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28
“잠시 쉬고 계시지요. 대감께서 곧 오실 것입니다.”
우겸이 떠난 이래로 오래도록 비어있어 사람의 흔적이 없었던 고 환관의 별채에 첫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은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고 환관은 은에게 당분간 별채에서 생활하도록 배려했다. 별채에 사람의 기척이 잦아든 뒤, 은은 제가 쓸 방에서 조용히 나와 우겸이 사용하던 방으로 갔다.
방은 어두웠고, 정갈했고, 아무도 없었다. 그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없어보였다. 자신의 기도가 닿았던 것일까. 조금 전 까지 차가운 감옥의 후미진 구석방에서 울던 저였는데, 지금은 우겸이 있던 방에서 그의 자취를 찾고 있다. 은은 우겸이 앉았을 의자의 등거리를 손바닥으로 가만가만 쓸어보았다.
“여기 있을 것 같더구나.”
고 환관이 들어서며 말했다. 은은 고개를 숙인다. 그에게 또 한 번 빚을 졌다.
“이리 하셔도 되는 것입니까.”
“무슨 말이냐.”
“뒷일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말했잖느냐. 나는 폐하의 명을 따랐을 뿐이다.”
은은 그제야 조금 실감했다. 다 알고 있다던 황제의 말을. 모든 걸 다 알고 계시니 염려 말라던 고 환관의 말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앞으로의 일들은. 모든 걸 놓아버린 마음이었다. 은의 손이 여전히 의자의 등거리를 꼭 붙잡은 채였다.
“그대로 두셔도, 괜찮았습니다.”
“........?”
“사필귀정이라지 않습니까. 그대로 감옥에 갇혀 있었더라도, 제가 정말 원에서 살아갈 운명이라면 어떻게든 살게 되겠지요.”
“무슨 소릴 하는게야.”
고 환관의 목소리에 약간의 당혹과 화가 묻어있었다.
“대감은 모르십니다.”
“.........”
“가족에게 배신당하고, 그들을 등지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제가 의지할 곳이라곤 우겸 오라버니뿐이었습니다. 저를 아는 유일한 분이었지요. 아버지처럼 믿었고, 친 오라버니처럼 따랐던 분을 잃고도 그 허황된 꿈을 계속 좇아야하는지- 이제 모르겠습니다.”
고 환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일순 배신감 비슷한 감정이 그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그러나 화기를 억누른 채, 꽤 덤덤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네게 이렇게 크게 실망하게 될 날이, 이렇게나 빨리 올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
“네가 이 일들을 ‘허황된 꿈’이라 믿었다는 것이다.”
“모든 일엔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아무런 동기도 없이 아버지의 의지에 휘말려 이 먼 땅까지 와서 황후가 되라는 가짜 꿈을 부여 받았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계속 나아가란 말입니까...!”
“해 볼만 한 일이라고 말했던 건 누구였느냐. 기자오에게 복수의 맘을 품고서라도 가장 높은 자리에 서 보이겠다 말했던 건 누구였느냐..!”
“........”
“조용히 잘 생각해 보아라. 천자(天子)라 불리는 폐하께서 어찌하여 너 따위를 믿고 스스로의 목숨을 거는 일을 도모하셨는지. 그런 일들을 ‘허황된 꿈’이라 비하시킬 수 있는지 말이다.”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듯, 고 환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리며 충고했다. 당분간은 방에서 머리를 좀 식히는 것이 좋겠다고.
...
평범한 소녀였을 뿐이다. 어머니께 바느질을 배우고, 친구들과 글을 짓고 책을 읽던. 찻잎을 덖거나 차를 따르는 방법 따위는 모르고 있어도 아무도 질책하지 않았다. 남에게 예를 차리고 허리를 굽히는 일 보다는, 누구에게나 존대를 받고 인사를 받는 쪽에 더 익숙했다. 그런 생활들은 생각보다 더 일찍 끝이 났다. 원한 적 없었던 생경한 곳에 와 버렸다. 그런 평범한 일상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 곳으로. 그리고 사람들은 제가 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것들을 원한다. 자꾸 등을 떠민다. 잠시 멈춰 쉬어갈 틈도 주지 않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라버니..”
//貢女 奇皇后//
쪼르르. 수대에 맑은 물이 담긴다. 황후의 손이 마른 수건을 담가 그것을 적셔 물기를 꼭 짜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황제의 침상 가까이로 와 잠든 그의 이마와 볼, 손 등을 깨끗이 닦는다. 간병은 제가 알아서 할테니 모두 물러가라는 그녀의 명으로 주변엔 아무도 있지 않다.
“오래 살고 싶으셨습니까, 폐하.”
...
“그렇다면 방법을 잘못 택하셨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 마치 송곳 같은 예리함으로 의식 없는 그의 귀를 파고든다.
“제게 한을 품게 하신 것은 폐하, 본인이셨으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
“저는 폐하를...”
황후의 입이 그의 귀 가까이로 다가가 무슨 말인가를 전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젖은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덮었다. 황후는 일말의 미련조차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그의 방을 빠져나간다.
탁. 단호히 닫힌 문 뒤로 무정하게 멀어지는 황후의 발소리. 영혼의 분노가 시킨 일인 듯, 침상 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인다.
//貢女 奇皇后//
“폐하께서 일어나지 못하시게 되면 어찌하려고 그런 일을 벌였는가.”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겠지요.”
정무회의가 시작될 무렵, 그 장소인 정전(正殿)에 수많은 재상들이 모여 있고 옥좌는 비어있었다. 정전 앞, 권자 하나를 펼쳐 든 고 환관이 진 대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것은 국경의 강화를 위한 이전의 안건에 대한 폐하의 뜻입니다. 이대로 실현하라 명하셨고, 정무회의에서의 발표와 이 일의 전권을 진 대인께 맡긴다 하셨습니다.”
“폐하께 모든 영광을.”
진 대인은 한 손을 가슴에 얹어 권자를 향해 예를 표했다. 그리고 고 환관은 천천히 권자의 내용을 읽어 진 대인에게 그의 임무를 전했다. 내용은, 은이 황제에게 권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국경의 강화를 위해 백성들 가운데 지원자에 한하여 일을 주고 그 노동력의 댓가로 임금을 지불하라는 것이었다. 필요한 인원만큼 차출하여 쓰되, 일정 시간 이상의 노동력 착취를 금할 것 등의 부수적인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과연 폐하시로군.”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일을 구상해 낸 자에 대한 예우도 잊지 말아달라고 하셨습니다.”
“호오, 그럼 일전의 태묘의 일을 해결했다던-”
“예, 같은 인물이라 하셨습니다.”
“그래. 누군가, 그 자가.”
...
“공녀, ‘은’입니다.”
//貢女 奇皇后//
누운 채로 오랜 시간을 생각들에 시달리다 언제 그랬는지도 모르게 겨우 잠이 든 은이었다. 넓은 별채 안에 오로지 혼자뿐인 은의 잠을 방해할 것은 결코 없었다. 고려에서의 일상을 꿈꾸는 것인지, 평온한 얼굴로 잠든 은은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이 제 이마를 매만지는 감촉에 불현듯 눈을 떴다.
“...오라버니..!”
침대 모서리에 앉아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분명 우겸이었다. 그러나 은은 온 몸이 짓눌린 양,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이 두 눈만 동그랗게 뜰 수 있을 뿐이었다. 우겸은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리고 다정히 웃어주며 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필귀정, 이다.”
“........?”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어. 모든 일은 다 제자리를 찾게 될테니.”
“어디에 계셨어요, 왜 이제 오셨어요.”
“약속, 잊지 않았지. 곧 돌아올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오라버니.”
그의 말이 마치 환청처럼 은의 귓가에서 울렸다. 그 목소리만으로, 그의 인영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그가 다가와 부드럽게 두 입술이 마주 닿았다. 짧았지만 강렬하게. 모든 괴로움을 잠식시켜주는 입맞춤이 끝난 뒤에, 그는 은의 귓가에 나지막이 당부하고 조용히 사라졌다.
“내가 없는 곳에서는 절대로 울지 말거라.”
...
번쩍. 두 눈을 뜬다. 부르지도 못하고 사라져버린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잠시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낸 은이 이불을 걷어내고 천천히 앉았다.
손가락으로 가만히 입술을 쓸어본다. 꿈이라기엔 너무 감격스럽고, 너무 생생했지만 정녕 꿈이라면, 그것은 너무 잔인한 꿈이었다. 은은 꿈에 매달려 허우적거리는 꼴인 자신이 한심스러워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부정할수록 선명해지는 얼굴은 여전히 제가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 그럼에도 사무치게 그립지만.
모든 것은 꿈이었다. 아니, 그리움이 만들어낸 환상이었을까. 바람결에 가만히 열린 창으로 들어온 나뭇잎파리가 바닥을 나부끼고 있었다.
첫댓글 황제가 드디어 깨어나는 건가요 ㄷㄷ 은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콩닥콩닥!!
후안 님★ 황제가 깨어나는 것으로 모든 일의 전환점이 될 수 있을지, 다음화도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아아, 우겸이 얼른 돌아왔으면 하네요.. 곧 황제도 깨어나게 될 듯 싶고...ㅎㅎ 다음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유리별미곰 님★ 이제는 정말 모든 상황이 해결국면으로 접어들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계속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모두가 무사했으면~
푸히힝히 님★ 저도 바라는 바예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별이 님★ 별이 님은 인내심이 부족해지시고 저는 창작력이 부족해지고 있고요ㅎ 다음화에서 뵐게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황제가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어요.....ㅠㅠ 우겸이도 빨리 돌아오고..........다음편은 언제 나오나요?????????
포래버영웅 님★ '기황후'는 격일로 연재중이랍니다. 다음화도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젖은 수건 덮어높고 나오면..숨 못쉬지않나요...?-0-
까불지마ㅋ 님★ 숨 못쉬는 게 당연하겠죠? 황후의 행동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음화도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차라리 우겸이가 죽고 황제랑 잘돼으면 좋겠네염ㅎㅎㅎㅎㅎㅎㅎㅎ
차라리 우겸이가 죽고 황제랑 잘돼으면 좋겠네염ㅎㅎㅎㅎㅎㅎㅎㅎ
부르조아♠ 님★ 어쩌죠, 전 아직 누구도 죽일 계획이 없답니다. 꼬릿말 감사합니다^^
미실부터 시작해서 저...요즘 한창 악녀에 끌리고 있나봅니다^^ 황후가 무슨 짓을 해도 밉게만 보이지는 않으니 말이에요!
황제가 정말 모든걸 알고서도 제 목숨을 담보삼아 저런 일을 벌였다면...
정말 무모하지만 그만큼 조금 더 멋진 사람인거 같아요><
은이 얼른 기운 차리고 황제가 보여준 믿음에 맞는 행동을 보여주기를 기다리며...
다음편 기다릴게요~
Tiare★ 님★ 저도 악녀에 끌리긴 옛날부터 끌리고 있는데, 제대로 된 악녀를 그린다는 건 아직 무리인가 봅니다. 미실을 능가하는 악녀가 등장하는 날까지! 많이 부족하지만 우리 히로인들도 많이 예뻐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