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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行
身行-口行-心行인 3行에서 色과 관련된 身行(色身)과 名과 관련된 心行(名身)과
이 둘 (신행과 심행)과 연관된 口行(語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수행이 무르익어 가면서(상수멸에 드는 과정에서) 소멸하는 순서는 口行-身行-心行 순서이다.
즉 (욕계에서) 색계 초선까지 작동하던 口行(語行)이 색계 제2선에서 소멸하고
색계 제3선까지 작동하던 身行(色身)은 제4선에서 소멸한다고 한다.
그리고 전 과정에서 작동하던 心行(名身)은 想受멸에서 소멸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口行(語行)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身行-心行은 이미 기본 전제라는 것이고
身行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心行은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身行(色身)이라고 하면 이미 心行(名身)상태이므로 名色(욕계~색계)이다. 이른바 5온.
또한 무색계는 당연히 名色이 아니다. 이른바 4온.
경문에는 想受을 心行이라고 한다.
그러면 名이라고 하는 <受想思觸-作意>에서 受想을 제외한
<觸思-作意>는 心行이 아니라거나,
3행 중에 어디에 속하게 될까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이 있다.
아래 M111에 의하면
身行(色身)이 소멸하고 나서도 <觸受想思-作意> 모두 나타난다.
그러므로 <觸思-作意>는 心行일 수밖에 없다.
혹자는 作意는 마노의 고유기능인 意行이라고 하나 作意와 意의 관계는 이미 설명하였다.
[sati → manasikāra → mana → dhamma] manasikārena mānasaṃ gaṇhāti
念(사띠)과 意의 관계,
또한 作意와 法의 관계 혹은 意와 法의 관계도 많이 언급되었으므로 생략한다.
그럼에도 풀리지 않는 문제는
제4선에서 身行이 소멸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무색계가 아니고 색계인가 하는 점이고,
또 제4선의 無想유정은 논서의 설명처럼 5온에서 오로지 身行(色蘊)만이 작동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觸의 순서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도 아직은 경문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kasmā panāyye, assāsapassāsā kāyasaṅkhāro, k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kasmā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assāsapassāsā kho, āvuso visākha, kāyikā ete dhammā kāyappaṭibaddhā,
tasmā assāsapassāsā kāyasaṅkhāro.
pubbe kho, āvuso visākha, vitakketvā vicāretvā pacchā vācaṃ bhindati,
t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saññā ca vedanā ca cetasikā ete dhammā cittappaṭibaddhā,
tasmā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스님, 무슨 이유로 들숨과 날숨이 몸의 작용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말의 작용이고,
인식과 느낌이 마음의 작용 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들숨과 날숨은 몸에 속하며 이 법들은 몸에 계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들숨과 날숨은 몸의 작용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먼저 생각을 일으키고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나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말의 작용입니다.
인식과 느낌은 마음부수[心所]입니다.
이 법들은 마음에 계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식과 느낌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jjantassa kho,
āvuso visākha, bhikkhuno paṭhamaṃ nirujjhati vacīsaṅkhāro,
tato kāyasaṅkhāro, tato cittasaṅkhāro”ti.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에게 먼저 말의 작용이 소멸하고,
그 다음에 몸의 작용이 소멸하고, 그 다음에 마음의 작용이 소멸합니다.
ye ca paṭhame jhāne dhammā
초선에는
vitakko ca vicāro ca pīti ca sukhañca cittekaggatā ca,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 희열[喜], 행복[樂],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境性],
phasso vedanā saññā cetanā cittaṃ
감각접촉[觸], 느낌[受], 인식[想], 의도[思], 마음[心],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 —
열의[欲], 결심[信解], 정진, 마음챙김[念], 평온[捨], 마음에 잡도리함[作意]의 법들이 있는바,
tyāssa dhammā anupadavavatthitā honti. <* = anupadadhammavipassanā>
그는 이 법들을 차례대로 결정지었다.
vitakko ca vicāro ca pīti ca sukhañca cittekaggatā ca,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 희열[喜], 행복[樂],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境性], phasso vedanā saññā cetanā cittaṃ 감각접촉[觸], 느낌[受], 인식[想], 의도[思], 마음[心],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 — 열의[欲], 결심[信解], 정진, 마음챙김[念], 평온[捨], 마음에 잡도리함[作意]의 법들 *초선의 마음상태는 초선을 특징짓는 [尋],[伺],[喜],[樂]의 [心一境性] 초선의 마음상태에 어울리는 그러면서 다른 선정의 마음상태와도 공통되는 [觸],[受],[想],[思]의 마음[心] 또한 다른 禪의 마음상태와도 공통되는 (그러나 사마타의 구성요소가 아닌) 위빳사나를 구성하는 법들이 [欲],[信解],精進,[念],[捨]의 [作意]이다. <*아래 열 가지 위빳사나 隨煩惱 참조> 그래서 [樂]과 [捨]가 초선이라는 마음상태에서 같이 소개되어 있는 것이지 싶다. 제3선의 [捨]<*경문의 출처에 따라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음>는 희열[喜]이 사라진 [捨]이다. 삼매(사마타)에 든 상태에서는 위빳사나 수행을 할 수 없다고 주석서는 설명하나 삼매에 든 상태에서 즉 출정하지 않고 위빳사나를 한다. 다만 마지막 두 경지 즉 비상비비상처와 상수멸은 출정하고 나서 과거의 법들을 위빳사나 한다. 또한 [心一境性]은 특정 대상에 대한 집중이 아니고 예를 들어 위 초선이면 [尋],[伺],[喜],[樂]이라는 법들이 한 방향으로 지향하는 것을 말한다. 즉 감각적 욕망 등 5蓋의 법들을 등 돌리는, 반대되는 방향, 벗어나는 방향으로 지향한다. 다만 무색계(공무변, 식무변, 무소유)에서는 각각의 경지(處)에 대한 想이 한 방향으로 지향하므로 이때는 특정 하나의 대상에 대한 집중이라고 설명해도 어긋나지는 않는다. A4:170 “puna caparaṃ, āvuso, bhikkhuno dhammuddhaccaviggahitaṃ mānasaṃ hoti. 5.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성스러운] 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난 들뜸에 의해서 마음이 붙들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353) 353) “'[성스러운] 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난 들뜸에 의해서 마음이 붙들림(dhamm-uddhacca-viggahita)'이란 사마타와 위빳사나 [도중에 생기는] 법들 가운데 열 가지 위빳사나의 경계(dasa-vipassan-upakkilesa)라 불리는 들뜸에 의해서 붙들렸다, 완전히 붙들렸다는 뜻이다. (AA.iii.143) 한편 『청정도론』 XX.106은 이 문장에 대한 『무애해도』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어떻게 [성스러운] 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난 들뜸에 의해서 마음이 붙들리게 되는가? 그가 [상카라들을]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① 광명이 일어난다. 광명이 법이라고 생각하고 광명으로 전향한다. 그것으로 인한 산만함이 들뜸이다. 그 들뜸에 마음이 붙들려 그들이 일어남을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일어남을 괴로움이라고 무아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② 지혜가 일어난다. … ③ 희열이 … ④ 경안이 … ⑤ 행복이 … ⑥ 결심이 … ⑦ 분발이 … ⑧ 확립이 … ⑨ 평온이 … ⑩욕구가 일어난다. 욕구가 법이라고 생각하고 욕구로 전향한다. 그것으로 인한 산만함이 들뜸이다. 그 들뜸에 마음이 붙들려 그들이 일어남을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일어남을 괴로움이라고 … 무아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Ps.ji.100~101) 열 가지 위빳사나의 경계는 『청정도론』 XX.105 이하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니 참조할 것. <Vipassanupakkilesakathā> Katame pana te dasa upakkilesāti? Obhāso, ñāṇaṃ, pīti, passaddhi, sukhaṃ, adhimokkho, paggaho, upaṭṭhānaṃ, upekkhā, nikantī ti. [信解],-----精進,----[念],-------[捨]----[欲], cf.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 paggaho와 vīriya는, upaṭṭhāna와 sati는, nikanti와 chando는 동의어이다. |
“puna caparaṃ, bhikkhave, sāriputto sabbaso rūpasaññānaṃ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ṃ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ṃ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비구들이여, 다시 사리뿟따는
물질[色]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空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ye ca ākāsānañcāyatane dhammā —
공무변처에는
ākāsānañcāyatanasaññā ca cittekaggatā ca
공무변처의 인식,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
phasso vedanā saññā cetanā cittaṃ
감각접촉, 느낌, 인식, 의도, 마음,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 —
열의, 결심, 정진, 마음챙김, 평온, 마음에 잡도리함의 법들이 있는 바,
tyāssa dhammā anupadavavatthitā honti.
그는 이 법들을 차례대로 결정지었다.
[Ps.무애해도[PTS183]
‘kāyo’ ti. dve kāyā - nāmakāyo ca rūpakāyo ca.
‘身’이라 할 때, 두 가지 身이 있다. 名身과 色身이다.
katamo nāmakāyo?
‘名身이란 무엇인가?
vedanā, saññā, cetanā, phasso, manasikāro, nāmañ ca nāmakāyo ca,
ye ca vuccanti cittasaṅkhārā. ayaṁ nāmakāyo.
受 ․ 想 ․ 思 ․ 觸 ․ 作意. <*名이라고도 하고, 名身이라고도 하는 것이며,>
心行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 名身이다.
katamo rūpakāyo?
‘色身’이란 무엇인가?
cattāro ca mahābhūtā catunnañ ca mahābhūtānaṁ upādāya rūpaṁ
assāso ca passāso ca nimittañ ca upanibandhanā,
ye ca vuccanti kāyasaṅkhārā. ayaṁ rūpakāyo.
四大 ․ 四大 所取 色 ․ 呼․吸 ․ 묶는 相,
身行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 色身이다.]
vedanā, saññā, cetanā, phasso, manasikāro — idaṃ vuccatāvuso, nāmaṃ;
느낌, 인식, 의도, 감각접촉, 마음에 잡도리함을 정신[名]이라 하고…
첫댓글
觸-受-想-思 : 6思身이 業/行 - 身口心 3行 중에 心行
chayime, bhikkhave, cetanākāyā —
rūpasañcetanā, saddasañcetanā, gandhasañcetanā,
rasasañcetanā, phoṭṭhabbasañcetanā, dhammasañcetanā.
ime vuccanti, bhikkhave, saṅkhārā.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의도의 무리가 있나니
형색에 대한 의도, 소리에 대한 의도, 냄새에 대한 의도,
맛에 대한 의도, 감촉에 대한 의도 법에 대한 의도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심리현상들이라 한다.
phassasamudayā saṅkhārasamudayo
감각접촉이 일어나기 때문에 심리현상들이 일어나고
phasso, bhikkhave, kammānaṃ nidānasambhavo.
비구들이여, 감각접촉[觸]이 업들의 원인과 근원이다.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 kāyena vācāya manasā.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하노니 의도한 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