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품꾼의 비유
마태복음 20 : 1 - 16
예수님께서 천국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14). 그리고 많은 재물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가는 청년을 보고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19:24). 그때 베드로가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19:27).
이러한 질문을 하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잘못된 천국관을 고쳐주시고자 본문인 ‘포도원 품꾼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의 결론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6)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구원이 스스로의 힘과 노력에 의해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먼저 부름 받은 자들은 결코 영적인 교만과 나태에 빠지지 말고, 할 수만 있거든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중이셨습니다. 메시야적 사명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마감하시려는 예수님과는 달리 제자들의 분위기는 달랐습니다. 제자들의 천국관은 유대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있었던 ‘공로 교리 개념’이였습니다. 이것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공로가 많으면 자신의 죄를 탕감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사상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의 천국관은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로 보지 않고,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성과물로 믿었던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천국 역시 세상의 질서처럼 계급과 지위에 따른 차등이 있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은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무리들 중에서 특별히 선택받은 자들로서 더 많은 헌신을 해왔기 때문에 천국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구분되어 특별한 지위를 보장 받을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제자들의 천국관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포도원 품꾼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천국은 헌신의 양이나 순서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고, 다만 은혜로 주어지는 곳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세상의 꼴지가 일등이 되는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본 비유에서 ‘품꾼’과 ‘포도원’, 그리고 ‘집주인’ 삼대 요소가 있습니다. ‘포도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일꾼들이 일할 수 있도록 마련된 터전으로서 오늘의 교회와 천국을 상징합니다. ‘집주인’은 천국 복음을 위해 일하도록 일꾼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이시고, ‘품꾼’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성도들입니다.
‘이른 아침’(1)은 해뜨는 시간으로 일하기 시작하는 첫 시간입니다. 집주인이 이른 아침에 일꾼들을 얻기 위해 나가서, 하루에 한 데나리온씩 약속하고 품꾼들을 포도원에 들려 보냈습니다. 요즘도 새벽에 일꾼들이 모여 그날에 일할 곳을 기다리는 인력시장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인력시장이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주인은 필요한 일꾼에게 하루 한 데나리온씩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에게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고 하니 그들도 포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삼시’란 오전 9시 정도입니다. 그리고 육시와 구시에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육시와 구시’는 정오와 오후 3시에 해당되는 시간입니다.
주인이 제십일시에도 나가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라고 물으니 품꾼들은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일할 시간이 불과 한 시간 밖에 남지 않은 때에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저물매’란 오후 6시로 하루의 모든 노동이 끝나는 시간이며 품삯을 계산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모든 품꾼들의 기대와 함께 주인은 품삯을 지불하는 시간입니다. 영적으로 해가 저물 때는 세상 종말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에게는 상급의 중량이 결정되는 시간입니다. 그런가 하면 부름을 거부한 자들에게는 형벌의 중량이 결정되는 최후의 심판의 때입니다.
품삯은 일반적으로 먼저 온 자에게 주는 관례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나중 온 자부터 품삯을 주었습니다. 천국은 세상의 질서와 법칙과는 다른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는 공로의 개념에 깊이 젖어있던 제자들의 사고방식에는 상당히 충격적일 수 있겠지만, 천국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따른 분배 방식만이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을 수시로 채용한 것부터 시작해서 품삯 지불하는 순서를 예상과 다르게 정한 것도, 주인의 은혜로운 주도권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제자들에게 잘못된 천국관을 고쳐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와서 일한 품꾼들을 제외하고서는 품삯을 한 데나리온의 약속받은 자들이 없습니다. 그저 ‘상당하게 주리라’(4)는 언질만 받거나 그냥 포도원에 들어가라는 말만 듣고 일한 것입니다. 그들은 한 데나리온 보다 적은 삯을 받을 것이라고 상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작 한 시간 정도밖에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동력에 비해서 과다한 품삯을 받은 것입니다. 주인의 선함과 관대함을 충분히 느꼈을 것입니다. 이러한 품삯은 분명 관례에 벗어나는 파격적인 대우였습니다.
문제는 아침부터 종일 일한 품꾼입니다. 한 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은 한 데나리온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합리적이며 당연한 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법칙은 많이 일한 자에게는 더 많은 품삯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당시 공로 개념에 깊이 젖어 있었던 유대인들과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먼저 온 자들이 나중 온 자들 보다 더 많이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종일 일한 사람에게 약속된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의 입장에서 볼 때 한 데나리온을 지급한 것은 계약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데나리온보다 더 많은 삯을 기대했던 먼저 온 자들은 계약대로 한 데나리온을 받았음에도 주인에게 감사가 없고 원망을 합니다.
이들의 원망은 세상적으로 볼 때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허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 부름 받은 자나, 나중 부름 받은 자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구원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야 할 뿐입니다. 인간사는 상대적이지만, 신앙의 세계는 오직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침부터 부름 받고 하루 종일 일한 자들의 원망의 이유가 뭡니까? “나중 온 사람들에게는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다”(12)는 것입니다. 이들의 불만은 적게 일한 사람들이 많이 일한 자신들과 동일한 품삯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였습니다. 만약 이들에게 한 데나리온 이상씩을 지급했거나, 아니면 늦게 온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 이하로 지급했더라면 이같은 원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비난을 공로를 중시하는 세상적으로 비추어 볼 때 잘못된 것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 비유의 목적은 ‘천국은 마치’(1)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상급은 인간적인 공로나 부르심의 선후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만의 대상이 아닙니다. 감사의 대상입니다.
주인은 불만을 말하는 그 사람에게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고 말했습니다. 주인은 어떤 품꾼에게도 부당하게 행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주인은 무흠을 밝힙니다. 그리고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하며 계약대로 이행했음을 말했습니다.
품꾼들은 자신의 계약 조건인 한 데나리온을 지급 받았습니다. 이런 계약 조건을 확인 시키는 것은 이미 계약 조건대로 품삯을 받은 자들이 다른 사람의 품삯에 간섭하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주인은 먼저 온 자에게 계약에 의한 품삯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중 온 자에게 먼저 온 자들과 동일한 품삯을 지급한 것은 무차별적인 ‘은혜’라는 것입니다. ‘공로 없이 준 은혜’ 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을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의 원칙인 공로나 능력에 따른 차등 지급원리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생리상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헌법에 ‘원로목사’, ‘공로목사’, ‘원로장로’, ‘공로장로’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유감입니다. ‘원로집사’, ‘공로집사’, ‘원로권사’, ‘공로권사’도 있습니다. 앞으로 ‘원로성도’, ‘공로성도’도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것들은 천국을 세상적인 것으로 타락시키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어떻게 보실까요? 오늘의 교회가 은혜에 감사가 없습니다. 공로 중심으로 되어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인은 원망하는 자들에게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3,14)라고 말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나중 온 자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불한 것은 결코 불공평한 처사가 아님을 거듭 밝힙니다. 주인은 분명 먼저 온 자들에게 계약에 의한 품삯을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나중 온 자들에게 먼저 온 자들과 동일한 품삯을 지급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물론 먼저 온 자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도 일한 대가인 공로가 아니고 은혜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섬김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먼저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19장 30절에도 있습니다. 세상적인 원리는 능력이나 공로가 많은 자들이 수석의 자리를 차지하고, 능력이 열등한 자들은 말석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칙은 결코 세상적인 기준이나 능력이나 공로에 의해 우선순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그 삯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먼저 될 것으로 생각한 자들은 나중 된 자들의 반열에 서 있을 것이고, 말석을 차지할 것으로 여겼던 자들은 놀랍게도 먼저 된 자들과 같은 상석을 차지하게 되는 은혜의 평준화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먼저 된 자들의 입장에서는 기대치 이하의 결과이므로 나중 될 것이고 나중 된 자의 입자에서는 상상 밖의 선물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비유는 주로 자신의 공적을 근거로 천국의 상좌를 보장받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말씀입니다.
천국은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는 마지막에 자신의 잘못과 예수님의 선하심을 고백한 것 외 아무 공로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말씀하셨습니다. 행악자는 자신의 한 평생을 한 번도 자신의 구원을 위한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공로가 없었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평생을 교회를 섬겼다 할지라도 그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먼저 믿은 자들은 자만하지 말고, 늦게 믿게 된 자들은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다 함께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축복을 받은 것을 진심으로 감사합시다.