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팩 외 김양아 잡다한 일상을 밀어 넣었다 며칠째 미루었던 짐싸기 속도가 붙자 압축팩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납작하게 밀폐된 옷가지와 이불 순식간에 허물어진 간격들이 커다란 가방을 채웠다 눌린 부피만큼 되돌아오는 무게를 끌고 도착한 그곳, 기숙사 동백꽃 울타리 속에 한꺼번에 챙겨온 사계절을 푸는 동안 학교 정문 앞 긴 잠에서 눈뜬 벚꽃이 하얗게 부풀어 오른다 눈길 닿는 곳마다 밀봉된 봄이 환한 꽃으로 터져 나오는 시간, 압축에서 풀린 나무들 봄볕을 접목하고 끊어진 그늘을 잇느라 소란하다 아이를 맡기고 혼자 돌아서는 길 부풀어 커지는 빈자리 이것들은 생략하거나 압축해야한다 물기 차오르는 마음을 꾹 누른다
포스트잇 머릿속 날씨는 또 안개주의보 실내연습장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공처럼 솟아오르던 단어들이 작동기능을 잃었다, 침잠이다 군데군데 빠져나간 기억의 퍼즐 간신히 더듬어 메모지에 깨알같이 적어넣는다 붙잡힌 기억조각 그 노란 날개들이 냉장고 문을 여닫을 때마다 다시 멀리 날아갈 듯 팔락거린다 망각의 벽면을 다닥다닥 메운 포스트잇 빠짐없이 적어놓은 장보기 품목을 깜박 남겨둔 채 마트로 향하는 내 건망증이 또 한 겹 포개진다 딱지모양으로 접어 전하던 쪽지 대신 종이 커피컵에 붙여 건네는 포스트잇 건조한 일상의 갈피에서 부드러운 이음새가 되어주는 그들 흔적 없이 붙였다 떼어지는 깔끔한 접착력으로 어디든 쉽게 날아가 앉는다 시간이 엇갈려 마주하지 못한 아침 식탁 남겨놓은 메모에 이모티콘이 익살스럽게 웃고 있다
매듭
묶고 풀며 매듭짓는 일에 골몰했던 날들 먼 길 모퉁이마다 힘주어 삶을 엮는 동안 손가락 마디에 맺힌 굵은 매듭들 쉽게 풀 수 없게 헝클어져 뭉쳐졌다 예고 없이 찾아온 손의 통증 몸이 레드카드를 불쑥 들이민다 재활치료과 신경과를 오가는 각종 검사는 손이 치뤄온 시간을 추적했다 시나브로 얽힌 시간들 한때 세 송이의 꽃을 피워 가꿔낸 멋대로 엉킨 이 난감한 매듭은 스스로 묶었지만 혼자 풀 수 없다 병원 입구, 벚나무의 두 팔에 매인 현수막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꽃샘바람이 숭숭 뚫린 엉성한 뼈를 통과한다 햇살이 주차된 병원 앞마당 잔뜩 웅크렸던 계절이 여물게 뭉친 꽃매듭을 스르르 풀고 있다
도시의 폐선
지하도의 구겨진 계단 한 켠, 한 덩어리 잠이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한이 지난 그늘의 냄새가 바닥에 고여 있다 물과 뭍의 경계에 매여 있는 낡은 배 한 척 바람에 삐걱거린다 먼 바다로 미끄러져 나가 뱃전 가득 싱싱한 하루를 채워오던 시간들 세상 밖으로 밀려난 그에게 삶이란 아득히 가물거리는 수평선이다 선적(船籍)에서 없애버린 폐선처럼 가족들 사이에서도 지워진 존재 출항의 꿈 증발해버리고 삭아가는 몸 곧 풀릴 듯 아슬한 끈에 묶여 적막으로 누워있다 환한 대낮을 피해 빠져든 잠 속 희미한 소음들이 귓전 가득 파도소리로 부서진다
두부 한 모
상가 한 켠 두부집 갓 나온 따끈한 두부가 입맛을 당긴다 두부는 말랑하게 살아있다 도마 위에 얹힌 두부 한 모 봉지에 담겨 올 때의 출렁임은 멎은 채 조용하게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연한 것에 칼집을 내는 일은 막막하다 삶은 대체로 그랬다 내 몫으로 주어진 무언가를 깨지지 않게 조심해서 완성해야 했다 오늘도 내 앞에 덩그맣게 놓인 과제는 선택과 결정을 요구한다 넓적하게 잘라 지지거나 조려야할지 작게 썰어 찌개에 넣고 끓일지 그대로 양념간장만 곁들여낼지 사소한 두부 한 덩이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또 잠시 망설이고 있다
김양아 서울 출생. 한국외대교육대학원 영어교육과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