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척모임에서 들은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대기업에서 거의 최고 자리까지 올라갔다가 마지막 계단에서 기업 오너의 직계자손에 밀려 퇴직을 한 오빠가 있다. 나이도 예순을 넘었고 여태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 편안히 여가를 즐기며 사나 했더니, 회사를 차렸단다. 벌어놓은 돈도 많을 텐데 또 일을? 자칫 실패할 수도 있는데 왜 그런대요? 오래 중소기업을 운영해 온 또 다른 오빠가 말한다. 자기가 아는 대기업 최고 간부가 퇴직을 2년 앞두고 있는데, 지금 받는 연봉만도 20-30억 원이고, 퇴직하면 5년 동안 월급의 40%를 받으니 연간 6-7억은 들어온단다. 그런데도 지금부터 퇴직 후에 100억 정도 투자를 해서 할 만한 사업을 알아봐달라고 야단이란다. “흠~일 중독이네” 했더니 또... 다른 대기업에 이사로 있다는 동생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이쪽 사람들은 회사에서 일하는 거 말고는 사는 방법을 모른다. 그리고 그 높은 자리까지 도달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을 밟고 올라갔기 때문에 진정한 인간관계가 힘들고, 퇴직하고 나면 더 쓸쓸해진다. 그러니 다시 그런 ‘사다리’ 사회로 들어가서 높은 서열에 있어야만 인정받고 사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강수돌 교수는 새 책 『팔꿈치 사회』(갈라파고스,2013)에서 이런 현실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대안의 길을 모색한다. 한국사회는 일중독 사회다. 한국인은 경쟁이 아니면 살맛이 안 나고 돈 버는 일 말고는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처음엔 타의였겠지만, 지금은 자의로 내면화가 되어 버렸다. 2011년 한국 근로자 연 평균 노동시간 2090시간. OECD국가 중 최장이다. OECD전체 평균 1737시간. 제일 짧은 나라는 네델란드 1379시간. 고액연봉을 받는다고 귀족노조 어쩌고 하는 현대자동차는 연간 3000시간 일한단다.
일 년에 수백 명씩 자살을 하는 우리나라 청소년들. 학교 폭력에다 성적비관에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은 지나친 성적 경쟁이다. 공부가 아니면 인간대접 받고 살기 힘든 세상 탓이다. 노동시간도 적고 행복지수가 높은 유럽의 대학들은 대체로 평준화되어 있다. 그 사회는 화이트냐 블루냐에 따라 보수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들을 성적 경쟁에서 구해내려면 대학의 평준화가 이뤄져야 하고 그것은 먼저 직업의 평준화를 전제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선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일들을 꽤 만족스럽게 이루고 사는 나라들이 있다.
북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대학 진학률이 20% 안팎이다. 오래전이지만 노르웨이 박노자 교수가 쓴 글을 보니 노르웨이에선 버스운전사 월급이 대학교수 급여보다 높다던가 비슷하다던가 그랬다. 대학교수는 높은 급여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서 자아성취를 이루는 것이라고. 이런 사회라면 책이 좋으면 공부를 하고 아니면 육체노동을 하면 될 것이다. 그런 나라들은 미친 듯한 경쟁과 일중독 현상이 우리처럼 강하지는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일중독 상태가 심각한가 하는 것은 <팔꿈치 사회>에 여러 가지 통계자료로 제시되어 있다. “당신이 일을 안 해도 좋을 정도로 충분한 돈을 얻게 된다면 그래도 계속 일하고 싶은가?”에 대해 “일을 그만두고 여가를 즐기겠다”고 대답한 이들은 미국(59%) 독일(43%) 일본(40%) 한국(25%)이다. 너무나 근면 성실한 한국인이다! 이 때의 일이란 직업을 말하는데 직업 외에는 삶을 모르는 사람들. 이건 실로 우울한 풍속도다.
‘팔꿈치 사회’란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며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치열한 경쟁사회를 일컫는 독일 말이란다.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강화되고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지만 한국이 그 최첨단을 걷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아는 일이다. 경쟁과 일중독은 이런 세상을 유지하는 두 개의 바퀴다. 경쟁적인 일하기는 저절로 일 중독자를 만든다. 사람에겐 누구나 경쟁심리가 있고 경쟁을 해야 세상이 발전한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 심리는 본능일까?
그러나 자본주의 이전의 전통사회는 경쟁보다 협력으로 살았다. 농업이든 어업이든 서로 돕고 살지 않으면 삶 자체가 불가능했다. 두레와 품앗이 등 우리의 옛 공동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민중들끼리 경쟁할 이유가 없다. 공생(共生)하고 공락(共樂)했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강화되면서 경쟁논리가 극대화된다. 경쟁은 지배의 도구다. 자본과 권력은 경쟁으로 노동자와 민중의 분열을 유도하여 지배하는 것이다. 경쟁은 분리에서 발생한다. 분열된 민중만큼 지배하기 좋은 상태는 없다. 개인간, 학교-회사간, 국가간의 경쟁. 경쟁의 논리는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다.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도 여가도 경쟁이다. 지역별 경쟁 경기인 프로야구나, 김연아나 박지성, 류현진 같은 국제적으로 활약하는 스포츠에 온 국민이 환호하는것 도 결국 경쟁 심리의 대리만족이다. 그렇게 하여 스스로 자본과 권력에 지배당하는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강자와의 동일시’를 하고 ‘경쟁의 내면화’로 살아간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의 참된 내면과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행복지수가 낮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팔꿈치 사회>는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예전에 부제와 같은 제목의 책을 개정 증보한 것이다. 이 책에는 우리 사회를 진단하는 최근의 통계자료와 함께 풍부한 예화들이 많아서 고등학생 정도면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뼛속 깊이 경쟁을 내면화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예화 중 하나.
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다. 심심하던 토끼가 거북이에게 달리기 경주를 제안한다. 원래 이야기의 결말과 교훈을 다시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요즘은 새로운 해석도 나와서 거북이가 잠자는 토끼를 깨우지 않고 일등한 것은 반칙이다, 이런 말들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강수돌 교수는 이 우화가 의도하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짚는다.
“토끼와 거북이가 정말 심심하다면 굳이 산꼭대기까지 달리기 시합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달리기 경주 말고 오히려 둘이서 더 재밌게 놀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왜 피곤하게 경쟁을 하는가? 경쟁 않고도 재미있게 놀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말이다. 또, 경쟁을 하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은 일종의 강박증 아닐까. 자신의 중심이 탄탄하게 서 있고 주변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면 별로 경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경쟁은 자신의 능력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기 때문에, 낮은 자존감에 대한 보상을 위해 경쟁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인생은 경쟁이며 삶의 목적은 승리라고 자연스레 내면화하게 된다. 인간에게 경쟁의 심리가 분명 존재하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정말 행복할 때는 경쟁해서 승리할 때보다 함께 대화하고 일하고 공동으로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가 아닌가?
나의 경우는 그랬던 것 같다. 중고시절이 가장 괴로웠던 것은 사춘기의 특성 탓도 있겠지만, 알게 모르게 옥죄는 경쟁의 공기에 숨이 막혔다. 중고시절 나는 공부 잘하는 친구를 두지 않았다. 그 애들은 경쟁자일 뿐 친구가 될 수 없었다. 더 이상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교사가 되어서 진짜 벗들을 사귀었다. 교사들은 승진할 생각 없으면 경쟁하지 않는다. 서로 의논하고 협력한다. 요즘 들어 성과급이니 뭐니 해서 정부에서 자꾸 교사들의 경쟁을 부추키며 기업의 논리를 도입하려 하는데, 이것은 정말 한심한 발상이다. 교사들까지 진심으로 경쟁하기 시작하면 학교는 더욱 황폐해질 될 것이다. 내가 겪어온 학교에서 우리 교사들은 선후배 동료를 경쟁상대를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겪어온 교사들은 대체로 그랬다. 다른 경우도 없진 않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의 상징은 sky라인이다. 그런데 새로운 sky라는 용어를 <팔꿈치 사회>에서 알게 되었다. 쌍용(s), 제주 강정마을(k), 용산(y) 철거민 사태를 일컫는 말. 2012년 7월에 ‘sky 공동행동’이 진행되었다. 이 “sky의 공통점은 국가폭력과 기업폭력의 결합이며 그 본질은 자본이다.”
“‘sky라인’ 및 ‘sky공동행동’에서의 sky는 얼핏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서로 통한다. 기득권 집단이 기득권을 독점적으로 누리기 위해 국가폭력이나 용역 깡패 또는 구사대 폭력 등을 이용하여, 대부분의 민중이나 자연을 착취하고 억압한다는 것이다.”
결국 sky라인이 ‘sky’사태와 ‘sky 공동행동’을 불러일으킨다. 1%에 대한 99%의 저항이다. 경쟁의 세상은 누구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다. 사다리 맨 꼭대기에 있는 사람도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언제 밀려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할 것은 사다리꼴 경쟁사회가 아니라 원탁형 협력사회, 공생공락의 사랑의 사회다.
그런 삶을 일깨운 선지자들로 이반 일리치, 앙드레 고르와 도린 이야기가 책의 후반부에 나온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너머의 삶을 꿈꾸는 많은 이들이 존경하며 배우는 사상가 이반 일리치가 가장 강조한 것은 ‘우정’이었고, 또 다른 생태주의 사상가 앙드레 고르는 아내 도린과 죽음도 같이 한다. 그들에게 삶의 최고 가치는 사랑이었다. 우정과 사랑에 대신할 것이 무엇인가? 경쟁과 성공의 가치관이 세상을 다 태워버릴 재앙의 불이라면, 우정과 사랑은 그 폐허를 살려낼 생명의 물이다. 우리는 이제 불의 시대에서 물의 시대로 건너가야 할 때다.
책의 마지막 장은 아들에게 주는 편지 “아들아 너랑 살아서 참 기쁘구나”도 참 훈훈한 글이다. 고 3때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일이 음악임을 깨닫고 대학입시를 치르지 않았던, 그리고 친구들보다 몇 년 늦게 외국 음악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 한결이에게 @강수강수돌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 더 이상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을 목표로 살아선 안 된다. 우리가 진정 추구할 것은 ‘일류인생’이다. 그것은 꿈의 발견, 실력 증진, 사회 헌신의 3요소로 구성된다.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은 소수만 성공하지만 일류인생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는 내 아이가 경쟁의 승자가 사랑의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
나도 내 아들이, 우리 학생들이 이렇게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렇게 아름다운 꿈을 꾸도록 먼저 이 책을 권해야겠다. 경쟁과 승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은 너무 듣지 못했다.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를 좀 더 적극적으로 펼쳐나가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 경쟁과 성공신화에 매몰된 이 광기의 세상, 우리에겐 더 많은 우정과 사랑의 전령사들이 필요하다. 서로 싸우는 삶보다 더불어 사귀는 삶이 행복하지 않은가.
첫댓글 우정이 대안이군요 ~ 실천방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