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제8대 임금 예종(1450~1469)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
형 의경세자가 20세로 갑자기 죽자 9세에 세자로 책봉된다.
세조가 죽기 하루 전날인 1468년 9월 7일 전위 받아 18세로 왕위에 올라
1년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재위해 남긴일은 별로 없다.
류자광의 모함을 받아 장래가 촉망되는 남이장군을 죽인것 말고는 정말 한일이 없었다.
예종은 세자일 때 세자빈인 장순왕후 (영의정 한명회의 3째딸)와 결혼하여
1461년에 인성대군을 낳았는데 이때 나이가 12살이였고 세자빈은 17세였다.
장순왕후는 산후병으로 일찍죽고 인성대군도 4살때 죽는다.
그러니까 12살에 예종은 아기를 낳을 정도로 조숙하고 정기가 왕성하였다.
요사히 나이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 쯤 되는 나이다.
그 후 예종은 우의정 한백륜의 딸을 세자빈으로 책봉하였으니 그녀가 인순왕후 한씨이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제안대군과 현숙공주가 이었으나
제안대군은 예종이 죽을때 4살이여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형인 의경세자의 둘째아들 자을산군-후일 성종이며
한명회의 4째 딸과 결혼 함- 이 왕위를 있는다.
야사에 따르면 예종은 안순왕후 한씨와 잠자리를 하다가 갑자기 죽었다고 한다.
이른바 복상사(腹上死)인 것이다.
안순왕후는 자기의 몸 위에 엎드린 용체가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여
하반신을 옆으로 빼내니 용체가 힘없이 요 위로 무너져 내렸다.
이에 안순왕후는 그만 혼절해 버렸다고 한다.
예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 정순왕후 윤씨는 기가 막혔다.
12년 전에 맏아들 의경세자가 갑자기 죽고 이어 남편인세조도 죽었는데,
1년 만에 또 다시 아들이 급사하자 눈앞이 캄캄했다.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황후나 후궁들과 잠자리에 들었다는 중국 한무제,
가마를 타고 가면서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여색을 가까이 했다는 진무제,
수 십명의 궁녀들과 밤낮 술래잡기를 했다는 수양제 등은
색을 유난히 밝혔던 음탕한 군주들이 였다.
그런데 여색을 밝혔다는 기록도 없는 예종에게
복상사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가 12살에 아기를 낳아서 일까?
아니면 아마도 급사(急死)라는 것이 와전되거나
덧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말 그대로 야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첫댓글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저주였을까?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도 20세에 죽고
예종의 아내이며 세조의 며느리도 17세 나이로 출산한지 몇일만에 죽고
그 세자도 4살에 죽고
예종도 20세에 또 죽고...
적자손으로 이어지는 왕통의 천부적 질서를 깨고
왕의 자리를 찬탈하는 일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정권을 탕취한 쿠데타와
다름없지요. 쿠데타나 독재를 미화하는 것은 왕조시대의 세조같은
자를 미화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요?
100년 200년이 지나도 역사의 기록은 변화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자목련과 새소리와 키타 음이 앙상블을 이루는 토요일 저녁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