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이동하는 날이다. 어제 코펜하겐 기차역에서 예매한 오슬로행 기차표의 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았다. 오후 1시 35분에 출발하여 스웨덴의 예테보리에서 갈아타고 오슬로에 도착하는 시간은 밤 10시 20분. 거의 하루 종일 타게 될 기차 안에서 여태까지의 여행을 돌이켜 보면서 일기나 정리해야겠다.
이젠 자명종 없이도 7시쯤이면 눈이 떠진다. 긴장하면서 다니는 탓인가 보다. 유럽여행 간다고 선물 받은 앙증맞은 자명종시계를 암스테르담에서 떨어뜨린 후로는 고장이 나버렸다. 이래서 난 2층 침대가 싫다. 올라 갈 때 몸의 어딘가가 꼭 멍이 든다. 그 후론 체크인 할 때 꼭 아래층 침대로 부탁하곤 한다.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체크아웃을 한 뒤 숙소를 나섰다. 기차역까지 버스는 정말 신기하게도(?) 시간이 정확하다. 우리나라에서 시내버스를 타면서 늘 불규칙한 배차 시간에 익숙해서일까. 하긴 이렇게 교통량이 많지 않은 나라에선 정확한 배차시간이 가능하겠지만...
북유럽의 기차는 미리미리 예약해야 한다는 말을 어제 코펜하겐 역에서 만난 한국인이 가르쳐줘서 오슬로-베르겐, 베르겐-오슬로, 오슬로-스톡홀름 구간도 미리 예약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이동하려면 항상 긴장하게 된다. 좌석 예약이 모두 끝나서 표를 못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유럽 중 그나마 물가가 저렴한(?) 덴마크에서 예약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야간이동구간은 침대차로 예약했다. 생각보다 비싸진 않다(138kr) 유레일패스가 없었다면 아마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했을 꺼다.
26세 나이제한으로 저렴한 2등석을 살 순 없었지만(이래서 여행은 한 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가야 한다니까) 1등석은 나름대로 제 값을 한다. 일단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서 좋고, 화장실도 넓고, 열차에 따라서 커피나 쥬스를 비롯한 음료수도 서비스 받기도 하고 식사 때는 식사도 제공된다. 좌석마다 있는 모니터로 영화도 볼 수 있다.
코펜하겐에서 예테보리까지 탄 열차에서도 역시 식사가 제공되었다. 음료서비스 땐 항상 맥주를 주문한다. 맥주마시고 잠시 눈감고 있으면 지루한 여행시간이 좀 짧아지기도 한다.
창 밖의 풍경이 국경을 넘으면서 점점 달라지고 있다. 코펜하겐에서 스웨덴으로 들어갈 땐 한강 다리 건너듯 간단하게 그냥 다리만 건넌다. 국경의 개념이 무색하다. 어느덧 예테보리에 도착했다. 오슬로행 열차의 플랫폼과 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플랫폼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타야 할 열차가 안 온다. 오슬로행 열차의 시간이 지연되었다는 방송이 나온다. 한시라도 빨리 노르웨이로 가고픈 마음에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다.
드디어 열차도착. 예약한 좌석의 칸을 확인 후 냉큼 열차에 올라 내 좌석을 찾아가니 웬 노랑머리 남자가 앉아있다. 내 자리는 창가인데 그 남자는 맞은편의 여자친구처럼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난 그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거기 내 자린데요”
내가 좌석표를 보여주자 그는 정말 자리를 바꾸고 싶냐고 묻는다. 당연하지 임마~~ 거기 내 자리야. 너 같으면 창가자리 예약하고 통로 쪽에 앉고 싶니?
그는 순순히 자리를 바꿔준다. 그러자 그의 여자친구 옆에 자리를 잡은 튼튼한 체구의 아가씨가 다시 자리를 바꿔줘서 그 커플들은 나란히 앉아가게 되었다.
열차는 곧 출발하였고 창밖의 풍경은 점점 초록색으로 바뀌어진다. 특히 호수가 많이 보인다. 중간지점에서 그 커플들이 내린 빈자리에 다른 칸에서 온 한국인 여학생 두 명이 앉게 되었다. 우리 세 명은 곧 통성명을 하고 오슬로까지 심심하지 않게 수다를 떨면서 갔다. 그들이 예약한 열차의 칸이 아예 없길래 검표원에게 물어보니 아무자리에나 앉으라고 하였다나.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군.
당장 오늘밤의 숙소는 한국에서 예약하지 않고 와서 좀 불안했지만 그들도 마찬가지라서 우린 오슬로에 도착해서 역 근처의 유스호스텔로 같이 찾아가기로 했다. 관광경영이 전공인 그들 중 한 여학생은 무척 쾌활한 성격으로 배낭여행 경험이 많았고, 경비를 위해서 트럭행상까지 할 정도로 생활력이 강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오슬로역에 도착했다. 시간은 밤 10시가 넘었지만 깜깜하지가 않다. 여름이라서 그런가. 그래서 숙소까지의 찾아가는 길이 무섭지가 않았다.
늦은 시간이라서 시내엔 사람들이 별로 없었지만 가끔씩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유스호스텔의 주소를 보여주며 물어보면 영어로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키가 큰 어떤 남자가 우리를 호스텔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는 우리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았다. 한국이라고 하자, 자기가 일본어를 좀 배웠는데, 우리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는 일본인이 아닐거라고 생각했단다.
찾아온 역 근처의 유스호스텔은 그리 맘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 하루 밤만 참기로 하였다. 아침식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고 135kr.
하루 종일 기차를 타서 다리가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일찍 일어나기 위해 샤워 후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2002년 8월 11일 오슬로
다음날 일찍 눈을 떠서 동행한 여대생들을 깨운 뒤 체크아웃을 하고 내가 예약한 숙소로 이동했다. 트램을 타고 15분쯤 시내 외곽으로 이동했는데 역시 오슬로 최대의 유스호스텔답게 규모도 크고 시설도 좋다. 다행히 자리가 있어서 그들도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아래층 침대로 부탁한 뒤 짐을 라커에 넣어 두고 아침을 먹었다.
원래 체크인을 하면 다음날 아침을 먹을 수 있는데 리셉션의 직원은 우리가 아침 일찍 온 것으로 봐서 아직 식사 전이라고 생각했는지 지금 식당에 가면 아침을 먹을 수 있으니, 지금 도착한 거 티나지 않게 짐을 라커에 넣어두고 먹으란다. 물가가 비싼 북유럽에서 식사비를 절약하게 되어서 무척 고마웠다.
식당엔 어린 학생들로 붐볐다. 방학이면 캠프가 많은 유럽에선 종종 유스호스텔에서 단체 학생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들은 거의 자기 체구만한 짐들을 가지고 다니는데 집을 떠나 여행을 하면 독립심을 키우기에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방학이면 더 많은 학원에 시달리는 우리나라 학생들과 비교되는 단면이었다.
식당의 메뉴는 다른 유럽과 비슷했지만 종류가 더 많았고 특히 여러 종류의 과일쨈이 맛있었다. 우유를 넣은 콘프레이크, 치즈와 햄을 넣은 빵, 요구르트, 그리고 커피와 쥬스, 마지막으로 녹차까지 마신 후 우린 숙소를 나서 시내관광에 나섰다. 오후 3시까지는 유스호스텔의 청소시간이라서 방에 들어갈 수가 없다.
트램 타는 곳까진 언덕위의 숙소에서 넒은 잔디를 가로질러 지름길이 나있다. 사람들이 하도 많이 이 길로 다녀서 그런가 보다. 넒은 잔디밭엔 축구골대도 있다. 누군가 이곳에서 축구도 하나보다.
일단 역의 인포메이션으로 가서 오슬로 근교의 열차시간표도 얻고 여러 피요르드의 코스에 대해서도 자세한 정보를 얻었다.
오슬로 여행의 첫 코스로는 뭉크미술관을 선택했다. 미술관이 개관하는 시간에 가야 좀 더 북적거리지 않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으니까.
하루 종일 트램과 버스, 지하철을 탈 수 있는 ‘닥스코트’를 아까 트램 안에서 50kr를 주고 샀다. 1회권(20kr)에 비해 저렴한 가격이다. 일주일권도 파는데 그건 운전기사에게 살 수 없고 역이나 편의점에서 살 수 있다.
1kr가 우리나라 돈으로 약 160원-165원이니 대충 물가를 짐작해보면 역시 북유럽은 비싸다. 편의점과 대형 수퍼마켓의 가격도 많이 차이가 난다. 가격차이가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론 필요한 것은 큰 수퍼에서 한 번에 장을 보곤 했다.
내가 노르웨이에 머물면서 소비한 품목들을 대충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콜라 600ml : 19kr
맥주캔 : 29kr이상
라이트 맥주(조그만 병) : 17kr
바나나 1개 : 약 5kr
중국집의 볶음밥이나 덮밥 종류 : 65-90kr
아이스크림 종류 : 8-15kr
감자칩(큰 사이즈) : 20kr 이상
라면 1개 : 18kr
샐러드용 포장 야채 : 약 30kr 내외
오렌지 쥬스 1L : 큰 수퍼에서 9kr 이상
샌드위치 : 30kr 내외
기념 뱃지 : 40kr
모튼 음반 : 119kr, 179kr
엽서 : 10kr 내외
기억이 나는 대로 썼지만 물론 가게규모에 따라서 차이가 많이 난다.
그나마 저녁식사는 큰 수퍼에서 장을 본 다음 유스호스텔의 주방에서 만들어 먹었다.
뭉크미술관은 오슬로 역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다른 유럽의 미술관처럼 그림 감상하기 힘들 만큼 북적거리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
노르웨이의 자연이 그대로 담긴 그의 작품들은 밝고 아름다운 자연을 담고 있기 보다는 우울한 죽음의 이미지가 엿보인다. 역시 노르웨이의 아름다운 숲이 연상되는 신비로운 초록색을 잘 사용한 작품들이다.
초록색이 이렇게 우울할 수도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미술관의 한 방에서는 그의 일대기가 상영되고 있고, 그의 유화와 판화 작품 이외에도 포스터와 책, 그가 사랑한 여자들과의 생애, 그리고 성장한 방의 분위기까지 재현해 놓고 있다.
미술관내에 있는 아트샵에서 엽서 몇 개를 고른 뒤 그래도 저렴한 기념품인 열쇠고리를 찾는데 보이지가 않는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열쇠고리는 없단다. 좀 서운했다. ‘절규’나 ‘마돈다’의 이미지를 열쇠고리로 만들면 재미있는 기념품이 될텐데... 다른 유럽의 대부분의 미술관에선 대부분 유명 작품의 이미지를 기념품으로 활용하는데 적극적이다.
거의 3시간을 미술관에서 보냈더니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오랜만에 중국집에 가서 밥을 먹기로 했다. 오슬로역으로 돌아와 역내의 중국 음식점에 들어갔다. 점심 식사 메뉴판을 보고 가장 매운 요리를 주문했다. 가격은 79kr.(약 13,000원)
닭고기와 야채가 탕수육 비슷한 소스에 볶아져서 덮밥처럼 밥과 같이 나온다. 그런대로 맛이 괜찮다. 물이 풍부한 나라인지 물은 무료이다. 물을 주문하니 수돗물을 그대로 담아서 준다. 북유럽은 물이 깨끗해서 수돗물을 그대로 받아 마셔도 된다. 그래서 노르웨이 여행 내내 물값을 절약할 수 있었다.
밥을 먹고 있는데 바로 옆 테이블의 여학생 두 명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암스테르담에서 코펜하겐까지 야간열차를 타면서 만났던 얼굴들이다. 그들은 방금 송내 피요르드 투어를 예약했다고 한다. 물가가 비싸서인지 노르웨이에 와서는 한국 배낭족들을 만나기가 쉽지가 않다. 서로의 즐거운 여행을 빌며 중국집을 나섰다.
역의 인포메이션이나 유스호스텔에서 무료로 배부해 주는 시내 지도는 비교적 시내관광을 하기 쉽게 잘 안내가 되어 있다. 오슬로역이 워낙 커서 카를 요한거리로 가는 방향을 잡기가 쉽진 않았다. 이럴 땐 무조건 물어봐야지 뭐.
오슬로 시내와 역 주변엔 군인배낭을 둘러 멘 군인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마 휴가 나온 군인들 같다.(며칠 뒤 알게 된 오슬로 현지인이 말해줬다) 가끔 하얀 해군 복장을 한 군인들도 보인다. 옷걸이(?)가 좋아서인지 잘 다린 군복을 귀여운 감청색 빵모자(?)와 같이 빼입은 그들은 대부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멋지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어린애(?)들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거나 20대 초반 정도...
노르웨이의 군대가 지원제가 아닌 징집제라는 것을 아는지? 우리나라처럼 말이다. 하지만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군대 가기를 원하지 않는 대부분의 청년들은 군대를 가지 않는다고 한다.(‘다음’의 노르웨이 카페에서 글을 읽은 기억이...)
그러면 그들이 모두 영창에 가냐고? 그것은 아니다. 그들은 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 사회봉사를 한다. 병원이나 기타 여러 사회시설에서 청소와 다른 일을 하면서 봉사시간을 채우는 것이다. 내가 알기론 폴과 맥스는 사회봉사를 하고 모튼은 군대를 간 것으로 들었는데... (맞나요?)
그래서 모튼의 근육이 멋있는 건가? ㅎㅎㅎ...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군인들처럼 모튼도 과거의 언젠가 군복을 입고 휴가를 나왔을 거라고 상상해 본다. 군복을 입은 모튼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너무 멋있다. 보나마나지 뭐. 카페의 여성분들~~~ 공감하시죠?
바로 옆에 군인 두 명이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카를 요한 거리’의 방향을 물으니 그들도 여기 사람이 아니라서 잘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서 바로 옆의 경찰서를 가리키면서 저기서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 한다. 황금색의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귀여운 웃음으로 친절하게 말해 준 그 군인은 동료와 같이 역 안으로 들어갔다. 그 잠깐 동안의 대화 중 떠오른 재미있는 상상 하나 ‘음... 저 속눈썹에 성냥개비를 올리면 몇 개나 올라갈까?’
경찰차 한 대가 서 있는 경찰서는 역 건물 중 일부이다. 마침 잘생긴 젊은 경찰 한 명이 문 앞에 서있다. 대부분의 노르웨이 사람들처럼 파란 눈의 금발인 그는 여기서 멀지 않다며 유창한 영어로 친절하게 방향을 가르쳐준다.
노르웨이 여행 내내 느낀거지만 영어로 질문했을때 열이면 열 명 모두 영어로 유창하게 대답을 한다. 북유럽 모든 나라들이 마찬가지다. 외국어를 하는 것이 이곳에선 대단한 재능(?)이 아닌것이다.
역에서 왕궁까지 가는 길은 오슬로의 번화가이면서 쇼핑과 관광의 중심지이다. 우리나라의 명동이나 종로쯤 될까. 하지만 길이 널찍해서 사람들이 부딪힐 정도로 복잡하진 않다.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가수들, 각종 악기들로 연주하는 사람들, 꼭두각시 연극을 보여주는 사람, 오픈카페들...
유럽의 다른 큰 도시에서의 광경들과 많이 다르진 않지만 좀 더 여유 있는 모습들이다. 오슬로 대성당과 입센의 작품이 상영되는 국립극장, 오슬로 대학, 시립 미술관, 시청, 백화점 등, 대부분의 관광명소가 이 길에 모여 있다.
시청 뒤에는 페리가 운행되는 선착장이 있다. 민속 박물관등이 있는 근처 비그되위 섬이나 오슬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작은 휴양지 섬 등으로 운행되는 페리들이다. 역시 1일 교통권으로 승차할 수 있다. 페리를 20분간 타고 비그되위 섬에 다녀왔다.
가는 길엔 크고 작은 보트들이 많다. 모두 개인 소유로 주말이나 휴가 때 보트가 있는 사람들은 근처 호수나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보트마다 노르웨이 국기가 걸려 있고 사람들은 일광욕을 하며 가족들과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름이 짧아서일까. 햇볕을 두려워(?)하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풍경이다. 나도 낮에 돌아다닐 때에는 거의 썬크림으로 무장을 하고 다녔지만 여행이 끝날 무렵엔 많이 그을렸다.
일요일이라서 큰 수퍼가 모두 문을 닫아 역 근처의 편의점에서 장을 봐야 했다. 혹시나 했는데 미스터리 라면이 있다. 쇠고기 맛, 닭고기 맛, 매운 맛 등 귀여운 포장에 한글이 써있다. 맥주를 사고 싶었는데, 일요일이라서 술 종류는 팔지 않는다고 한다. 일요일에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곳은 pub 이나 카페로 가야한다고 편의점 여직원은 말한다.
맥주를 한 잔 하고싶었던 우리는 너무 실망을 하였다. 그렇다고 비싼 pub에서 한 잔을 하자니 출혈이 너무 클테고... 월요일까지 참는 수 밖에 없지 뭐.
앞으로 오슬로에 3일은 더 있을 예정이니 나중에 더 천천히 구경하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기차에서 만난 그들과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침대는 창가의 1층으로 자리를 잡고 간단히 빨래를 한 다음 주방으로 가서 라면을 끓였다.
편의점에서 사온 계란도 풀어서 먹었는데 라면 맛은 포장에 있는 것처럼 매운 맛이 아니다. 전혀... 아마 우리나라에서 이런 라면이 팔린다면? 맛이 심심해서 사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 같다.
라면을 다 먹고 설거지까지 끝냈는데 내가 라면을 끓이기 전부터 파스타를 삶고 있던 한 여자애는 아직도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역시 스파게티 삶는 시간엔 인내력이 필요한 것 같다.
짐 줄인다고 먹을 것을 하나도 챙겨오지 않은 것이 좀 후회가 된다. 유럽의 맛없는 라면을 먹으면서 생각한건데 다음에 유럽 올 땐 꼭 한국라면의 스프를 가지고 와야겠다. 부피도 적고, 쉽게 살 수 있는 파스타를 우동처럼 오래 끓여서 스프를 넣으면 맛이 그럴 듯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2002년 8월 12일 오슬로
오늘은 오슬로 근교로 가보기로 했다. 어제까지 동행했던 두 여학생들은 아침 일찍 코펜하겐으로 가는 페리를 타기 위해 떠난 것 같다.
아침을 먹고 중요 소지품을 락카룸에 두고 나오니 어디서 많이 듣던 음악이 들린다. 아하의 ‘lifelines'... 순간 그 감동이란... 멀리 노르웨이에 와서 새삼 그들의 모습이 더 뚜렷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오히려 이곳에서 들리는 것이 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리셉션(프론트)에 앉아 있는 직원 아저씨에게 지금 나오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방송되는 것이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이후 노르웨이에 있는 동안 역내 쇼핑센터나 레코드 가게 등에서 아하의 새 앨범을 몇 번 듣기도 하였다)
난 너무 반가운 마음에 내가 너무 너무 좋아하는 가수라고 했다. 아저씨는 “아하는 노르웨이에서 무척 인기가 좋아요. 일본에도 여러 번 공연했어요”라고 한다. 아마 나를 일본 사람으로 생각했나보다. 난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예, 알아요. 한국에서도 인기가 좋답니다. 데뷔할 때부터 좋아해온 팬들이 많아요”
아저씨는 그제서야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웃는다. 난 음악이 끝날 때 까지 아저씨랑 수다를 떤 다음 유스호스텔을 나섰다. 기분이 너무 뿌듯했다.
꾸물꾸물한 날씨가 수상해서 우비를 챙겼다. 짐이 될까봐 우산을 챙겨오지 않았더니 가끔 비가 올 것 같이 날씨가 흐린 날은 아쉽기도 하다. 일단 역으로 가서 콩스베르그행 기차시간을 확인했다. 이런, 다음열차가 7분 후 출발. 플랫폼으로 뛰었다. 1시간 20분 정도의 거리라서 기차는 한 시간 간격으로 자주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철을 타고 창 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가자니 어느새 콩스베르그에 도착했다. 그런데 콩스베르그 역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우비를 뒤집어 쓰고 역을 나와 보니 바로 인포메이션이 보인다. 들어가서 안내 책자도 받고 콩스베르그에서 가 볼만한 곳을 물어보니 젊은 남자직원은 오래된 교회과 구시가와 신시가, 쇼핑센터 등을 소개해 준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엽서 몇 개를 사서 인포메이션을 나섰다.
콩스베르그는 자그마한 마을이다. 깨끗한 강이 흐르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구시가와 신시가가 함께 하고 있다. 오르막길을 올라 오래된 교회로 가보았다. 교회 앞 뜰엔 묘지가 있었고(대부분의 노르웨이 교회의 앞 뜰엔 묘지들이 있다) 비가 와서 그런지 마을이 작아서인지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마을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빗줄기가 계속 굵어져서 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 예쁜 금발 소녀가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으며 오르막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작은 마을이라서 동양인 관광객이 흔하지 않은지, 우비를 쓴 내 모습이 재미있는지 나를 쳐다본다. 눈이 마주치자 먼저 인사를 건넸다. “hi~~" 소녀는 수줍게 씨익 웃는다. 꾸미지 않은 모습이 자연스럽고 예쁘다. 오슬로의 10대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틀 전에 쓴 엽서를 아직도 부치지 못해서 우체국을 찾았다. 마침 호텔 건물 안에 우체국이 보인다. 엽서 두 장을 내밀며 한국까지 부친다니 아줌마 직원이 친절하게 우표를 부쳐준다. 한국까지 엽서 한 장당 10kr. 직원이 우표를 꺼낸 우표집을 내가 눈여겨 쳐다보자 직원은 봐도 된다고 한다.
우표집은 가격별로 우표들이 가득 차 있었다. 평소에도 우표를 조금씩 모으던터라 예쁜 우표 몇 개를 사고 혹시나 해서 맥스가 그린 작품이 실린 우표를 물어보았다. 직원은 바로 찾아준다. 맥스의 우표는 한 종류밖에 없단다. 직원은 내가 산 우표들을 정성스럽게 봉투에 넣어준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우체국을 나섰다.
날씨가 맑았으면 좀 더 구시가의 곳곳을 보았을텐데 우산을 안가지고 온 것이 후회되었다. 역으로 가니 오슬로행 열차가 플랫폼에 서있다. 얼른 올라탔다. 2분 뒤 열차는 출발했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열차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중간중간 역에 설 때 마다 역무원은 열차에서 내려서 타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호각을 불어 출발을 알린다.
약 한 시간 후 에스커에 도착했다. 에스커 역은 무척 도회적인 느낌이다. 플랫폼까지 연결 통로는 온통 투명유리이고 엘리베이터가 플랫폼까지 연결된다.
비가 더 세차게 쏟아진다. 역의 직원에서 에스커 고등학교를 물으니 약 5분 거리라고 한다. 에스커의 지명을 가진 고등학교가 또 있냐고 물으니 한 군데 라고 한다. 에스커의 다른 고등학교는 역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이름이 다르다고 한다. 그러면서 “학교까지 수영을 하면서 가야할텐데...”하는 농담까지 한다. 비가 너무 많이 온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순 없지... 계단을 올라가다 마주친 아가씨에게 다시 길을 물으니 정확한 방향을 가르쳐준다. “멀지 않아요, 금방 갈 수 있을 거에요”.
곧 도착한 학교는 방학 동안 공사중이다. 먼저 번 봄의 정모 때 회원 중 한 분이 아하 멤버들이 다녔다는 고등학교를 가르쳐주며 가까우면 가보라고 했던 것을 잊지 않고 오긴 했는데 이 학교가 맞았으면 좋겠군... 공사중인 인부에게 안에 들어가 봐도 되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한다.
널찍한 복도엔 새 의자와 각종 물품, 그리고 새 사물함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비닐에 씌워진 채 있다. 내부 분위기를 쓰윽 살펴보니 학교가 맞긴 맞는 것 같다. 복도를 기웃거리니 도서실도 보인다. 시설이 정말 끝내준다.
학교 주변은 조용하다. 마을만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노르웨이는 금방 숲으로 변한다. 조용해서 교육환경으로 딱이군. 한 번 다녀 봐도 좋을 학교로 보인다.
다시 열차를 타고 오슬로로 돌아왔다. 오슬로와 에스커는 30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이다. 역 주변의 큰 수퍼에서 야채와 과일, 소세지, 쥬스, 그리고 일요일인 어제 사지 못했던 맥주를 사가지고 유스호스텔로 돌아왔다.
라면을 끓여서 소세지도 넣고 샐러드도 만들어서 저녁을 먹었다. 라면이 매우면 더 좋을텐데... (사실 여행 내내 매운 음식에 한이 맺혀서 한국가면 먹고 싶은 매운 음식 리스트를 만들기까지 했다. ㅎㅎㅎ)
비오는 날 돌아다녀서 그런지 좀 피곤한 하루였다. 우비 덕분에 옷은 젖지 않았지만 운동화는 대책이 안 선다. 다행히 가져온 슬리퍼가 있으니 ... 내일은 날씨가 맑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