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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대중 통닭시대 연 명동 영양센타 본점
박정배 / 음식칼럼니스트·‘음식강산’ 저자
1960년대 서울 명동 영양센타의 전경. 1시간 동안 구워 기름을 뺀 뒤 담백한 맛을 내는 전기구이 치킨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곳이다. 명동 영양센타에 전시된 사진을 재촬영한 것임.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떠났던 서울은 1950년대 말을 지나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1959년 200만 명을 돌파한 인구는 1년 만인 1960년에 244만 명을 넘어섰다. 강북만의 서울은 당시 만원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사람들의 거주지였던 명동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인 거주지로 본격적으로 개발된다.
일제가 물러간 뒤 명동은 서울의 심장이 된다. 부흥, 재건, 희망 같은 단어들이 들끓던 1960년 한성화교학교에서 남산으로 가는 길목 근처에 세상을 놀라게 한 전기구이 통닭이 선보인다. 가게 앞에 선보인 전기구이 조리기 안에는 닭들이 도열한 채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의 본격적인 대중적 통닭 시대의 개막은 이렇듯 경이 속에서 시작됐다. 천천히 돌아가는 쇠막대에 걸린 닭들의 모습은 회전목마에 앉은 공주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익어가는 닭에서 기름이 떨어질 때마다 어린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넋이 나갔다. 전쟁이 끝나고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먹을 것이 없던 시대였다. 잔칫날에나 먹던 통닭들의 군무는 영화처럼 비현실적이었다.
1960년대 중반 명동 한성화교중학교를 다닌 왕육성(60·전 화교조리사협회 회장) 씨는 ‘영양센타 본점’의 전기구이 통닭과 명동 주변의 먹거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화교학교 주변에 혜성처럼 등장한 통닭은 부자들이나 먹을 수 있는 꿈의 음식이었다.
부자 친구들이 사온 통닭을 부러움과 시샘의 교차 속에서 몇 점 얻어 먹었던 기억은 또렷했다. 당시 명동 주변에는 시장 상인들이나 배고픈 학생들을 위한 저렴한 먹거리들이 많았다.
1960년대에 출시된 삼립빵은 학생들의 애용품이었다. 얇게 펴서 튀겨낸 오징어튀김과 갓 탄생한 삼양라면을 파는 포장마차들이 지금 신세계 백화점 뒤쪽에 있었다. 지금도 중국 식당들이 몰려있는 서울중앙우체국 건너편의 좁은 골목에는 간장과 대파로 기본 간을 하고 고추장을 살짝 넣은 달달한 떡볶이를 아주머니들이 길가에 늘어놓고 팔았다.
1960년대 쌀 부족으로 시작된 분식의 시대는 짜장면, 라면, 떡볶이 같은 먹거리들을 대중적인 음식으로 탄생시켰다. 쌀보다 밀가루가 더 많이 들어간 부드러운 떡볶이는 달보드레한 음식이다. 쌀로 만든 떡볶이보다 식감이 좋은 부드러운 떡볶이와 같은 질감의 떡볶이를 왕육성 씨는 지금도 찾아다니며 먹는다.
당시 중국집들도 야유회나 소풍철에는 ‘싸박이(八鷄)’를 엄청나게 팔았다. 닭을 여덟 개로 조각내 밀가루를 묻혀 돼지기름이나 쇼트닝(동물성 지방)에 튀겨낸 싸박이는 지금의 프라이드 치킨과 비슷한 음식이었다. 1890년 발간한 언더우드 ‘한영자뎐’에도 ‘통닭’이란 단어가 등재돼 있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한국인에게 닭고기는 삶거나 쪄먹는 것이었고 통으로 먹는 음식이었다. 전기구이 통닭은 통째로 닭을 먹는 한국인의 식습관과 잘 맞는 먹거리였다.
전기구이 통닭은 등장하자마자 부자들의 최고 외식 메뉴이자 영양을 위해 먹는 외식이 된다. 1960년 문을 열 당시 영양센타 본점은 전기구이 통닭 기계 하나를 놓고 영업을 했다. 통닭은 가게에서 먹는 것이기도 했지만 포장으로 많이 팔렸다. 40대 이상이라면 아버지가 사온 포장지에 담긴 통닭에 관한 기억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전기구이 통닭은 물론 통닭 포장지도 영양센타 본점에서 처음 개발했다. 지금도 영양센타 본점에 가면 통닭을 포장해 준다. 통닭 포장지에는 실용신안등록 1754호, 1828호 번호가 적혀있다. 실용신안등록 1754호는 1962년 6월 12일 출원을 신청한다.
처음에는 ‘구조상으로 보아 재래식 수회동(회전)으로 각종 육류를 조리하던 것을 전기동력을 이용하여 복잡한 구조로 조립한 것인데 그 효과는 재래 수회동과 차별이 없는 것이며 오히려 조리의 조정이 불능할 뿐더러 니크롬선에 붙은 지방질의 청소 등 여러 면으로 보아 실용신안법 제2조의 규정에 의한 신규 유용한 고안이라 인정할 수 없음’이란 이유로 거절된다.
하지만 이의 신청 끝에 1963년 3월 25일 정식으로 등록된다. 실용신안의 명칭은 ‘영양보존조리기(營養保存調理器)’였다. 실용신안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 당시 닭 조리에 관한 일반적인 상황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소육(燒肉·고기 굽기)의 조리 열원은 대개 목탄, 두탄 등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열원은 항상 연소에 필요한 적절한 공기(산소)를 공급할 때 연료 점화의 번잡성도 있고 때로는 불완전연소로 인하여 유독 일산화탄소도 발생하고 탄분 기타 발분의 기산(흩어짐) 등으로 불결함은 말할 것도 없고 육류 본래의 맛을 갖기는 용이치 않고 필요한 온도조절이나 열원의 취급 곤란성 등은 물론 감각적인 미를 도구는(돋우는) 통닭의 소육은 조리하기 곤란하였다. (중략) 본 고안은 이러한 결점의 개선과 종래 통닭의 증자(찌고 삶는)시는 소육의 건열과 달리 자즙(삶은 국물) 속에는 육성분의 일부가 용출되여 통닭 증자육의 저작(씹는)의 미각이 거의 없었던 것을 간단하고 편리한 구조로서 단시간 내에 조리하고 본래의 영양분의 분해와 손실이 없도록 적절한 급속고온완만 가열의 온도조절로서 통고기의 진미를 감미할 수 있는 고안을 구성했다.’
불 위에 고기를 손으로 돌려 구워 먹던 것을 개선해 자동으로 니크롬 열선에 구워 먹는 방식은 영양센타 본점의 창업주가 해외를 다니며 아이디어를 얻어 개발한 것이었다. 삶아 먹는 닭의 영양 손실을 막아 영양을 최대한 보존한 통닭이란 의미로 영양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63년 5월 15일에 실용신안 1828호로 등록된 ‘소숙조리기(燒熟調理器)’는 전기구이한 통닭을 기계 안에서 보존할 수 있는 발달된 형태였다.
그런데 이 실용신안 등록을 놓고 명동에서 전기구이를 팔던 다른 식당과 특허 소송이 벌어졌지만 승소한다.
1965년 월간종합지 ‘신동아’ 9월호에는 당시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기사가 실린다. ‘전기구이 통닭, 군침부터 삼키고 한집 문을 열었을 때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도 없이 초만원이라 다른 집엘 갔다. 역시 만원이다.’ 전기구이 통닭의 인기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절정기를 맞는다. 전성기에 영양센타 본점은 사보이 호텔 옆으로 자리를 옮기고 2000년대 말 다시 한 번 사보이 호텔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전성기만큼은 못하지만 인기는 여전하다.
40년간 일한 주방장과 창업 때부터 자리를 지킨 매니저까지 영양센타 본점은 음식이든 사람이든 잘 변하지 않는다. 오랜 역사 탓에 3대를 잇는 단골들을 포함해 40년 이상 된 단골만 100여 명이 된다. 1960년 창업 당시의 통닭 가격은 한 마리에 150원이었다. 현재는 1만4000원으로 100배 정도로 올랐다.
가게 안에는 1960년대 창업 당시의 흑백사진이 붙어있다. 영양센타는 현재 9개의 매장이 있지만 프랜차이즈 방식이 아니라 창업자와 인척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영양센타 본점은 생닭을 한 시간 정도 찐 뒤 구워내는 방식으로 통닭을 만든다. 껍질에 지방이 몰려있는 닭은 속까지 익히기가 어려운 식재료다. 전기구이 방식이나 프라이드 치킨은 닭을 찐 뒤 굽거나 튀겨내는 방식을 이용한다.
프라이드 치킨은 닭의 속까지 양념이 배게 하기 위해서 염지라는 방식을 사용한다. 소금물을 기본으로 각종 조미료를 섞은 용액에 닭을 담그는 기술은 가장 기본에 속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초기에 프라이드 방식으로 닭을 먹는 방식이 조리서에 기록돼있다. 세종대왕의 어의로 잘 알려진 전순의가 쓴 한민족 최초의 조리서인 ‘산가요록’(山家要錄·1450년경)에는 닭고기 구이법이 나온다.
‘살찐 닭 한 쌍을 24∼25개로 잘라서 먼저 노구솥 속에 기름을 넣고 달군 뒤에 솥 안에 있는 고기를 빨리 뒤집는다. 청장과 참기름을 붓고 가루즙을 넣어 익힌 후 식초를 넣어 먹는다.’
19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내게도 통닭에 관한 기억은 강렬하게 남아있다. 남해 촌놈이던 나는 서울의 초등학교 소풍날 통닭을 처음 봤다. 반장, 부반장 같은 공부 잘하고 집도 잘사는 아이들의 부모들은 전기구이 통닭을 선생님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당시 내게 전기구이 통닭은 부자들이나 힘센 사람들의 음식으로 보였다. 집에 가서 그날의 이야기를 했다.
다음 날 저녁 아버지는 전기구이 통닭을 몇 마리 사오셨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가난한 집에서 부자들의 성찬이 베풀어졌지만 처음 먹어본 음식은 먹기에 부담스러웠다. 그날 나는 바삭한 껍질만 몇 점 먹었다. 친구들과 이미 몇 번 맛을 봤던 형과 누나들은 전기구이 통닭을 빠르게 먹어 치웠다. 그후로도 아버지는 몇 년 동안 일 년에 몇 번쯤은 전기구이 통닭을 사오셨다. 1970, 80년대가 되면서 전기구이 통닭 값은 서민들도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떨어졌고 전기구이 통닭이 신문 광고 지면에 자주 등장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전기구이 통닭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은 1971년 국내 최초로 선보인 해표 식용유의 등장과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때문이었다. 마을마다 영양센타나 전기구이 통닭집이 들어선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장에 식용유로 닭을 튀겨주는 시장닭튀김이 등장한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경기 수원의 ‘매향통닭’은 1971년부터 가마솥에 식용유를 가득 붓고 통째로 닭을 넣어 튀겨낸 튀김 통닭을 팔았다. 이후에 가게들은 좀 더 쉽게 닭을 튀기기 위해 닭을 잘랐다. 통닭에 결정타를 먹인 건 197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이었다.
전기구이 방식의 굽는 닭 요리법은 중세시대부터 잉글랜드에서 먹던 방식이었다. 잉글랜드는 닭을 굽거나 삶아 먹는 반면에 스코틀랜드에서는 닭을 튀겨 먹었다. 잉글랜드의 구운 닭은 유럽 전반과 미국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스코틀랜드의 잘게 자른 닭을 기름에 튀겨 먹는 방식은 미국으로 옮아와 꽃을 피운다. 1930년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KFC)이 쪄낸 뒤 튀겨 낸 튀김 닭을 팔면서 프라이드 치킨은 미국인의 국민 음식이 된다.
1971년 일본에 상륙한 KFC의 인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눈치 빠른 기계 수입업자들이 프라이드 치킨 기계를 일본에서 수입해 팔기 시작하면서 켄터키 치킨이란 말을 사용했다. 닭을 한 번 찐 뒤 튀겨내는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은 속까지 간이 잘 배고 촉촉함을 유지하면서도 겉은 바삭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맥주 문화는 프라이드 치킨과 찰떡궁합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생맥주 문화가 기름지고 짠 프라이드 치킨과 만나 생맥주와 프라이드 치킨을 먹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된다. OB가 1980년에 낸 생맥주전문점 ‘OB베어’는 열풍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열자마자 젊은이들과 직장인들의 저녁 일상 문화가 된다. OB베어는 유흥과 상업지역을 넘어 본격적으로 주택가로 입지를 옮긴다. 1981년 당시 OB베어는 전국 600여 곳에 매장을 가지고 있었다. 후발로 참여한 경쟁사 크라운비어의 ‘크라운 시음장’ 등을 합치면 1000여 곳으로 추산될 정도였다.
1984년 KFC가 종로에 1호 매점을 내고 대한민국에 정식으로 상륙하면서 닭 전쟁은 격화된다. 가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집들은 문을 닫고 국내 치킨 프랜차이즈들이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한다. 프라이드 치킨에 대항하기 위해 대구에서는 1978년 간장을 이용한 간장치킨이 ‘대구통닭’에서 만들어지고, 1982년에는 ‘페리카나’에서 양념을 바른 통닭이 생겨나 프라이드 치킨과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치킨게임’을 벌인다.
1980년대 중반에는 반포에서 전기구이 통닭에 마늘을 바른 전기구이 마늘통닭이 탄생해 통닭 마니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조각닭 프라이드가 장악한 뒤였다. 어린 시절 닭을 거의 먹지 않던 나는 대학생이 되어 술을 마시면서 전기구이 통닭의 맛을 알았다. 바삭한 껍질과 촉촉한 속살, 닭의 맛으로 승부를 거는 원초적인 전기구이 통닭은 밀가루 반죽과 기름이 가득한 프라이드 치킨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음식이었다.
40년 넘게 살고 있는 서울 성북구 안암동 주변에는 ‘삼성통닭’, ‘온달치킨’ 같은 전기구이 통닭의 명가가 오래전부터 영업 중이다. 전기구이 통닭은 속까지 익히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살이 적어 식당 주인들에게 손이 많이 가고 수익이 많이 나지 않는 계륵 같은 음식이다.
박찬일 셰프의 말대로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전기구이 통닭이 사라지면 내 기억의 상당 부분도 사라진다. 몇 달에 한 번 내가 전기구이 통닭을 먹는 이유다.
현재 서울 명동의 영양센타 전경. 일본·중국 관광객뿐만 아니라 오랜 단골의 자녀, 손자·손녀가 함께 이곳을 찾기도 한다.
불 꺼진 창 - 조영남
첫댓글 지금은 자양센타 통닭대신 후라이드 치킨이
대세지요
그 시대에 웬만한 사람은 꿈도 못꿨지요
70년대 중반 청량리에 통닭집에서 세마리를 사서 춘천가는 기차를
타고 가는데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청평역에 내리니 통닭이 종이 쇼핑백에 담긴것이 다 찟어져서 어디로 가고 한마리만 남아서 같이간 6명이 어이가 없었지요
처음으로 청량리 기차를 탔는데 그렇게 사람이 많은줄 몰랐지요
그시대에는 젊은이들이 여름에 놀러가면 청평이나 현리 계곡에 기차 타고 많이 갔나보더라구요
영양센타 닭집. 명동 성지순례 코스
부대찌개집도있었는데. 의정부 부대찌개였던가?
큰언니가 유난히 좋아해서 가끔 갔던 곳
충무로 영양쎈타
일년에 두번
쿠리막스때랑 연말. 통행금지 없던 날은..
명동에서 장충동까지 넘쳐나던 인파가 생각나네요
내나이 열여섯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