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재 밑 외진 마을
홀로 사는 할머니가
밤저녁에 오는
눈을 무심히 바라보네
물레로 잣는 무명실인 듯
하염없이 내리는
밤눈 소리 듣다가
사람 발소리? 하고
밖을 내다보다 간두네
한밤중에도 잠 못 든
할머니가
오는 밤눈을 내다보네
눈송이 송이 사이로
지난 세월 떠오르네
길쌈 하다 젖이 불어
종종걸음 하는 어미와
배냇짓하는 아기도
눈빛으로 보이네
빛바랜 자서전인 양
노끈 다 풀어진
기승전결
아련한 이야기를
밤 내내
조곤조곤 속삭이네
밤눈 오는 섣달그믐
점점 밝아지는
할머니의 눈과 귀
-〈동리·목월〉2022. 가을 -
〈오탁번(1943~2023) 시인〉
△ 충북 제천 출생
△ 고려대 대학원 영문과 졸업
△ 1966년 동아일보 (동화), 1967년 중앙일보 (시), 1969년 대한일보 (소설) 신춘문예 당선.
△ 시집 '아침의 예언'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 '겨울강' '1미터의 사랑' '벙어리장갑' '오탁번시전집' '손님' '우리 동네' '시집보내다' '알요강' '비백' '속삭임'
△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사진 〈Bing Image〉
詩 人
오 탁 번
상투 잘리고 목 떨어지는
개화기의 조선 땅
푸르디푸르다 못해 희디희게 물들어버린
스산한 가을 하늘을
오리알 빛으로 바라본
정녕 슬픈 시인이 있었네
한강이 금빛 허리 뒤척일 때
사랑하는 이와 함께
짝이 되어
술 한 잔 홀짝 마시는
카페 홀짝 / Cafe One Pair
시집 이름보다도 더 예쁜
이 술집 이름을
어느 시인이 지었을까
'杏子板 검자주 옻칠 소반에 정갈한 백자 대접 흰 달 같이 놓이고, 다른 반찬 소용없어 간장 한 종지 앙징맞게 동무하여 따라온 것이, 벌써 마른 속에 입맛 돌게 하는데, 간장 한 점 숟가락 끝에 찍어 흰죽 위에 떨구고 한 술 뜨면'
―「魂불」에 나오는 흰죽 먹는 장면이라네
말 하나하나 고르며 밤 밝힌 최명희는
시 짓는답시고 죽을 쑤는 시인보다
정말 진짜 시인이었네
오리알 빛 하늘 바라보며
술 한 잔
홀짝 하고 싶네
간장 한 점 찍어
흰죽
한 술 뜨고 싶네
엄마가 어린 딸을 데리고 시장 가는 길
감나무에 조랑조랑 열린 풋감을 보고
'푸른 감이 가을이 되면 빨갛게 익는단다'
엄마 말에 고개를 갸옷갸옷 하던 딸은
감나무 가지가 휘어지도록 우는
매미울음 따라
엄마 손 잡고 까불까불 걸어갔네
가을 어느 날 해거름에 시장 가는 길
빨갛게 익은 감이 탐스러운
감나무 가지에
하얀 낮달이 꼬빡연처럼 걸려 있었네
다 저녁이 되어 엄마 손 잡고 돌아올 때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
딸이 말했네
'엄마, 달님이 그새 빨갛게 익었어'
개미가 기어다니는 보도블록을
걸어오는 길
엄마가 까치걸음 하는 딸을 보고
눈을 흘기자
'아기 개미를 밟으면 엄마 개미를
못 만나잖아?'
앙증스러운 어린 딸의 말을 듣고
엄마는 처녀적 시인의 꿈이 다시 생각나
미소 지었네
시인은 못됐지만 이제
시인 엄마가 되었네
감나무가 빨간 등불 알알이 켜고
환히 비추는
아기 시인과 엄마가 시장 갔다
돌아오는 길
사진 〈Bing Image〉
운수 좋은 날
오 탁 번
노약자석엔 빈 자리가 없어
그냥 자리에 앉았다
깨다 졸다하며
을지로 3가까지 갔다
눈을 뜨고 보니
내 앞에 배꼽티를 입은
배젊은 아가씨가 서 있었다
하트에 화살 꽂힌 피어싱을 한
꼭 옛 이응 'ㅇ' 같은
도토리 빛 배꼽이
내 코앞에서
메롱메롱 늙은 나를 놀리듯
멍게 새끼마냥 옴쭉거린다
전동차 흔들림에 맞춰
가쁜 숨을 쉬는
아가씨의 배꼽을 보면서
나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 옛날 길을 가다가
아가씨를 먼 빛으로 보기만 해도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
들끓는 야수를 눌러야 했던
내 청춘이 도렷이 떠올랐다
공짜로 지하철을 타고
맨입으로 회춘回春을 한 오늘은
정말, 운수 좋은 날!
- 시집〈우리 동네〉2010 -
사진 〈Bing Image〉
속 삭 임
오 탁 번
2022년 세밑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옆구리가 아프고
명치가 조여온다
소리를 보듯
한 달 내내 한잔도 못 마시고
그냥 물끄러미 술병을 바라본다
무슨 탈이 나기는 되게 났나 보다
부랴사랴
제천 성지병원 내과에서
위 내시경과 가슴 CT를 찍고
진료를 받았는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다
(참신한 비유는 엿 사 먹었다)
췌장, 담낭, 신장, 폐, 십이지장에
혹 같은 게 보인단다
아아, 나는 삽시간에
이 세상 암적 존재가 되는가 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1초쯤 지났을까
나는 마음이 외려 평온해진다
갈 길이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가는 것보다야
개울 건너 고개 하나 넘으면
바로 조기, 조기가 딱 끝이라니!
됐다!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