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1~13 /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신 예수님
(요 7: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요 7: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요 7: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요 7: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요 7: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요 7: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요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요 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 7: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요 7: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요 7:11) 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요 7:12)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요 7: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은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데 두 번째는 예루살렘에 은밀히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은 아직 십자가에 죽으실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 번째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는 공개적으로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감추실 때와 나타나실 때를 아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1절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요한복음 7장은 5장의 내용을 배경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근처 베데스다 못가에서 안식일을 어기고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고치실 뿐 아니라 그에게 그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였습니다. 병 나은 사람은 바리새인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이 시켜서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고자질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법을 어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고자 하시는 것을 아시고 유대 땅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주로 갈릴리에 거하였습니다.
2~4 초막절이 가까워졌습니다. 초막절은 추석과 같은절기로 우리 달력으로 10월 15일쯤 됩니다. 초막절이 되면 이스라엘의 성인과 다른 나라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다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성전 주위에 초막을 짓고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베푸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초막절이 와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형님, 지금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는 적기입니다. 지금 올라가시지요.” 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능력을 행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쳤듯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잔칫집에서 기쁨을 주었듯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듯이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 앞에서 기적을 베푸시기를 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유명해지기를 원하였습니다.
5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형제들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표적을 행하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말씀이 은혜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할까요?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믿고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믿기보다 예수님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정치적, 경제적인 것에서 올 수 있는 이익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형제들은 예수님이 떡을 주지 않자 예수님을 떠나 무리들과 같았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기복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기복신앙은 진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전적으로 의탁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두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목자를 신뢰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자신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곡예사가 있었습니다. 곡예사는 절벽에 줄을 매어 놓고 70kg이나 되는 쌀가마를 메고 몇번을 왔다 갔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구경꾼들에게 내가 다시 저곳을 다녀올 것을 믿습니까? 그러자 사람들은 예! 믿습니다. 그러면 나의 어깨에 올라탈 사람은 나오십시오. 몸무게가 70kg 이하는 나오십시오. 제가 저 절벽을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 뒤에서 나요! 하고 나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곡예사는 아들을 목마 태우고 몇 번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누가 믿은 사람입니까?
형제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의탁하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나는 그분의 도구가 되어 쓰임 받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느 정도 믿습니까?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는다면 전적으로 나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무엇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텔레비전 보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기도 때문에 잠자는 것도 내 맘대로 하지 못합니다.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예수님은 지금도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시고 며칠이 지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나타내는 때를 따라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에 따라서 살고 하나님의 때에 따라서 죽으셨습니다.
7~10절 형제들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형제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핍박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미움을 받습니다.
바울은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은 큰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후에 은밀히 올라가셨습니다.
11~13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을 뿐 잡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예수님이 죽으실 때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여론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좋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병 고치시고 먹을 것을 주시는 예수님을 좋은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은 사람도 예수님을 좋게 보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좋지 않은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무리를 미혹한다고 보았습니다. 무리를 선동한다고 말하였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핍박이 있어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