던 무릎을 피고서 그를
내려다보던 나는 쿡쿡, 소리내서 뱉고 싶은 웃음소리를 겨우 목넘어로 삼키고 말을 이어갔다.
"개새끼가 되어서 주인님께 충성을 다해봐. 어느 잡종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마리에 2천 8백만원짜리라니. 비싸긴 해도 그정도
가치는 있는 듯 하니 내가 인심써서 키워줄께. 어때, 괜찮지 않아?"
"미친! 너 제정신이...윽! 쿠,쿨럭!"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을 놀리는 녀석의 배를 발을 들어 차버렸다. 명치가까이를 꾸욱, 밟고 누른 체 찌푸려진 그의 눈과 나의 두
눈을 정확히 맞추었다. 이거, 교육이 좀 필요하겠는 걸.
"쯧, 어디서 앙탈은. 우선은 흐음...아, 그래. 어서 짖어보렴 개새끼야."
스멀스멀 입꼬리로 웃음기가 피어오는 듯 했다.
나답지 않아. 머릿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물론 알고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왈왈, 귀엽게."
네가 목숨을 바쳐 모셔야 할 이 주인님을 향해 말이야.
예쁘게 봐주세요 :D (혹시 필요하시다면 업뎃쪽은 *여왕*입니다)
- NOAH
첫댓글 *여왕* 뭔가 새로운 스타일인것가타여, 기대할께요 ㅋㅋㅋ
재미있어요ㅎㅎ 어떻게 전개될지 무지 무지 궁금하네요~~
여왕 ㅋㅋ다음편도기대여 ~
*여왕*/오 좋아요 이런거ㅋㅋ잘 읽고가구요, 다음편 기대할게요:-)
여왕 재밌어요!다음편도기대할게요♥
여왕 흐흐 재밋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