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
포스트모더니즘-신국원[IVP, 총신교수]
서문-이 책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정보 홍수 가운데 유용하고 필수적인 것을 결정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내용으로 간추리는 작업을 근간으로 삼았다.
책의 내용 구성 본 책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3장과 4장은 분위기를 파악하도록 쓰여졌다. 이것을 바탕으로 개념적인 포스트모더님즘에 대한 사상이 5장과 6장에 기록되어 있다. 결론부분에서는 기독교적인 대안으로 쓰여져 있다. 1장과 2장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발생 배경을 역사적 배경에서 철학사조를 통해 여러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발표 방향 본 발표의 목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무엇인지 알고, 그 관점을 파악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기독교인으로써 어떻게 바라보며 대안을 모색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포스트모던의 어원을 살펴보고, 그 어원에 근거하여 전근대와 근대의 철학사조를 1-2장에서 간략하게 살펴본다. 둘째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떻게 현실 속에 나타나고 있는지를 3장과 4장을 통해 전반적으로 스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그 현상들 내면에 흐르는 정신적 사상의 공통점을 파악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의 윤곽을 잡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기독교인으로써의 대안으로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할지를 짚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은 독자로써뿐 아니라, 이 시대의 한 명의 기독교인으로써, 목회자로써 의견을 첨부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한다.
1. 포스트모던의 어원 대개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는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가 대표작 “역사의 연구”(Study of History)에서 서구 역사를 크게 암흑기, 중세기, 모던, 포스트모던의 네 시기로 구분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 포스트모던이란 제1차 세계대전 또는 1870년대 이후의 세계를 의미한다. 곧 “합리주의가 붕괴되고 무정부주의 가 처음 대두되기 시작한 가장 최근의 역사적 시기”를 지시하는 말이었다.
포스트모던이란 어휘가 문화 전반에 대한 묘사로 처음 사용된 것은 역시 1956년판 토인비의 「역사가의 종교 이해」(An History's Approach to Religion)에서다. 토인비는 이 책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을 자포자기, 도피주의, 표류라고 보았으며, 또한 그 시대는 언어, 관습, 종교 등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아무것이나 무차별 수용하는 초점 없는 혼합주의와 무비판적 관용의 시대라 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대중적 정신의 승리라고도 표현했다.
포스트모던을 광범위한 문화적 추세라고 할 때, 그것은 말 그대로 ‘포스트’ 모던적 요소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될 수 있다. 여기서 ‘포스트’란 ‘근대 이후’라는 시간 개념과 더불어 ‘근대에 대한 반대’ 또는 ‘근대로부터의 탈피’라는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내포한다. 물론 ‘후’로 규정하면 연속성이, ‘탈’로 규정하면 단절과 비판, 극복의 주제가 강조된다. 즉,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논의는 ‘이후’보다는 ‘탈’ 또는 ‘반대’의 의미가 중심이다. 그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결코 모더니즘이 자연스레 진화하는 과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 기간에 누적된 병적 요소들이 초래한 문제와 위기에 대한 반발과 대응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포스트모던은 근대의 문제에 대한 반성과 해답을 추구한다. 따라서 근대의 사상적 기반인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는 포스트모던을 알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2.전(前)근대와 근대의 차이 근대를 과학과 이성의 시대라고 부른 이유는 근대가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과학을 문화의 토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전근대란 신화나 계시에 기초한 신앙을 토대로 이루어진 문화였다. 전근대는 보통 역사에서 말하는 고대와 중세가 포함된다. 이는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후만 따져도 5,000년 이상의 긴 기간이다.
전근대 시대의 근본적 특징 3가지(비이스)
(1) 전근대는 초월적 세계가 존재함을 믿는다. 이는 과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2) 세계를 조화와 체계의 세계라고 믿는다. 세계에는 법, 원리, 이성, 로고스, 자연법 등으로 부르는 초인간적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삶이란 이 질서를 따라 사는 것이었다.
(3) 진리는 모두에게 공통적이라는 진리의 객관성에 대해 동의가 있었다. 삶의 바른 길 역시 절대적이라고 보았다.
근대는 바로 이런 전근대의 근본적 세계 이해에 혁신적 변화가 생기면서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세계를 신성한 유기체로 보던 관점을 떠나 하나의 무생물적 메커니즘으로 보는 기계론적 모델의 등장이 근대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근대의 특징 4가지(왈쉬)
(1) 근대는 더 이상 초월적인 세계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자연적인 것과 이 세상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2) 종교적 권위에 굴복하기보다 관찰과 반성에 의해 진리에 도달하는 정신의힘에 대한 믿음이 강해졌다.
(3) 과거보다 미래가 마음을 사로잡고 용기와 지적 노력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 들어왔다.
(4) 좀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끈질긴 실험적 연구가 진보를 이루는 방법이라고 믿게 되었다.
결국 이 4가지를 종합하면 근대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고 발전시키려는 자율적 사고와 행동의 세계관을 특징으로 한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근대는 기본적으로 철학적 인식론을 통해 삶의 기초를 마련하는 이성주의적 토대주의(rationalistic foundationalism) 문화였다.
문제는 과연 철학이 이 기초 공사를 담당할 능력이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면서부터 일어났다. 철학의 실험이 계속 실패하여 결국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근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해서 근대의 위기는 토대주의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의 위기는 바로 이 이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찾아왔다.
포스트모던을 말하는 오늘의 철학적 과제는 토대주의 철학의 자신감과 불안이라는 이중적 유산에서 유래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근대의 위기는 근대의 기둥인 철학이 이성의 자율 신화에 빠지고, 과학과 기술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정신적 토대인 기독교 정신에서 유리된 데서 비롯되었다(불행하게도 이것을 대처할 만한 기독교적 변혁의기초가 마련될 사이도 없이 근대적 사고의 열풍이 밀어닥쳤다). 그러나 기독교적 의미에서 분리되어 자율화된 이성은 결국 뿌리를 상실하고 소외되어 정신적 공황을 맞게 된 것이다. 포스트 모던 시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2. 근대의 문화적 전통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4가지 국면들 문화 전체를 가장 명료하게 가시화할 수 있는 것은 예술이다. 따라서 예술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는 것은 문화 전반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 역할을 한다. 칼리스쿠의 연구와 주장에 따르면 예술의 영역에서 드러난 위기의 국면들은 아방가르드와 키취 그리고 데카당스와 니힐리즘으로 나타났다.
(1) 아방가르드(avant-garde):전통의 파괴 아방가르드는 전위대 또는 선구자(advance guard 또는 van-guard)라는 의미의 고대 불어로서 중세에 생긴 말이다. 이 말은 본래 혁명 및 내란과 연관된 용어였다. 실제로 전통과 기존 체제에 대한 매우 전투적이고 혁신적인 변화를 기도하는 운동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아방가르드는 근대가 이미 갖고 있는 과거에 대한 비판과 변화의 추구를 극단적으로 만든 운동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극단화되고 극히 유토피아적으로 표현된 근대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는 근대적 자율성 이념의 극단적 표현이다.
(2) 키취(Kitsch):문화의 상업화 키취라는 용어는 영어의 스케치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과 허영으로 부풀려진다는 의미의 러시아어의 동사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그 말의 의미는 속된 자랑하기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좀더 일반적으로 ‘주워 모으다’라는 의미 19세기 독일어인 verkitschen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말은 낡은 가구를 모아 새것으로 만들어 판다는 뜻, 즉, 내용을 속이거나 진품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키취가 이런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예술의 대중화를 위한 모방, 위조, 복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키취는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라고 믿는 예술의 고유성, 개체성, 창조성 같은 심미적 이상을 기계적 복사 기술을 통해 허문다. 결국 키취는 심미적 성향에 대한 자본주의 정신의 승리를 뜻한다. 이처럼 키취는 상업화를 통해 근대 문화에 남은 가치들을 파괴한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키취는 대중 문화의 선봉이다. 신도, 이성도, 미학적 기준도 상실된 사회에서는 ‘소비의 욕구와 그것으로 채워지는 만족’이 최고의 가치요 이상이다. 백화점을 키취의 전당이라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키취의 결과로 즉각적 쾌락만이 추구할 유일한 가치로 여겨지는 소비주의 문화가 맹위를 떨치게 된다. 키취는 예술 전체를 상품화해서 쉽게 구입하여 즉시 소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획일화된 문화를 조장한다.
(3)데카당스(decadance):진보 이념의 비판 아방가르드가 기성 권위를 파괴하고, 남은 가치들이 키취에 의해 상업화되면 문화가 쇠퇴하는 것은 당연하다. 데카당스는 이를 반영한다. 데카당스는 퇴폐, 부폐, 쇠퇴라는 뜻으로 본래는 로마제국 쇠망기의 타락과 방탕의 시대상을 가리킨 말이다. 데카당스는 구조나 상태를 의미하는 정적 개념이 아니라 방향과 성향을 의미하는 동적 개념이다. 데카당스는 근대의 파괴라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것이 종말을 향한 전진이 아니라 오히려 쇠퇴라는 인식에서 다르다. 그러므로 문학과 예술의 데카당스는 근대의 이상이라 할 수 있는 진보나 유토피아의 개념에 대한 반대를 반영한다. 이것은 관능주의, 향락주의, 악마주의, 탐미주의로 불리는 범주에 속한다.
(4) 니힐리즘(Nihilism) 근대 내부의 저항과 비판이 방향을 잃고 좌절하게 된 상황에서 니힐리즘이 나왔다. 니힐리즘은 라틴어의 ‘무’를 뜻하는 nihil에서 유래했다. 허무주의라고 번역되는 이 용어는 근대 문화의 토대였던 이성이 가치를 상실한 상황에 대한 지시어로 적합한 것이다. 니힐리즘은 ‘극단적인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기성 도덕, 전통적 종교, 습관, 제도 등을 거부하고... 파괴하려는 입장’을 말한다. 이는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고 또 그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과 가치까지도 부정하려는 사상적 입장’이다. 이런 정신은 이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해도 알 수 없고 알아도 전달할 수 없다던 고대 그리스의 궤변가 고르기아스(Gorgias)에게서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던의 선구자:프리드리히 니체 니체는 니힐리즘이 유럽 정신의 양대 뿌리인 헬라적 형이상학과 기독교의 초자연적 세계관의 유산이 붕괴하는 데서 말미암는 당연한 결과라고 갈파한다. 그가 특히 강하게 저항한 것은 기독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본 삶에 대한 적대 의식이었다. 이는 근대가 신을 버린 후에도 이성의 법칙에 따라 윤리와 도덕의 이름으로 자연스러운 삶을 구속한 데서 일어난 것이다. 본능적 삶을 부정하는 근대 문화는 허무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즉, 그의니힐리즘은 이제까지 인류가 궁극적 진리의 근원으로 믿어 온 두 근원인 신과 이성을 부정하는 것에 근거한다. 이간은 자신이 만든 신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발견하고자 했다. 이성도 같은 목적으로 신격화되었다. 구권에 대한 갈구의 표현인 신과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는 한, 삶의 목적과 의미는 상실된다. 이것이 바로 근대 후반에 찾아온 니힐리즘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신이 죽었다. 마찬가지로 이성도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의지와 권력 추구의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이런 우상들은 결국 참된 삶의 긍정적 정신을 전복시키는 것이므로 결단코 깨뜨려야 할 것으로 보았다. 니체가 데카당스와 니힐리즘을 극단화한 것은 결국 근대성을 포함해 모든 근대적 정치, 사회, 문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니체 역사상 가장 반기독교적 사상가로 꼽히는 니체는 2대째 목사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더욱이 그 자신도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자유 신학의 대가 리츨(A. Ritschl)의 지도 아래서 신학과 고전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다. 결국 그는 리츨의 추천으로 박사 학위나 교수 자격 논문 과정을 생략한 채 25세의 극히 젊은 나이에 고전학 교수가 되었다. 그의 반기독교적 태도는 「우상의 황혼」이나 「적 그리스도」에서 보여 준 거처럼 서구 문화가 처한 위기의 궁극적 원인을 기독교 신앙의 유산에서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의 죽음에 대한 그의 유명한 선언은 지금까지 서구가 모든 의미와 기치의 근원으로 여겨 온 절대적 존재에 대한 거부를 뜻한다. 사실상 그는 인간의 자유롭고 본능적인 삶을 극대화하기 위해 신이 죽어야 할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이런 극단적 자세는 절대적 권위와 기준을 모두 우상으로 여겨 파괴하고, 대안이 없는 공백을 만들기 때문에 흔히 니힐리즘으로 간주된다. 니체의 의도는 절대를 배격해서 인간의 자율적 삶을 보장하려는 것이다. 그는 지식과 학문은 진리와 사실을 밝히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전략이 질서를 좌우하고 삶을 지배하느냐 하는 권력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니체는 삶의 본질을 권력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즉, 생존 본능이 아닌 권력의(Wille zur Macht)가 삶의 본질이다. 가치 체계나 윤리는 자연적이며 보편적인 규율이나 진리가 아니라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니체는 “우리에게 자신에 맞추어서 세상을 뒤집는 자신의 존재를 만드는 예술가가 되라”고 부추긴다. 니체는 신과 이상주의를 철저히 부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피하지 않고 사랑하는 정신을 주장한다. 이는 신 없는 시대의 인간 존재의 무의미성을 알되 이것을 저주하지 않고 이 운명을 감수하며 사랑하는 강자로서의 운명애(amor fati) 정신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처럼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신이 주시는 초월적 기쁨이나 형이상학이 제공하는 위로보다는 처절한 삶의 심연에서 경험하는 내재적 삶의 가치를 중시하는 인간이다.
3. 포스트모더니즘의 형상들[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 (3장) 포스트모던은 오늘날 거의 모든 특이한 문화 현상에 붙는 제유적 명칭처럼 되어 버렸다. 포스트모던에 대한 과대한 반응 또는 무감각이 초래되고 있다.(예. 엘리뇨)
(1)세계화와 지역화의 역설:다중(多重) 문화 세계의 모습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현격히 변화하고 있다. 그 원인은 세계화이다. 지역적 특색이 옛날만큼 분명치 않다. 세계화의 결과로 문화가 복합화되고 있다. 문화와 가치의 혼합 결과로 인한 긴장과 갈등은 포스트모던적 상황을 연출하는 첫째 조건이 된다. 그것은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 감과 더불어 오히려 심각한 파편화와 지역화 현상이 나타난다는 역설에서도 잘 드러난다.
(2) 정보화 사회와 후기 산업 사회 정보화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정보는 이제까지 사회의 토대 역할을 해 온 지식 체계와 성격이 완연히 다르다. 지식은 종합적 체계와 객관화를 통해 보편적 적용을 가능케 하는 표준화 특성이다. 그러나 정보는 이와 달리 단편적이고 유연하며 활용 역시 주관적이다. 따라서 정보화 시대는 특성화와 전문화 시대다. 이렇게 정보화는 근대의 핵심적 특징인 지식의 체계를 깨뜨려 삶을 다원화하는 데 근본적으로 기여한다.
(3)사이버 세계와 시물레이션 첨단 컴퓨터 기기와 전자 통신 기술이 또 하나의 세계인 가상 현실(virtual reality)의 지평, 즉 사이버 스페이스를 펼쳐 놓고 있다. 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닌 디지털 정보와 컴퓨터 조작에 의해서 형성되는 인위적 지평이요, 주관적 경험의 세계로서, 결국 공통된 세계의 상실에 기여한다.
(4)자연환경 의식의 변화 자연에 대한 의식의 변화 즉 환경 의식의 변화도 중요한 포스트 모던 현상이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자신감과 물질주의에 빠져, 자연을 개발과 착취의 대상으로 보던 세계관이 퇴조하고 있다. 반면 지구가 제한된 주거 지역과 자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잘 보존해야 한다는 새로운 세계관이 확산되고 있다. 이런 운동은 단지 개별적 사안의 중요성에서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근대 과학주의 세계관의 변화를 촉구하는 점에서 포스트모던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5)포스트모던 과학 근대 문명의 토대인 과학도 포스트모던적 변화의 예외가 아니다. 우선 과학의 통일성이 부정되고 있다. 즉, 한 시대의 과학의 틀이 한계에 봉착하면 다른 체계가 대체해 왔다는 패러다임(paradigm) 이론의 그것이다. 후(後)과학 시대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오늘날, 심지어 물리학자들도 객관적인 질서나 인식 기능의 절대성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막스 플랑크의 양자역학 그리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 이론 등은 원자 이하의 영영에서는 기존의 물리학이 제공하는 확실성뿐 아니라 객관성이라 중립성도 통하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과거에 생각했던 것처럼 실재가 어떤 고정 불변의 구조라는 인식을 배격하고 그것은 이질적이고 다원적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깔려 있다. 그러므로 세계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로 우리가 직면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에 의해 조성된 세계요 따라서 언어만큼의 많은 수의 세계가 존재하며, 과학도 단일하거나 통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6) 뉴에이지와 신과학 운동 이처럼 과학의 권위가 흔들리는 틈을 타 비과학 운동이 번지고 있다.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동양적 지혜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고, 세계화 추세로 동서양의 종교와 사상적 혼합이 고무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종교 다원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추세와 포스트모던 사상의 부추김을 받아 종교 다원주의가 신앙 생활과 종교에 상대주의적 영향을 확장하고 있다. 뉴에이지 운동은 다양한 종교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기조를 가지고 있어 다원주의 성향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궤를 달리한다. 그러나 본질상 탈이성적이고 탈과학적인 운동이라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무관하다 하기 어렵다.
(7)다원주의와 탈(脫)중심 객관성을 토대로 하여 통일성의 기초를 마련했던 철학과 과학이 흔들림으로 인해 대두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는 포스트모던의 가장 대표적 특징으로 꼽힌다. 포스트 모던 시대의 특징은 다원성 자체가 공인되고 절대적으로 신봉되는 것을 환영하는데 있다. 다원주의는 세속 사회에 가장 잘 부합하는 문화적 이데올로기다. 그것은 공동체가 어떤 의미에서건 믿음이나 행위의 정형을 공인하거나 지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정형이 비판받거나 의심되는 것을 당연시한다. 거대 담론이란 문화의 토대를 이루는 전체적 구조를 짜는 사상적 체계인데 이에 대한 불신이 이 시대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사회를 통일하는 거대 담론이 불신되고 적극적으로 해체되는 세계가 다원주의 사회로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8)동성애 다원주의는 중심의 존재와 의의를 부정한다. 이에 따라 수직적이고 계급적이던 관계가 다양성과 차이의 관계로 바뀌고 있다. 이처럼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 하나는 주변에 놓였던 것이 중심으로 이동하는 일이다. 아마도 자신들의 입지 확보를 위해 다원주의의 분위기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가장 잘 활용하는 그룹은 동성애자들일 것이다. 동성애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 제도와 권력의 문제였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진리와 제도가 사회적 담론의 산물이라는 포스트모던적 사고에 입각한 주장이다.
(9)성(性) 정치학 성 혁명은, 합의해서 성을 누리고자 하는 성인의 욕구는 사적인 문제이므로 공적 윤리나 법규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성 정치는 성의 공적 측면을 강조한다. 성차로 빚어지는 모든 불평등에 대한 비판과 교정 노력, 동성애 문제를 포함하는 소위 비정상적인 성의 정당화 문제가 성 정치의 관심사다. 모든 성적 취향이 인정받는 성적 다원주의의 실현으로 비정상이라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을 추구한다.
(10)페미니즘 페미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보다 역사가 길다. 사실 페미니즘은 근대 계몽주의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성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페미니즘은 급진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 자유주의운동, 여성 억압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복합적 결과라고 믿는 이중 체계론 등 적어도 네 가지 유파가 있다. 초기는 주로 여성의 위치나 가정 내의 역할 분담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지금은 남성 중심의 철학을 해체하고 여성 중심의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통해 학문의 중심부로 진입하고 있다. 페미니즘이 가정 내의 문제점이나 잘못된 성적 차별의 문제를 고발하여 시정에 기여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11)대중 문화의 시대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은 권위 체계가 붕괴한 ‘대중 사회’다. 최고의 가치와 예술만을 문화로 정의했던 고전적 문화의 개념이 쇠퇴했다. 문화의 가치 기준이 다원화되면서 우선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의 분리가 사라졌다. 대중 문화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넓고도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는 현상이다. 아울러 대중 문화의 본질은 문화의 상업화에 있다. 문화가 대중적이 되기 위해서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구조로 변해야 했기 때문이다.
(12)신세대/감성 세대 대중 문화의 부상은 소위 ‘신세대’의 출현과 맞물려 있다. 특히 개인주의 성향이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꼽힌다. 신세대는 흔히 감성 세대로 불리낟. 데카르트의 말처럼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과 소위 ‘끼’로 존재하는 세대다. 신세대의 감성 중심적 문화는 바로 포스트모던 문화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감성 중심의 문화는 교육학자들의 새로운 이론으로 지능 지수인IQ와 더불어 감성지수인EQ를 아동과 청소년 교육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재기되고 있다.
(13)감성 광고 광고는 상품을 구매하도록 소비자를 설득하는 의사 소통 방법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적 광고는 상품보다는 이미지를 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객관적 서술 구조가 파괴된 열린 메시지를 소비자의 해석에 맡기는 방식이다. 패스키쉬와 패러디도 활용한다. 이 외에도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탈정전화(규범에서 일탈하는 행위), 탈중심화를 활용해 임의성, 우연성, 유희성을 보이는 광고도 있다. 또 제품과는 관계 없는 모델, 평범한 소비자, 회사원이 등장해서 모델의 권위 파괴에 나서기도 한다. 요즘은 부적이나 종교인을 동원하여 신비감을 내세우는 광고도 있다. 무엇보다 광고가 성역 없이 모든 것을 활용한다는 점도 포스트모던적이다. 물건의 용도와 품질을 선전하기보다 분위기를 조성해 구매 충동을 일으키는 광고도 흔하다. 소위 감성적 광고다. “바로 이 맛이야”라며 구미를 자극.
(14)크로스오버와 퓨전:열린 음악회 ‘열린 음악회’도 좋은 예다. 열린 음악회는 클래식과 대중 음악이 한 무대에서 교차하거나 혼합되는 소위 크로스오버나 퓨전에 치지지 않는다. 크로스오버에서 클래식이 점차 대중 문화 속으로 함몰하는 현상도 그렇다. 클래식과 팝이 교차하는 음악에서 전통 음악회에서처럼 대곡(大曲)의 연주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문제는 이런 실험적 음악보다 청중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과도한 상업주의 음악과 거기서 더 나간 기형적 음악들에서 극에 달한다. 괴상한 몸짓과 발악과 같은 발성, 기이한 옷차림이며 머리 모양. 사회 비판을 넘어 가사 중 욕설을 삽입, 테이프 거꾸로 틀어 괴기한 소리가 난다는 소위 백워드 매스킹을 들 수 있다. 극단적 형태로 기존 음악의 틀을 벗어나는 시도로 드뷔시는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이 대표적 예다. 조성과 박자 같은 음악의 틀을 무너뜨리기로 유명한 존 케이지의 <4’ 3”>(1961)는 피아노 뚜겅을 열지 않은 채 4분 33초 간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일어나는 것이 전부였다.
(15)건축에 반영된 문화와 시대 건축만큼 문화의 변화를 잘 반영하는 것도 드물다. 고전 건축은 우주의 질서나 도를 반영함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에 비교하면 근대 건축은 철저히 인본주의적 기초에 서 있다. 즉, “형식은 기능 뒤에 온다”는 기능주의에 입각하여 불필요한 것을 모두 소거한다. 그러나 근대 건축은 비인간화와 소외의 문제를 일으킨다.(세인트 메리 대학-미국)
-포스트모던 스타일은 기능 위주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난 다양성과 장식적 요소가 기본 특징이다. 기능 위주인 근대 건축과 달리 포스트모던 건축은 상징성을 강조한다. 포스트모던 스타일의 또 다른 특징은 지역적 전통 또는 건물이 위치한 주변 맥락과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좀더 극단적인 예는 소위 해체적 건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물이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방위 감각을 해체하고 안과 밖을 교체하고, 익숙한 평면을 거부하고, 일종의 희롱 또는 농담이나 어울리지 않는 역사적 스타일을 섞어 놓아 각개의 의미가 상쇄, 상실케 하여 스타일의 해체와 역사의 상대화가 진행됨을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 건물들: 백화점이나 쇼핑몰은 외형뿐 아니라 그 기능이나 목적에서도 포스트모던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 상업성과 소비주의의 전당인 몰에는 위안, 풍요, 편의와 유행이 깃들어 있다. 고대와 중세의 상징이 신전이나 대성당이며 근대는 공장이라면, 포스트모던은 쇼핑몰이다. 비이스의 말처럼 쇼핑몰의 메시지는 소비와 오락의 추구이기 때문이다. (서울역 건물이 고전적이라면 그 전면에 있는 대우 빌딩은 전형적인 근대 건축물이고, 용산의 국제 빌딩은 포스트모던 양심이다)
4. 포스트모던의 상상력(4장) 건축은 결국 건축이요 해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허구의 세계인 예술에서는 상상력이 제한 없이 발휘된다. 건축에서 나타난 형식의 해체나 혼합이 예술에서 훨씬 깊고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포스트모던 상상력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항상 미래 세계는 오늘날의 상상력 속에 예고된다는 점 때문이다.
(1)포스트모던 예술 고전 예술은 자연의 미와 아름다움을 이상으로 삼아 그것을 모방했다. 반면에 근대 예술가는 주관적 시야와 감성에 의해 인위적인 미를 창조했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미의 절대적 이상을 포기하고 개인적 상상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포스트모던 예술을 진리를 주장하는 허울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진리란 사회적 관습이 만든 환상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이 허구라고 믿기 때문이다. 또 독특한 스타일로 영원과 초월을 지향하는 근대 예술과 달리, 일시성과 익명성을 가치 있게 여긴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진지하지 않다.
(2)패스티쉬(pastiche), 콜라주(collage) 포스트모던 예술의 특징은 혼합적이다. 창조성과 독창성 대신 다른 작품이나 테스트와의 상호성을 중시한다. 포스트모던의 주된 형식을 콜라주로서, 서로 연관되지 않는 이미지와 모순된 의미들을 뒤썩어 놓아 모호하고 불안정한 의미를 창조한다. 가장 좋은 예는 뮤직 비디오와 MTV의 멀티 미디어 음악의 혼성 장르 현상이다.
(3)영상문화시대, 세대 시와 건축, 회화와 조각이 주도했던 근대와 달리 포스트모던 문화는 영상이 주도한다. 영상은 각종 문화 활동을 종합하는 중심 노릇을 한다. 영상문화의 주체는 텔레비전과 영화, MTV, 비디오와 멀티미디어다. 컴퓨터 통신과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공간도 영상을 통해 구성된다. 영상 문화가 비교적 역사가 짧으면서도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이런 사회 제도와 기술적 요인 때문이다. 영상을 실제 세계에 대한 모사로, 결국 허상이지만 뛰어난 사실성 때문에 다른 매체보다 호소력이 훨씬 강하다.
-텔레비전 보급 이후의 세대는 인쇄 매체보다 영상에 익숙하다 하여 영상 세데라 부른다. 문제는 영상이 추상적 사고 능력을 요구하는 독서와 달리 구체적이며 순간적이고 감성적이라는 데 있다. 영상문화는 본래 외관과 육체적 아름다움에 집착하기 쉽다. 대개 짧은 시간 내에 이야기를 완결해야 하므로 주제를 손쉽게 시선을 끌거나 호기심을 자아내고 충격적인 주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영상이 문화를 주도하여 독서가 사라지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반지성주의, 상대주의 그리고 피상성이 겉잡을 수 없이 증대될 것’이라는 우려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영상매체는 포스트모던 상상력을 표현하는 데 매우 적절하기에 둘 사이의 결합은 이미 실험 영화에서 확고해졌다.
-포스트모던 실험 영화는 즉흥적이고 임의적으로 우션을 남발한다. 결국 영화가 일시적이요 가변적인 유희일 뿐이라는 자조적 관점을 맹백히 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1)공상 과학 영화의 유토피아 ‘해체’ 포스트모더니즘같이 어려운 사상이 빨리 거리에 나도는 것은 영화나 텔레비전 같은 매체들 때문이다. 터미네이터, 백투더퓨처,토탈리콜,매트릭스,스타트랙,X파일,트루먼 쇼,덤앤더머,케이블 가이,마스크
-현실과 허구를 뒤섞어 모호하게 하는 것은 포스트모던 영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 기교는 어떤 소재와 주제에 적용되건, 과연 현실이 무엇인지 또 믿을 수 있는지 물으면서 의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에 사용된다. 삶 전체가 연기와 조작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다.
-일부 포스트모던 영화에서는 단지 환상적인 시간이나 공간의 해체가 아니라 사회 규범과 질서나 세계관에 대한 좀더 실제적인 해체가 시도된다. 이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포착하려던 근대 영화와 달리 다양한 시각을 당연시하는데서 비롯된다.
2)포스트모던 애니메이션 영화뿐 아니라 흔히 아동용이라고 여겨지는 애니메이션에도 포스트모던의 변화가 예외 없이 반영된다. 포카혼타스,늑대화 춤을,바람 계속의 나우시카,원령공주,신세대 에반겔리온
-기계 문명, 남성 우월, 이데올로기 같은 모던적 주제를 배격하고 좀더 여성적인 이미지나 부조리, 근대적 인간성의 허구에 대한 폭로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인간과 사회 틀의 파편화, 신에 대한 일반 개념 해체, 패러디, 기독교적 주제 패러디, 관객을 개입시키는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3)심령 영화 포스트모던 영상 문화의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장르는 바로 괴기 심령 영화일 것이다. (X파일)
-제작자 크리스 카터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시대, 절대적 신념을 상실한 시대를 그리려 했다”고 말한적이있다.
4)텔레비전 텔레비전이야말로 가장 포스트모던적인 매체다. 이미지가 사실을 대치하는 시뮬라시옹(모사) 문화의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요한 뉴스나 프로그램이 하찮은 광고와 섞이면서 균등하게 처리되기 때문에 둘이 비슷한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는 데 있다. 또한 시청자로 하여금 역사의식이 결여된 ‘항상 현재’ 속에 살게 하는 면이 있다.
(5)포스트모던 공연 예술 여기서도 예술의 장르를 통합하거나 임의로 넘나드는 혼합이 눈에 띈다. 그 대표적인 예는 단연 조각과 록음악 그리고 연극을 조합한 존 케이지의 공연이다. 비엔날레의 주종을 이루는 설치 미술도 이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작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도 대표적인 예다.
(6)포스트모던 문학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포스트모던 문학도 다른 영역에서처럼 근대적 사실주의와 합리주의 세계관의 붕괴에서 비롯된다. 포스트모던 문학은 합리적 서술을 지양하는 면에서 근대 문학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우선 이것은 이성과 논리를 배격한다. 또 분명한 의미 전달보다 다의적이고 모호한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포스트모던 문학의 비합리적 경향은 스파이 소설이나 공상 과학 소설이 가장 대중적 장르로 부상한 점에서도 드러난다. 포스트모던 공상 과학 소설은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코피아를 그린다. 또 허구의 세계를 실제 세계와 병치시키고 전자를 실재보다 더욱 사실적으로 그리는 기술을 발휘한다. 이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실재가 무엇인지 매우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1)장르와 경계의 파괴 탈장르화 또는 장르의 혼합과 확산은 포스트모던 문학의 중요한 특징이다. 장르간의 경계를 넘고 간격을 좁히는 작업이 문학 전반에서 진행되고 있다.(사극과-현대식 배경음악)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창작보다는 비평과 이론에 관심을 기울인다.
2)상호 텍스트성 이는 작품들간의 혼합 현상이다. 이 역시 근대 문학의 정형을 깨고 창작의 위상을 흔드는 중요한 현상이다. 결국 이 현상도 작품을 현실의 반영으로 보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 작품은 다른 텍스트들의 혼합으로 간주된다. 패러디를 ‘정당화된 일탈’로 간주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창작이라 재결합에 불과하며 저자는 단지 편집을 수행하는 사람일 뿐이다. 저자의 죽음이 거론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실재의 합리적 질서에 대한 신념을 포기한 포스트모던 문학은 고정 불변의 의미를 주장하지 않는다.
-의미 해서에 있어서도 저자의 의도보다는 글이 쓰이고 읽히는 문화-사회적 배경이 더욱 중시된다.
-바셀미의 「백설공주」는 혼란스러운 패러디다. 공주 대신 권태에 빠진 22세의 주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며 기다리는 왕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저자는 자신의 작품뿐 아니라 백설공부 자체가 허구임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목적은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다른 문학 장르와 전통과 모든 텍스트가 허구임을 폭로하고 조롱하려는 공통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런 목적 의식으로 포스트모던 문학의 분위기는 냉소적이고, 대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들을 폭로하는 데 그치는 비관주의적 니힐리즘으로 끝나기 일쑤다.
3)작가와 독자의 관계 재정립 포스트모던 문학은 작가의 시각을 중시하는 근대 작가와 달리 독자를 우위에 두는 경향이 있다. 이미 근대에 들어와 의미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으로 간주되었고, 주관적으로 축소된 예술이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객관과의 연관성마저 완전히 끊겼다. 즉, 포스트모던 문학의 전체 구성은 흔히 플롯이 없거나 있어도 매우 빈약하다. 구체성이 없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이야기를 산만하게 진행시키는 것이다. 결국 작품이 인과 관계에 따른 짜임새 있고 논리적인 구조로 보이기보다 여러 개의 에피소드의 모임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포스트모던 소설의 경우 전작이나 대하 소설보다 단편이나 중편이 선호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5. 포스트모더니즘 사상(5장) 반철학적인 포스트모던 문화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철학적 논의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 논의는 비록 합리적인 근대 철학과 다른 성격을 보일지라도 크게 보면 여전히 철학적이다. 특히 오늘의 반철학적 성향은 근대 후반에 고도로 전문화된 철학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현대 철학의 흐름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 없이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 내용이 어렵도라도 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포스트모던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1)구조주의: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 운동 철학과 예술 이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부르는 운동은 1960년대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단의 사상적 흐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근대 문화 비판 운동에 영향을 준 구조주의부터 논의를 해야 한다. 구조주의는 철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방법론에 가깝다. 구조주의는 오히려 객관적 전체 구조를 발견하고 이에 따라 개체간의 상호 관계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것은 구조주의가 개인의 행위나 생각이 결국 사회 제도 같은 좀더 근본적이며 심층적 의미 체계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데서 비롯된다. 구조주의는 당시 프랑스 철학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실존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초월적 자아의 주관성을 중시하는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2)의미론과 기호학 구조주의 대표학자였던 언어학 교수 소쉬르는 가능적 체계로서의 언어(langue)와 실제 사용한는 말(parole)을 구분한다. 그리고 말의 의미는 랑그의 규칙을 따라 정해진다고 주장했다. 그의 의미론은 바로 이 전제에 입각해 있다. 그는 의미가 단어나 문장 내부에서가 아니라 다른 단어나 문장과의 차이에서 확정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문장의 의미는 문단 도는 글 전체에 의해 정해진다. 기호학(semiology)의 핵심은 이와 같이 언어가 외부의 사실이나 본질을 지시하는 체계가 아님을 주장하는 데 있다. 구조주의 이론의 핵심 개념인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gie)는 이를 잘 보여 준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본질적이라거나 신비로운 근거에 입각해 있다거나 자연적, 필연적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이는 정지를 의미하는 빨간 불의 의미가 노랑과 파란 불과의 변별성에 기초하는 것과 똑같다. 그것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관습에 의한 임의적 연관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 언어는 기표와 기의로 구성된 임의적 관습이다. 소쉬르는, 언어가 내부 구조의 상호 관계에 의존한 형식을 가진 자율적 체계임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이런 소쉬르의 주장은 언어가 사물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전통적 진리관에 대한 상당한 파괴력을 행사한다. 또한 이 이론은 모든 진리가 사회적 담론의 결과라는 포스트모던 특유의 주장에 근거를 제공한다.
(3)구조주의의 철학적 함축 구조주의의 영향으로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진 신적인 능력이라는 생각이 부정되었다. 언어가 로고서에 근거한 특별한 무엇이라는 형이상학적 생각 역시 배격되었다. 이와 함께 언어에 기초한 모든 사회-문화 체계에 대한 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이해가 배격되었다. 진리와 지식 체계의 절대성에 대한 믿음도 흔들렸다. 결국 모든 언어의 공통적 구조를 찾겠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언어-문화적 상대주의가 열렸다. 구조주의는 사회 구조도 언어처럼 임의적이라고 주장함으로 주목을 끌었다. 사회도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같은 이항 대립에 의해 체계화된 구조라는 것이다. 즉, 사회는 이런 임의적인 대립 구분에 입각해 가정이나 부족 같은 간단한 구조를 형성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사회 구조를 이항 대립의 체계로 분석하는 후기 구조주의의 사회-문화적 시각이 나오게 된다. 이와 같이 구조주의는 근대 철학의 기본 가정을 흔드는 새로운 사고 형태를 보여주며, 언어학을 넘어 깊은 철학적 함축을 가진다.
(4)구조주의와 사회-문화 연구 벨기에 출신의 인류학자 클로스 레비스트로스의 관심은(Claude Levi-Strauss,1908)는 문화와 사회의 심층 구조를 파악하는 데 있었다. 그는 언어의 문법 구조를 살피거나 직장의 노사 관계, 조직 체계, 족보를 살펴 알 수 있는 표층 구조의 저변에는 그것을 형성하는 무의식적인 구조가 있다고 믿었다. 즉 문화의 다양성 뒤에 어떤 근본 구조가 있다고 보고, 외견상 상이한 표층 구조를 가진 문화의 공통 구조를 파악하여 단일한 법칙을 만들어 내는 데 구조주의적 분석을 활용한 것이다. 미셸 푸코는 권력과 지식을 분석, 자크 라캉은 무의식을 분석, 루이 아튀세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분석, 롤랑 바르트는 문학과 대중 문화를 분석, 미국의 언어 철학자 촘스키는 언어학 분석, 스위스의 피아제는 인간의 논리 구조를 분석하여 발달 심리학의 기초를 세우는데 활용했다. 구조주의를 철학적으로 가장 잘 활용한 것은 데리다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다.
(5)유물론과 결정론적 전제 구조주의 학자들은 겉모양과 표면적 구조만을 이해해서는 사회-문화 현상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없다고 본다. 또 표면적 현상 밑에 심층 구조가 있고 그것은 복잡한 표면적 현상과 달리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심층 구조를 찾아 다양한 현상을 규명하는 통일적 원리의 근간으로 삼고자 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초월적인 인간을 주체로서 중심에 놓고 모든 것을 생각하던 근대 철학의 방향과 크게 다른 것이다. 구조주의의 치명적인 면은 모든 것이 구조나 관계의 산물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개인의 중요성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든다. 결단, 개성, 자유, 인격성을 중시하던 입장에서 보면 구조주의야말로 주체가 없는 철학이다. 문화 형성의 심층에 있는 구조가 표층 구조를 결정한다는 이론을 뒤집으면 개인과 사회는 보이지 않는 구조에 의해 이미 규정된다는 사회 결정론이 나온다. 근대의 관점에서 볼 때 주체가 상실된 철학은 상대주의의 근원이기도 하다.
(6)미셀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푸코는 가장 주목받는 포스트모더니스트다. 그는 헤겔과 후설, 하이데거에 심취했다. 특히 이성의 범주를 확대시켜 ‘비이성적인’ 것들까지도 포함시키고자 했던 헤겔의 변증법이었다. 그의 연구는 주로 광기, 범죄, 동성애 같은 일탈과 관계된 것이다. 필생의 역작「성의 역사」의 주제를 성으로 택한 것은 자신의 삶에서 성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론의 실전을 강조했다.
1)푸고의 교수 자격 논문이자 첫 번째 책인 「광기의 역사」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된다. 그것은 총 13권의 책이 소재는 각기 다르지만, 모두 지식의 객관성과 중립성 부정이다. 그것은 정신병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이 미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므로 미치지 않는 것도 반드시 또 다른 형태의 광기다. 이웃을 감금함으로써 자신이 정상임을 확신할 수 없다” 광기란 누가 누구를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일부를 광인으로 몰아 감금하는 것은 다수가 정상임을 확인하기 위한 광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방대한 증거를 동원해서 광기는 근대 ‘이성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주의는 광기를 별난 것으로 몰아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확립시켰고, 정신 병리학은 이에 입각해서 정신병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기의 역사는 그것을 규정하고 핍박하는 문화의 역사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광기는 이성과 과학으로 무장한 정신 병리학 앞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푸코는 그 강제된 침묵을 깨뜨려 정상과 비정상의 단순하지 않은 관계를 폭로하려 했다. 억압된 침묵을 깨뜨리고 눌린 목소리를 대신 발하는 일. 이것이 푸코가 말하는 자신의 사명이다. 이어서 「감시와 처벌」에서는 범죄자의 억압된 소리를 발했다. 제4권을 탈고하던 중 에이즈로 사망하여 최후의 저술이 되고 만 「성의 역사」까지 동성애를 비롯한 억압된 성의 욕구를 토로했다.
2)푸코는 침묵을 깨뜨리는 궁극적인 방법은 억압자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이를 위해 그는 근대적 인간을 비판하고 나섰던 것이다.
3)계보학:근대적 ‘주체’비판 푸코는 니체처럼 신의 죽음에 만족하지 않고 인간도 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대에서 억압의 주체는 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근대인은 이성에 따라 알고 행동하는 이성적 자아요, 모든 사물을 객체로 만드는 주체다. 근대인은 계몽주의의 믿음처럼 해방의 주체이자 억압의 주체이기도 하다는 것이 푸고의 주장이다. 이 근대인을 제거하는 작업이 곧 계보학(geneology), 즉 근대인의 탄생 과정을 밝히는 일이다. 푸코의 기획은 결국 데카르트의 자기를 성찰하는 자아나 칸트의 주관적 자아를 파괴하려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심리학이나 정신 의학 같은 ‘인간 과학’을 깨뜨리려했다.
4)반(反)철학 푸코는 지식의 중립성을 배격하고 그 폭력적인 면을 들추어내고 저항한다. 지식과 주체에 대한 비판은, 결국 근대 문화의 중심에 대한 매우 강력한 파괴 작업이다. 반철학이란 고매한 진리 탐구, 진리 사랑인 철학에 반대하는 행위이다. 즉 진리의 저질적 근원을 폭로하는 작업이다. 특히 보편성과 객관성을 근거로 하며 진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과학의 배후에 투쟁과 갈등, 임의성과 우연성, 권력의 역학이 있음을 폭로하려는 작업이다. 이는 지식이 언제나 권련 관계를 반영한다고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푸코는 그 힘이 자연을 지배하는 힘 일 뿐 아니라 다른 인간, 특히 약자와 소수 집단을 지배하는 권력, 즉 폭력과 연관됨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푸코는 근대 철학과 과학이 만들어 놓은 주권적 인간의 죽음을 외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비판을 일단 그런 인간관에 기초한 과학적 인식론의 기초와 계몽주의적 인본주의 도덕의 파괴로 파급된다. 그 다음 단계로 당연히 근대 사회와 문화 전체의 기초가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근대 문화 전체를 위기로 몰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고고학(archaeology)이라고 부른 방법에서 잘 나타난다.
5)고고학:지식과 권력 고고학이란 지식이 어떤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는지를 파헤쳐 사회-문화 현상을 비판하는 방법이다. 따라서푸코의 고고학은 철학적 인식론을 탈피하고 사회-문화적 인식론을 시도한다. 더욱이 푸코는 진리란 사회적 담론의 산물이요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다고 믿기에 그 진위를 가리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 대신 모두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진리의 이면에 어떤 위장된 권력이 작용하고 있는지를 밝혀내는 데 주력한다.
-모든 지식을 결국 권력의 문제로 보는 푸코의 이론은 그의 뒤를 잇는 거의 모든 포스트모더니스트에 게 가장 인기 있는 통찰로 여겨진다.
(7) 장 프랑수아 리요타르(Jean-Francois Lyotard,1924-) 파리 근교 베르사이유 출신으로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뱅센의 파리제8대학 교수였다. 그는 1968년 5월에 발생한 좌파 학생 혁명의 실패와 같은 해에 일어나 소련의 프라하 침공의 충격으로 마지막 희망이었던 공순주의에 대한 환멸과 혁명을 통해서는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는 자각을 갖게 했다. 리요타르는 이후 자본주의건 공산주의건 보편적 체제나 가치 구현을 일체 배격하는 탈(脫)구조적 사우에 몰두했다.
1)정보화 사회에서의 지식 세계관의 변화의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지식의 달라진 위상이다. 푸코처럼 지식이란 발견되는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사회적 담론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지식의 진위보다는 용도와 결과적 효용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체계화된 지식보다 단편화된 정보가 중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지식은 교양이나 인격 형성보다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소비되는 상풍이 되어 버렸다. 백과사전식 지식인이 근대를 지배한 것과 달리, 포스트모던 사회는 하나의 상품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정보를 다룰 줄 아는 자가 통제한다. 그 결과 이제는 불균형, 불확실성, 불확정성이 비정상이 아닌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되었다.
2)거대담론(metanarrative)에 대한 불신 지식의위상이 흔들리고 정보화로 파편화된 세상에서 보편적인 진리 체계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리요타르는 이에 따라 거대 담론에 대한 불신이 이 시대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거대 담론이란 문화와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통합적 신화와 같은 것이다. 그는 오늘날 거대 담론이 신빙성과 설득력을 함께 잃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객관주의 세계관에서 구성주의 세계관으로의 이행과 더불어 일어난다. 구성주의의 배후에는 어차피 상황과 역사를 초월하여 지식의 진위를 밝힐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매우 극단적이 생각이 깔려 있다. 결국 어떤 주장의 진위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라고 본다. 거대 담론의 종말은 단일 세계의 종말이다. 이것은 리요타르의 말처럼 ‘전체성에 대한 선전 포고’다.
3)분산의 세계관 거대 담론이 무너진 세계는 상충하는 다양한 언어 게임의 시대요, 불일치의 시대다. 포스트모던의 다른 정의는 ‘세계의 종말’이다. 즉 철학과 과학에 의한 이성적 질서와 원리에 익숙한 근대 세계의 종말이다. 그는 세계를 사방으로 연결된 육지가 아니라 체계 없이 분산된 채 바다에 떠 있는 군도에 비유한다. 이것은 인생과 역사의 의미를 일관성 있게 부여하려는 노력에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히 그는 흩어진 존재를 하나로 체계화하는 메타 담론과, 역사를 하나로 설명하려는 보편 역사의 개념을 모두 배격한다. 존재는 본래 분산되어 있다.
4)근대성 비판 근대적 세계관의 이성적 토대를 비판하여 근대 문화와 사회를 기초부터 흔들려는 것이다. 그들은 근대의 세계관이 폭력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성적 자아는 주체로 절대화되고, 객체는 주체의 규칙에 복종하는 통일 체계가 확립된다. 따라서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이성적이고 보편 타당한 이 체계가 객체에게는 억압과 불의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를 분쇄하고 다원성과 이질성을 존재의 본질적 성격으로 강조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8)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 데리다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 중 가장 조직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다.그의 글들은 플라톤부터 후설과 하이데거의 철학 비판을 출발점으로 삼는 고도의 전문성을 지녀 매우 무겁다. 주제뿐아니라 저근방식이 매우 특이하며 글 쓰기 역시 통상적이지 않아 어렵다.
1)해체(Deconstruction) 데리다는 자신이 비판하는 체계뿐 아니라 이후에 어떤 구조도 다시는 서지 못하도록 아예 모든 사상적 구조물의 기초를 뜯어내는 데 몰두한다. 그래서 해체주의자로 통한다. 해체는 결국 서양의 근대 문화의 문제점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사상은 푸코나 리요타르보다 더 깊은 곳을 좀더 조직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데리다도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 이론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런 비판의 목적은 소쉬르의 구조주의가 가진 최소한의 의미 체계조차도 깨뜨리고자 하는 것이다.
2)이항 대립의 해체 데리다가 해체하려는 것은 근대 문화의 근간이 되는 계층적인 대립 구조다. 즉 이성/감성, 논리/수사, 말/글, 과학/비과학, 문학/철학, 자연/문화, 남자/여자, 이단/정통, 정상/비정상, 사실/허구 같은 대립 구조다. 무엇보다 이 대립의 기초에 놓여 있는 주체/객체의 대립구조다. 데리다는 이러한 구분을 임의적 배척과 억압의 반영으로 본다. 해체란 이러한 구분과 대립을 근본적으로 깨뜨리는 작업이다. 그것은 기존의 체계와 질서를 뒤바꾸기 보다 그곳에 숨어 있는 전제들을 분석하고 숨은 모순을 폭로하는 것을 우선시한다. 궁극적 목표는 이런 작업을 통해 거기에 내재하는 모순들을 극대화시킴으로 그 체계가 옳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데리다는 체계 내부의 균열을 드러냄으로써 체계 자체를 해체하는 방법을 택했다.
3)현전(現前)의 형이상학 비판 현전의 형이상학이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상식의 철학적 표현이다. 결국 현전의 형이상학은 대화를 진리의 통로로 생각한 소크라스테스처럼 음성중심주의 또는 로고스 중심주와 통한다. 데리다는 바로 이 점에 이견을 제시한다. 앎의 기초는 현전이 아니며 말하고 듣기가 아니라 글 쓰기와 해석이라는 것이다. 음성도 알고 보면 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는 순간부터 소리를 듣고 이해하기가지는 시간적 간격, 즉 지연이 있다. 거리와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결국 데리다의 의도는, 이성과 음성이 담보하는 진리의 현전성을 편애해 온 서양 철학의 진리관을 비판하는 것이다.
4)차연(差延, differance)과 산종(散種, dissemination) 차연이란 앞서 설명했듯이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 조건인 차이와 지연의 복합적 개념이다. 차연은 현전성 비판과 함께 진리의 다원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개념이다. 차연은 쓰여진 텍스트 이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독자는 저자와 다른 눈으로 글을 읽는다. 즉, 차이와 지연이 이해의 근본적인 상황이다. 데리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아나가 이해는 의미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흩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해는 헤겔이 생각하듯 변증법적 지양을 통한 종합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산종이다. 결국 산종도 의미의 궁극적 성격이 다양성임을 강조한다. 이해는 고정 불변의 통일적 의미 발견이 아닌 다양한 의견의 추구여야 한다. 데리다는 이해에 있어 합의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결국 차연이나 산종은 진리의 가장 확실한 기초로 믿어 온 현전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에 입각한 통일성도 근거가 없다는 점을 드러냈다. 이 비판은 현전의 형이상학이 규정한 진리를 토대로 하는 기존의 모든 체계와 제도를 그 기초에서부터 흔들고 있다. 즉 현전성과 통일성은 부정되고 모든 것을 무한한 다원성과 불확실성으로 열어 놓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는 해체나 차연 등의 단어를 내세워, 기존 서구 문화가 중심 가치로 삼아 온 현전의 형이상학과 그것이 주도해 온 보편성이나 통일성의 기초와 가치를 파괴하는 점에서 좀더 깊고도 포괄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데리다는 이 시대 최고의 우상 파괴자라 일컬어진다.
(9)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1931-) 로티는 자신을 포스트모던적 부르주아 자유주의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신실용주의라고 명하고 존 듀이를 사상적 직계 조상으로 꼽고 있다. 그는 미국 캐나다에서 가장 많은 청중을 거느린 포스트모더니스트다.
1)‘자연의 거울’깨뜨리기:인식론 비판 언어 분석철학 비판은 비트겐슈타인이 열어 놓았다. 처음에는 언어가사물의 그림이라는 실증주의적 이론을 폈던 그는 뒤에 이 주장을 완전히 버린다. 언어는 사용에 따라 의미가 정해지는 일종의 ‘게임’이라는 이론으로 돌아선 것이다. 진리 이론은 일종의 게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거울 이론이란, 정신에 반영된 심상이 외부에 실재하는 사물과 상응할 때 진리로 확인된다는 전통적 진리 이론을 말한다. 이 오류의 뿌리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서양의 상식이다. 그러나 그것이 확고해진 것은 근대 철학의 인식론 때문이다. 로티는 역사와 상황에 매여 있는 인간은 그 누구도 객관적으로 진리를 검토할 입장에 설 수 없다고 주장한다.
2)‘인류의 대화’:토대주의 비판 철학은 토대적 학문이 아니라 문학처럼 세계를 표상하는 하나의 장르로 여겨야 한다. 바로 이 토대주의 비판에서 로티는 다른 포스트모던 철학자들과 통한다. 사회-문화 각층에 속한 모두가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참여하는 열린 대화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 이 새 문화의 틀을 ‘인류의 대화’라고 부른다. 이 대화는 철학적 문화의 권위적이고 교조적인 진리관과 문화 체계를 타파하는 교화적 담론이다.
3)유대성(Solidarity)의 철학 유대성은 무모한 기획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이제껏 우리에게 익숙해진 진리의 객관성에 대한 욕구 자체에 대한 포기를 전제로 한다. 로티는 객관성의 포기가 곧 상대주의로 떨어지고 만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유대성은 집단 이기주의나 임의적 편견이라는 비판은 부정한다. 오히려 유대성의 정신은 가장 실용적인 정신이라고 강변한다.
4)신(新)실용주의 로티 사상의 핵심은 철학이 이제는 객관성을 빙자한 절대 체계를 찾는 노력을 포기하고 다양성의 조화를 지켜 인류의 복지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진리의 가치는 오직 당면 문제에 얼마나 잘 대처하게 해주는지에 의해 판단된다. 이것은 바로 ‘일이 되는 것’이 진리라고 보는 실용주의적 관점의 지혜다. 결국 로티의 기획은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미국식 자유주의의 미덕인 자율적 관용을 문화와 사회의 원리로 극대화하려는 것이다. 그의 유대성의 철학이나 ‘인류의 대화’는 모두 이 실용주의와 관용의 정신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 정신에 입각해서 그는 새로운 유토피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할 수 있다.
6.포스트모던적 대화(6장) 푸코나 데리다 같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드이 오늘날 문화와 사상의 흐름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님을 조여준다. 좀더 전통적이고 온건한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1)현대 서양 철학의 지형도 분석철학은 영미의 경험론 전통의 마지막이요, 현상학은 대륙의 합리론과 관념론 전통의 끝이다. 해석학과 비판 이론은 근대 철학과 문화의위기를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결국 오늘날 철학적 논의의 중심은 근대를 넘어서려는 노력에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파괴적인 해체를 통해 근대를 넘어서려고 한다. 그러나 철학적 해석학이나 비판 이론은 근대 철학의 문제를 비판함과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도 넘어서려고 한다.
(2)현상학:관념의 도그마와 경험의 상대성을 넘어서 후설은 중도적 인식론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즉 사물의 본질이 인식과 독립해서 존재함을 인정하되, 그것은 오직 구체적인 사물의 성질로 의식에 포착될 때 인식된다고 했다. 이는 또한 근대 과학이나 심리학의 세계 인식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생활 세계라 불리는 이 새로운 세계 인식에서는 과학처럼 인식의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대립되지 않는다. 이세계의 특징은 나의 것만도 너의 것만도 아닌 간주관성(間主觀性)이다. 이 세계 인식은 일상적이고 소박한 삶의 태도다. 즉 자연과 이웃으로 더불어 살며 객관적 대상으로 보지 않는 태도다.
(3)현대 해석학의 발단:자연 과학의 방법을 넘어서 근대 중반까지도 주로 신학과 법학의 도구였던 해석학은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새롭게 태어났다. 이점에서 특히 앎을 고립된 자아의 행위로 생각하는 데카르트와 크게 달랐다. 윌리엄 틸타이는 해석학을, 자연과학의 실험과 관찰 같은 방법론에 필적할 만한 엄밀한 인문 과학의 방법론으로 만들고자 했다.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는 해석학에서 수학이나과학을 모델로 삼아 진리를 추구하려던 근대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또 다른 진리의 길을 정립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인격에 접근하는 것 같은 방법이 필요함을 보여 주었다. 특히 딜타이의 업적은 역사적 상호 연관성에 대한 고려가 삶의 이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 것이다.
(4)하이데거와 존재 이해로서의 해석학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연구의 의의는 해석학을 통해 인식론 위주의 철학에서 존재론적 전환을 이룩했다는 것과 언어 연구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이 전환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가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5)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 Georg Gadamer, 1900-) 가다머는 근대 철학과 과학의 방법론적 지식이 전통적 상식에 입각한 진리에 비해 얼마나 편협하고 독단적인지를 보여 주었다. 이 점은 근대에 들어 종교나 예술의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 편견이나 주관적 취향이라는 이유로 진리에 관한 논의로부터 조직적으로 배제되는 과정이나 서양 철학의 역사의 방법론 논쟁에 잘 드러난다. 오늘날 문화가 봉착한 문제의 근본을 근대적 객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 사이의 딜레마라고보고 이를 넘어서고자 노력한다.
-오히려 그는 이성은 주어진 진리를 이해하는 피동성을 근본으로하여 비로서 능동성을 갖게 되는 양방향 대화의 참여자라고 본다. 이성은 주어진 진리에 응답하고 진리가 이끄는 놀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대화자다.
-가다머는 과거의 지혜를 회복하는 것은 전통에 대한 창조적 해석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해석적 철학이야말로 객관주의적 독단론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관론을 모두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계몽 사상이요 그 사상의 후예라고 주장한다.
-실천의 회복만이 이 문제의 해결책이다. 사회의 기반은 과학을 통해 획일적으로 일치할 수 있는 객관적 기초를 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의 유대성을 기초로 모든 구성원 상호간의‘대화’로 존재하는 문화 형태를 강화함으로 건실해진다고 보았다. 유대성을 기반으로 하는 ‘대화적’ 구조를 지향하는 사회-문화는 한 사회나 문화의 소수 집단이나 무시되기 쉬운 집단의 목소리도 좀더 쉽게 들을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즉 과학 이론 위주로 운영되는 ‘계몽적’ 닫힌 사회에서, 좀더 열린 ‘실천적 교양’ 사회로 이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6)폴 리쾨르(Paul Ricoeur, 1913-)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진리를, 하나의 의견이요 권력을 탐하고 남을 지배하려는 구실로 보고 의심하고 파괴하려 한다. 이는 들은 바 복음을 의심 없이 믿는 자세를 기본으로 하는 기독교와 극히 대조되는 자세다. 그는 포스트모던 사상을 주된 적으로 생각하고 이들의 원조인 니체와 프로이트의 사상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리쾨르가 이들을 대항해서 내세운 전략은 그들에 대한 의심과 비판의 원리 대신 신뢰를 이해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일이다.
-그는 가다머가 지나치게 방법론을 반대하기 때문에 자칫 정당한 방법론마저 배격하는 경향이 있음을 우려한다. 즉, 문장비평, 문장의 형태적 분석, 문장론, 구조주의 방법론이 텍스트의 주제를 밝히는 작업과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밝히는 데 활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쾨르는 텍스트나 상징을 ‘이중적 의미’의 표현으로 생각하고, 단순한 의미론적 분석을 넘어서는 이중적 의미의 해석학에 착안했다. 즉 건설적인 ‘회복의 해석학’과 더불어 ‘의심의 해석학’을 병용할 것을 강조한다. 해석학이란 우상을 파괴하는 ‘의심의 의지’와 텍스트와 상징의 힘을 회복하는 ‘들음의 의지’라는 두 원칙으로 요약될 수 있다.
(7)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 오늘날 비판 이론의 대표적 계승자는 위르겐 하버마스이다. 그는 인간의 삶과 문화는 자연 과학에서 보듯 결코 기계적인 법칙만으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는 가다머의 주장을, 비판 이론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실마리로 삼았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가다머의 해석학의 불충분함을 비판한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해방과 자율의 이상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처럼 모든 규율과 형이상학의 해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바른 이성적 법칙을 발견하여 그것을 사회와 문화의 기본 법칙으로 규정하는 데서 이루어질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근대의 계획을 수정하여 유지하려 하지 않는 자들을 모두 보수주의라고 비난하는 점이다. 그 이유는 계몽을 지향하지 않으면 결국 기존의 제도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철학적 해석학과 비판이론의 의의 오늘날 건실한 철학적 노력의 핵심은 결국 근대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되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에 빠지지 않으려는 데 있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 이들이 문화와 사회의 토대가 과학적 객관성이 아닌 공동체적 유대성임을 보이고, 이를 통해서 포스트모던적 상대주의도 극복하려는 노력에서 잘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적 대화를 통해 억압적이지 않은 삶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음을 보여 주어, 포스트모던적 해체주의와 허무주의를 극복할 길을 제시한다. 다행인 것은 이런 이론들이 오늘날 철학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적 입장에 비교적 가까워 보이는 가다머나 리쾨르에게도 서양 철학 전바에 깔려 있는 이성에 대한 신뢰와 낙관이 깊숙이 잠복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근대와 포스트모던에 관한 이들의 분석이나 비판은 매우 정확하고 실질적이다.
7. 결론-포스트모던의 위기와 기회 사이에서
(1)다원주의 이성의 객관성을 부정하여 문화와 사회의 토대 역할을 박탈함으로써 수행된다. 이성과 그 학문인 철학과 과학이 기초적, 중심적 위치를 상실하면 문화가 다원화될 것이라는 계산이다. 기존의 중심과 서열이 무너지고 주변부가 중심으로 진입하는 현상이 여러모로 삶에서 체감되고 있다. 기독교와 줄곧 충돌해 온 인본주의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있다. 특히 객관주의를 내세워 특히 기독교를 편견과 독선으로 몰아온 계몽주의가 수그러들었다. 절대적 진리를 아는 일에 이성의 역할을 도외시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이다. 또한 이런 분위기는 모든 종교와 신앙의 균등을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를 부추긴다.
(2)종교 다원주의 여러 종교가 공존해야 할 당위성이 강조되고 선교는 부정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면에서 힌두교나 불교와흡사하다. 이는 진리란 바로 당신이 좋아하는 무엇이라는 소비자 중심적 세계관의 발로다. 오늘날 사람들은 종교를 일종의 기호품처럼 여긴다. 이는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고 초월적 범주와 보편적 가치를 부인하며 종교를 미학적 선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풍토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즉 느낌과 심리적 행복감이 진리를 대신하는 풍조가 지배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문제는 독단적 다원주의다. 현상적 다원성을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다원성을 존재의 궁극적 원리와 삶의 규범으로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다원성과 더불어 통일성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통일성을 무시하거나 고려하지 않는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는 옳지 않을 뿐 아니라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상대주의다.
(3)상대주의 공통적 가치와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대주의는 진리에 상대적 국면이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신적 권위든지, 이성적 법칙이든지 절대성을 표방하는 것을 모두 배격한다. 상대주의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포스트모던적 상대주의는 상대성 자체를 궁극적인 것으로 절대시하고 규범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진리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절대적 진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절대적 진리의 존재가 부정될 대 남는 것은 ‘의견’뿐이다. 한 사회나 문화를 지배하는 거대 담론이 사라지면 상대주의가 활개치게 되고 완전히 규제가 풀린 세계가 된다. 거기에는 단순한 구호와 유행과 피상적 이미지가 진리와 의미를 대변하게 된다. 또 신앙이나 이성에 의해 규제되던 감성, 관능, 탐욕 등의 폭발적 해방을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 잘못된 절대주의의 붕괴는 환영할 만하지만 상대주의와 무정부 상태는 더 무서운 악이다.
(4)포스트모던니즘의 도그마 포스트모더니즘은 나름대로 중심적 도그마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체계적 이론과 철학을 부정하지만 그 자체는 매우 이론적이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이론적인 기초가 튼튼하고 방법론적으로도 치밀한 고도의 지적 행위다. 해체는 이 언어적 의미 형성 과정상의 구조를 풀어해침을 목표로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율성을 주장함에 있어 근대 인본주의보다 훨씬 더 고집스럽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자연과 본질 그리고 이성에서조차 벗어나고자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들은 오히려 극단적 계몽주의자라고도 볼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포스트모더니즘이 분산과 해체를 주장하되 한편으로는 공동체 중심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세계관은 언제나 공동체에 기초한 진리 이해와 유대성의 인식에 입각해서 움직인다. 진리는 항상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공동체에서 상대적이다.
-포스트모던니즘이 허무주의적인 것은 모든 진리가 권력 의지라고 주장하는 데서 비롯한다.
-포스트모던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뿌리는 구성주의다. 포스트 모던 사상가들은 언어와 사회적 담론의 역할을 궁극적으로 여기는 구성주의 또는 비본질주의를 신봉한다.
대안 (1)종교 다원주의의 극복:레슬리 뉴비긴 -첫 번째 조건은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뉴비긴은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를 전략적으로 역이용하여 복음의 세계관을 자신 있게 제시하는 것이 학문적으로 문화적으로 가능함을 역설한다. 성경적 세계관의 회복을 단순하고 분명한 어조로 역설한다.
(2)객관주의의 극복:종교적 전제 폭로 이성과 학문의 객관성 비판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강점으로 꼽힌다. 그러나 정작 오래 전부터 학문이 중립적이지 않음을 주자해 온 것은 기독교 사상가들이었다. 이미 어거스틴이나 루터와 칼빈도 이성과 학문이 종교적 신념에 입각해서만 기능을 발휘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3)상대주의의 극복:실재 의식의 회복 포스트모더니즘은 삶의 질서와 실재가 인간 스스로의 형이상학적이거나 과학적 조작에 의해 완전히 통제될 수 없다는 점을 잘 보여 주었다. 교만으로 쌓인 근대의 바벨탑이나 실망으로 허물어진 포스트모던의 흩어짐은 모두가 치유되어야 할 비정상적 세계관의 결과다.
(4)진리와규범의 회복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는 모든 것이 언어의 산물이요,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하며 절대적 나라나 규범을 부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 있고 그것이 언어에 의미를 준다. 우리의 언어는 하나님의 언어를 반영한다. 물론 우리의 언어가 진리를 드러내는 일에 장애가 될 수도 있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장하는 것처럼 허위와 기만과 폭력 행사만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그들의 언어가 모더니즘의 문제를 드러낸다고 믿기에 말도 하고 글도 쓰는 것이다. 언어가 진리를 발견하는 통로가 된다는 통찰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 제시에 매우 중요하다.
(5)새로운 인간관의 회복 해석학은 남을 이해하기 위해 인내와 관용, 이해 의지가 필요함을 밝혔다. 신뢰에 기초한 상호 관계 속에서 남의 말을 듣는 일이야말로 자기 기만을 벗어나 자신과 남을 바로 아는 방법이다. ‘남을 고유한 행위자 또는 능동적인 인격적 주체로 존중한다’는 해석학적 원리는 성경적 진리에 근접한다.
(6) 공동체의 회복 근대적 위기와 포스트모던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토대는 바른 사회 의식과 윤리에 입각한 건강한 공동체이다. 참다운 신뢰와 상호 존중과 사랑에 입각한 공동체의 회복이다. 객관성을 명목으로 지배적이거나 억압적이거나 조작적이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희생적이고 구속적이어야 한다.
결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최고의 대안은 십자군적 자세가 아니라 순교적 선교자의 자세이다. 독단적인 배타주의나 광신주의와 무책임한 상대주의나 보편주의에 대한 대안은 역사적 기독교의 회복뿐이다. 결국 이 모든 대안적 방향을 제시하고 삶으로 증거할 공동체가 관건이다. 그것은 곧 기독교 공동체가 할 일이요, 교회가 할 일이다. 이를 위하여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으나 포스트모던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이 세대 속에 살지만 이 세대를 판단하며 하나님의 뜻을 밝혀 보여 주는 이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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