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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 목사님에 대하여,
한국교회사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께서 지니셨던 “회개”와 “기도”와 “말씀”과 “전도”와 “천국 소망”의 영성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태동케 한 1907년 부흥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는데 29세 때 예수님을 믿은 다음부터 40여 년 동안 날마다 “회개”하면서 평생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는데, 380여 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고, 3천 여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8백 여명을 목사와 전도사와 장로로 세웠고,6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처음에는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습니다. 그는 1869년 3월 15일 평남 안주에서 출생했는데 네 살 때부터 가정에서 어머니로부터 한문을 배웠고일곱 살 때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습니다.열한 살 때는 열 여섯 살 되는 소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길선주는 소년시절부터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9살 때부터 산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창일이라는 도사가 써준 ‘산신 차력’이란 주문을 밤낮으로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길선주는 21살때부터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옥경의 ‘구령 삼정’ 이란 주문을 외웠습니다.
때로는 21일 때로는 49일 때로는 100일씩 기도하며 주문을 외웠습니다.
결국 길선주는 선도의 영험과 신통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차력에 성공하고 선도에 통달한
길선주의 이름이 널이 알려지자 평양 시내에 그가 나타나면 그를 가리켜 “길 도사” 라고
부르며 수군거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느끼며
계속해서 수도에 힘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쌤 마펫 선교사가 1890년 1월 제물포를 거쳐 경성에 도착했고 그 해 8월 잠시 평양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고 경성으로 갔다가 1893년부터 평양에 와서 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길선주는 평양 널다리 골에 살고 있었는데 괴상한 서양 사람이 나타나서 새 교를 전한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동하여 쌤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서 그와 담론은 나누었습니다. 쌤 마펫 선교사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전도했습니다. 길선주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알쏭달쏭하여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길선주는 진리를 더 알아보기 위해서 제자 두 사람을 마펫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돌아온 김종섭이 길선주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길선주는 어이가 없었고 그의 배도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길선주는 “이선생 자서전”과 “장원양우상론” 이란 전도책자도 받아서 읽었지만 별로 감동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천로역정”을 받아서 읽었는데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선도와 서양 도에 대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번민이 더해갔고 소화불량까지 생겼습니다. 길선주는 결국 마음에 번민을 가지고 깊은 밤 이른 새벽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길선주는 고민하며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이시여, 저는 지금 심한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신봉하던 선도는 정말 섬길만한 도인지 의심스럽고, 예수교에는 과연 영생의 진리가 있는지 알 수 없어 마음이 몹시 괴롭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사 이 마음을 가라앉아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수삼일간 계속했습니다. 밤이 깊어 새벽 한 시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정말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인지 알려 주옵소서” 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안에서 청아한 피리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탕탕 하는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깜짝 놀라는 순간 하늘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하고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길선주는 너무도 무서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엎드린 채 “아버지여,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울부짖었을 때 그의 몸은 불덩어리가 된 듯이 뜨거웠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길선주는 새로 태어났습니다.
아침에 그를 찾아온 김종섭이 이 사실을 알고 너무 기뻤습니다. 두 사람은 그 길로 성경책을 끼고 널 다리 교회로 가서 예배에 참석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길선주는 교회에서 처음으로 공 “기도”를 했는데 성령의 감동을 받아 너무나 유창하고 간절하고 은혜롭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길선주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길선주는 두문불출하고 “기도”와 “성경”에 전력했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와 만나고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도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기록을 읽을 때는 환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29세 되던 해인 1897년 8월 15일 길선주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조롱했지만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상점 일을 돕고 있던 이정식에게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내에게 “전도”해서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길선주는 너무 기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길선주는 1898년 30세 때 평양 널다리 교회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널다리 교회는 1899년에 장대현으로 옮겼고 1900년에는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길선주는 1901년 33세 때 장대현교회의 장로로 장립되었고, 1902년에는 조사(전도사)가 되어 목회에 전념했습니다. 해박한 성경 지식과 유창한 설교와 기도와 성령으로 충만한 그의 목회 사역은 장대현교회의 급속한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조사가 되어 그가 받은 봉급은 매월 6원이었는데 그가 약국을 할 때 받은 봉급 80원에 비하면 너무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사가 된 후부터 그는 돈과 부에 대한 관심을 모두 버리고 현 평생 “청빈”의 생활을 했습니다. 사모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많은 핍박과 탄압이 있었으나 길선주 조사는 더욱 더 “기도”에 파묻혔습니다. 1903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는 매일 한 시간씩 “기도”하고 한 시간씩 “성경”을 읽고 암송했습니다.
길선주 조사는 1905년 영국 웨일즈 지방에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 지역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사람들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이었습니다. 드디어 1906년부터 회개운동과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 1월이 되었습니다. 전국 각처에서 1,500여명의 신자들이 장대현교회에 모여 10일 동안 사경회를 가졌습니다. 그 사경회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회개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 글들을 소개합니다. “길선주 장로는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 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이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존귀하신 분이 비천하고 누추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이고, 귀중하신 분이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며, 전능하신 분이 간절히 두드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귀빈을 맞아드리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자애하신 귀빈을 환영치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고, 간절하신 음성을 듣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며, 굳게 닫은 방문을 열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길 장로는 ‘문을 열라 문을 열라 문을 열고 환영하라’ 라고 준엄하게 외쳤다.”
“길선주 장로의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을 영접하라’는 열띤 설교가 시작되었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의 설교는 흐르는 시냇물 같이 회중의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설교가 끝나고 길 장로의 기도가 시작되자 감동을 받은 회중은 자기들도 모르게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통회자복했다. 장내는 금새 울음바다가 되었다. 죄인 잡으러 왔던 순표가 회개하고, 기독교를 비판하려 왔던 중이 개종하고, 신부가 은혜 받고 감격하여 염주를 길 장로에게 기념으로 주기도 했다.” “그는 기도회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 라고 하며 지난 날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그가 친구 한 사람이 죽으면서 남은 재산을 잘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유산을 정리하기는 하였으나 그 중의 1백원은 수고비조로 인정하여 자기가 소유하였다. 길 장로는 기도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속였고 그 친구와 그의 부인을 속인 도둑놈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그 돈을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라고 공중 앞에서 눈물과 함께 자복하였다. ‘나 때문에 온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올시다’ 라는 자복기도는 쉬지 않고 계속하였다. 회중은 이 때 모두 마루 바닥을 치면서 회개하기를 시작하였다.” “기도가 계속되자 무겁고 슬픔마음이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한쪽 구석에서 어떤 사람이 울기 시작하였고 이어 모든 청중들이 울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어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는 털썩 주저앉아 흐느껴 울다가 마루 위에 뒹굴며 고뇌에 찬 모습으로 마루바닥을 두 주먹으로 두들겼다.
죄를 고백한 후에 이따금씩 모든 청중들이 한 목소리로 통성기도를 했는데 수백 명의 청중이 함께 모여 드린 이 통성기도의 감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 장로라는 분이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외쳤다. ‘나를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시작했는데 ‘아바지’‘아바지’ 외에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교회당 지붕이 벗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김장로 곁에 몸을 던지고 흐느껴 울면서 이 전에 결코 한번도 기도해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기도했다.” (윌리엄 블레어, 「한국의 오순절」).
길선주 장로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 일곱 분 목사님들
중의 한 분으로 안수를 받았고,
장대현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고,
총회 전도국장이 되어 6년간 시무했습니다.
1908년 3월 1일에는 한국교회 역사상
목사로는 처음으로 세례식을 거행했습니다.
1919년 길선주 목사님은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시다가
2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옥중에서는 “기도”와 “성경” 읽기와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출옥 후에 전국을 누비며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1935년 11월 26일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마지막 폐회 축도를 마치고 뇌출혈로 쓰러져 35 곳의 집회를 남겨두고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으로 옮겨가셨습니다. 한 말씀 더 드리면 길선주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1만 독 하면서 재림과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사셨는데 그의 부흥회의 주제는 주로 “종말”과 “재림” 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길선주 목사님이 내세를 너무 강조하면서 현세적인 삶을 도피하게 만들었다고 무식하게 비판을 하지만 저는 길선주 목사님께서 강조하신 “재림”과 “천국 소망”의 신앙이야말로 예수님과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이 강조한 너무너무 귀중한 “복음 신앙”이었고 생각합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아버지”로 한국교회를 세우는데 한 평생을 다 쏟아바치고 하나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길선주 목사님의 손을 잡고 이곳 저곳으로 부흥회를 다니시곤 했는데 길선주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했습니다. 즉 길선주 목사님은 사경회를 인도하실 때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고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찬송을 부르시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시곤 했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도 했습니다. “그때는 성령의 지배를 받으려고 무릎 꿇고 울면서 기도했는데 지금은 각종 음악과 프로그램으로 성령을 지배하려고 대들어요.” “요새는 사경회는 없어지고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부흥회만 있어요.
길선주 목사님은 계시록을 만 독을 했고 계시록을 전부 암송을 했는데 그분의 말씀 한마디 한 마디는 온 몸과 영혼을 쏟아 바치는 말씀이어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몸이 떨기도 했다고요.”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께서는 “회개”와 “기도”와 “말씀”과 “전도”와 “천국 사모”의 영성을 몸에 지니고 “회개”와 “기도”와 “말씀”과 “전도”와 “천국 사모”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한국교회의 기초를 튼튼하게 세우시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얼마나 귀중하고 얼마나 보배로운 삶과 사역과 죽음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길선주 목사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존경하고 또 존경합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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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글 감사합니다
귀한 목사님의 간증 너무도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길 되세요.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