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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읽기 81장
(1) 제81장 원문
信言不美, 美言不信. 善者不辯, 辯者不善. 知者不博, 博者不知. 聖人不積, 旣以爲人己愈有, 旣以與人己愈多. 天之道, 利而不害. 聖人之道, 爲而不爭.
신언불미, 미언불신. 선자불변, 변자불선. 지자불박, 박자부지. 성인부적, 기이위인기유유, 기이여인기유다. 천지도, 이이불해. 성인지도, 위이부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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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信) : 믿다. 믿음.
미(美) : 아름답다. 맛이 좋다. 화려하다.
선(善) : 착하다. 도덕적이다. 높다. 많다.
변(辯) : 말 잘하다. 다스리다. 다투다. 변론하다. 논쟁하다. 다투는 말을 하다.
박(博) : 넓다. 넓히다. 평평함. 평탄함. 박식하다.
적(積) : 쌓다. 모으다. 저축하다. 포개다.
기(旣) : 이미. 벌써. 원래. 처음부터.
유(兪) : 점점. 그러하다. 대답하다.
여(與) : 주다. 베풀다. 따르다. 돕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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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역
미더운 말은 화려하지 않고 화려한 말은 미덥지 않다. 착한 사람은 다투는 말을 하지 않고 다투는 말을 하는 사람은 착하지 않다. 깊은 원리를 아는 사람은 박식함을 자랑하지 않고 박식함을 자랑하는 사람은 깊은 원리를 모른다. 성인은 쌓아 두지 않는다. (지니고 있는 것을) 이미 남에게 다 쓰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에게 점점 더 있게 되고, 이미 남에게 다 주지만 자기에게 점점 더 많아진다. 하늘의 도는 (만물을) 이롭게 하되 해를 끼치지 않고, 성인의 도는 남을 위하되 다투지 않는다.
(3) 해설
이번 81장은 도덕경의 통행본에 있어 마지막 장이다. 통행본을 만든 사람이 왜 이 장을 마지막으로 배치하였을까? 통행본에서는 1장에서 37장까지 도경(道經)으로, 38장에서 81장까지를 덕경(德經)으로 구분한다. 이렇게 보면 81장도 덕(德)에 대한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도경을 시작하는 1장의 무게와 깊이가 상당하면서, 최소한 道에 관한 통찰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덕경을 마무리 하는 81장도 그에 해당하는 무게와 깊이를 지니면서 德에 대한 통찰을 제시할 것으로 여겨진다. 道가 이론적이라면 德은 실천적이다. 81장이 자연의 道를 인간생활에 실천하는 德으로 정리하였다면 이번 장을 통해 노자가 주장하는 인간 삶의 핵심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노자는 마지막 구절에서 하늘의 道와 성인의 道를 비교하고 있다. 성인의 道는 인간이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德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道는 (만물을) 이롭게 하되 해를 끼치지 않고, 성인의 道는 남을 위하되 다투지 않는다.”(天之道 利而不害 聖人之道 爲而不爭) 여기서 말하는 하늘의 道는 노자의 존재론에서 보았을 때는 땅의 道를 합친 자연(自然)의 道(이치)라 할 수 있다. 자연은 주어진 여건 안에서 만물의 이익을 늘이고 피해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길을 간다. 여기에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면서 고집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자를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우리는 자연치유력 또는 자연복원력이라고 한다. 자연을 훼손하는 많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자연은 끝까지 좋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면 파괴되면서 근원인 無로 돌아갈 뿐이다. 인간생활에서 성인(聖人)도 이와 같이 타자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타자를 자신이 통제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타자의 생각을 억지로 바꾸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와 다투지 않는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생활하는 성인의 삶에 대해 노자는 물을 예로 들어 잘 설명하고 있다. “가장 좋은 것은 물처럼 사는 것이다. 물이 좋은 것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 것이다. 물은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은 거의 도에 가깝다. …… 오직 다투지 않기 때문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물은 생물체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그런데도 생물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낮은 자세를 취한다.(낮은 곳으로 흐른다.) 게다가 물은 남들을 빛나게 하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은 더러운 상태로 바뀐다.(만물을 깨끗이 씻는다.) 이렇게 남들에게 큰 도움을 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자랑하)지 않으니 다툴 일이 없다. 노자는 인간세상에서는 성인(聖人)이 바로 이러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깊이 생각해보면 물뿐만 아니라 자연에 있는 대부분의 존재들(물과 더불어 만물의 원소라 불리는 것들, 즉 불, 나무, 쇠, 흙)도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각자의 분야에서 전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노자는 “하늘의 도는 만물을 이롭게 하되 해를 끼치지 않고”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연의 道(이치)처럼 살지 못하고 다투면서 살며 인류의 멸망과 자연환경의 파괴를 스스로 자초하고 있는가? 인간의 사고능력에 대한 오만 때문으로 여겨진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다른 존재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 것은 지구상의 어떤 존재보다도 사고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다른 존재보다 사고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의 이치들을 알아내어 적용하면서 지구상의 다른 존재들을 마음대로 지배하면서 편리하고도 풍부한 삶을 누리고 있다. 물론 그 능력을 소유한 특수계층에게 풍부한 삶이 편중되어 있긴 하지만 AI 때문에 살처분 되는 수많은 가금류(家禽類) 등에 비하면 모든 인간들은 상대적으로 대접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의 사고능력이 다른 존재보다 뛰어나지만 자연의 도를 모두 알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자연의 아주 작은 일부밖에 알 수 없으며, 그 근원에 대해서는 인간의 사고가 닫지 않는다. 그런데 모든 사고는 근원적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내리는 판단은 오류투성이다. 오류투성인 인간의 사고에 대한 지나친 믿음은 인간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자연(自然)의 도에 어긋나게 된다. 우리는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잘난 체하는 인간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노자는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미더운 말은 화려하지 않고 화려한 말은 미덥지 않다. 착한 사람은 다투는 말을 하지 않고 다투는 말을 하는 사람은 착하지 않다. 깊은 원리를 아는 사람은 박식함을 드러내지 않고 박식함을 드러내는 사람은 깊은 원리를 모른다.”(信言不美 美言不信 善者不辯 辯者不善 知者不博 博者不知) 깊이 공부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안다. 그래서 단정적인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여기에 비해 얕게 공부한 사람은 자신이 아는 지식이 진리인양 자신 있게 말한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대단히 공부를 많이 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 얕은 지식을 늘어놓으면서 화려한 말을 구사한다. 이런 사람은 깊은 지식이 없거나 착한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깊이 공부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스스로 알고 있는데다 양심이 있는 착한 사람이라면 모르면서 아는 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깊은 지식을 지닌 사람은 ‘이다’와 ‘아니다’의 이분법으로 알 수 없는 근원적인 지식에 사고가 닿아 있기 때문에 ‘이다’와 ‘아니다’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말은 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56장에서는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라고 한다. 그러니 깊은 지식을 지닌 사람이 화려한 말, 다투는 말, 박식함을 자랑하는 말을 할 리가 없다.
그리고 근원적인 지식에 사고가 닿아 있는 사람은 성인(聖人)인데, 성인은 자신의 것으로 쌓아두지 않고 남에게 모두 베푼다. 왜냐하면 만물을 낳은 근원은 만물의 어미와 같은데 그 어미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의 미래를 위해 쌓아두지 않고 모두 남을 위해 베푸는데도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더욱 덕이 많이 쌓여 베푼 것 이상 많이 있게 된다. “성인은 쌓아 두지 않는다. (지니고 있는 것을) 이미 남에게 다 쓰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에게 점점 더 있게 되고, 이미 남에게 다 주지만 자기에게 점점 더 많아진다.”(聖人不積 旣以爲人己愈有 旣以與人己愈多) 이와 반대로 남에게 베풀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 쌓아두면 오히려 결과적으로 줄어들게 될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하늘의 道(자연의 이치)가 그렇기 때문이다. 하늘의 도는 베풀기만 하지 다투지 않는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라면서 따지는 일을 하지 않는다. 구분하지 않는다. 특히 누구의 잘못이니 라면서 심판자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모두 잘 되기를 바라면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모든 것은 저절로 돌아가게 한다. 여기에 비해 인간의 도는 자신이 안다(자신이 생각한 것이 옳다)고 여겨 구분하며 따지고 시비를 가린다. 그래서 다툼이 일어난다.
노자는 “學은 나날이 늘고 道는 나날이 준다”고 하였다. 세상의 다툼은 나날이 늘어난 學으로 인해 더욱 심해진다. 學은 바로 시비(是非)를 가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학문이 깊어지면 시비가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가물하고 또 가물해서 (구분이 되지 않는 곳이) 온갖 미묘한 것들이 드나드는 문”(玄之又玄 衆妙之門)이다.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이 시비를 가리는 학문만 늘도록 가르치지 않고, 시비를 줄여가는 道도 함께 가르치는 학교의 교문(校門)을 드나드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4) 문제 제기
1. 노자는 다투지 않음을 마지막까지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노자가 살던 춘추전국시 대가 갖고 있는 특수한 상황에서 생긴 것이 아닌가. 오히려 인류의 역사는 다투면 서 발전을 해 왔고, 이것에 대해서는 서양의 변증법이 잘 증명하고 있다. 만약 그 렇다면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동양이 서양에 뒤처진 것이 아닌가?
2. 노자가 ‘성인은 쌓지 않는데 더욱 많아진다’는 역설을 사용하는 진정한 의도는 처 세술인가. 즉 ‘출세성공을 하려면 베풀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칸트가 말한 가언명법(假言命法)이 되어 정언명법(定言命法)을 위배해서 올바른 행위로 볼 수 없지 않는가?
3. 노자의 말대로 살면 결과적으로는 지식도 많아지고 생활도 여유롭고 풍족하게 되 는데 끝까지 드러내(비우)는 작업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생 활에 여유가 없이 쪼들리면서 사는 모습을 보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나서지 않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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