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전에 콱, 부딪힌 파도가 넓고 하얗게 퍼지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동시에 배는 주둥이를 하늘로 뽑아올리다가 포물선을 그으며 곤두박질쳤다. 부서진 물 알갱이들을 바람이 꽁무니 쪽으로 휩쓸어갔다. 코를 처박은 배가 다시 파도와 부딪히며 몸부림을 쳤고 배쌈에 달려 있는 충격 방지용 타이어들이 튀어오르며 제각기 자지러졌다.
바다에는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가늠할 수 없는 크고 작은 파도들이 욱욱 끊임없이 밀려와 검푸른 몸뚱이를 서로 부딪혀 바람과 어우러지며 흩어졌다가 이내 새로운 모습으로, 소리로, 색깔로 뒤섞여갔다.
하늘에는 고속 촬영한 영화의 필름처럼 시커먼 먹장구름들이 서쪽으로 줄을 지어 이동했다. 먹구름 틈새로 간간이 나타난 보름달이 잠깐잠깐 달빛을 흘리다가 어뜩 어둠 속으로 먹혀버리곤 했다. 어둠과 파도가 서로 갈증나는 교미를 해대고 있는 탓에 사방은 분간조차 어려웠다. 배의 디젤 기관은 가쁜 폭발음을 토해냈다. 튀어올라온 바닷물은 벌겋게 달아 있는 연통에 닿기가 무섭게 치직, 증발해버렸다. 세찬 바람이 자꾸 부추겨서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다는 듯 먹구름은 빗방울을 쏘아댔다. 빗줄기는 대각선을 그으며 배를 때려왔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나무 상자 사이에 앉아 있던 여자는 손가방에서 양산을 꺼냈다. 터무니없이 큰 꽃들이 수놓여 있고 드문드문 꿰맨 실밥 자국이 보였다. 여자는 거의 머리에 닿을 정도로 양산을 눌러썼다.
파마머리가 풀려 있었다. 눈가에는 기미가 끼었고 입술은 말라 있어서 주름살처럼 보였다. 가는 손목에는 얇은 시계를 찼으며 너무 오래 신어 이제는 닳고닳은 단화가 가녀린 발등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손죽도에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는데 그것은 잔뜩 지쳐 있는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주로 시선을 주는 곳은 분명 누가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불러 있는 아랫배였다.
뱃전을 쳐올라온 파도가 후두둑 양산을 덮쳤고 여자는 몸을 더욱 움츠렸다.
"어어이, 이짝으로 건네와. 그짝보다는 훨씬 들해."
키를 잡고 있던 선장이 한 손을 입가에 대고 이물 쪽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그 말은 바람과 기계소리 때문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여자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고등학생이 고개를 들어 두 눈을 멀뚱거리다가 짐작으로 선장의 뜻을 여자에게 전달했다. 여자는 배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기우뚱거리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워머. 고집들허고는."
선장이 조타석의 문을 열고 뭔가를 꺼냈다. 고물 쪽에 서 있던 사내는 담배를 물었다. 라이터 불은 길게 눕자마자 바로 꺼져버렸다. 붉은색 비옷을 꺼낸 선장이 물고 있던 꽁초를 건넸고 사내는 그것을 받아 담뱃불을 붙였다. 사내의 손가락에서 퉁겨나간 꽁초는 아스라한 불빛을 끝으로 배의 꽁무니에서 퍼져나가는 소용돌이에 묻혀버렸다. 손죽도에서부터 줄곧 따라오던 갈매기 두어 마리가 길게 원을 그리더니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어이야, 학생아. 이리 좀 와바라이."
선장의 고함에 갑판 위에 쪼그리고 있던 고등학생이 기관실 난간을 잡으며 위태롭게 건너왔다.
"워째 너까지 고집을 부리냐. 이거 비옷인디 너랑 저 처자랑 둘러써봐라. 아순 대로 쓸 만할 것이다."
비옷을 건네받은 고등학생이 갑판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선장은 자신도 하나 입고 나서 마지막 것을 사내에게 건넸다.
"써보슈. 양복이 추져지는 것보담은 낫을 거요."
사내는 그중 가장 큰 광해호를 탔다.
육지에서 떨어진 바다일수록 철따라 잡히는 어족이 틀리며 물때마다 잡히는 마릿수도 차이가 났다. 사람들은 찬바람이 불면 삼치와 대구 숭어를 찾아다녔고 봄바람이 불면 서대와 돔을 건져올렸다. 여름에는 갈치와 멸치가 주종을 이뤘고 가을철에는 갖은 조개들과 해초가 주 수입원이었다. 그는 광해호를 타고 지금처럼 파도를 헤쳤던 시절이 새로웠다. 작년 이맘때다 싶으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어장. 간혹 만선이라도 하는 날에는 하루종일 푸짐했던 도가집 막걸리와 선주집에서 잡은 장닭, 사철마다 새로이 피어나는 산꽃들, 그리고……
사내는 회상을 멈췄다. 돌을 얹어놓은 듯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매끄러운 턱을 손바닥으로 쓸며 그는 여자가 뒤집어쓰고 있는 양산을 한번 훑어보고는 선장이 서 있는 조타석 옆에 쭈그리고 앉아 흥, 그게 어디 내 탓인가? 생각했다. 그냥 손죽도에서 잘걸. 마음이 바빠 서두른 것이 후회됐다. 온몸이 구진구진 추져왔다.
소나기가 개었다. 여자가 신음소리를 냈다. 양산을 쓴 몸에 비옷이 착 달라붙어 있었다. 학생이 고개를 길게 내밀었다.
"아줌마, 아파요?"
여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학생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으며 고개를 돌려 조타석을 살폈다. 선장의 모습이 어둠 속에 희미했다. 그는 여자의 비옷을 한 번 추스려주고는 몸을 앞쪽으로 돌려 바지 주머니에서 쭈그러진 답뱃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여자의 눈치를 살핀 다음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아버지 손에서 미끈거리던 묽은 똥물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턱을 부르르 떨며 담배를 빨았다.
구름들 사이에 커다란 공간이 생기더니 이윽고 보름달이 나타났다. 울렁거리는 파도밭 위로 은빛 가루들이 가득했고 검푸른 바닷물은 달빛을 머금어 청동색으로 바뀌었다. 소나기는 개었으나 파도와 바람은 여전히 거셌다.
"워따, 비 개니께 좋은거."
선장은 비옷을 벗으며 혼자말을 했다. 사내는 선장의 얼굴이 자신을 향했음을 알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선장은 뜻하지 않은 돈벌이가 생겼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주막집에서 일찍 자리를 털고 일어선 게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하루종일 비가 추적거렸으니 섬 남정들은 달리 할 일 없이 그저 주막집에 모여 시간을 보냈다. 심심풀이로 시작한 술잔이 가고 오고 하다 보니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가 서로 꼬리를 물고 생겨났다. 그만 먹고 가자는 사람은 많아도 선뜻 일어서는 사람은 없었다. 술판이 돌던 끝에 주막 사랑으로 자리를 옮겨 화투판이 벌어질 때쯤 그는 밍그적거려지는 엉덩이를 애써 박차고 나왔다. 막 집으로 가는 고샅길로 접어들 때 맞은편에서 이장이 걸어오고 있었다.
"누구여? 이, 자네여?"
"주막가시는 게라?"
"그게 아니고 자네 광도 한 행비 안 할란가?"
"뜽금없이 광도는 왜라?"
"머시냐, 고등학생 하나가 즈그 아배 세상 베릴 것 같다는 기별을 받고 왔다는디. 아, 광도서 온 배가 없잖어. 그래 어짤 거여. 아배가 세상 베린다는디 자식이 가보는 게 당연지사고. 가는 질에 평도 들어가는 사람도 좀 델다 주고."
"늬가 솔찬히 씨든디……"
"아, 그 집서 경비야 나수 주겄다고 연락이 왔으니께 가서 술도 마시고 요즘같이 벌이 없을 때 과용도 벌고 을매나 좋아?"
그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승낙을 했었다.
선장은 키를 좌우로 움직이며 사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근디 평도에도 땅보러 가요?"
"예?"
"뭐냐, 듣자 하니 목 너메 해송밭하고 아울섬 주인인 황노인이랑 흥정이 붙었다는디, 땅 사러 왔잖에라?"
"누가 그래요?"
"이장이 그든디? 아, 나를 잘 모르겄제라? 상선도 타고 중선 배도 탐서 세월 보내다가 이곳에 온 지 한 삼 년 되았소. 원래 고향은 초도고 손죽도는 처가 동네구만."
까무잡잡한 선장의 수염이 조각난 달빛을 받아 노인의 그것처럼 희게 보였다.
"그랬군요."
사내가 말을 맞췄다.
"근디 이런 외진 데서 육지로 나가 대학을 나와도 돈벌기가 에레울 건디."
선장이 말꼬리를 흐렸다. 무슨 수완이 그리 좋아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뭉칫돈 가지고 땅을 사러 왔는가 하는 소리였다. 사내는 하마터면 내 돈이 아니오. 할 뻔했다.
여자는 되도록 옆의 학생이 눈치채지 못하게 숨을 죽여 울었다. 그러나 억지로 눈물을 참으려고 이빨을 앙다물어도 마치 물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처럼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고개를 숙여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조용히 코를 풀었다. 막힌 코가 조금 뚫리자 고소한 담배연기가 콧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학생이 몸을 돌린 상태로 연달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손수건을 접어넣고 나서 학생의 등을 건드렸다. 학생이 깜짝 놀라 얼굴을 돌렸다.
"나도 하나 줄래?"
눈을 동그랗게 뜨던 학생이 재빨리 팔팔갑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한 개비를 붙여문 여자는 두어 번 기침을 했다. 임신을 한 뒤로 끊었던 담배였다. 기침 끝에 부드럽게 연기를 내뿜었고 담배연기는 달빛 때문에 굉장한 양으로 부풀려져 바람에 흩어졌다.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며?"
"오늘 밤이 어렵대요."
"그래? 무슨 병환이신데?"
"중풍요. 한 삼 년 됐어요."
"안됐구나."
"이렇게 들어가는 것도 벌써 네번짼데요 뭐. 그런데 아줌마는 친정 가세요?"
"그런 셈이지. 네 덕분에 밤에라도 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애기 낳으러 가세요?"
여자는 대답 대신 꽁초가 되어버린 담배를 바다로 던졌다. 튀어올라온 파도가 먹이를 채가듯 그것을 덮쳤다.
사내는 여자가 담배 피우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그녀를 오랫동안 만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여자가 적당한 곳에서 결혼도 하고 그럭저럭 행복을 느끼며 살아주기를 원했고 그랬기 때문에 서로 거처를 알 수 없게 되었어도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나중의 일로 찾으려 할 때는 이미 서울시민 천만 명 속으로 묻혀버린 뒤였다. 그는 여객선에서 우연찮게 그녀를 본 순간 생겨난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다. 그녀의 행적에 관하여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될 수 있으면 담담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에 충실하고자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머리는 혼란했으며 가슴은 답답했다.
그는 배가 고팠고 추웠고 몸이 아팠다. 절망스러웠고 괴로웠으며 끝내는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서울로 올라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여자가 찾아왔다. 멀고먼 길을 찾아온 여자를 껴안고 하룻밤을 울던 끝에 돌아가자고 말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다음날 그가 일하던 나이트클럽으로 가서 손님의 양복 주머니를 털었다. 가슴이 쿵쾅거렸고 손에는 식은땀이 났다. 클럽을 나오기도 전에 덜미가 잡혔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일주일을 잡혀 있다가 달방으로 돌아왔다. 여자는 보이지 않았고 이불보따리는 연탄 창고로 가 있었다.
신경질을 부리던 바다가 갑자기 잔잔해졌다. 바다에는 잔물결만이 찰랑거렸다. 선장이 배의 기관을 끄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밧데리 벨트 좀 갈아갖고 갑시다."
선장이 말했다.
"밧데리 벨트요?"
"이, 사실 오늘 밧데리 벨트가 좀 찢어졌는디 낼 아침절에 고칠라고 냅뒀거든이라. 거울대 온 김에 손봐서 갑시다. 혹 모르니께."
선장은 닻을 떨어뜨리며 사내에게 이해를 구했다.
풍덩. 여자는 닻이 바닷속으로 빠지는 소리를 들었다. 벨트를 들고 기관실로 들어가는 선장에게 갔다온 학생이 기계 쪼끔 보고서 간데요. 설명을 했다. 여자는 상체를 일으켰다.
배에서 오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비석처럼 바위섬이 솟아있고 그 주위로 마치 태풍의 눈처럼 백여 미터가 잔잔했다. 경계선 너머에는 주렴 같은 파도들이 서로 어깨를 비벼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거울대라고 불렀다. 거울처럼 언제나 편평해서 그렇기도 하고 귀신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옛날에 바다로 고기잡이를 하러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이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아낙은 쪽배에 노를 저어 이곳까지 와 풍랑을 만났고 결국 암초에 부딪혀 갓난딸과 함께 죽었다. 그 뒤로는 파도가 없어졌다. 사람들은 아낙과 아기의 영혼이 아직도 남편을 기다리며 파도를 붙잡고 있다고, 그래서 풍랑을 만난 배들이 쉴 곳을 만든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아낙과 아기의 영혼이 선원들을 꼬인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어야지만 자신이 승천할 수 있어, 그래서 멋모르고 다가온 배들이 암초에 부딪히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여자는 두 눈을 촉촉이 뜨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뇌리 속에 깊숙이 숨어 있는 기억이 아슴아슴 피어올랐다.
그날은 왠지 양 볼부터 불그스레해지는 봄날이었다. 괜스레 가슴이 설레였고 아랫목을 문지르고 있는 밑둥이 간지러웠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남향의 쪽문을 열었다. 바다 쪽에서 산들바람이 하늘거리며 밀려와 그녀의 목덜미와 생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비밀스러운 모습을 낯선 이에게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으나 차마 문을 닫지 못했다.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보았다. 창호지에 밀려드는 빗물 자국 같은 새털구름이 한 켠에 흩어져 있었다. 일부러 숨을 들여마셔봤으나 가슴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그녀는 그 연유를 겉마음으로는 알 수 없다고 도리질을 했으나 짐짓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낯바닥에 확확 열기가 끼쳐왔다. 동박새 한 마리가 넝쿨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담장 위로 내려섰다. 쉴새없는 새의 고갯짓에 잠시 정신을 놓았다. 그러다가 새가 포르륵 날아오르자 가벼운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우물 돌담 아래에는 잡풀과 이끼들이 물발을 마음껏 빨아올려 한층 푸르렀다. 우물 너머로 널려 있는 조각밭에서는 갓 피어난 유채꽃 사이를 일벌들이 어지럽게 날아올랐다.
벨트가 너무 빡빡하기 때문에 선장은 기관실에서 나와 두레박으로 바닷물을 긷고 그 속에 벨트를 넣은 다음 에이, 투덜거리며 조타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소주 됫병을 꺼내고 사내를 불렸다.
그녀는 두레박을 들다 말고 샘물에 얼굴을 비췄다. 둥그렇고 반듯한 머리칼에 반달모양의 두 눈, 가녀린 볼에 매끄러운 목덜미가 적삼저고리 위로 솟아 있었다. 붉게 상기된 낯빛이 쑥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큰바람이 불 때면 휘웅휘웅 소리를 내며 그대로 가라앉을 것처럼 위태로워보이는 축항에는 잔파도만이 찰싹거리고 있었다. 동백나무숲의 저쪽에 있는 주막에서 간간이 뱃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왔으면 눈이나 붙이지 않고 뭐한담. 그녀는 물동이를 이었다. 입에 문 또아리를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붉은 입술을 적셨다.
튀밥처럼 흩뿌려져 있는 유채꽃밭 고랑을 지나고 오백 년 묵은 산갈치가 산다는 김씨 사당을 거쳐 마을 초입의 갈림목에 있는 물푸레나무를 막 지나다가 발길을 멈추었다. 강아지풀 줄기를 까닥까닥해 보이며 웃음을 보내고 있는, 짧은 머리카락에 단단하고 가무잡잡한 피부, 그윽한 눈빛을 한 종현이 서 있었다.
종현의 바른편 어깨에는 그물톱 등속의 잡기들을 넣는 헝설이와 그물에 달려온 잡어들을 넣는 다래끼가 매달려 있었다.
"나 왔어."
불그스레한 얼굴에 웃음을 지은 채 종현이 입을 열었다. 바다 쪽에서 눅진한 물바람이 느물느물 불어왔다.
"알고 있어."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명실은 물푸레나무의 어린 잎사귀에 눈길을 주며 입을 다물었다. 뭔가 어색했다. 예전 같으면 늬 안쳤어, 을매나 잡었어? 살갑게 호들갑을 떨었을 터였다. 그녀가 이토록 어색해하는 이유는 엊저녁에 할매와 이장영감의 말을 엿들었기 때문이었다.
엊저녁 이장영감이 중신을 서고자 할매를 찾았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할매가 이장영감에게 확실히 못을 박는 소리가, 마침 사립문을 들어오던 그녀의 귀에 들렸다.
"금매 그런 자림사 나도 좋제만은 우리 아그가 아무래도 웃집 종현이헌티 맘을 주고 있는 것 같으요. 머시매가 내 보기에도 정이 가고, 우리 명실이야 아배어매 읎이 이 늙은이량 사는디 그런 거라도 지 뜻대로 혀야지라."
명실은 할매의 말을 엿듣고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몰랐다. 이장이 입맛을 다시며 돌아가자 할매는 막 들어온 그녀에게 애호박 두 개를 은근히 밀어주었다. 그 동안 애호박전을 몰래 부쳐서 종현을 찾곤 했던 일이 고스란히 들통난 것 같아 고개도 들지 못했다.
"뭐했어?"
"그냥."
"나 안 보고 싶었어? 나는 명실이 생각만 했는디."
나도. 대답이 튀어나올 뻔했고 그것 때문에 더욱 얼굴이 빨개졌다. 그 동안 그런 정담이야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새삼 쑥스러워지는 마음 때문에 더욱 그랬다.
"된 줄도 몰랐어. 명실이 보고 싶어서. 알어?"
"으응."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을 그쳤을 때였다. 갑자기 종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고 콧속으로 밥 쉰내 같은 막걸리 냄새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종현의 입술이 그녀의 젖은 입술에 닿았다.
명실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하마터면 이고 있던 물동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출렁거리며 튀어나온 몇 가닥의 물방울이 종현의 머리 위를 적셨다.
"엄매."
그녀는 몸을 휘청거렸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두 다리에서는 힘이 쭉 빠져나갔다.
"이거 할매 죽 쒀줘."
아직 멍하니 서 있는 명실에게 종현이 다래끼에서 아가미와 주둥이를 끝으로 엮은 붉은 옥돔 한 마리를 꺼냈다.
"싸게 받어. 딱 한 마리 올라온 것을 어거지로 얻어왔으니께."
종현이 미적미적 뒷걸음질을 했다.
"이따 삼굴로 와이? 해거름에."
말을 마치고 해송숲 쪽으로 모습을 감췄다. 명실은 그제서야 놓아버린 정신을 수습했다. 혹 누가 봤는지 주위를 훑어보고 나서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가슴은 아직도 방망이질을 해댔다. 동이에서 물이 튀어올라 무명치마와 슬리퍼를 젖게하는 줄도 몰랐고 동이 물은 잘 부어놨는지, 옥돔은 어디에 두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안방으로 뛰어들었다.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숨을 할딱이며 자신의 입술을 천천히 만져보았다. 예감했었던,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찾아온 첫 입맞춤이었다.
명실은 입술을 손으로 더듬었다.
입술은 말라붙어서 까칠했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추억은 아련했고 가슴을 콕콕 찔러왔으며 목 언저리를 뜨뜻하게 했다.
이제는 모두 지난 일이야.
모래톱에서 빠져나가는 썰물처럼 마음이 허전하면서 삼킨 찬밥덩이를 채 삭이지 못할 때의 통증 같은 것이 느껴졌다. 고물 쪽을 보았다.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끝으로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나서 손가방을 열었다. 손가방에는 화장품과 스타킹 입술연지 장식품 따위가 담겨져 있었다. 흰색 화장병부터 꺼내어 하나씩 바다로 던졌다.
"아줌마는 아직도 미신을 믿어요?"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여인네의 물건들을 던져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학생이 물었다. 명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버려요?"
"이젠 필요 없어서 그래."
"담배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마지막으로 나비모양의 머리핀을 던졌다. 핀은 춤을 추듯 하느작거리며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것처럼 어디론가 깊숙이 숨고 싶었다.
사내가 조타석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배의 시동이 걸렸다. 로울러로 닻을 캐는 소리가 끼리링끽끽 들려왔다. 물살을 가르며 거울대를 벗어난 배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곤두박질을 다시 해대기 시작했다. 새로이 파도가 쳐올라왔다. 명실은 한켠에 제껴두었던 양산을 끌어당겨 몸을 감쌌다. 학생이 그 옆으로 몸을 움츠렸다.
기관실에서 조타석으로 돌아온 사내는 선장이 먹다 남긴 한되들이 소주병을 끌어당겼다. 소주는 반쯤 들어 있었다. 양은종재기에 소주가 채워졌고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선장이 그를 바라보더니 마른김을 꺼내며
"아까는 줘도 안 묵은다 허등만."
하고는 헤벌쭉 웃었다. 수염이 웃는 입언저리를 따라 길게 퍼지며 도랑을 만들었다. 사내는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한 잔을 따랐다. 소주는 한겨울에 얼음 갈라지는 느낌을 주며 뱃속으로 퍼졌다.
먹구름이 조금 가신 듯하더니 다시 세상은 먹장으로 가득했다. 어느 정도 진정을 찾던 바다도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무수한 사선을 그어댔고 파도는 더욱 거칠게 용트림을 했다.
샛바람 부는 밤바다는 언제나 파도가 거칠었다. 그래서 파도가 치고 배가 요동치는 것은 당연한 거였다. 그러나 날씨의 변화가 화냥년 바람난 듯 하는 초가을 바다는 파도의 생김이 여느 때와 다를 때가 종종 있었다. 거진 평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싶었는데 난데없이 큰바람이 불었다. 파도도 그저 거칠기만 할 때완 달리 묵직한 너울로 바뀌었다. 큰 너울은 파도처럼 몰아치지는 않지만 높고 낮은 그 기운 때문에 순식간에 배를 멍청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런 니기미."
키를 잡은 선장의 눈가에 긴장이 번뜩거렸다. 잔파도는 사라지고 집채만한 너울이 울렁울렁 밀려왔다. 배는 파도를 헤치며 보이던 당당함이 없어지고 속수무책으로 기우뚱거렸다. 사내는 긴장을 했다. 태풍이나 폭풍이 불어오거나 뜻밖의 돌풍이 불어올 때 간혹 생기는 너울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비는 큰 각도를 그리며 좌우로 흔들거렸다.
한동안 위태롭게 너울바다를 헤치자 평도가 나타났다. 섬은 어둠과 파도 속에서 갈피 없이 서 있었다. 섬의 밑둥에서는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며 섬과 바다와의 경계선을 나타내고 있었다. 섬의 된비알 사이에 뿌리를 내린 해송들이 바람에 흽쓸려 거의 드러누워 있다시피했다.
"바람이 돈다."
선장의 다급한 외침이 튀어나왔다.
파도들은 서로 부딪치다가 한데 어우러지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마을 쪽으로 들어갈 수가 없겄는디."
긴장된 얼굴의 선장이 사내를 향하여 고함을 쳤다.
"그래도 가보죠."
사내도 맞고함을 질렀다.
"평도 방파제가 재작년 태풍 때 유실되서 이런 늬에는 대기가 무자게 힘들다니께. 암만해도 삼굴 쪽으로 가야 쓰겄어."
선장이 빗방울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삼굴은 마을의 뒤편에 있었다. 사내는 삼굴이라는 말에 눈빛이 굳어갔다. 배는 뒤에서 쳐오는 너울과 섬과 부딪히며 밀려나는 맞파도에 갈팡질팡하며 간신히 섬의 오른쪽으로 돌아나갔다.
꼬리처럼 튀어나온, 파도들이 부서지며 낮은 바위를 올라타는 섬 끝을 부딪힐 듯 말 듯 힘겹게 돌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타났다. 절벽을 만난 바람이 갈 곳을 몰라 웅웅 울어댔다. 절벽 사이로 움푹 패인 동굴이 나타났다. 선장은 절벽과 최소한의 안전 거리를 유지하며 배를 동굴 쪽으로 몰았다.
동굴 입구의 바위 옹두라지를 가까스로 피한 배는 비로소 동굴로 들어갈 수 있었다. 굴 속은 서너 척의 배가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천연 방파제였다. 하늘 끝까지 치솟은 벼랑이 좌우로 자리를 잡고 있고 바위 틈새로 황소바람이 세찼다. 바다 쪽에서는 여전히 회오리가 드셌으나 통로에서부터 여세가 사그라들었다. 닻을 내린 선장이 밧줄을 들고 벼랑턱으로 뛰어내렸다. 뒤이어 학생과 여자가 배에서 내렸고 조금 있다가 사내가 뛰어내렸다. 일행은 이제 자신의 임무를 마친, 매우 순종스런 말과 같은 배를 입구에 띄워놓은 채 괴물이 벌린 아가리 같은 삼굴 속으로 들어갔다.
동굴 속은 파도와 빗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숙하고 한적했다. 벼랑을 타고 내려온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퉁퉁 들렀다. 입구 근처에 육지의 그것처럼 자그마한 돌샘이 있었다. 우거진 해초들이 규칙적으로 퍼졌다 오므라들었다 하는 것으로 보아 바위 밑으로 바다와 연결된 통로가 있음 직했다.
"수달피가 살았었는데……"
여자는 삼굴에서 시제를 모시고 나서 생선을 놓아두면 먹곤 하던 수달피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작년에 예비군 중대장이 이장이랑 와서 칼빈으로 쏴 잡아갔댔어요."
학생이 앞서가며 설명을 했다. 선장이 재빠른 솜씨로 근처에서 마들가리를 들고 와 불을 지폈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불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동굴바닥에 깔려 있는 자갈과 그 사이에 널려 있는 명개흙이 모습을 드러냈고 벽쪽의 얽박고석과 구불거리는 벼랑이 물기를 머금은 모습으로 반사광을 쏘아왔다. 삼굴 입구에는 세숫대야에 담긴 물처럼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낡은 배의 퇴색된 뱃가죽이 아슴하게 비쳐왔다. 마들가리가 탁탁 타들어갔고 간간이 쇳소리가 쇄애쇄애 들려왔다.
"처자도 집에 댕기로 온 거여?"
불 위로 나뭇가지를 얹으며 선장이 물었다. 대답이 없다.
"허. 그거 참."
선장은 다시 배로 다가가 소주병과 김을 들고 왔다.
"한잔합시다."
선장이 먼저 술잔을 따라 사내에게 권했고 사내는 화석 같은 얼굴로 사양했다. 선장 홀로 두어 잔을 마셨을 때 한동안 구석진 곳에서 마들가리 불을 바라보던 여자가 몸을 일으켜 선장에게 술병을 달라고 청했다. 그녀는 떨떠름해하는 선장을 뒤로하고 얽박고석으로 걸어가 이끼가 잔뜩 달라붙은 나지막한 제단에 술잔을 따라 올리고 절을 했다.
"삼시랑님, 엄니, 할매……명실이가 왔소이. 엄니, 진작에 오고 싶었는디 인자사 왔구만이라."
명실은 절을 하다 말고 흐느꼈다. 그녀는 부드러운 명개흙을 손바닥으로 움켜쥐었다. 그 언제인가 이제는 흔적마저도 희미한 옛날.
"이제 넌 내 꺼여."
명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종현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매에 쫓기는 참새마냥 가슴이 헐떡거리기도 했고 이제 막 영원의 안식처를 찾은 나그네처럼 푸근하기도 했다. 검붉은 명개흙에 깐마른풀은 감쪽이 좋았다. 종현은 굵은 팔에 힘을 주며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그의 가슴은 넓었으며 맨 살의 촉감은 감미로웠다.
"엄니, 명실이가 왔어라……못난 딸년이 왔어라."
가로누운 종현의 등뒤로 얽박고석이 삼굴 주인이라는 삼시랑할매 얼굴로 보였지만 그녀는 두 눈을 내리깔며 종현의 품속만을 찾았다. 이젠 어장이 안 돼. 그런 말 하지 마. 돈벌이가 안 된다니께. 아무 말 하지 마. 이제 너는 내 색시여. 그래서 돈을 벌어야 돼 어차피 고기 잡아서는 돈이 안 돼. 배라도 한 척 있다믄 모를까. 그런 말 하지 마. 대처로 나가야겄어. 뭐라고? 이 년이야, 딱 이 년만 있어라. 싫어. 상현이가 취직자리를 알아봐준다고 했당께. 종현오빠……말했잖아 어장꺼리가 읎어. 그렇다고 무슨 양식장을 할 수도 읎고. 가지 마. 이 년이야. 전번에 갔던 흥식이오빠도 안 왔어. 명자언니도 끝내 육지로 가서 소식도 없고 이제 평도에는 처녀가 나 혼자뿐이야. 이젠 아니지만. 그건 명자누나가 집심이 읎어서 그렇지. 그래도 가지 마. 이 년이야. 가지 마. 딱 이 년만 있으라니께. 그러지 마. 오늘 선주한테 말했어. 싫어, 가지 마.
"삼시랑님 내가 잘못했어라."
얽박고석이 진흙처럼 느물거리더니 험상궂은 삼시랑할매의 얼굴로 바뀌었다. 네 이년, 고약한 년. 잘못했어라. 네 이년 내 집을 어지럽히고 네가 잘될 성부르더냐? 다 잘못했어라. 그래 그런 년이 내가 점지도 안 한 드러운 씨를 품고 와? 삼시랑할매의 얼굴이 길쭉하게 늘어나더니 낮선 남자의 얼굴로 변했다. 스페샬로 부탁해. 남자의 성기가 팽팽하게 솟아 있었다. 싫어. 집줄게. 싫어.
"어 엄니."
명실은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 눈물이 눈두덩까지 타고 내려오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군가 가슴에 굵은 대못을 탕탕 박아넣는 것처럼 통증이 일어났고 거기에서부터 점차 금이 가 온몸이 쪼개질 것 같았다.
"어 엄니, 할, 할매……"
그녀는 고석을 부여안았다. 눈앞에 엄니와 할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서울에서는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황소바람 한 줄기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냈다.
"그만해."
사내가 다가와 어깨를 잡으며 달랬다. 불을 쬐고 앉은 선장과 학생이 어찌된 영문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놔, 이거 놔."
"아, 그만해."
사내가 고함을 지르며 명실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녀의 고개가 앞쪽으로 고꾸라지자 눈물 방울이 사내의 소매 위로 번졌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니?"
사내의 목울대가 파르르 떨렸다.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손마디가 가는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그녀에게 강한 연민과 급박스런 부아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여자의 흐늘거리는 어깨가 한없이 가녀리게 보이기도 하고 더없이 우둔해보이기도 했다.
명실은 사내가 다가오자 가슴속에 쇳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서러움이 복받쳤다. 그 옛날 자신의 처녀를 흘러넣은 명개흙에 눈물이 방울졌다.
"저리 가."
"명실아."
한동안의 정적이 동굴을 감쌌다. 간간이 회오리바람이 휘웅 휘웅 일었다. 썰물 때가 되었는지 물이 빠지며 감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동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학생이 마들가리 불에 고개 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선장은 연신 두 눈을 끔벅거리다가 장작 서넛을 불 속에 던진 다음 배를 둘러보더니 곧바로 몸을 눕혔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파도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명실은 울음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사내도 어깨를 놓으며 옆에 주저앉았다.
"남자는 탈탈 털려 거지가 되어야만 고향으로 돌아온다던데."
명실은 코를 풀고 나서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겉만 이래. 빌어먹을 돈은 아직도 연분이 안 생겨."
"그렇겠지. 하지만 벌었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녀는 부담이 오는지 아랫배를 손으로 문질렀다.
"정말이야."
"그럼 뭐야. 등신같이 돈도 못 벌고. 왜 왔어?"
명실의 목소리가 발악을 하듯 높아졌다. 학생이 꿈쩍 눈을 뜨더니 자라처럼 고개를 무릎 속으로 파묻었다.
사내는 학생을 바라보며 지금은 그의 사장이 된, 나이트클럽에서 그가 돈을 훔쳤던 남자를 잠시 떠올렸다.
"너를 버리지는 않았어."
"그럼 그때, 영등포서 왜 집을 나갔어?"
"내가 말했잖아.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우선 네가 내려가 있으면 곧바로 나도 내려가겠다고. 죽어도 안 가겠다고 고집하더니만……"
사내는 그녀의 아랫배를 노려보았다.
"내려가라고? 어떻게, 내가 왜 자기를 찾으러 간 줄 알어? 동네에서 젊은 사람은 나 혼자 남았었어. 모를 거야 그 기분. 차례대로 여수로 부산으로 떠나가는데……서른이 넘는 집이 금새 열몇 집으로 쫄아들었어.순 노인네들뿐인 동네에서, 이건 숫제 텅빈 섬에서 나 혼자 뭘 해. 할매가 죽자 면에서 나온 구호쌀도 딱 끊겼지. 그런 데서 기껏 고구마나 캐며 기다리라고? 물해질을 해도 전복새끼 하나 코빼기도 볼 수 없는 이곳에서?"
명실의 두 눈에서 불꽃이 반짝했다.
"그럼 어떡하니? 네가 왔을 때 난 무일푼 상거지였는데. 상현이놈이 소개해준 데는 술집이었고……그때는 말 안 했는데 벌었던 돈도 모두 털린 다음이었어. 그런 모습 너에게 보여주기가 얼마나 싫었는데. 너만 괴로웠는 줄 아니?"
이번에는 사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내친김에 돈을 훔치다가 잡힌 이야기까지 했다.
"기껏 하는 짓거리하고는."
명실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눈을 흘겼다. 사내가 카악, 가래침을 멀리 뱉었다.
"너는 그때 어디로 갔었는데?"
"자기가 집을 나가고 며칠 있으니까 주인아줌마가 방을 빼 달래. 그래서 나와 무작정 걸었어. 어디로 갔을까. 죽었을까. 아니면 내가 싫어서 도망갔을까 생각하면서."
"쌍년의 예편네."
사내가 물고 있던 담배를 팽개치며 욕을 했다. 불가루들이 흩어지며 반짝거렸다. 명실이 불씨가 간신히 붙어 있는 그것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피우지 마."
명실은 대답 대신 갈라진 입술을 오므리며 연기를 빨았다.
"애 뱄잖아."
"자기 애는 아니니까 상관 마."
"누구 애야?."
"……"
명실은 십 년이나 늙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 말하지 마."
"……갈치떼 같았어."
명실은 목이 막혀 좁은 틈으로 바람이 빠져나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갈치?"
"있잖아. 사람이 빠지면 달려들어 한순간에 찢어 발겨 먹는 갈치떼 말이야."
"그래, 갈치떼. 허연 몸뚱이를 하고 이빨을 곤두세운 것이……그것 그만 버려. 내가 새것 줄 테니까."
사내가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내가 왜 돌아왔는 줄 알어? 처음에는 그냥 죽고 싶었어. 그래 고향에 가서 아부지 빠져 죽은 바다도 좀 보고 물해질하다가 죽은 엄니도 불러보고 내가 댕긴 학교 터도 가보고 할매가 묻힌 산밭 고랑에 가서 내가 이렇게 됐다고……오빠집에는 누가 사는가 보고 싶고. 흐윽."
명실은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가 않았다. 팅팅 부어오른 눈두덩이가 새로 축축해졌다.
"하소연도 하고 나서 죽으려고 했어. 그런데 너무 억울한 거야."
"……"
"애기를 낳을 거야. 낳아서……키울 거야, 나처럼. 그래 또 한번 잡아먹어봐라. 씨팔. 아무튼 그런 오기로 내려왔어."
"악만 남았구나."
"그래."
"왜 여객선에서 아는 척 안 했니?"
"오빠는 왜 아는 척 안 했어?"
"……"
"……"
종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 속의 장작이 탁, 탁, 터지며 불똥을 쏘아올렸다. 얽박고석의 튀어나온 부분이 검게 반짝였다.
시간이 갈수록 동굴 입구의 물이 줄어들었다. 그만큼씩 모습을 드러낸 감풀의 면적이 점점 더 늘어갔다. 느긋하게 출렁거리고 있는 배의 뒤켠에서 희붐한 새벽빛이 입구를 비집고 들어왔다. 썰물이 되면서 파도는 한결 기세가 꺾였으나 바람은 여전한지 뷔웅뷔웅 동굴 속까지 울려댔다.
명실은 울다가 지쳐 탈진된 얼굴로 고석에 몸을 기댔다. 부풀어오른 눈가에는 땟국이 얼룩져 있었다. 종현은 자신이 버린 꽁초를 주워 불을 붙였다. 뻐끔뻐끔 입술이 뜨거워지는 것을 참으며 두어 모금 억지로 연기를 만들어냈을 때 학생이 소스라쳐 몸을 일으키며 선장을 깨웠다. 몸을 뒤척이며 움, 큭, 입맛을 다시던 선장이 벌떡 일어나
"워매. 벌써 날이 샜다냐? 어여, 가세 가."
눈을 비비며 허둥지둥 서둘렀다. 학생은 벌써 배 쪽으로 뛰고 있었다.
"우리는 그냥 뒷길로 걸어갈랍니다. 여기까지 타고 온 것도 고마운데."
종현이 말을 마치자 선장이 으응, 그럴라요? 뒷걸음질을 치다가 다시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저, 뭐시냐, 엊저녁에 말을 놓을라다가 그냥 뭐해서 말었는디, 저기 손죽도 나올 때 나한티 쪼깨 들려줄라요? 뭐나 하믄 처갓집에 밭뙈기가 쫌 있는디 경치가 좋은 목 너메 쪽이라……땅 보러 왔다니께 값을 한번 맞춰봤으믄 쓰겄는디. 금만 맞으면 우리도 팔고 여수로 한번 나가볼라고라."
"그래봅시다."
"살펴가세요. 태워줘서 고마워요."
명실이 퍼질러앉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려, 처자. 몸조리 잘 하드라고……둘이 서로 아는 사인 줄 몰랐구만. 허허."
"빨리 가요. 아부지가 돌아가셨을 거예요."
배 갑판 위에서 학생이 소리쳤다. 선장이 잰걸음을 쳤다. 탕탕탕. 기계소리를 뒤로 하고 배는 동굴 입구를 빠져나갔다.
종현이 먼저 동굴 안쪽에 있는 안도리길을 걷기 시작했고 명실이 그 뒤를 따랐다. 동굴과 통해 있는 너덜컹에 올라서자 물바람이 훅 불어왔다. 배는 아직도 바람 기운이 남아 있는 바다를 하얗게 가르며 저만치 보이는 광도로 가고 있었다. 희번거리는 아침 기운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명실이 신음을 하며 주저앉았다. 종현이가 무릎을 굽혔다.
"업혀. 애 뱄어도 업힐 수 있을 거야."
"싫어."
"업혀."
"싫다니까."
한동안 실갱이를 하다가 명실은 등에 업혔다. 그는 그녀의 몸이 보기보다 훨씬 가볍다고 생각했다. 등에 전달되는 명실의 아랫배를 느끼며 마을의, 이제는 거의 다 잘려 슬렁슬렁한 해송숲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언제 갈 거야?"
묵직한 아랫배 때문에 고개를 약간 젖히고 명실이 물었다.
"나흘 잡고 왔어."
명실이 몸을 세웠기 때문에 균형을 잡기 위해 상체를 한껏 숙인 그가 우거진 잡풀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배어매들은 바다로만 나갔고 자식들은 뭍으로만 나가고……무슨 놈의 팔자지?"
"애배서 돌아온 너 팔자는 어떻고?"
"새로 생긴 팔잔갑지 뭐."
명실이 양팔로 종현의 목을 감쌌다.
멀리 조는 듯 우는 듯한 낡은 사당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