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래 세가닥 줄다리기'는 삼국시대부터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사회의 의례적 행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1930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부산 인구 6만 명 중 2만 명이
3일 동안 줄을 당겼던 우리 민족의 단합을 상징하는 대동놀이다.
전국 유일의 세 가닥 줄로 만든 '동래세가닥줄달리기'가 10월 10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온천장
허심청 앞 도로에서 2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동래구 동(洞)을 동부와 서부로 나눠 진행됐다.
부산은행직원과 신라대학학생들과의 미니 줄다리기가 진행됐다. (부산은행 2:1승)
풍물패 한마당이 한껏 흥을 돋우다.
동군과 서군이 줄다리기 시합 전에 풍물패를 앞세우고 온천장 일대를 돌고 있다.
머리가 좁은 수줄을 암줄의 넓은 구멍에 끼워놓고 숫줄머리 구멍에는 전봇대만한 나무 기둥을
끼워 징과 북소리에 맞추어 양쪽이 힘껏 줄을 당겼다.
전광우 동래구청이 줄다리기 성공을 위해 술잔을 올리고 있다.
한국여행 중 구경하러 온 외국인이 1$을 놓고 고사에 참가하면서 싱글빙글 웃는다.
실버넷뉴스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는 김주상 기사가 동영상을 열심히 촬영하고 있다.
전광우 구청장이 징을 울리자 줄다리기는 시작되었다.
(上) 동부군 (下) 서부군 우리 민족의 단합을 상징하는 대동놀이, 전국의 유일의 세가닥 줄이
길이 90m, 몸줄 굵기 40㎝로 동래 줄다리기를 재현하고 있다.
동부군과 서부군의 깃발 싸움도 대단하다.
줄을 당길 때는 선창자(先唱者)의 노래창에 따라 "쾌지나 칭칭나네"의 후렴을 일제히
따라 부르고 갖가지 놀이로 흥겨웠다.
온천장 녹천탕 옆 동래 온천 노천족탕 공간에서 '동래문화 알리미' 공연도 있었다.
회원 평균연령 76세 대단한 실력으로 박수를 받았다.
영광아카데미 사진부 5기 동기 김종철(김치) 사진작가와 함께···
동래세가닥줄다리기
3·1운동(1919)이 있은 후 울분을 토할 길이 없었던 부산(동래) 사람들은 예부터 이 지방에 있었던 민속놀이인 줄다리기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1922년 음력 대보름날 부산시를 동(좌천동에서 북쪽)과 서(수정동에서 남쪽)로 나누어 줄다리기를 했다.집집마다 짚을 내놓아 새끼줄을 꼬고 거기다가 로프나 철제줄까지 섞어 암줄과 숫줄을 만들었다. 머리가 좁은 수줄을 암줄의 넓은 구멍에 끼워놓고 숫줄머리 구멍에는 전봇대만한 나무 기둥을 끼워 징과 북소리에 맞추어 양쪽이 힘껏 줄을 당겼다.당시 부산에 거주했던 우리 동포가 6만명이었는데 줄다리기에 참가한 인원이 2만명 이상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큰 행사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3일만에 끝난 이 해의 줄다리기는 서군(西軍)이 승리했다.정월 대보름을 기해 이같이 줄다리기가 시작되면 일본인 상가(商街)도 철시를 하고 근방에는 포장을 친 음식점이 즐비하고 휴식시간에는 술을 마시고 장구를 치며 흥청댔다.줄을 당길 때는 선창자(先唱者)의 노래창에 따라 "쾌지나 칭칭나네"의 후렴을 일제히 따라 부르고 탈춤과 갖가지 놀이로 흥겨웠다.그 이듬해의 대보름날 줄다리기에서는 동군(東軍)이 이겼으나, 그 이후 몇 년 동안은 행사가 열리지 않았다.그러다가 1930년에 부활하여 3∼6년간 계속되기도 했으나, 그 이후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막대한 물량, 도로사정, 새끼구입의 곤란, 시민의 참여도 등 여러 문제로 오늘날 재현이 어려운 실정이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민속이다.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아림(娥林) 이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