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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귀 | 마태 1:16 | 누가 3:23 |
요셉의 아버지 | 야곱 | 헬리 |
그리스어 표현 | "야곱이 요셉을 낳았다(겐나오)" | "헬리의 아들(휘오스) 요셉" |
2. 요셉은 헬리의 사위인가?
이러한 모순점에 대한 가장 1차원적인 대답은 "요셉이 헬리의 사위"라는 주장이다.
(즉 누가의 족보는 마리아의 가계도라는 주장이다.)
워치타워 역시 이런 주장을 그대로 받아드린다.(통찰책 "헬리" 참조)
특히 마태의 족보는 "야곱이 요셉을 낳았다(겐나오)"라는 표현을 사용한 반면, 누가는 "헬리의 아들(휘오스) 요셉"라는 표현을 근거로 들면서 여기서 아들은 사위라고 우겨댄다.
그러나 유대교에서 여성, 그것도 일반 평민의 족보를 수천년 동안 기록하는 것은 전혀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모계 족보 추적은 유대교의 관습이 아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은 아론의 후손,즉 레위지파 사람임을 알려준다.
(누가 1:5) ...그에게 아론의 자손인 아내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누가 1:36) ...보시오! 그대의 친족 엘리사벳도 노년에 아들을 수태하였소....
따라서 마리아는 유다지파 다윗계열의 왕족인 아니라, 레위지파 제사장계열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누가는 요셉을 다윗의 후손이라고 여러차례 강조하지만, 마리아에게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누가 1:27) 다윗의 집의 요셉이라는 남자와 약혼한 처녀에게로 갔다....
(누가 2:4) ...요셉도 다윗의 집과 가문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사실상 기원 8세기 마리아 숭배 사상에서 기인한 것에 불과하다.
[“마리아의 몽소승천(蒙召昇天)(Assumption of Mary)” - 다마스커스 요한저 참조]
이러한 주장은 유대교의 전통으로나 성경적으로나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는 억측에 불과하다.
“누가의 족보는 일반적으로 요셉의 족보로 간주되었다”
_ 샤프 Philip Schaf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NPNF2-01.
3. 야곱은 요셉의 생물학적 아버지이고, 헬리는 요셉의 법적 아버지였는가?
초기 교부들은 예수의 족보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유일한 대체 가능한 설명을 제시한다.
“솔로몬의 후손인 맛단은 야곱을 낳는다, 맛단이 죽었을 때 나단의 후손인 멜기는 같은 여인으로부터 엘리를 얻는다. (따라서) 엘리와 야곱은 (이종의)동복형제다. 엘리가 후손이 없이 죽자 야곱이 요셉을 낳아 그의 대를 잇게 한다, 요셉은 야곱의 친아들이지만 법적으로는 엘리의 아들이다. 따라서 요셉은 두사람의 아들이다(즉 二父之者다: 역자 주)”
_ 유세비우스 Eusebius, History of the Church, 1.7.15.
이 동영상은 유세비우스의 설명을 쉽게 영상으로 만든 것이다.
요약하자면,
맛단(Matthan) 맛닷(Matthat)
: :
야곱 -- 헬리
: :
요셉
:
예수
예를 들어, 에스더라는 가상의 여인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에스더는 맛닷(Matthat)이라는 남자와 결혼을 해서 헬리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남편이 죽자, 아들을 데리고 맛단(Matthan)이라는 남자와 재혼해서 야곱을 또 낳는다.
(헬리와 야곱은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는 다른 이종형제가 된다.)
그런데 헬리가 자식이 없이 죽게된다.
그래서 이종형제인 야곱이 자신이 낳은 아들, 요셉을 헬리의 법적인 아들로 입적시킨다는 가정이다.
(맛닷과 맛단을 동일 인물로 착각하지 말라. 비록 신세계역은 모두 "맛닷"으로 번역하지만, 마태와 누가의 족보는 그들의 조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러한 그럴듯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뒷바침할 근거는 전무하다.
오로지 추론에 불과한 것이다.
유세비우스 자신도 이렇게 인정한다.
헤롯은 이스라엘 인들의 혈통관계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전혀 도움이 안됨으로 인해, 또한 비천한 출생에 대한 열등의식 때문에 모든 족보기록들을 태워버리게 하였다. 그는 만일 아무도 그의 혈통을 공적 기록으로부터 추적하지 못하게 되면 그가 귀족가문 출신으로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_ 유세비우스 Eusebius, History of the Church, 1.7. quoting Julius Africanus.
4. 스룹바벨은 예수의 부모의 공통 조상인가?
마태와 누가의 족보는 다윗의 후손에서부터 차이가 발생한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누가는 나단을 예수의 조상을 제시한다.
그러나 바빌론 유수이후 마태와 누가는 모두 스룹바벨을 공통의 조상으로 제시한다.
왜 갑자기 솔로몬의 후손과 나단의 후손이 모두 스룹바벨로 통일되는가?
문제는 이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마태와 누가는 모두 스룹바벨의 아들이 아닌 전혀 다른 인물을 내세운다.
역대 첫 3:19,10에서는 스룹바벨의 7명의 아들을 분명하게 알려주는데, 마태와 누가는 전혀 엉뚱한 사람을 아들로 내세운다.
(마태 1:13) 스룹바벨은 아비웃의 아버지가 되고,...
(누가 3:27) ...레사는 스룹바벨의 아들,...
(역대기 첫째 3:19-20) ...스룹바벨의 아들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였다. (슬로밋은 그들의 누이였다.) 20 또한 하수바와 오헬과 베레갸와 하사댜, 유삽-헤셋, 다섯이 있었다.
성귀 | 역대 첫 3:19,20 | 마태 1:13 | 누가 3:27 |
스룹바벨의 아들 | 므술람,하나냐 하수바,오헬,베레갸,하사댜,유삽-헤셋 |
아비웃 | 레사 |
왜 이런 엉떠리 족보가 탄생하는가?
바빌론 유수이후 500년동안 페르샤,그리스,톨레미,셀루시드,하스모니안,헤롯 그리고 로마의 지배가 이어지면서, 다윗 왕조의 가계도는 거의 소멸되었다.
결과적으로 다윗이후 솔로몬과 나단이라는 전혀 다른 가계도를 스룹바벨로 통일해서 시작하고,
역대상에서 알려주는 스룹바벨의 아들이 아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내세워서 다시 가계도를 이어가는 것이다.
이런 족보가 정당성있고 정확한 족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수천년 동안의 역사를 편집 왜곡해서 만들어내 신화적 족보에 불과한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살아남은 성직자들은 옛 기록으로부터 새로운 족보를 작성하고 남아 있는 여인들의 상황을 점검했다...…모든 사람은 자발적으로 서기가 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이미 기록된 것에 대한 거부도 없었다; 다만 원문을 기록한 선지자와 영감에 의해 신 자신에 대하여 그들이 배운 것들에 대한 최초의 설명만이 허용되었다…”
_ 요세프스 _ Against Apion 1.7.
요세푸스는 1세기에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족보를 새롭게 기록하는 일들이 있었음을 알려주며, 이러한 족보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영감받은 성경의 기록만을 허용되었다."라고 증언한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 모두는 소위 영감받은 성경에서 알려주지 않는 전혀 다른 인물을 족보에 올린다.
5. 마가는 왜 예수의 족보를 언급하지 않는가?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왜 예수의 족보를 언급하지 않는가?
마가복음은 오히려 다윗의 후손이라는 족보에 집착하는 서기관들을 질책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라고 말한다.
(마가 12:35-37)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이라고 합니까? 36 성령에 의해 다윗 자신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적들을 네 발 밑에 둘 때까지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하였습니다. 37 다윗 자신이 그를 ‘주’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아들이 되겠습니까?”...
다윗 왕가의 후손으로서의 메시야 _ 혹은 이 문제에서 어떤 다른 선조를 들먹이는 일은- 이 원본 복음서의 한 요소가 아니었다. 이는 후세의 세련화 과정에서 덧붙여졌다.
-"예수은 없다" 중에서
6. 요셉은 마태의 족보에 따르면 예레미야의 저주받은 후손이다.
(예레미야 22:24-30)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여고냐)가 내 오른손의 인장 반지라 할지라도, 거기에서 내가 너를 빼내겠다!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이 사람을 두고 자녀가 없는 사람, 자기 생애에 성공하지 못할 남자라고 기록하여라. 그의 자손에게서는 성공하여 다윗 왕좌에 앉아 유다에서 통치할 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저주(에레미야 22장)에도 불구하고 여고냐의 아들 스알디엘은 유대의 통치자가 된다. 또한 그의 손자 스룹바벨도 유대의 통치자가 되었다! (따라서) 요셉은 저주받은 왕의 후손인 셈이다!
"여호야김 - 고니야 - 스알디엘 - 스룹바벨"(역대기 첫째 3:16-19)
(마태 1:12) ...여고냐는 스알디엘의 아버지가 되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의 아버지가 되고,
7. 결론
이외에도 수많은 모순과 오류가 넘쳐나는 예수에 족보가 과연 진정성이 있는가?
사실 왕족과 서기관들도 제대로된 족보를 가지기 힘든 상황에서 시골의 목수의 족보가 3500년을 거슬러 완성될 수 있었는가?
아니면 그들의 족보는 후대에 첨가된 상징적 신화인가?
첫댓글 예수의 족보문제에 대해 매우 자세한 조사가 있었군요..
요세푸스의 증언은 매우 결정적이라 보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05.01 10:41
이 족보를 보면서 가장 황당한 것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과 나단이라는 다른 시조를 가지고 시작한 족보가 갑자기 바빌론 유수이후 스룹바벨로 합쳐진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나서 또 성경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인물을 스룹바벨의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족보를 다시 이어나간다는 엉떠리 설정이죠.
족보가 꾸며진 것이라는 것이 확실히 밝혀진다면 근본주의 신학자나 교인들은 적잖이 당황하여 흔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이 기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록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족보기록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며 구약 성경에 약속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목적이기 때문이겠죠
요한복음에도 예수님이 베들레헴 출생인지 의아해할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체험이 그런 모든 문제를 상쇄하고도 남았을테니까요 성서의 영감성은 디모데후서 3:16의 말씀 후반부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족보자체가 정확성이 없다는 그것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기 위해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태의 족보는 사실 마소라 사본이나 히브리어 사본이 아니라 칠십인역에 나오는 이름들이 나옵니다.
이 족보가 엉떠리라는 것은 누가와 마태의 기록자체가 완전 상의할 뿐 아니라, 솔로몬과 나단이라는 다른 시조가 나중에 스룹바벨로 합쳐지고, 성경에 기록되지도 않고 어떤 문서에도 없는 이름을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다시 족보를 시작하는 것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것이죠.
족보를 통해 다윗의 후손임을 증명하려는 태도는 친유대적이고 유사 학문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 복음의 정신과는 위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합니까?
다윗은 이미 그리스도를 나의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 되겠습니까?" - 나사렛 예수
그 다윗의 후손이라는 계보가 정확하지 않은데...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라는 증명이 된다는겁니까?
왜 기독교인들은 한문장내에서 앞뒤틀리는 말을 천연덕스럽게들 하죠?
그리고...예수는 다윗의 후손 아니잖아요.
저걸 그대로 봐도 다윗의 후손들에게 입양됬을 뿐이잖아요...
구약성경의 약속이 틀린거 맞는데요..
아니..구약성경이 정말 예수를 말하고 있는게 맞아요? 마태가 인용한것과는 다르게 구약은 처녀가 아이를 낳을거란 소린 일언반구도 안했고..나사렛예언따위도 없었죠.
저게 대체 어떻게 연결되나요?
물론 이렇게 직설적으로 질문하면 기독교계는 그냥 신앙선언으로 답합니다. 동문서답인데 내용
이 신앙선언이라 더이상 말못붙이고..보고있던 신앙인들이 아멘..이러면 끝나죠.
아주아주 자주 벌어지는 풍경입니다.
제가 글을 정확히 올리지 않았나 봅니다 마태나 누가의 기록은 그 계보가 다윗에게로 소급된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실제가 그렇든 아니든 단지 목적이 그것이니까 그 목적이 좌절된다 하더라도 지식에만 의존한 사람은 타격을 받지만 삶을 통하여 영적 체험을 가진 사람은 대수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체험이 없으니 지식과 자신의 논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한때 종교를 가졌다가도 무신론이 되어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소급이 안되지 않습니까..
영적체험같은건 그런걸 체험하지 않은 사람 여기에 없을겁니다.
영적체험이란 욥의 경우를 보면 자신이 가난과 질병이라는 시련을 받을 때 오히려 그 가운데서 하느님을 더 잘 알게됐기 때문에 그의 신앙이 성장한 것입니다. 이는 신앙이 삶을 통하여 성장하는 것이지 지식이나 논리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다 아시는 사실일겁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감성을 삶에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체험을 얻어야 한다는게 저의 취지입니다.
욥...또한 바빌론발 스토리입니다.
바빌론의 어느 청년의 이야기가 히브리 설화에까지 이른것입니다.
정보통님의 신앙선언및 설명은 그냥 난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이지 이렇게하여 그것이 증명된다.
가 아닙니다.
종교인들은 위 두 가지를 종종 혼동하더군요.
저는 성경의 가르침이 반드시 유익하지만은 않음을 체험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건지 알려줄 수 있나요? 가능한 변론을 해보겠습니다.
그릇된 신앙으로 자녀를 죽이는 일은 거이 매일 뉴스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 역시 수혈거부로 자녀를 살인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모두 성경에서 찾습니다.
얼마전에 자칭 목사부부가 아픈 자녀 세명을 굶기고 때려서 사망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잠언 23:13,14에서 "매로 때릴지라도 죽지 않을 것이다. 매로 때려야 한다 그들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할 것이다."라는 성경대로 행했다고 합니다.
왜 이런 비극적인 일들이 생길까요?
그토록 유익하고 의로 교육하기에 완변한 영감받은 말씀대로 행했는데...
이 방은 다른 님들이 눈살을 찌푸릴 것 같아 옆집으로 논의를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