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꽃 질 무렵이면
가로수 가운데 꽃이 피면 향기가 나지 않고 색깔로도 주목을 반지 못하는 나무가 있다. 그게 다름 아닌 은행나무인데 곡우 무렵에 꽃이 피어 저문다. 암수 딴 그루인 은행나무의 수꽃은 누에처럼 생겼는데 연녹색을 띠었다. 향기가 없고 색상이 화려하지 않으니 벌이나 나비가 찾아올 리 없어도 자연의 섭리는 오묘해 바람이 인연을 맺어주었다. 이맘때 날리는 송홧가루도 마찬가지다.
곡우 전후 보도를 따라 걸으면 길바닥에 연녹색 은행 수꽃이 수북하게 쌓여 있음을 볼 수 있다. 암 그루 밑에는 그 꽃을 볼 수 없어도 초가을에 은행열매가 떨어져 있음을 보게 될 테다. 은행 열매에서는 특유의 구린내가 나서 당국에서는 길바닥에 떨어지기 전 강제로 털어 치우는 모습도 봤다. 그리고 겨울이 오는 길목이면 샛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일 년에 세 차례 자유 낙하를 했다.
내가 은행나무를 언급함은 그 꽃이 저물 무렵이면 산에서 채집하는 산나물도 거의 쇠어가는 때다. 산나물은 여린 잎줄기를 채집해 삶아서 나물로 무쳐 먹거나 말려 묵나물해서 계절 구분 없이 먹기도 한다. 우리 집에선 묵나물까지 해서 보관하지는 않고 양이 넘치면 이웃이나 지기에게 보내고 만다. 올해는 퇴직하고 처음 맞은 봄이라 관심을 가졌더니 새로운 산나물을 만나기도 했다.
올해 새로 알게 된 산나물로는 호연봉 북향 응달에서 찾아낸 가시오가피 순이 있다. 찔레나무 순처럼 식감이 좋고 영양이나 약성에서도 두릅 순이 음나무 순에 뒤지지 않았다. 미산령을 넘으면서는 빗살서덜취와 영아자도 채집해 왔다. 영아자는 미나리싹이라고도 하는 산나물인데 생으로 먹어도 식감이 좋고 향긋했다. 서북동 임도에서는 나비나물을 뜯었는데 잎이 꼭 나비 날개 같았다.
사월 넷째 금요일 아침 빈 배낭을 둘러메고 집을 나서 김밥을 마련하려고 반송시장으로 향했다. 앞서 언급대로 거리의 은행나무 가로수 가운데 수 그루 아래만 특이한 모양의 은행꽃이 떨어져 있었다. 바람이 인연을 맺어주는 은행나무는 바라만 봐도 절로 수분이 되는데 사방 오 리 이내면 결실이 되었다. 거리의 은행나무 가로수는 다닥다닥 붙어 자라 수분이 안 될 염려는 없었다.
반송시장 노점에서 김밥을 마련해 동정동으로 나가 온천장 가는 버스를 타서 외감마을 앞에서 내렸다. 동구 밖에서 달천계곡 들머리를 지나 남해고속도로 창원터널 곁 단감농원으로 올라섰다. 어제 비가 살짝 내렸던 영향으로 아침 안개가 자욱해 사위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양미재로 오르는 숲으로 드니 이름 모를 산새들이 조잘댔다. 내가 목표 삼은 구고사 뒤편 산기슭으로 향했다.
등산로를 따라 가면서 바디나물과 오리방풀이 보여 몇 줌 뜯어 모았다. 구고사를 돌아가는 트레킹길에서 채집할 산나물은 다래 순과 벌깨덩굴 두 가지였다. 다래 순은 쇠어가는 즈음이라도 해발고도가 높은 북향은 채집이 가능했다. 돌너덜 부근 다래나무 군락지에서 보드라운 다래 순을 따 모았다. 다래 순을 딴 뒤 바위 절벽 아래로 다가가 벌깨덩굴을 찾아내 여린 잎줄기를 땄다.
벌깨덩굴을 채집한 뒤 바위더미에 앉아 김밥을 먹으면서 호연봉과 작대산이 에워싼 산정마을을 내려다 봤다. 김밥을 비운 뒤 문인화 화실로 나가는 친구에게 전화를 넣었다. 오후에 다래 순을 건네받고 산나물 전을 부쳐 잔을 기울이자고 했다. 이어 같은 아파트단지 꽃대감 친구에게도 오후에 시간을 비워두라 했다. 쉬었던 자리에서 산정마을로 내려가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다.
집 근처에 이르러 무학상가 주점으로 갔다. 주인 아낙에게 평소 영업 개시보다 좀 이른 시각에 문을 열어 주십사고 양해를 구했다. 문인화 교습소에 나가는 친구에게 다래 순을 건네고 나머지 산나물은 주인에게 모두 안겼다. 넷이 마주 앉은 주탁에는 멍게 살과 굴비 구이에 이어 산나물이 전으로 부쳐져 나왔다. 취향 따라 맑은 술과 곡차를 비우면서 한 친구는 사철가를 흥얼댔다. 22.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