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선진국으로 가는 길 (1 2)
지난달 초 비상시국의 장면들은 참으로 아찔하고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럽기도 하였습니다. 머릿속 아득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계엄령이라는 무서운 맹수가 한밤중에 여의도 등 시내 곳곳으로 뛰어들어 잠시지만 온 국민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였습니다. 위기에 맞선 시민들의 지혜와 용기로 가까스로 불행한 사태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위대한 국민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후진적·퇴행적 정치행태가 계속된다면 유사한 사태가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겠습니다. 지금처럼 정치 혼돈과 경제 불안정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여태까지 이룩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최악의 정치 위기를 최선의 기회로 삼아 우리 정치도 다른 분야처럼 선진화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세계 모든 나라가 부러워할 만큼 거의 모든 면에서 선진화되었는데 두드러지게 정치만 예외로 남아 있어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남들보다도 우리 스스로 매우 부끄러워해야 할 공공연한 치부이자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무엇보다 정치가 안정돼야 안정기조하에 국태민안과 국리민복을 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정치가 만사일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정치가 잘돼야 매사가 잘 굴러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왜 퇴행의 길을 반복하고 있을까요? 정치학자나 평론가들은 주로 헌법상 권력구조와 선거제도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권력구조와 선거제도만 잘 만들면 정치가 안정되고 선진화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정치 후진성의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와 국민 간의 괴리(乖離)라고 봅니다. 정치는 국민을 외면한 채, 또 국민은 정치를 외면한 채 서로 겉돌고 있는 형국입니다. 바꿔 말하면 정치과정(political process)에서 '그들만의' 정치 놀음만 요란할 뿐 정작 국민의 진정한 정치 참여는 실종 상태라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에서 투표율이 낮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민주정치의 토대인 정당 활동이 국민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국민들이 정치에서 동떨어져 있는 상황(political apathy)은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쇠퇴를 가져온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우리의 경우 깨어 있는 국민인 지식인마저 정치를 경원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식인들은 정치 비판에는 강하나 정치 참여에는 약합니다. 평소 정치과정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킨 채 정치판의 동향에는 비상한 관심을 보이면서, 잘해야 그저 시국선언을 하거나 거리로 몰려가 시위를 하는 것은 진정한 정치 참여가 아닙니다. 엘리트로 불리는 국회의원들이 거리 시위를 추동할 뿐 아니라 국가 최고 공론의 장인 의회를 박차고 나가 걸거리 시위에 참여하는 것도 저질 정치의 표본이라 하겠습니다. 정치권이 정치판의 논리에 갇혀 갈팡질팡하는 동안 국민들은 대중매체를 통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스포츠 중계 보듯이 따라갑니다. 몇 사람이라도 모이면 보고 들은 정치판 이야기를 나누면서 흥분하거나 냉소하거나, 때로는 언성을 높여 싸우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당이나 지도자급 정치인에 대한 선호에 따라 진영이 나뉘어 양 진영은 죽기살기로 싸웁니다. 정책을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진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친한 친구 사이도 진영이 다르면 만나기 싫어할 정도로 진영의 편가름은 우리 생활 전반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어떤 정책이 자신과 국민의 삶에 바람직한가보다는 어느 당, 어떤 지도자를 선호하고 지지하느냐가 선택의기준이 됩니다.
한편 대중매체는 정당의 정책을 분석하고 평가하기보다는 그 정당의 속내나 정당 지도자가 내놓는 온갖 자극적인 언행을 밀착 취재하고 공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가십성 기사를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된 일상 속에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선정적 기사가 눈과 귀를 끄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결과 '정치 한다'는 사람들은 대중매체에 많이 언급될수록 득표에 유리한 것으로 보고 인기성 언행을 일삼으며 포퓰리즘적 정책을 주창하기 일쑤입니다. 더욱이 판박이 정치판 소식에 지친 국민들은 유튜브나 팟캐스트 같은 현란하고 무책임한 정보 소스에 더욱 끌리게 됩니다. 왜곡된 진실과 선동이 난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라 하더라도 정당 정치가 국민 생활에 뿌리박지 못하고 정쟁에만 매몰되는 상황에서는 25세기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경고한 이른바 '중우(衆愚)정치'가 되고 맙니다. 일반 국민으로서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적 정치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현상은 아마도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비뚤어진 정치문화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성을 제대로 보살피지 않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 잘못하다가는 일가족이 화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 이에 더해 위선적인 지도층의 기득권 나눠먹기 등으로 인해 옛날부터 국민은 정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를 선호해 온 것으로 봅니다. 이런 정치 참여 기피 현상은 여전히 우리의 DNA에 스며 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이래의 권위주의적 정치문화는 대통령이 제왕처럼 군림하고 대통령을 제왕처럼 인식하는 잘못된 습관에도 남아 있습니다. 흔히 비판의 대상이 되는 '제왕적 대통령제'는 사실 헌법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문화의 소산입니다. 왕조국가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탓으로 은연중 대통령을 왕처럼 인식하는 문화가 기성세대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잔존하고 있는 데다가 이승만, 박정희를 필두로 김영삼, 김대중, 전두환 등 카리스마가 강한 지도자들이 그런 식의 통치 모델을 남긴 것도 한 요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카리스마를 과시하는 지도자는 법치를 무시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우리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의 정치판은 득표율 차(55% 대 45%)에 비해 기형적으로 많은 의석을 차지한 거대 야당과 근소한 표 차(0.73%)로 대권을 장악한 제왕적 대통령 간 강 대 강 대결 구도입니다. 거야소여(巨野小與)의 상황에서 의회는 의회대로,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각기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임을 내세워 승자독식의 관행에 빠집니다. 서로 경쟁하듯이 권력을 오남용하면서 안보든 민생이든, 그 어떤 사안에서도 정파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민주정치의 기본 원리인 삼권분립은 무시되고 민주주의의 일상적 작동 원리인 타협과 협상은 사라지고 맙니다.
정치의 후진성에 대한 사회문화적 요인을 하나 더 든다면 우리 국민에게는 토론과 숙의를 통하여 결론에 도달하는 것보다는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상대방을 설득하고 굴복시켜려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지도층이 성리학적 이론과 이념에 대한 충성을 기준으로 당파를 나눠 대치하던 잘못된 전통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까이서 겪어온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잔재도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토론에서 실용적으로 타협을 추구하기보다는 논쟁에서 질 경우 체면이 손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끝까지 버티거나 싸우다가 결국 평행선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엇이 사회에 옳고 바람직한가보다도 무엇이 자신과 우리 편에 유리한가를 위주로 논의가 진행되게 마련입니다. 올바른 결론이 나오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사회적 자본'의 결핍이 더해짐으로써 우리의 정치는 후진적 행태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어렵게 됩니다. 사회적 자본이란 사회학 용어로서 일반에게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쉽게 말하면 공동체의 법규를 지키는 준법의식, 사회구성원 간의 배려와 신뢰, 공동체가 필요로 할 때 양보하고 협동하는 자세 등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여러가지 연유로 우리 사회는 각 분야에서 위아래를 막론하고 법과 규칙을 지키지 않고 나아가 법을 무시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웃 간에도 공연히 의심하고 경계함으로써 신뢰가 쌓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큰 곤란이 닥쳐올 것으로 예상되지 않는 한 서로 양보하고 협동하는 습관이 정착돼 있지도 않습니다.
준법은 위에서부터 법을 지키지 않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법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지키지 않는 것은 국회의원이 가장 심하고 그다음, 지위가 높은 공직자 순으로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거에 나온 후보 검증이나 국회 인사청문회 때마다 식상할 정도로 지도층의 불법, 위법 행태가 드러납니다. 당사자들은 '다 그러하니 나도 그리하게 되었다. 죄송하다'라는 말 한두 마디로 넘어가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니 국민들이 법이나 규칙을 지켜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회 각 분야의 상층부는 오랜 세월 쌓아온 기득권을 지키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다가 위법·불법의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후진적 정치문화와 사회적 자본의 결핍으로부터 정치의 후진성이 야기된 것이므로 이를 넘어서야 진정한 선진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 두가지 장애요인을 개선하는 데는 시일이 걸릴 뿐만 아니라 총체적, 집단적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첫째로, 변화한 현실에 맞게 조속히 개헌을 하고 승자독식의 선거법을 개정하는 등 정치제도를 개선하고, 둘째 민주주의 본연의 정당 활동 활성화 등을 통한 국민의 적극적 정치과정 참여를 진작하고, 셋째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통해 사회적 자본 결핍 문제를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 2편으로 계속)
정치 선진국으로 가는 길 (2) / 정달호
정치 선진국으로 가는 길(1)에서 결론으로, "첫째 변화한 현실에 맞게 조속히 개헌을 하고 승자독식의 선거법을 개정하는 등 정치제도를 개선하고, 둘째 민주주의 본연의 정당 활동 활성화를 통해 국민의 적극적 정치과정 참여를 진작하고, 셋째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통해 사회적 자본 결핍 문제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2025. 1.3 자유칼럼 참조). 현재 진행형인 미증유의 헌정 혼란이 잘못된 권력구조에서 연유한다고 보면 헌법개정을 포함한 정치제도 개선이 우선적 과제입니다.
민주주의 정치체제로서는 허점과 맹점이 적지 않은 87년 헌법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한 채 선거법도 입맛대로 개정에 개정을 거듭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지금처럼 기형적인 정치판 구도가 생겨났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극단적인 혼돈 상황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에도 개헌 없이 현행 헌법에 따라 새 대통령을 뽑는다면 대한민국의 정치 선진화는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권력은 한 번 잡고 나면 양보하는 법이 없습니다. 지금 정계 원로들이 입을 모아 개헌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고 국회 차원에서도 그간 수차 개헌 작업을 해왔지만 당리당략에 밀려 실현될 수 없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이 계속 그렇게 가서는 더 이상 발전할 수도 없으므로 두고두고 역사의 비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개헌 내용에 관한 논의는 더 할 필요가 없을 만큼 많이 진전돼 왔습니다. 헌정회(회장 정대철)가 지금까지의 개헌 논의를 종합하여 제시한 개헌 방향은 권력구조에 관한, 이른바 원포인트 개헌입니다. 요약하면 4년 중임의 분권형 대통령제로 가되 동시에 책임총리제, 국회 양원제(상원은 장관급 공무원 임용 인준권, 대통령 탄핵 심판권, 하원의 입법 독주 견제 등)를 도입한다는 것입니다. 민주정치의 기둥인 삼권분립을 확실히 보장하고 대통령의 권력을 효율적으로 분산하고자 하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일단 개헌이 되고 나서는 선거법도 손을 보아 승자독식형 소선거구제를 유연한 중대선거구제로 바꾸고 비례대표도 원래의 취지에 맞게 개선하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나라의 명운을 가를 중차대한 문제를 기득권을 누리는 정치인들에게만 맡겨 놓으면 결국에는 현행 헌법 유지라는 잘못된 전철을 밟게 될 개연성이 큽니다. 지금과 같이 극도로 불안정한 정국이 계속되면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국민에게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탄핵 정국의 와중에도 개헌 작업은 조속히 추진돼야 하며 이런 절체절명의 기회를 앞에 놓고 정치인들이 당리당략에 따라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나서야 합니다. 국민 1,000만 명이 개헌 탄원서에 서명을 한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국민의 뜻을 거부할 정치인은 없을 것입니다.
제도적 개선만으로 우리 정치가 선진화될 수는 없습니다. 정치가 국민과 더 밀접한 관계 속에서 운영돼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정당정치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만큼 정당의 기반이 강하고 정당의 활동이 국민의 삶과 밀착될 때 그 정당을 민주 정당이라 할 수 있고 그런 정당들이 경쟁하면서 정책을 추진해 나갈 때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와 민생이 살아날 것입니다. 지금의 정당들은 국민적 기반이 약해(국민의힘 84만, 민주당 240만으로 추정)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 정당이라기보다는 겨우 국가보조금에 의존해 지탱하고 있는 거대 정치조직일 뿐입니다.
이런 정당들은 표방하는 가치와 정책을 추구하고 관철시키는 것보다 정쟁과 정권 획득을 우선시합니다. 그러다 보니 지지하는 정당과 신봉하는 이념을 중심으로 지지자들 간 진영 대립이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흔히 국민의힘(그 전신인 당들을 포함)은 보수, 민주당은 진보로 불리며 또 전자는 우파, 후자는 좌파로도 불립니다. 말의 어감이 갖는 어쩔 수 없는 영향으로 보수는 기존의 가치와 기득권을 지키는 것, 진보는 이를 넘어서 앞으로 나가는 것으로 이해되기 십상입니다. 실제로는 먹고사는 데 크게 걱정이 없거나 이미 기득권을 누리고 있어 세상이 좋아지는 것은 바라지만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분들이 보수 정당을 선호합니다. 반대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 중 특히 국가로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현재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이 이른바 진보 정당을 선호할 개연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러다 보니 분열 양상이 극단으로 흐르는 가운데 자유와 민주, 정의와 양식(良識) 등 오랜 세월 공동체의 삶의 기반이 돼 온 가치를 옹호하는 것을 수구적(守舊的)으로, 평등과 평준, 약자와 소수자 보호 등을 내세우는 것을 진취적(進就的)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분류가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지만 딱히 현실과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따라서 '국힘'과 '민주' 양당을 보수, 진보로 단순 구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실제에서는 보수에도 진취적인 요소가 있으며 진보에도 수구적인 요소가 있게 마련입니다
긴 역사를 통해 인간이 추구해온 가치 중 자유와 평등을 잣대로 해서 볼 때 보수 또는 우파는 자유에 중점을 두고 진보 또는 좌파는 평등에 중점을 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한쪽만을 고집하면 진정한 보수, 진정한 진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자유와 평등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양식과 균형감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인 정책 사안별로 어느 쪽에 중점을 둘 것인지는 신봉하는 가치와 함께 현실적인 통찰을 바탕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도 공화, 민주 양당이 실제 추구하는 정책을 놓고는 일률적으로 편이 갈라지지 않습니다. 이번 미국 대선 결과를 봐도 양당의 기존 노선이 그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가 공존합니다. 삶에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취해야 하는 것처럼 정책에서도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 사이에 균형을 유지해야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보수와 진정한 진보 사이에서는 타협을 통해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영역이 크지만 지금처럼 진영 대립으로만 갈 때 타협은 사라지고 사회는 고질적 분열 속에서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사회 불안정 속에서는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번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극단적인 진영 대립 상황에서는 포퓰리즘과 선동의 정치가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고 이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인 일반 국민들은 건전한 판단에서 벗어나 진영 논리의 포로가 되기 십상입니다.
깨어 있는 많은 국민이 제각기 신봉하는 가치와 추구하는 정책에 따라 어느 쪽이든 정당에 많이 가입하여 진정한 정당 정치에 힘을 실어줄 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뒷짐을 지고 남의 일처럼 비판만 하다가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때 가서야 어느 한쪽이 주장하는 것만 믿고 피켓을 들고 거리시위에 나가는 것을 진정한 정치 참여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태가 오기 전에 다수 국민이 참여하는 효율적인 정당 정치를 통해 문제가 해결되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뒤늦게나마 정당 정치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런 데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지만 정치판의 향방에 관심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막상 정당에 가입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이른바 '지식인'으로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이 일었습니다. 이번 계엄 사태 이전에 제가 신봉하는 가치를 어느 정도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정당에 가입하였습니다{입당의 변(辯)은 아래 별첨}. 많은 분들이 각자 신봉하는 가치와 선호하는 정책에 따라 어느 정당에든 가입하여 정치과정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우리 정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정될 것입니다.
권력구조를 바꾸는 개헌이 이루어지고, 선거법이 개정되고, 많은 국민이 정당에 가입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특권과 기득권이 많으면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국회의원의 특권이 많으면 정치지도자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특권을 노리고 개인적인 영달과 명예만을 좇아 국회의원이 되고자 합니다. 이런 국회의원은 국민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차기 선거에서의 당선에만 관심을 가지고 정당 지도자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부류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이런 비정상적인 관행과 비루하기 짝이 없는 풍조는 사라져야 합니다. 정치지도자로 뽑힌 사람은 무엇보다 국가와 국민의 이익에 봉사해야 합니다.
국민세금의 보조를 받아 평생토록 연금을 받는 공무원의 특혜, 상궤를 벗어난 공기업 임직원의 특혜, 법의 한계를 넘어선 노동조합의 특혜 등 우리 사회에는 도처에 특권과 기득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기득권을 누리는 집단과 이에 불만을 품는 집단 사이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갈등은 결과적으로 사회통합을 어렵게 합니다.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줄여나가기 위해서는, 특히 국가재정에 큰 부담을 주고 결과적으로 국민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공적 연금들을 개선해야 합니다. 고위직 출신을 중심으로 현재 지급하는 연금을 현실에 맞게 일부 조정하는 것을 검토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향일 것입니다. 그래야 별 진전이 없는 연금개혁에도 새로운 동력이 붙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공화국의 '공화(共和)'는 왕이나 귀족 같은 특권계급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정이나 귀족정이 아닌 공화주의적 정치체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하며 어떠한 특권이나 기득권도 인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 국민의 뜻을 따라 개헌이 실현된다면 새 헌법에는 국회의원이 불체포특권을 비롯한 온갖 특권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규정도 만들어 넣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장기적으로 민주공화국이 잘 작동하기 위헤서는 건전한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건전한 민주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선진국들(특히 북유럽 국가)처럼 공민교육(civic education)을 시행해야 합니다. 모든 국민이 헌법과 국가의 운영체계를 제대로 알고 선거를 비롯한 정치과정(political process)에 올바르게 참여토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각급 학교 교육과정에 공민교육 과목을 설치하고 평생교육관 같은 기성세대 교육기관에서도 공민교육 과정을 넣어 시민들이 정치과정을 잘 이해하고 바른 자세로 이를 감시하면서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정치 문화 수준을 높일 수 있고 사회적 자본의 결핍도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첨부: 입당의 변(辯)
일반 시민으로서 무슨 변(辯)이라는 글을 쓴다는 게 좀 쑥스럽기는 합니다. 저는 대햑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76세 은퇴자입니다. 학창 때 대학 졸업 후의 진로를 생각하면서 언론인, 관료, 학자, 세 길을 놓고 고심하였습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관료의 길을 택해 외교 분야에서 일해왔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제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고 학구의 길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틈틈이 공부하여 해외에서 학위를 도모하기도 하였습니다.
외교관으로서 또는 그 연장선상에서 65세까지 공직 내지 준공직 생활을 하고 나서는 10년 이상 칼럼니스트로서 다양한 주제로 글을 써오고 있기도 합니다. 동시에 문화 분야의 일도 하였고 지금은 주로 국제음악제와 관련된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언론인이 되지 못한 미련 때문에 칼럼니스트로서 활동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한국일보 입사 시험을 봐서 합격한 적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학창을 떠나 바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이 쉽지 않아서 그래도 정계와 가까운 것이 언론계라고 생각해서 언론인의 길을 시도해보았던 것 같습니다.
외교관으로서 첫 임지에서 근무하는 기간에 5.18이 일어나고 국보위가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답답한 나머지 진로에 대한 새로운 고민에 봉착하게 되었어습니다. 공직을 그만두고 사법시험을 봐서 변호사로 나간 다음 정계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한동안 여유 시간을 활용해 사시(司試)준비를 하기도 했습니다.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아서 결국 있던 직장에 그대로 머물면서 대외적으로 국가 이익을 추구하는 일에 봉사하다가 정년을 맞아 은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완전 은퇴 후 만 10년이 경과한 시점입니다. 외교관으로서 나름 세상 경험을 두루 하고 은퇴 후에도 이런저런 일을 해오면서 지난 삶을 후회해 본 적은 없지만 늘 마음 한 구석이 비어 있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근년에 들어 국내 정치가 불안정해지고 정치권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지식인으로서 뒷짐지고 비판만 하고 있는 것은 떳떳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후 저와 가치를 공유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정당에 가입했습니다.
당에서 특별히 어떤 역할을 하거나 어떤 자리를 생각해서 가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때도 지났고 그런 자리를 주거나 받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니까요. 다만 평당원으로서 지금보다 우리 정치 현실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필요할 때 바른 목소리를 내고 필요할 때 옳은 행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일반 당원으로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같은 난국에 처해 국민으로서 왜 할 일이 없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그간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남은 기간 얼마든지 건설적인 봉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입당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 옛날이여/노래 이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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