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망무제로 탁 트인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산자락 알프스. 오랜 세월 동경해오던 알프스였기에 그만큼 감동은 더했는지 모른다. 연봉 멀리에는 코발트색 하늘을 아름답게 채색한 하얀 뭉게구름이 수평선처럼 가물거렸고 여름 한복판인데도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서늘하여 제대로 호연지기를 느낄 수 있었다. 호크그라트Hochgrat 산이 한라산이나 지리산에 버금가는 높이인데도 고산이란 느낌은 별로 없었다. 케이블카로 오른 탓도 있지만 마지막 정상까지 구간도 동네 뒷산처럼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 바로 밑에서 네댓 살 어린 꼬마 녀석이 양손에 스틱을 들고는 알피니스트 포즈를 취한 것은 이곳이 알프스란 걸 이방인에게 알려주는 멋진 퍼포먼스였다.
독일 젊은 엄마들은 어릴 때부터 자식을 강하게 키우고 있었다. 사진에서 스틱을 든 정도의 꼬마를 밧줄에 매달아 암벽타기 훈련을 시키는 엄마를 실제로 만났던 것이다. 훈련장은 가동을 멈춘 대규모 제철소를 개조해서 만든 뒤스부르크 환경공원 안에 있었다. 우리처럼 돈을 들여 새로 훈련장을 지은 것이 아니라 옛 공장 낡은 콘크리트 벽면을 그대로 사용하는데도 어린 아들을 훈련시키는 엄마들은 많았다. 어쩌면 실용과 근검절약을 중시하는 이 나라 국민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는지도 몰랐다. 어릴 때부터 극한적인 훈련을 다진 아이들은 성인이 되면 지구촌 사람들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절도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독일병정이 될 것임은 불문가지가 아닐 수 없으리라.
겨울 알프스를 체험한 것은 서울올림픽이 끝난 몇 년 후였다. 세 나라가 국경을 맞댄 몽블랑에서였다. 때마침 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날 산을 수직으로 오르는 승강기 안에서 젊은 스키어들 대여섯을 만났다. 영국에서 왔다는 그들에게 나는 코리아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청년들은 오늘의 우리 젊은이들처럼 부모세대가 이룬 부를 그냥 즐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철의 여인 대처가 영국병을 고친다고 팔을 걷어붙인 직후였는데도 그들은 절박함을 모르는 듯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태어나기 불과 30여 년 전 자국 청년들이 한국동란에 참전하여 초개같이 목숨을 바쳤는데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나마 올림픽 덕분에 절반 정도는 서울을 안다고 답하여 체면치레를 했다고 여겼을까.
3년 전 보름 동안의 여름휴가를 국외여행으로 정한 건 시쳇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한국 굴지의 대기업 CEO를 지내면서 업무출장으로 유럽을 섭렵하고 있었던 동서의 역할이 컸다. 먼저 독일과 네덜란드 접경에 위치한 전원주택에다 숙소를 잡았고 그곳에 일주일을 기거하며 스위스 벨기에를 비롯한 룩셈부르크 심지어 리히텐슈타인 공국과 같은 초미니 나라까지 드나들었다. 미리 행선지를 정하지 않았는데도 산을 오른 것은 다소 의외였다. 두 번째 숙소인 독일 산간마을 별장에서 산은 아주 가까웠다. 숙소가 그 산자락 안에 아예 들어 있었다. 실수로 숙소 비품인 전기주전자를 태워먹어 표독스런 관리인 할매가 안겨준 스트레스도 산을 오르고 나니 씻은 듯 사라졌다.
산을 보면 그 나라의 국민 수준을 알 수 있다. 산에다 설치하면서 정작 주인인 산에겐 물어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흉물스런 시설물을 설치하는 나라는 후진국이다. 아름다운 산길을 목재데크나 타이어 조각 심지어 야자수 껍질로 만든 두터운 멍석으로 뒤덮곤 콘크리트 구조물로 생채기를 내는 나라가 한국이다. 쇠사슬로 만든 난간도 빠지지 않으니 전국의 유명산들은 거의 중병에 들었다고 봐야 한다. 지자체가 남는 돈을 어디다 쓸까 고민하다가 산에다가 쏟아 부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산행안내 표지판도 우리처럼 대형으로 곳곳에 세운 것은 나라 밖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처럼 잘사는 나라가 돈이 없어서 팻말을 돌무덤에 겨우 꽂듯이 작게 세우고 있을까. 그것도 작은 나무판에 주로 붓글씨로 써서 썩고 나면 형체도 없이 사라지게 만든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좋은 자연보존방법이란 걸 알아야 한다.
독일의 산도 검소하기는 일본과 닮았다. 이런 나라들이 선진국임은 물으나 마나다. 독일도 산을 가급적 생긴 그대로 놔두고 있었다. 깎아 내거나 설치물을 추가하지 않은 태곳적 그대로의 산이기 때문에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도 그만큼 편하게 접근할 수 있었을 터이다. 어디로 어떻게 올랐는지 이 높은 곳까지 올라 먹이를 뜯고 있는 소들이 부러웠다. 온갖 공해가 만연한 지구촌인데 태어나 고산의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때 묻지 않은 먹이로 살아가는 그들의 낙원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가가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소들은 무척 편안해 보였다. 말 못하는 소들이 혹시 낭떠러지로 추락할까봐 닿으면 찌릿할 정도의 직류전원을 가압한 전선을 울타리로 설치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산을 보호하느라 사람들 출입을 막는 철책은 따로 없었다.
산을 오른 사람들은 대부분 자국민인 독일인이거나 인근의 유럽에서 온 듯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그들의 복장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서양인들 중에도 호주나 뉴질랜드 같은 곳에서 온 사람들은 가끔씩 원색의 등산복을 걸치고 있는 걸 보았는데 오늘 우리 일행 말고는 컬러풀한 복장을 전혀 만날 수 없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내가 꺼내준 오렌지색 바지를 걸친 내가 그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 은근히 걱정되었다. 우리 일행이 걸친 눈에 튀는 복장에 은근히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등산복 사랑이 도를 넘은지 오래란 걸 생각하면 스스로를 위로할 순 있었다. 여행은 물론 결혼식장 심지어는 장례식장까지 등산복 차림이 빠지지 않으니 산에 오르면서 걸친 등산복을 타박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패러글라이더를 메고 알프스 상공을 나는 이들이 많았다. 공중에 뜬 높이는 우리가 발 디딘 정상 약간 아래로 강한 바람이 없으니 정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을 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패러글라이딩은 비교적 높은 곳에서 이륙하여 기류를 탈 수 있는 높이까지 오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공기가 차기 전의 캐노피를 카메라에 담아보겠다고 출발지점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형형색색의 패러글라이더는 여름 산을 오른 사람들에게 시원한 풍광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인생 황혼에 미루고 있던 여행사진을 정리하다가 호크그라트의 추억을 다시 만났다. 그러곤 사진을 그냥 묻어두는 것보다 이곳 카페에 포스팅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산이라 호크그라트를 느끼는 감회는 사람에 따라 또 살아온 세월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먼저 호크그라트를 추억으로 간직한 사람들도 적지 않겠지만 금년에도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시 산을 올라 여름을 만끽하면서 생활 속 스트레스를 날리고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