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있는 바보들의 쓸데없는 거짓말.
사법부 판결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오보' 주장 안타까워...
"공산당이 싫어요"(70년대 구전가요)
1. 원수의 총칼 앞에 피를 흘리며
마지막 주고 간 말 공산당은 싫어요
구름도 망설이는 운두령고개
새무덤 오솔길을 산새가 운다
2. 어린 넋 잠든 곳에 겨레가 운다
엎드려 절한 마음 눈∼물이 솟네
바람도 길 멈추고 어루만지니
하늘이 성이 났다 오랑캐들아
이 노래는 어린시절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슬프게 전해졌던 걸로 기억한다.
만 30년간 북한공산집단의 잔혹성을 상징 해오던 이 말 한 마디가 10년 이상 도마 위에 올랐다. 기자협회가 발행하는'저널리즘'이라는 잡지 92년 가을호에 김종배 기자협회 편집국기자가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라는 글을 기고한 것이 그 발단이다.
그후 '미디어 오늘'-'말'지-중앙일보가 동시다발적으로 조작설을 제기했으며, 드디어 지난 98년 9월 MBC는 'PD수첩 오보, 그 진실을 밝힌다'에서 조선일보의 '이승복 기사'는 작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98년 8월 창립직후부터 ‘언론개혁시민연대(상임대표 김중배)’는 서울 시청역 지하도와 부산역 광장에서 ‘개혁을 위해 돌아본 우리 언론의 부끄러운 과거들 정부수립 50년 한국신문 50년' 전시회에서 '기사가 아닌 소설'이라는 설명을 달아 조선일보의 이 기사를 내걸었다.
1.21 청와대습격사건이 있던 1968년 10월 3차에 걸쳐「울진·삼척지구」해상으로 침투한 북한의 120명의 무장군인 중 잔당 5명이 추격을 피해 북으로 도주하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12월 9일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 계방산 중턱 이승복군의 초가집에 침입한다.
결국 일가족 4명이 무참하게 살해되고, 36곳에 칼을 맞고 거름더미에서 발견된 형 이학관, 이웃집 이사를 돕다 돌아와 공비에게 붙잡혀 다리를 칼에 찔린 뒤 기적적으로 도주한 아버지 이석우는 극적으로 살아난다. 당시 많은 언론들이 이 사건을 취재했는데, 조선일보가 이승복군 가족 4명이 북한 무장군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건은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군의 발언이 발단이 됐다는 특종보도를 하게 된다.
그 후 이승복군은 반공의 상징이 되어, 거의 모든 초등학교에 동상이 세워지고 75년 10월에는 대관령정상에 이승복 반공관이 설립되었다. 80년대 대학가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주체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운동권학생들을 중심으로 이승복 선전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는 콩사탕이 싫어요”라는 패러디가 유행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논란은 이승복군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이 실제 있었느냐와 조선일보 취재기자가 과연 취재를 통해 그 말을 듣고 기사를 썼느냐의 두 가지로 모아진다. 작문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모두 의문을 제기한다.
당시 조선일보 취재기자인 강인원(58)은 "현장에 도착해서 시체 주변에 있던 주민으로부터 그 말을 듣고 썼다"고 주장한다. 이는 승복군의 형 이학관과 당일 병원으로 후송되기 전 이학관에게 이 말을 들었다는 마을사람들의 일치된 증언으로 입증되고 있다.
작문론자들은 유일한 현장 목격자인 이학관이 병원으로 후송될 때까지 다른 주민에게 학살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할 경황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야말로 전형적인 작문이다. 말할 경황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여부는 추측이 전혀 필요 없는 사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건현장의 참혹한 시신을 앞에 두고 자세한 정황도 모르는 상황(사건의 구체적인 전말은 나중에 이학관의 증언을 통해 밝혀진다)에서 초등학교 2학년생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해 죽음을 당했다는 상상을 해내고 이를 기사로 보낼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시신은 말을 한다’는 법의학의 경구대로 이승복군의 시신은 오른쪽 입술 끝부터 귀밑까지 찢어진 상처가 있고 뺨 중간과 귀 근처에 +자 형태의 상처 2개가 뚜렷한 상태였다. 왜 하필 어린아이의 입을 무참히 칼로 난도질 했을까? 이학관은 “승복이가 그렇게 말해 공비들이 칼을 승복이의 입에 쑤셔박았다"고 증언한다.
작문론의 원조인 ‘미디어오늘’ 前차장 김종배 조차 오보의 증거를 얻고자 주민들을 취재한 후에 “내 글에 대해 불합격 판정을 내려야겠다”고 시인하고 있다.
한편 과연 이승복군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 말이 있었다는 주민들의 증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PD수첩’ 이용석PD는 "학관씨의 말을 '주장'으로서만 인정할 뿐 1백%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마을사람 또는 이학관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학관이 사건 한참 후에 이런 증언을 했다면 모르되, 사건 직후 칼에 찔려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서 동생을 영웅을 만들겠다고 없는 사실을 지어낼 수 있을까? 정황으로 보아 이학관은 거의 유언 비슷하게 동생의 비극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역시 강원도 산골 오지의 마을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상상하기도 어렵다.
“남한이 좋으냐, 북한이 좋으냐”는 북한군의 물음에 이승복군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대답했다가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런 정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승복군이 마치 투사가 재판정이나 형장 앞에서 “나는 독재가 싫다”라는 식으로 외친 것처럼 오인하고 의아해 한 것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은 오직 이승복군 같이 선생님에게 배운대로 정직하게만 말하는 초등학교 2학년 정도의 어린이만이 할 수 있다. 특히 집은 가난했지만 공부도 잘하고 착했던 이승복이기 때문에 무척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오히려 중학생이나 어른이 이런 말을 했다면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오보 논란은 법정으로 가게 되었고, 2004년 10월 28일 항소심 재판부는 ‘오보전시회’를 주도한 ‘언론개혁시민연대’ 전 사무총장 김주언에게 허위사실 유포죄 등을 적용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당시 ‘언개련’의 전시회 책임자인 김중배 상임대표는 “내가 이 선정작업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일보)기사가 오보가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 책임자로서 사과를 포함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법부의 판결이후 김중배대표의 사과를 들어본 적이 없다.
오보 논란에 가담했던 매체 중 오직 중앙일보만이 기사보도 1주일뒤 ‘알림’을 통해 “이승복군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한 말은 조작됐다는 내용과 관련, 이승복군의 형 학관씨는 '당시 현장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밝혀왔습니다. 더불어 과거의 슬픔을 들춘데 대해 유족들에게 사과드립니다"라고 밝혔다.
사법부의 판결로 논란은 종결되었지만 작문론자들이 주류로 득세하면서 심지어 이승복군 자체가 실존하지 않은 허구의 인물로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유행처럼 이승복군 동상 철거가 자행되었다. 유족들은 지난 12년간 악몽 속에서 살아야 했다.
“(판결 내용을) 전해 듣는 순간 36년 동안 지내온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머리에서 돌아가더라. 세상이 야속했지. 내 말을 두고 거짓말이니 뭐니 했던 사람들…. 난 산골에서 태어나 자란 겨우 열세 살 아이였어. 아는 것이라곤 내가 살던 산골이 전부였는데….” - 이학관의 언론 인터뷰 中
홍진표(자유주의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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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이 싫다는 절규와 함께 처참하게 죽어간 이승복군은 그 당시 반공정신의 표상이었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려하는 좌파들의 괘변이 한심할뿐입니다.
안타깝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이 게시물 가져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