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여행기
파타야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캄보디아로 가기위해 태국을 출발한 시간이 1시 30분이었다. 국경으로 가는 태국의 도로는 포장이 잘 되어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드넓은 벌판. 산도 마을도 보이지 않았다.
키 작은 나무들과 잡초만이 우거진 버려진 땅. 황무지. 이런 넓은 땅이 우리나라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며 4시간여의 지루함 끝에 태국의 국경지대에 도착했다.
여기서 캄보디아로 들어가기 위한 입국비자를 다시 받아야한다. 여권과 사진 한 장. 입국비자비로 돈을 내면 가방은 캄보디아 국경직원이 나무로 만든 손수레에 옮겨 싣고 국경직원이 버스로 올라와 사진 한번 촬영하고 내려가면 것으로 입국절차는 끝난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통로를 걸어서 캄보디아에 입국했다. 입국하자마자 맨발에 땟국이 줄줄 흐르는 어린 아이들이 달려들어 완 달러를 외치며 손을 벌린다. 7~8세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동생인 듯싶은 아기를 엽구리에 끼고 완 달러를 외치며 따라오는 모습에서는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옷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고 신발은 아예 신지 않았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물 구경을 못 했는지 붉은 입술과 검은 눈빛만이 반짝반짝 살아있었다.
땅에 버려진 과자부스러기에 연연했고 깨져 흘러내린 계란에 연명하고자 하는 애처로운 모습에서 말 할 수 없는 처절함을 느꼈다. 들고 있는 과일봉지를 주지 않으면 손을 넣어 꺼내갈 만큼 먹을 것이 절실한 것일까.
눈을 마주치면 도와 줄 거라는 신호로 알고 악착같이 달려드니 신경 쓰지 말라는 가이드의 말을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 천 원짜리 지폐라도 한 장 쥐어줄라 치면 순식간에 7~8명이 우루루 모여들어 황당하게 한다.
리어카, 오토바이, 손수레 등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간 운송기구들 앞에서 관광객들의 짐 하나라도 더 맡고자 남루한 옷차림에 앙상한 몰골의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떼 지어 서성거리고 있다.
불쌍하지만 도와주지 못 하는 아픔을 쓰러 내리며 한참을 바라보다가 캄보디아 국경에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랐다. 35인승인 이 버스는 아시아‘란 한글이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수입한 중고버스임을 알 수 있었다.
캄보디아 국경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비포장도로여서 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오래전부터 공사를 해오고 있는 듯한 도로는 길은 곧게 잡혀있지만 표면은 울퉁불퉁, 움푹움푹 말이 아니었다. 차가 지나가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가 인다. 준비물에 마스크가 있었던 것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이런 도로를 4시간을 달려가야 한단다.
캄보디아 또한 태국처럼 넓디넓은 초원의 땅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지대.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지평선뿐이다.
기온은 우리나라 여름과 같으나 습도가 없어서 더운 줄은 모르겠고 3계절을 함께 볼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나뭇가지에 꽃이 만발 했고 가을걷이를 끝 넨 곳도 있는가 하면 지금 모내기를 하는 곳도 있었다. 캄보디아의 기온은 겨울이라는데 이렇게 3계절이 다 있으니 1년에 삼모작을 한다는 말이 이해가 될 듯싶다.
불과 하루를 조금 넘겼을 뿐인데 나는 4계절을 다 보았다. 옛날 같으면 꿈도 못 꾸었을 일이다. 지구가 작은 것인가 세상이 좁은 것인가. 과학의 문명위에 살고 있음이 행복으로 느껴졌다.
어쩌다 스치는 길옆의 가옥들은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흙먼지가 뽀얗게 이는 길가의 상점에는 덮게도 없이 상품이 진열되어 있고 고샅을 걸어가는 이들은 거의 맨발이었다. 맨발로 뛰노는 아이들에서 수 십 년 전 검정고무신을 가슴에 품고 잠 못 들던 나를 본다. 수초 하나 없이 팍팍한 웅덩이에 괴어있는 흙탕물에서 빨래를 하는 이도 있고 손과 발을 씻는 이도 있다. 한 옆에서는 오리가 헤엄을 치며 물고기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황토물속에 연신 머리를 쳐 박으며 쩝쩝거린다. 그러고 보니 집집마다 웅덩이가 하나씩 있다. 우기 철에 빗물을 받아두기 위해 파놓은 것이지 싶다. 물이 많이 귀한가보구나.
드넓은 초원에 간간히 농사를 지었던 흔적을 스치면서 감보디아속의 대한민국아시아 중고버스는 비포장 황토 길을 털털거리며 석양을 달리고 멀리 지평선에는 붉은 노을이 서서히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도착지인 씨엠리업 도시까지 가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전기나 전화도 없는 밤늦은 시골길에서 차가 그만 고장이 났다. 비포장도로를 장시간 달려서 엔진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종종 있는 사고라고 한다. 고칠 수 있는 장비도 없고 카센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교체차량이 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다행이 가이드의 핸드폰으로 연락이 되어 1시간 반 후에는 대체차량이 도착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낯설고 물 설은 타국 땅 깊은 밤 어느 시골마을 길가에 내려섰다. 난감하기 이를 데 없지만 도리가 없었다.
시간을 보내기위해 우리는 길가에서 o선생님이 가지고 오신 녹음기에 테이프를 걸어놓고 한국인 특유의 관광놀이판을 벌렸다. 지나가는 차량들의 라이트 불빛에 조금은 쑥스러웠지만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괜찮은 놀이였다. 그러다가 가물가물 호롱불이 졸고 있는 원주민이 사는 집으로 들어가 보았다. 현지시간으로도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 그들의 밥상에는 소금에 절인 듯한 채소와 소금국 같은 스프를 놓고 젊은 내외와 아기 둘 그리고 할머니와 청년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손짓 몸짓으로 이리 와서 함께 먹자는 시늉을 한다. 인간이 나누는 인정은 그들이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는가보다.
집이라고는 하지만 원두막처럼 지은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헛간 같은 이층집에 밑에는 강아지 오리 토끼우리가 있고 마당가에는 그래도 펌프가 있는 한 가지 문화는 갖추고 있는 집이었다.
캄보디아 어린이들에게 주려고 20k나 준비했다는 어느 분 덕택에 집 주인은 물론 이웃 마을사람들까지 모두 모여 사탕잔치가 벌어졌다. 어린 아이가 사탕을 입에 넣어보고는 달콤한 맛에 신기한 듯 함박웃음을 웃으며 엄마 입에 할머니 입에 하나씩 넣어준다. 옛날에 우리도 그랬지. 지나가는 미군 군인아저씨에게 헬 로 헬 로 하며 따라가서 얻은 달콤한 쵸코렛 맛이 신기했고 쫄깃쫄깃한 껌을 버리기가 아까워 책상 밑에 붙여 놓고 몇날 며칠씩 씹었던 그런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그때는 미국이란 나라를 달나라쯤으로 생각했었다.
한 저녁에 나타난 이방인들의 호의에 작은 마을이 잠시 시끌벅적 했다.
다시 버스가 있는 곳으로 왔지만 차는 좀 더 기다려야 한단다. 지나가는 차량들이 간간히 있었지만 당연히 있음직한 고장쯤으로 아는지 누구하나 내려 보는 이가 없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다. 검어서 더욱 밝은 것일까. 참으로 오래 만에 또렷한 내 별을 보았다.
첫댓글 캄보디아 여행 잘 하였습니다. 가난의 아픔들이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마지막 연 "오래만에 또렷한 내 별을 보았다 담아 갑니다. 부럽습니다 감상 잘 했습니다
저의 사견은 "가난은 죄가 아니라 다만 불편할뿐이다" 라는 말에 공감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내전으로 국민들을 가나으로 내몬 캄보디아 정부의 무능함은 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굶주리는 아이들이 눈에 선합니다.
중국에 가셨다고 하더니......
캄보디아 이야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