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세밑에 찾아온 맹추위가 옷깃을 파고들 때 <운디네>가 문득 나를 찾는다. 미국 아니면 프랑스 영화 정도가 내걸리는 나라에서 도이칠란트 영화를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더욱이 젊은 날의 몇 년을 쾰른과 베를린에서 보낸 까닭에 추억과 회한도 동반한다. 어떤 느낌과 상념이 찾아들 것인지, 궁금증도 생겨나고.
포스터에 새겨진 짧지만 강렬한 문장이 눈길을 잡는다. ‘사랑에 빠지다. 운명에 잠기다.’ 어찌 보면 사랑 영화에 나옴 직한 흔한 글귀 아닌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그들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지만 여주인공의 예사롭지 않은 눈동자와 맑은 흰자위, 집중된 시선은 무엇인가 다른 이야기를 해줄 것이라는 예감을 선사한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안기다시피 길을 가다가 뒤돌아보는 여자의 눈길에서 감촉되는 서슬 퍼런 이미지. 우리는 남자의 얼굴과 표정을 알지 못한다. 여자가 뒤를 돌아보기 직전까지 그들 사이의 대화나 움직임에 관한 어떤 정보도 없다. 그렇기에 영화 포스터는 더욱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무슨 일이 있었고, 일어날 것인가, 하는.
운디네와 요하네스 그리고 크리스토프
노상 카페에서 대화하는 남녀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처연하고 애원하는 듯 보이는 여자의 얼굴과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는 남자의 불안정한 얼굴. 남자가 카푸치노를 가지러 간 사이에 여자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볼을 적신다. 그녀 이름은 운디네, 사내는 요하네스. 작별을 통보하는 요하네스와 한사코 매달리는 운디네.
일을 마치고 30분 후에 다시 올 거라는 운디네.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내 곁을 떠나면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말을 남기고 박물관으로 걸어가는 운디네. 그녀는 베를린 미테(Mitte)구에 소속된 박물관 해설사이자 역사학자다. 세계 전역과 도이칠란트에서 찾아온 방문객을 대상으로 베를린 변천사를 유려한 언어로 해설하는 운디네.
30분 후에 돌아온 운디네가 요하네스를 찾는다. 종적이 묘연한 그를 찾아 이층으로 올라오는 운디네. 그때 어눌한 말투와 어리숙한 얼굴의 사내 크리스토프가 운디네에게 말을 걸어온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노동자의 언어와 몸짓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내.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던 운디네가 갑자기 몸을 날려 크리스토프를 안고 쓰러진다.
<운디네>는 이렇게 시작한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별 통지로 괴로운 운디네 앞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사내 크리스토프. 멀쩡했던 수족관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물을 흠씬 뒤집어쓰고 쓰러진 두 사람의 운명. 피할 겨를 없이 몰아닥친 물벼락에 순응하며 웃음 짓는 남녀의 운명적 대면! 그들은 사랑에 빠진 것일까.
사랑의 기쁨
두툼한 옷차림에 물안경을 낀 크리스토프가 물속에서 땜질 작업에 한창이다. 그의 직업은 산업 잠수부. 작업하던 그에게 커다란 입과 긴 수염을 가진 거대한 메기가 다가온다. ‘군터’라는 별명을 가진 2미터가 넘는 메기. 크리스토프의 수중작업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그런 까닭에 선상에서 협업하는 동료 모니카가 그와 함께한다.
크리스토프가 사는 베를린 교외와 운디네가 거주하는 베를린 중심을 이어주는 열차로 그들은 사랑을 시작한다. 운디네의 방에서는 슈프레(Spree)강과 에스반(S-Bahn)이 질주하는 베를린 도심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꾸미지 않아도 도회지 냄새가 풍기는 여인 운디네와 거칠고 투박한 사내 크리스토프의 대조가 공간적으로도 현저하다.
운디네를 태운 열차가 정거장 부근에서 속도를 줄이고, 내릴 채비하는 운디네 옆으로 크리스토프가 열차와 함께 달린다. 얼굴 한가득 행복한 웃음이 넘치는 ‘사랑에 빠진’ 운디네. 그녀는 온 얼굴을 크리스토프의 목에 묻고 힘껏 그를 호흡한다. 세상 모든 이와 관계와 완벽하게 절연된 것처럼 온몸과 영혼으로 서로에게 투신하는 연인들.
운디네에게 느닷없이 부과된 베를린 궁전 역사와 도시계획에 관한 해설작업. 그녀는 한밤중까지 작업에 몰두한다. 잠에서 깨어난 크리스토프는 그녀가 준비하고 있던 해설을 들려달라 부탁한다. 진지한 얼굴의 크리스토프에게 자신이 준비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주는 운디네. 산업 잠수부의 얼굴이 사랑의 기쁨과 충만으로 빛처럼 환하다.
사랑의 슬픔
어느 날 요하네스가 불쑥 운디네를 찾아온다. 일시적인 불장난이었던 노라와 작별하겠다며 재회를 선언하는 요하네스. 들떠있는 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는 운디네. ‘저렇게 일방적이고 천방지축이었던 남자를 운명적인 사랑이라 생각했던가?’ 하는 표정이다. 그녀의 흉중에는 크리스토프를 향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한층 커지는 것처럼 보인다.
한밤중에 운디네에게 크리스토프가 전화한다. 사랑으로 가득했던 운디네의 말투가 급속히 바뀐다. 얼마 전에 길을 걷다가 운디네의 심장 박동이 멈춘 일을 똑똑히 반추하는 크리스토프. 그때 그 사람을 본 게 아니냐고 묻는 크리스토프. 카페에서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 묻는 크리스토프. 당황하며 어설프게 변명하는 운디네.
한숨 자지 못하고 전화를 거듭하는 운디네. 하지만 꺼져버린 전화기는 계속 먹통일 뿐. 운디네에게 다른 선택은 없다. 산이 내게로 오지 않으면, 내가 산으로 가는 도리밖에 없다. 하지만 거기서 만난 차디찬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는 사건이다. 거기서 운디네는 우연히 마주친 요하네스와 노라를 노려보다 잠시 멈추었던 자신의 심장을 기억해낸다.
맨몸으로 요하네스의 집을 찾아가는 운디네. 요하네스는 수영장에서 접영을 선보이고 있다. 빗줄기마저 간간이 뿌리는 베를린의 늦은 저녁. 수영장 안에서 갑자기 솟구쳐 나오는 운디네. 그녀의 단아한 얼굴이 일순 단호해진다. 순한 양처럼 고요함을 지키며 자신의 운명에 잠기는 요하네스. 노라의 비명이 날카롭게 허공을 가른다.
운디네와 크리스토프 그리고 모니카
사랑의 슬픔은 시간만이 해결한다. 여자는 평균 2개월, 남자는 6개월이 지나면 사랑의 아픔과 상실에서 회복 가능하다는 통계도 있다. 그래서일까, 러시아 희곡 <숲>의 주인공은 말한다. “여자는 빨리 잊어버린다.” 하지만 운디네는 여느 여자들과 아주 다르다. 그녀는 망각을 알지 못한다. 적어도 2년 동안 그녀는 크리스토프를 잊지 않는다.
모니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크리스토프. 수중작업을 하겠느냐는 모니카의 말에 선뜻 동의하는 크리스토프. 예전처럼 잠수부 복장으로 땜질하는 그에게 나타난 운디네의 하얀 손. 아, 어찌 그녀를 잊을 수 있겠는가?! 새벽녘 자리에서 일어난 크리스토프가 호수로 걸어 들어가 큰 소리로 운디네를 외쳐 부른다. 그녀만이 사랑이었기에!
물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크리스토프. 언젠가 운디네가 그러했던 것처럼 거침없는 크리스토프. 하지만 여기서 영화는 반전을 준비한다. 운디네는 아름다운 사랑에 충실하고 행복했던 크리스토프에게 저승의 삶을 권하지 않는다. 동트기 직전의 미명에서 크리스토프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모니카를 어떻게 할 것인가.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물의 정령 운디네를 현대적으로 손질한다. 그것의 기조는 따뜻함과 얼얼함 그리고 냉랭함과 상큼함의 공존이다. 영화가 끝난 뒤 객석에 남는 온기와 시린 가슴은 감독의 유려한 연출과 파울라 베어의 뛰어난 연기에 힘입은 것이다.
사랑과 운명
<운디네>는 힘 있는 영화다. 며칠이 지나도록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몇 가지 까닭이 있을 것이다. 요하네스의 경박하고 변덕스러운 사랑과 크리스토프의 순정하고 맑은 사랑의 대비. 신비로운 메기 군터와 물속의 벽면에 새겨진 글자 ‘운디네’. 잠수 유영 중에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운디네의 묘연한 행방. 흥미로운 베를린의 변천사 이야기.
물의 정령 운디네가 보여주는 양면성이 매혹적이다. 지상의 모든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물의 힘을 구현하는 운디네. 자신과 사랑에 빠진 사내 크리스토프의 죽을 운명까지 거두려는 의지와 헛된 사랑의 요하네스를 징벌하려는 운디네. 우리가 마주하는 만남과 헤어짐에 담긴 우연성과 의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사랑의 변덕과 이별, 느닷없는 만남과 또 다른 사랑은 왜 그리 흔한 일인가. 있을 법하지 않은 부활은 왜 다른 생명의 상실과 연결되어야 하는가. 사랑에 빠져서 운명에 잠기는 것은 결국 우리의 선택지가 아니라, 하늘이 부여하는 것인가?! 이런 물음표를 던지는 영화 <운디네>가 대구에서는 조용히 막을 내렸다.
첫댓글 영화 포스트의 표현법, 영화 연출자의 표현법, 영화 감상자의 표현법, 같은 동일한 하나일까요? 서로 의논하지 하지 않은데도 같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뭘 말해주는 것일까요? 사랑과 이별이라는 화두를 생각하고 생각하면 어떤 처지의 어떤 사람도 동일한 체헙지에 이르게 된다는 뜻인지. 저가 읽은 서양교육역사 책에 이런 페라그래프가 있습니다. '패스탈로지는 칸트보다 더 칸트주의자이다.' 덧붙여 패스탈로지는 칸트를 공부한 것 같지는 않다고 적고 있습니다. 칸트와 패스탈로지는 거의 동시대 사람이라고 해도 됩니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 사이 삶의 밑바탕 경험은 거의 동일하다는 뜻이라고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영화 이야기를 읽으며
뜬금없이 저의 기억을 되살려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가 그리도 많은 깊은 인생이야기를 압축하여 드러내는 특수한 예술 장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엇습니다.
깊이 있는 인간의 통찰과 사유는 상통하는 모양입니다. 칸트를 읽지 않은 페스탈로치가 칸트주의자라 불렸다니 말씀입니다. 오늘날 영화는 아마 가장 대중적이면서, 가장 입체적으로 인간의 내면과 인식, 행위와 사유, 오락과 미래사회까지 살피는 전천후 능력을 선보이는 거의 유일무이한 장르가 된 것 같습니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다 보면, 오호, 지난 번에는 보지 못했던 장면과 상황에 눈길이 가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습관적인 행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일깨우는 것이죠. 시간 죽이는 용도로 영화를 들여다보는 것은 어쩌면 영화에 담긴 함의를 가장 무시하는 행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볼 때마다 저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공동 노력이 만들어낸 거대한 결정체를 아주 헐값에 향수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