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적으로, 혹은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했거나 질병으로 인하여 손을 사용할 수 없는 장애를 가진 분들이 입이나 발가락으로 그린 그림들이었다.
화집의 프로필을 보니 후천적인 불의의 사고로 인해 장애를 입게 된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교통사고나 추락사고로 전신이 마비되었거나 감전이나 열차사고, 수영 중 사고로 양팔이 절단되었거나, 근이양증, 류마치스성 관절염 등의 질병으로 인해 장애자가 되었으며, 뇌성마비로 태어나면서부터 어렵게 세상을 만난 이들도 있었다.
17세의 중학교 3학년생으로부터 53세까지의 다양한 연령층이었지만 공통적으로 그들의 작품에선 하나같이 여느 그림에서도 보지 못했던 생명력이 넘쳐 났다. 정상인들보다 열 배, 백 배 이상으로 열정과 공력이 들어가야 이루어질 수 있는 작품들이니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도 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은 재능뿐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 쏟아서 한 점의 작품을 이루는 것이니 그 정성 또한 오죽 하겠는가.
화집에 실려있는 작품 하는 모습의 사진들을 보면서 작품과 작업과정을 연결해 생각하다 보니 나도 몰래 등에 촉촉이 땀이 베이는 것을 느꼈다.
문득 생명은 저렇게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생명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감격인가. 저들은 얼마나 크고 많은
절망과 체념, 죽음보다 더 짙고 깊은 어둠의 터널과 늪을 빠져 나와 얼마나 큰 감격으로 빛이 있는 세상에 이르러 살아있는 것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 너무 쉽게 죽고싶다는 말들을 하고 만다. 그러나 저들이
우리의 불쑥 내뱉는 한 마디를 듣는다면 무슨 말을 하게 될까?
죽음으로부터의 탈출, 절망에서 건져낸 희망, 그리고 거기서 얻어낸 살아있음의 확신, 그들은 입으로 또는 발로 작품을 이루어가며 무엇보다도 자신이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은 아녔을까.
그러면서 저들의 작품이 유난히 생명력이 넘쳐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다른 데 또 하나의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더렵혀진 우리들의 손으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더 이상 진실로 깨끗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작품은 만들어 낼 수 없기에 특별히 구별한 저들을 통해 그것도 우리가 늘상 사용하는 손이 아닌 입과 발로 그 모자라는 부분들을 채우고자 하신 신의 섭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여름이었다. 담장 너머로 해바라기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목이 부러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것들은 하나같이 크고 탐스러운 모습으로 우쭐대며 태양을 향하고 있는데 목 부러진 해바라기는 꺾여진 목을 쳐들 수도 없어 꺾여진 채로 힘겹게 옆으로 조금 고개를 들고 겨우겨우 햇볕을 받고 있었다. 꽃도 다른 꽃들보다 훨씬 작고. 옆으로 뻗어나간 목 줄기도 유난히 가늘어 보였다.
하지만 그 작은 해바라기를 보면서 오히려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피워낸 꽃에서 다른 꽃에서 느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다른 꽃보다 훨씬 아름다워 보였다. 하기야 죽음의 고비를 넘긴 아픔과 고통이 더 절실한 생명력으로 꽃을 피워냈을 터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그림을 보면서 담 너머로 보이던 해바라기를 생각함은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피보다 진한 땀을 흘리며 획 하나를 긋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생명을 가진 생명체로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살아있음을 감사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명을 보다 안전하게 보장받고, 어떠한 위협에서도 보호키 위해 무수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던가.
그런데 요즘 들어 그러한 생명보호의 수단이 오히려 창조의 질서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두려움이 앞선다.
생명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신비로움 자체였는데 과학이란 이름으로 그 신비로움까지 위협받고 있어 신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이다.
모든 것은 자기다울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아이가 아이다울 때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이고, 어른이 어른다울 때 믿음직스럽고 존경스럽지 않던가. 만약에 아이가 너무 어른스럽다거나 어른이 너무 아이스러우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아이의 귀여움도 어른의 믿음직함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느끼는 것 또한 아름다움일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들어 부쩍 생명을 쉽게 버리는 뉴스들을 접하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무엇이 우리에게 이토록 생명을 가볍게 여기게 만들었을까. 어떠한 생명체도 죽음의 위협 앞에선 몸을 사리기 마련인데 생명체중에서 으뜸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생명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의 아이들까지 그러는 것을 보면서 이건 분명 기성세대의 잘못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한 생명은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했다.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만큼 생명은 소중한 것이 아닌가.
도사리고 있는 무수한 생명의 위협 앞에서 의연하게 생을 지키며 미래를 창조하는
사람들을 보자. 그리고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마지막 꺼져 가는 한 가닥 생명의 불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보자.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 것인가.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닥쳐오는 생의 종말인데 우린 어떤 모습으로 어디만큼 와서 서있는 것인가.
누군가는 말했다. 추한 모습으로 살기보다는 생명을 마감하는 것이 더 낫다고.
그러나 아름다움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무리 아름다워 보여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참 아름다움일 수 없지 않을까?
살아있어야 아름답다. 살아있는 것일 때 아름다움을 논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향기가 없는 꽃처럼 생명이 없으면 아름다움도 일회적일 수밖에 없으리라.
목이 꺾인 해바라기가 오히려 아름다운 것도, 구족화가들의 그림에 생명이 넘치는 것도 바로 살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림을 보다 말고 내가 그림이 되어본다. 그림이 된 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를 본다.
내게서는, 살아 있다고 하는 내게서는 얼마큼이나 생명의 빛이 감돌고 있을까. 오히려 목 꺾인 해바라기보다도, 그려진 그림보다도, 사지가 완전하게 살아있는 내 모습에선 오히려 생명의 빛이 스러져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그림 앞에 선다. 말씀으로 세상을 여신 창조주처럼 경건하고 엄숙하게 붓을 물고 작은 창조를 하고 있는 모습이 액자에 그림 대신 가득 담긴다. 그래, 지금 작품을 하고 있는 저들의 모습이야말로 아무도 흉내 못 낼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겠구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나의 등뒤에서 똑똑 땀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것은 살아있음의 소리였다. (1996)
첫댓글 언냐~ 잠깐만 기다려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