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는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던 팍스로마나 시대의 이스라엘 세리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보호가 꼭 필요한 실정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는 로마의 군대가 주둔했고, 많은 부분에서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넓은 영토를 다스리고 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에는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다. 로마에서 할당한 이 세금을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로부터 거두는 일이 바로 마태가 하는 일이었다.
로마황제에서 로마 총독으로, 총독과 분봉왕에서 세관으로, 세관에서 세리로 내려오면서 수수료가 붙어 세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수수료를 키우면 키울수록 세관과 세리의 연봉 또한 비례해서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개인이 나서서 바꿀 수 없는 그 시대의 관행이었다. 불행하게도 세리 마태 또한 먹고 살기 위해 그 관행을 따라 부과된 세금 외에 추가분을 더 걷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세관과 세리는 일반 민중들에 비해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용에는 항상 반작용이 따른다. 인플레이션이 커져 물가가 올라가고, 서민의 삶은 팍팍해졌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뤄야 한다. 세리 마태가 감당해야 하는 그 대가는 혹독했다. 마태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세리'라는 직업을 택한 것만으로 '강도, 도적, 매국노'라 불리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내가 만약 마태와 같은 세리였다면 ?"
어떻게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곧장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 예수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야의 모습이 아니었다. 예수는 보잘 것 없어보였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 유대사회의 지도층은 예수를 죄인으로 몰아 심판할 빌미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태는 지금 '세리'라는 아스팔트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예수'라는 좁고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로 들어선 것이다. 마태는 자신을 둘러싼 단단한 알을 깨뜨리고, 왕되신 주님을 아슬아슬하게 뒤따라가는 아기새와 같다.
예수의 제자 마태는 분명 세리 마태보다 더 비천하고 소망 없어 보이지만, 마태는 회개하고 다시 태어난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을 통해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탕감받았고, 마태 또한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의 모든 빚을 탕감해준 것이다.
구약의 율법과 정죄 아래에서 노예처럼 신음하던 마태는 예수님을 간절히 구했고, 비로소 예수님을 만나 복음 안에서 자유로운 자녀가 되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적힌 헬라어 '비블로스 게네세우스'(근원의 책, 창세의 책) 단어의 뜻대로 새롭게 깨끗하게 창조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의 본모습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빌 3:8-9) 이제 마태의 정체성과 소명과 삶의 이유는 분명해졌다.
마태가 앉아 있던 의자가 보인다. 그가 돈을 받던 책상과 세금 장부가 보인다. 나는 여전히 내게 "강도, 도적, 매국노"라고 욕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세리다.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부과된 것 이외에 더 거두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서민의 등골을 휘게 하는 세리다. 예수님께서 찾아와 부르실 때, 우리는 앞날이 불안하고 두려워 마태와 함께 일어서지 못한 세리다.
주님께서 다시 부르실 때 ? 우리도 꼭 이렇게 외치자!.
"다윗의 아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치는 믿음을 주시기 원한다.
샬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